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산업의 대서사시
- 위험의 외주화, 해고의 외주화, 숙련의 탈각
사내 하청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내 하청 관리 노하우가 필요하다. 조선산업 전문가인 박종식 박사(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1987년 이전까지 조선산업의 관리자는 노동자의 작업 방식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일량과 물량을 던져 주면 노련한 사내 하청의 소사장이나 조장 반장이 알아서 숙련공과 견습공을 조직해 선박 건조를 진행했다. 마치 1960년대 이전 영국과 비슷했다.
현대중공업은 1972년 조선소를 설립할 때부터 일본의 생산설계기법을 도입하고, 유럽의 선체설계를 파악하기 위해 오덴세 조선소 출신을 조선 소장으로 임명하는 등 기술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하지만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데는 이른바 ‘축적의 시간‘이 필요했다. - P178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생산 관리자와 엔지니어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량과 작업 물량을 산정하기 위한 품셈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정확하게 지시를 줄 수 있을 만큼 공정 파악을 마쳤다고 한다. 생산 관리자는 차근차근 사내 하청 물량을 늘리면서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관리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LNG 선박 수주가 ‘대박‘이 났던 2000년대 초반, 이제 사내 하청을 통한 생산의 최적화가 완료된 시점이 됐다. 이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험 관리도 일정수준에 올랐다는 말과 같다. 많은 산업 재해, 특히 조선소의 중대 재해는 아직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에게 일어나곤 한다. 물샐틈 없이 관리가 돼야 안전하고 생산성도 올라간다. - P179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해양 플랜트 수주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도 밝혔지만 조선 3사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해양 플랜트 수주로 인해 엄청난 수업료를 치러야 했다. 최초에 견적설계 단계에서 일량과 물량에 대한 산정을 잘못했던 것이다. 애초 작업자 10명이 3일에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이 100명이 일주일 동안 해도 모자라는 일인 경우가 허다했다. 또 해외에서 입고되는 자재에 대한 검증이 기본설계 단계에서 충분히 되지 않아 자재나 장비에서 결품이 나고 다시 주문을 해서 배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오는 데 몇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공정이 지연되고 많은 사람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공정 흐름이 순탄하다면 10명이 했을 일을 100명이 하는데, 공정마다 그런 일이 발생하니 각 플랜트건조공사에 들어가는 인원은 몇 배, 몇십 배로 늘어났다. 일의 순서는 꼬였고, 안 그래도 배관과 케이블 그리고 많은 인원이 엉켜 있는 작업 구역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 선박 건조 단계에서 축적했다는 생산 관리의 노하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공정 지연과 유가 하락으로 인해 발주처가 선박 인도를 거부하는 일까지 겹쳐 이중으로 엄청난 재무적 손실을 겪었다. - P180
2000년대를 지났을 때 모든 조선소의 주력 공정은 다 하청 노동자들 몫이 됐다. 1990년대부터 정규직 채용을 일정 부분 줄이고 사내 하청 노동자를 활용하기 시작해 누적된 결과다. 2010년대가 됐을 때 왕년의 ‘골리앗 노동자‘와 기계공고 출신 생산직 노동자의 나이가 모두 50대를 훌쩍 넘었다. 용접, 도장, 사상, 취부, 포설, 결선 등 조선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산재가 나지 않더라도 노동자 다수가 근골격계질환을 앓기 마련이다. 용접 자격증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은 편안하지 않은 자세나 수한 재료를 사용할 때인데, 그 말은 숙련된 용접공 노동자일수록 근골격계 질환을 겪기 쉽다는 말이다. 신체가 노화되면 위험하거나 불편한 작업을 하기 어려워지거나 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면서 나이 든 생산직 노동자의 적지 않은 수가 생산지원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구를 들고 용접을 하던 노동자가 공구를 나눠주는 역할로 업무가 바뀐 것이다. 고용이 보장돼 있는 조합원의 빈자리를 사내 하청 노동자가 채우기 시작했고, 당연히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중이 그만큼 더 올라갔다. - P180
위험한 순서대로 공정을 사내 하청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특수도장이, 나중에는 외업의 많은 부분을 사내 하청에 넘겼다. 조선소의 가장 핵심적인 손끝 숙련이 용접인데, 용접을 너무나 쉽게 사내 하청 노동자에게 넘겨 버렸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높은 곳에서의 작업(고소작업)도 넘어가고, 점차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에 걸맞게 위험작업이 사내 하청에 전가됐다. 지속적인 하청 비율의 확대는 오히려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의 기간이 예외였다. 회사는 언제든 하청을 쓰려고 한게 아닌가하고 한탄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2000년대까지만 해도 직업훈련소를 나와 사내 하청 업체에 취업해 위험한 작업을 맡고 기술력을 축적하다 보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실제로 직업훈련소에서 기술을 익혀 취업한 10~20퍼센트 정도의 노동자가 직영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2010년대 해양플랜트로 인한 어려움이 왔을 때, 많은 사내하청 업체가 해양 플랜트 물량이 줄어듦과 동시에 도산했고, 사내 하청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다. 단순한 해고가 아니고 폐업이었고, 유가 상승으로 해양물량이 줄어드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위장 폐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 P181
조선소를 찾았던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위험의 외주화‘는 애초 고용 조절의 목적이라는 사내 하청의 본분에 따라 ‘해고의 외주화‘로 전환됐다. 현대중공업은 정규직 조합원에게도 희망퇴직을 진행했지만 해고된 것은 결국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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