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멕시코, 브라질의 도시 빈민굴은 농업의 규모의 경제 신화와 자유로운 농지거래의 결과다.

엘리시움에서 본 빈민굴은 충격을 잊을 수 잆다

구유럽에서 전통적인 농업사회가 근현대적 공업화와 도시화의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종주국은 자신의 잉여 인구와 빈곤 인구 및 범죄자들을 외부로 대규모 이주시켰고, 그럼으로써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자원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본국의 인구와 토지와 자원 사이의 모순이 완화되었고,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전환에 따른 여러 부담도 더불어 완화되었다. 그리고 현대적 정치경제 제도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만들어졌다.

주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새로 세운 식민지 국가는 해당 지역의 토착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나머지 땅들을 전부 보류지로 점거함으로써 광활한 토지와 천연자원을 독점했기 때문에, 여전히 토착민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그 내부적 모순이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

유럽 국가들이 대규모로 식민지화를 추진하던 수백 년 동안 서구의 공업화에 따른 제도의 비용은 내부에서 외부로 전가되었고, 자원은 외부에서 내부로 이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구유럽 국가들은 오늘날 중국이나 기타 제3세계 국가들을 장기간 괴롭혀온 삼농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 P202



객관적으로 ‘시야를 전 세계에 둔다면‘, 세계에서 불과 10개를 넘지 않는 대농업 국가들만이 토지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농업에서 규모의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그 국가들은 거의 전부가 식민지화 과정 중에 해당 지역의 토착민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농지를 개척한 경우이다. 

그 경우를 제외한 구유럽의 선진국들은 이미 수백 년의 시장화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규모의 경제‘를 농업에서 실현한 경우는전혀 없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소농장 위주이거나, 3분의 2의 농업경영자가 여전히 겸업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산업화 국가와 지역가운데 한국과 일본 및 타이완은 중국보다 앞서 온전한 시장경제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농업은 지금까지 여전히 소농경제 위주이다. - P203

서구의 이론에 따라 ‘토지 사유화+시장화전환‘을 실행한 결과는 예외 없이 빈부의 양극화, 농촌 빈곤지역에서의 게릴라전, 도시 빈민굴의 범죄조직 만연, 그리고 심지어 테러리즘으로의 경도였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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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통찰!

북한 농업의 이른 현대화가 소련제국 붕괴로 재앙이 되다.
탈북민이 아니라 탈농민이다.

맨 처음 글은 김정훈 교수의 해제에 있는 요약이다.
아래의 문장은 저자의 원글이다.

이처럼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한 이념적 접근보다는 현장조사를 통한 체득을 강조하는 입장은 북한의 식량 위기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자신이UN 파견 전문가 자격으로 북한 농업의 실상을 고찰하고 온 경험을술회하면서, 북한 농업의 붕괴는 농업 현대화의 지연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구소련에서 도입한 6만 대의 트랙터로 대표되는 농업 기계화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북한 전체 인구 30퍼센트미만의 농촌 인구가 70퍼센트의 도시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도시화의 급속한 진전 속에서 구소련의 해체로 인해 농기계 부품과 에너지공급이 중단되었을 때 북한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현장실사를 경험한 원톄쥔의 주장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주의의 실패를 계획경제의 비효율 혹은 관료의 부패라는익숙한 각도에서만 바라보아온 우리의 ‘냉전‘적 사고관행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충격을 가한다. 이러한 시각은 향후 남북한의 통일을보다 실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실제적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해주는 유의미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 P254

김정일 영도 하의 북한은 기근에 직면해 있지만, 이미 앞서서 현대화를 이룬 농업과 도시화를 이룬 인구 구조를 되돌릴 수 없다. 과거 소련이 주도한 동유럽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의 영향 아래, 북한은 1인당 평균 경지면적이 남한보다 적은 산지 농업이라는 조건 하에서도, 일찌감치 기계화를 위주로 한 농업 현대화를 실현했다. 이를 통해 농업부문의 노동생산성을 극도로 높였고,
따라서 농촌 인구가 자연스럽게 도시로 이동하여, 70퍼센트가 넘는 고도의 도시화를 이루었다. 즉 북한은 일찍이 중국보다도 먼저 농업의 현대화를 실현했고, 오래전부터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때 더 이상 호미질을 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가 오늘날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또 학계의 이론가나 현실의 정치가를 막론하고 모두 동경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꿈을 북한은 우리보다 20년 전에 벌써실현한 셈이다. 1989년 무렵 북한은 1인당 평균 식량 배당 380킬로그램, 1인당 평균 소득 900달러에 근접해 있었다. 우리의 지금 1인당 평균 식량 수준보다 높고, 소득도 우리의 1980년대 말보다 훨씬높은 수준이었다.  - P173

그러나 현대화를 앞서 실현한 데 따른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1년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해체되면서, 하루아침에 석유 공급이 끊겼다. 산유국이 아닌 북한은 트랙터를 잠자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인구의 30퍼센트에 불과한 농업노동력은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트랙터를 운전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경제적으로 봉쇄가 되자, 석유도 없고 트랙터 부품도 없는 조건에서 농사를지을 길이 막연했다. 식량 생산이 대폭 줄었고, 대규모의 기아가 발생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건 누구의 죄인가?

중국의 ‘가구단위 생산청부제‘를 시행하도록 권했으면어떠했겠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북한에서 현지조사를 한 결과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가구단위생산청부제는 80퍼센트의 농민이 20퍼센트의 도시민을 먹여 살리는 구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룬潤生(1913~) 노인이 예전에 한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네 명의 농민이 한 명의 도시 사람을 드는 ‘사인‘라서 들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 세 명의 농민이 일곱 명의 도시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 게다가 맨손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 P174

김정일은 도시민을 다시 농촌으로 보내서 맨손으로 삽질, 곡괭이질, 낫질을 하도록 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탈북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들은 사실 ‘탈농자‘인 셈이다. 도시민들은 농업을 할 줄도 몰랐고, 또 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북한은 일찍부터 농업의 현대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해왔는데, 김정일이 그것을 하향조정하는 쪽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북한은 장기간에 걸친 농업의 곤경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체제의 문제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농업의 현대화를 너무 서두르고 도시화를 가속화한 데 따른 엄청난 제도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발등을 찍게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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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된 마시멜로 실험

2013년 로체스터대학교의 홀리 팔메리Holly Palmeri와 리처드 애슬린Richard Aslin은 잡지 〈코그니션Cognition〉에 〈합리적 간식 먹기Rational Snacking〉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에 의하면 “첫 번째 마시멜로를 빨리 먹은 아이들 중 일부는 참을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돌아오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연구원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며,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좀 더 오래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9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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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생까지도 어찌 보면 기존 세대들과 같이 ‘본인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다. 장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강압적인 신입 사원 교육 과정을 인내하고, 권리는 잠시 유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은 강압적인 요구에 그들의 권리를 잃으려 하지 않고,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관리 시스템은 적절히 조절하면 80년대생들의 기본적인 가치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생들은 권리를 지키고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과감한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복종이나 권위를 통한 강압적 통제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다.<9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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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 즉각적인 퇴사 욕구가 끓어오른다고 한다. 그들은 보여주기식 노력이 대부분 그들의 직속 상사에 대한 소속감 때문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90년대생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상사나 회사에 대한 수직적인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과거와는 달리, 주변 동료나 지인들을 향한 수평적인 소속감을 더 많이 느낀다.<9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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