3저호황, 한국과 소련

공교롭게도 1986년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역사적 고점을 찍었던 석유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해였다. 1970년대 중반 배럴당 약 60달러였던 유가는 1980년에 배럴당 120달러를 상회했다. 그러던 유가가 1985년 말 급락하여 80년대 말까지 40달러대를 유지했다. 소련의 연간 GNP 성장률은 흐루쇼프 시대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1990년에는 마이너스 2. 3퍼센트를 기록했다. 1987년 6월 중앙위원회에 보고된 소련 경제 상황을 살펴본 고르바초프는 낭비, 비효율성, 부정확한 보고가 ‘위기 직전’ 상황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xGPYMaxEYa5VTn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혁의 순서, 소련 대 중국

덩샤오핑의 아들이 말하길, 경제개혁을 정치개혁보다 앞세우지 않은 고르바초프를 덩샤오핑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의 개혁 결과를 비교할 때 이 말은 타당한 판단인 것 같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판단 역시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경제 재건을 반대하는 고착 세력들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흐루쇼프의 지역경제위원회를 기억해보라!)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개혁 성향의 지식계급이 주도하는 여론의 도움으로 그들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1FQEeatQJywKqPr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획기적 변화를 연상시키게 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이자, 자신이 추진한 개혁에 추월당한 개혁자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다민족 제국을 해체되게 한 황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정보화시대로 이끌려고 했지만 소련의 몰락을 주재할 운명에 처했다. 혁명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았어도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소통의 달인이었다면 고르바초프는 촉진의 달인이었다.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기 시작한 초기 볼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역사가 자연스러운 경로로 되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헤엄을 쳤다. 혁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해진 뒤에도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서 뒷걸음치지 않았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족주의로 개종한 공산주의자,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핵심 인물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관료적 음모에 능한 밀로셰비치는 1980년 티토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동유럽에서 민족주의의 힘을 이해한 첫 번째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긴 세월 억압된 민족적 불만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유고슬라비아의 6개 공화국 중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 밀로셰비치의 행동은 거장의 공연과도 같았다. 무신경하고 색깔 없는 공산당 당직자였던 밀로셰비치는 불과 몇 달 만에 세르비아 민족의 아버지로 변신했다. 공산주의 구체제가 붕괴하면서 종말을 맞기는커녕 거의 반세기의 균열 뒤에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역사의 재탄생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할 줄 아는 감각이 있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를 팔아먹은 공산주의자들

수년간 국가를 희생시키며 개인적 부를 축적하는 데 몇 안 되는 진짜 제약은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덕분에 그런 거리낌도 사라졌다. 소련경제를 통제하는 관료들은 각자의 지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앞을 다퉜다. 놀랍게도 한때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자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 장군들은 NATO의 위협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연료와 군용품을 암시장에 팔았다. 자유 기업의 싹을 근절하도록 훈련받은 KGB 관리들은 상품거래소를 만들었다. 국가계획위원회인 고스플란 관리는 소련 경제의 작동 방식을 둘러싼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서 개인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