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 확대재생산을 위한 초기 과잉 숙련인력 투자


1961년 국내 최초로 화학비료를 생산하는 충주비료가 준공됐다. 이후 이승만 - 장면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동안 상공부는 공장건설과 생산관리를 경험했던 수백 명의 충주비료 엔지니어를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이후 설립될 다수의 화학 공장 건설과 운영의 핵심 인력으로 고려하면서 육성했다. 이들의 경험은 종합석유화학을 추진할 때에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핵심 암묵지를 내놓았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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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생산직-대기업 정규직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
- 여성의 진입과 맞벌이모델
- 엔지니어와의 협업 또는 그들의 유입
- 하청업체의 동반성장



적대적 노사관계, 공간분업,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산업 가부장제라는 요소를 모두검토해 볼 때 현재 전개되는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경우 평범한 사람의중산층 진입과 재생산이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울산의 노동자 중산층모델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면 박정희 시대 이후 50년간 형성돼 온산업-노동-가정의 복합체로 굴러가는 전국의 산업도시 역시 손쓰기어려운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이 되는 가장 근본적 이유는 우리가 산업도시의 평범한중산층 가정‘ 구성을 생각할 때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때문이다. 바로 남성, 생산직,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가정이다. - P286

공장에서도 여성이 정규직으로일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원하는 일자리가 충분할 때에야 산업도시의 재생산이 가능하나 중앙정부 외에도 울산광역시나 기업 모두여성을 잘 고려하지 않는다. - P287

대공장을 떠올릴 때 관습적으로 생산직 노동자만 고려한다. 공학을 전공한수많은 엔지니어가 대공장에 근무하지만, 2022~2023년의 조선 산업인력난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고려하는 것은 오로지 생산직이다. 더불어 산업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개발 센터나 조선업의 엔지니어링 센터모두 수도권으로 이전하려 할 때마다 지자체가 막으려는 시도는 하지만, 그 논리를 설득력 있게 제대로 펼친 적은 없다. 울산이 사무직, 기술직 엔지니어 일자리를 진심으로 원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 P288

울산의 모든 일자리 문제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그리고 남구 정유 및 석유화학단지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가 생겨야 해결될 것이라 여긴다. 울산에는 대기업 외에도 오토밸리의 자동차 부품업체, 울산부터 동남권 전체를 둘러싼 조선기자재업체. 그 외 다양한 중견·중소 화학 업체가 존재하지만 이런 일자리의노동문제는 ‘관심 밖이다. 지역 사회의 청년이 사내 하청 업체나 N차벤더‘ 협력사에 다니면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아빠가 다녔던 대공장 정규직이 된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만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울산은 역사적으로 형성해 온 궤적을 고려하면서도 새로운 ‘평범한 노동자 중산층‘을 다시금 구축하는 작업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산업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생산직 중심주의를 깨고, 정규직 중심주의도 깨면서 ‘노동자가 중산층으로 살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 P290

성평등을 고려해 전망 있고 안정적 일자리를 구할수 있는 노동시장정책, 달라진 학력 구조를 반영하는 직군 구조의 설계, 원하청 간 이중 노동구조가 만드는 차별의 해소라는 과제가 모두 앞에 놓였다. ‘평범한 노동자 중산층 3대‘를 이루기 위해 수면 위로 드러내야 하는 숨은 가정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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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의 가치, 제조업의 귀환

미국과 유럽 선진국은 과거 제조업에 기반을 둔 산업도시의 쇠락을 방치해 왔다. 영국의 사례처럼 ‘지식기반 경제‘가 되었으므로 금융산업에 집중하거나 제조업에서도 IT, BT, NT 등 고부가가치 기술 산업에 집중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다가 최근 10년간 산업도시를 되살려 내는 조치에 한창이다. ‘하르츠 개혁‘, ‘슈투트가르트 협약‘, ‘산업4.0‘(이하 독일), ‘제조업 르네상스‘, ‘IRA‘(이하 미국) 등 산업 정책, 기술정책, 혁신 정책, 노사관계 정책, 지역 정책을 망라하고 무슨수를 써서라도 살려 내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 이유는 지역에 제조업이 존속함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의 마중물이 된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제조업처럼 평범한 수많은 사람을 균등한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산업이 없기 때문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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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직종별 노동조합의 역할


˝영국의 노동자는 숙련을 그들만의 노하우로 묶어 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산업발전에 맞춰 진화해 나가는 데에는 실패했다˝(283)

잠시 영국 산업도시의 사례를 살펴보자. 1960~1980년대 영국에서는 한국의 1987년처럼 노사간 갈등이 첨예했다. 파업과 노사간 갈등이 극에 달해 ‘산업 전쟁‘의 주역으로 불렸던 지역이 바로 북부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리버풀, 요크, 셰필드, 더럼 둥지와 조선소가 많았던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였다. 탄광촌 노동자의 자녀 빌리가 국립 발레단 무용수로 거듭나는 스토리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 더럼처럼, 그때의 영국풍경은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됐다.
당시 파업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일을 파괴한다는 의미의 문자 그대로의 파업이 많았다. 노동자는 기계를 세우고 공구를 내려놓고 연좌하여 공장과 작업장 입구를 폐쇄했다. 그들이 작업의 많은 것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숙련을 장악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하는 프로세스를 장악했다. 경영진과 엔지니어의 기술력만으로 공장을 꾸릴 수는 없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대체로 직종별 노동조합이라 노동조합을 우회해서 작업자를 모을 수도 없었다. 54일본이 조선 산업을 제패하던 시기가 바로 영국이 기나긴 파업에노출되던 시기와 겹친다. 당시 일본에는 있고 영국에는 없는 게 있었고,
이런 차이가 산업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는 엔지니어가그린 생산설계 도면이 있었고 영국에는 생산설계 도면이 없었다. 영국 조선소는 상세설계 도면을 엔지니어가 제작해 현장에 나눠주면 숙•련 노동자가 작업 방식에 대해 자주 관리 관점에서 토론하고 결정했다. - P184

그에 비해 일본 나가사키에 위치한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표준화된생산설계 도면과 작업지시서를 반장이 나눠주면 그에 맞춰 노동자가정해진 구역의 용접을 하고자재를 표준 경로대로 지게차로 날랐다.
앞서 브래버먼의 이야기처럼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위해 중요한것은 작업 절차의 표준화다.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면 노동자는 모든작업을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수행하고, 노동자들끼리 일하는 ‘비#FM 프로토콜‘이 생긴다. 관리자와 경영진은 제품의 높은 품질과 낮은 비용, 빠른납기를 바라지만 그 모든 것이 노동자 손에 맡겨진다. 관리자와 경영진이 직접 배를 짓거나 자동차를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노동자는 자재의 활용과 재활용, 품질관리, 조업 속도 모두스스로 정하며 노동자자주 관리를 실천했다. 영국은 노동자의 입김이아주 셌다. 그들은 새로 들어오는 예비 신입사원인 견습공(도제)을 어떻게 교육할지, 몇 명을 뽑을지도 결정하려 들었다. 견습공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임금 수준을 떨어뜨릴 것 같으면 아예 채용을 주저하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조합도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직종별 노조였기 때문에 임금 협상이나 노동조건에 대한단체협상도 모든 직종과 회사가각각 수행해야 했다. 예컨대 오늘은 배관공 노동조합과 협상하고, 내일은 리벳공 조합과 협상하고, 그다음은 전장 설치공 조합과 협상하는식이다. 전장 설치공 조합과의 협상 결과를 빌미로 다시 배관공 노동조합과 협상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니 의사결정이나사간 협상이 빨리 이뤄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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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산업의 대서사시
- 위험의 외주화, 해고의 외주화, 숙련의 탈각



사내 하청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내 하청 관리 노하우가 필요하다. 조선산업 전문가인 박종식 박사(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1987년 이전까지 조선산업의 관리자는 노동자의 작업 방식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일량과 물량을 던져 주면 노련한 사내 하청의 소사장이나 조장 반장이 알아서 숙련공과 견습공을 조직해 선박 건조를 진행했다. 마치 1960년대 이전 영국과 비슷했다.

현대중공업은 1972년 조선소를 설립할 때부터 일본의 생산설계기법을 도입하고, 유럽의 선체설계를 파악하기 위해 오덴세 조선소 출신을 조선 소장으로 임명하는 등 기술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하지만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데는 이른바 ‘축적의 시간‘이 필요했다. - P178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생산 관리자와 엔지니어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량과 작업 물량을 산정하기 위한 품셈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정확하게 지시를 줄 수 있을 만큼 공정 파악을 마쳤다고 한다. 생산 관리자는 차근차근 사내 하청 물량을 늘리면서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관리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LNG 선박 수주가 ‘대박‘이 났던 2000년대 초반, 이제 사내 하청을 통한 생산의 최적화가 완료된 시점이 됐다. 이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험 관리도 일정수준에 올랐다는 말과 같다. 많은 산업 재해, 특히 조선소의 중대 재해는 아직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에게 일어나곤 한다. 물샐틈 없이 관리가 돼야 안전하고 생산성도 올라간다. - P179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해양 플랜트 수주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도 밝혔지만 조선 3사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해양 플랜트 수주로 인해 엄청난 수업료를 치러야 했다. 최초에 견적설계 단계에서 일량과 물량에 대한 산정을 잘못했던 것이다. 애초 작업자 10명이 3일에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이 100명이 일주일 동안 해도 모자라는 일인 경우가 허다했다. 또 해외에서 입고되는 자재에 대한 검증이 기본설계 단계에서 충분히 되지 않아 자재나 장비에서 결품이 나고 다시 주문을 해서 배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오는 데 몇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공정이 지연되고 많은 사람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공정 흐름이 순탄하다면 10명이 했을 일을 100명이 하는데, 공정마다 그런 일이 발생하니 각 플랜트건조공사에 들어가는 인원은 몇 배, 몇십 배로 늘어났다. 일의 순서는 꼬였고, 안 그래도 배관과 케이블 그리고 많은 인원이 엉켜 있는 작업 구역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 선박 건조 단계에서 축적했다는 생산 관리의 노하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공정 지연과 유가 하락으로 인해 발주처가 선박 인도를 거부하는 일까지 겹쳐 이중으로 엄청난 재무적 손실을 겪었다. - P180

2000년대를 지났을 때 모든 조선소의 주력 공정은 다 하청 노동자들 몫이 됐다. 1990년대부터 정규직 채용을 일정 부분 줄이고 사내 하청 노동자를 활용하기 시작해 누적된 결과다. 2010년대가 됐을 때 왕년의 ‘골리앗 노동자‘와 기계공고 출신 생산직 노동자의 나이가 모두 50대를 훌쩍 넘었다. 용접, 도장, 사상, 취부, 포설, 결선 등 조선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산재가 나지 않더라도 노동자 다수가 근골격계질환을 앓기 마련이다. 용접 자격증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은 편안하지 않은 자세나 수한 재료를 사용할 때인데, 그 말은 숙련된 용접공 노동자일수록 근골격계 질환을 겪기 쉽다는 말이다. 신체가 노화되면 위험하거나 불편한 작업을 하기 어려워지거나 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면서 나이 든 생산직 노동자의 적지 않은 수가 생산지원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구를 들고 용접을 하던 노동자가 공구를 나눠주는 역할로 업무가 바뀐 것이다. 고용이 보장돼 있는 조합원의 빈자리를 사내 하청 노동자가 채우기 시작했고, 당연히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중이 그만큼 더 올라갔다.  - P180

위험한 순서대로 공정을 사내 하청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특수도장이, 나중에는 외업의 많은 부분을 사내 하청에 넘겼다. 조선소의 가장 핵심적인 손끝 숙련이 용접인데, 용접을 너무나 쉽게 사내 하청 노동자에게 넘겨 버렸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높은 곳에서의 작업(고소작업)도 넘어가고, 점차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에 걸맞게 위험작업이 사내 하청에 전가됐다. 지속적인 하청 비율의 확대는 오히려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의 기간이 예외였다. 회사는 언제든 하청을 쓰려고 한게 아닌가하고 한탄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2000년대까지만 해도 직업훈련소를 나와 사내 하청 업체에 취업해 위험한 작업을 맡고 기술력을 축적하다 보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실제로 직업훈련소에서 기술을 익혀 취업한 10~20퍼센트 정도의 노동자가 직영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2010년대 해양플랜트로 인한 어려움이 왔을 때, 많은 사내하청 업체가 해양 플랜트 물량이 줄어듦과 동시에 도산했고, 사내 하청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다. 단순한 해고가 아니고 폐업이었고, 유가 상승으로 해양물량이 줄어드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위장 폐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 P181

조선소를 찾았던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위험의 외주화‘는 애초 고용 조절의 목적이라는 사내 하청의 본분에 따라 ‘해고의 외주화‘로 전환됐다. 현대중공업은 정규직 조합원에게도 희망퇴직을 진행했지만 해고된 것은 결국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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