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기적 유전자) 사자가 사슴 무리에 다가올 때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녀석이 풀쩍풀쩍 뛴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이를 보고 사자가 왔음을 알게 되어 무리 전체가 도망간다고 한다. 이때 풀쩍 뛴 녀석의 행동에 대해 먼저 도망갈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는다고 하여 동물들에게 이타적 행동이 있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도킨스는 바로 그 유명한 책에서, 풀쩍 뛰는 행동이 오히려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도킨스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사자의 접근을 눈치챈 사슴은 힘있게 풀쩍풀쩍 뜀으로써 사자에게 자신은 건강하고 날렵하니 나를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2.(신호발송게임) 정보가 비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거래가 잘 성립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 정보를 많이 가진 측의 일부가 다른 이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신호(signal)를 발송함으로써 정보의 비대칭성을 깨고 정보를 공개하여 정보가 없는 측과의 거래를 시도한다. 이러한 경제학의 원리를 약간 변형하면 사자와 사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써먹을 수 있다. 사자는 누가 날렵한 놈인지 하는 정보가 없는 측이고 사슴은 각자 자신이 얼마정도 날렵한지 아는 정보가 많은 측이다. 그리고 풀쩍풀쩍 뛰는 놈은 신호를 발송하는 것이다.

 

3.(신호로서의 교육) 일부 경제학자들은 대학졸업장을 얻으려는 교육경쟁을 신호를 발송하려는 노력으로 해석한다. 애초에 이미 유능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구분되어 있는데 문제는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누가 유능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기 위해 입사시험을 치루고 다양한 방식의 면접을 하는데 구직자 입장에서 자신이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학을 나왔다 또는 어느어느 유명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신호 시장의 소멸)  비대칭적 정보가 존재하는 시장에서 나타나는 신호의 가치는 남들이 흉내내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만약 다른 이들이 흉내내기 쉬운 신호일 경우에는 정보로서의 의미가 사라진다. 이럴 경우 시장은 다시 비대칭적 정보가 존재하는 시장으로 되돌아간다. 대학졸업장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인사담당자들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더이상 대학졸업장은 능력과 관련된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부모의 재력과 관련된 신호일 뿐이다. 그렇다면 기업입장에서는 대학졸업장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5.(기여입학제) 대학졸업장 문제는 기여입학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논점을 보여준다. 기여입학제를 원하는 학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들어가는 학교가 상당수 학생을 기여입학제로 뽑거나 자신의 자녀가 기여입학제 출신임이 졸업장에 명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명문대의 신호를 사고파는 행위는 명문대의 존재를 전제하는데 신호를 사고파는 행위가 만연하면 명문대라는 신호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신호를 둘러싼 시장은 항상 적당한 - 비교적 적은 - 규모여야만 유지가능하지 신호가 돈으로 거래되는 시장만 존재할 경우에는 시장 자체가 없어진다.

 

6.(의학박사학위 시장) 최근 불거진 의학박사학위의 매매사건(아래 뉴스 참고)도 마찬가지다. 환자들은 어느 의사가 실력있는 의사인지 알기 어렵다. 이에 비해 의사들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신호 발송을 위한 경쟁을 한다. 하나의 신호가 의학박사학위다. 환자들은 의학박사학위의 존재 여부를 통해 그의 실력을 사전에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의사들 사이에서는 의학박사가 돈으로 사고 판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돈을 내는 환자들 사이에서의 인식이 문제의 핵심이다. 의학박사학위의 매매사건을 통해 환자들이 학위가 매매된다고 알게 되면 더이상 신호를 사고파는 시장은 성립할 수 없다. 가치가 없는 신호는 매매될 수 없기 때문이다.

 

7.(의료시장에서 학위 신호 이외의 다른 대안) 환자들은 신호에 목말라있다. 그래도 믿을 것은 전통적인 신호인 명문대냐 아니냐라는 신호라고 생각하는 환자들도 있을 것이고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 속에서 좋은 의사를 찾아헤매기도 하고 잡지나 방송에 출연했는지 여부가 신호라고 생각하는 환자도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 중 일부는 의사들도 광고를 하도록 하면 많은 정보가 공개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일부는 정부와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객관적인 척도로 병원이나 의원의 정보를 공개할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후자와 같은 아이디어는 정책으로 구체화되는데 매번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의사들 전체가 원하지 않고 이를 막기 때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8.(고백) 얘기를 마무리 짓기 전에 고백할 것이다. 도킨스가 사슴의 행동을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으로 해석한 사례는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끌어다 붙인 측면이 있다. 사슴이 풀쩍풀쩍 뛴 것이 과연 자신이 건강한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스럽다. 신호는 원래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을 해야 신호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인데 처음 본 녀석이 풀쩍 뛰는 것은 남들보다 사자를 먼저 봤기에 먼저 풀쩍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일뿐 별다른 정보가 사자에게 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사자도 왠만큼 이력이 나서 풀쩍거리는 모습을 척 보면 저놈이 팔팔한 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사자는 웬만하면 어린 놈만 공격하므로 풀쩍거리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정보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진국을 살펴보면 전자의 공공부조보다 후자의 사회보험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것은 사람들이 공공부조의 방식보다 사회보험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공공부조를 받는 경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끼지만 사회보험의 방식에 대해서는 나도 건강하고 일자리가 있을 때 병든 실업자들을 위해 기여했으므로 내가 지금 병들고 늙고 일자리를 잃어서 받는 사회보험급여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보장은 시민의 기본권이며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할 것이지만, 사회보장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섬세한 인간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장에서 만들어지는 보험은 기본적으로 같은 타입의 사람들의 위험에 대한 대응책이다. 사람의 타입에 따라 위험에 차이가 날 때 이런 다른 타입의 사람들이 섞인 보험은 균형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에 둘 이상의 타입이 가입할 경우 어느 한 타입이 손해를 보게 되고 손해를 보는 타입은 자신들만을 위한 보험에 들지 섞은 보험에 들지 않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영보험은 가능한 한 세분화된 타입들로 나뉜다.


문제는 여러 타입을 섞은 보험을 가입하면 이익을 보는 타입들이 대체로 불쌍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이라는데 있다. 이들 타입은 위험이 높다. 그리고 하나의 종류의 위험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험도 높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높은 위험에 상응하는 높은 보험료를 낼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보험을 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둘 것인가. 물론 그냥 두자는 냉혹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대세이다. 이들을 돕는 해결책은 두가지다. 하나는 정부가 이렇게 보험을 들 수 없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보험을 들 수 있는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야 한다. 형편이 나은 이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여러 타입을 섞은 보험을 만들어서 강제로 모두 가입시키고 형편이 좋은 타입의 사람에게 보험료가 좀더 비싸지더라도 참고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형편이 나은 타입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것이다. 전자를 공공부조라고 부르고 후자를 사회보험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대로 사회보험은 다른 타입의 사람들을 강제로 하나의 보험에 가입시켰기 때문에 돈 내는 사람 따로 있고 돈 받는 사람 따로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실업보험(우리나라에서는 고용보험)의 경우 실업할 확률이 높은 타입의 사람들은 덜 내고 더 받고, 실업할 확률이 낮은 타입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질병보험(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의 경우 질병에 잘 걸리는 타입의 사람들은 덜 내고 더 받고, 건강한 타입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산재보험의 경우 재해율이 높은 사업장의 사람들이 덜 내고 더 받고, 재해율이 낮은 사업장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노령연금(우리나라에서는 국민연금)의 경우 노후를 준비하기에 경제적 여력이 없는 이들이 덜 내고 더 받으며, 노후를 대비하기에 충분한 재력을 갖춘 이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실업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것 아닌가. 의료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 아닌가. 산재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다치지 않는 것 아닌가. 노령연금을 받지 않는 대신 넉넉한 재산이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재산을 넉넉히 갖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좀 더 내고 덜 받는다고 그렇게 열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좀 불공평하지만 양보할만 하지 않은가.

 

* 이 글은 김태성, 김진수(2001), 사회보장론, 청목출판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메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에서 얻게된 소중한 정보 중의 하나는 전통중국에서 교육이 갖는 의미였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를 선발했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많이 이들이 평생을 매달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위한 교육제도가 나름대로 계층이동을 위한 효과적인 통로로서 기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옛 교육제도 아래에서 교육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사숙은 일반적으로 촌락에 있었기 때문에 학생은 자신의 집에 거주하며 다닐 수 있었다. 유교경전이나 묵필, 종이 등의 가격은 대부분의 농촌 소년에게도 지불 가능한 액수였다. 게다가 친척이나 종족, 혹은 촌락이 총명하지만 가난한 소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젊은이의 교육을 주로 방해한 것은 금전보다도 오히려 시간이었다. 가난한 농민은 농사일을 도울 자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p. 269)."

이스트만의 주요 논점 중의 하나는 중국이 근대화를 경험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 사이에는 근대교육이 과거제도에 비해 훨씬 비싸고 서민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동경로였다는 점이다. 근대교육은 우선 도시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의 경우 도시에 유학할 수 있는 비용이 필요했다. 또한 근대적 학교의 수업료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그리고 교재 역시 선배나 선조로부터 물려받을 수 없고 새로 장만해야 하므로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20세기 초엽 중국의 새로운 엘리트는 유학파였다. 상해의 어느 회사의 월급표에 따르면 최고의 연봉을 받는 이는 서구 유학파이다. 중국의 대학 출신은 월급이 80원에 3X1.5 책상을 받았지만 일본의 제국대학의 월급은 150원, 유럽과 미국의 대학은 200원이었다. 하버드나 옥스포드 출신은 250원을 받았고 맞춤책상, 서가, 등나무의자에 크리스탈 잉크스탠드를 받았다.

청조 말엽에 정부는 국비를 들여 학생들을 유학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의 유학생들은 가난한 천재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엘리트 집안의 자제들은 유학을 엘리트코스로 여기지 않았기에 유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을 통한 성공 가능성이 확연해지자 엘리트 가문이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자제들을 유학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변화의 시점에 부패한 청조가 신해혁명과 함께 무너지자 국비유학생이 급속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난한 천재들이 유학을 통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격감하였다.

중국 유학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이 근대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인데, 이런 현상은 러시아의 혁명운동이나 독일 나치 운동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유학파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국민당계열과 공산당계열은 약간 차이가 난다. 전형적인 공산당 지도자는 지주나 부농의 자제로 농촌 출신이며 소련이나 프랑스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이에 비해 전형적인 국민당 지도자는 상인이나 도시 전문직 종사자의 자제이며 해안지역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이스트만의 이런 설명은 중국 근대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의 근대사에도 비슷한 굴곡이 있을텐데 관련된 연구를 요약한 글을 읽어보고 싶다. 근대조선, 일제강점기에서 근대교육이 전통교육과 비교할 때 민중에게 얼마만큼의 기회로 여겨졌는지가 궁금하며, 근대화운동 및 민족해방운동에서 유학파는 어떤 배경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역할들로 분화되었는지를 읽을 수 책을 만나기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악인가?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그의 재임기간 중에 한국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이를 근거로 경제성장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싱가폴의 리콴유 전 수상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전 수상, 대만의 장경국 전 총통 등을 추가적인 예로 든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쉽게 논박가능하다. 아래의 표는 경제성장의 성공 여부와 정치적 민주주의와 독재의 기준으로 네 개의 유형을 구분한 것이다. 독재가 경제성장의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D의 유형의 나라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독재이면서 경제성장에 실패한 나라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종”이라는 영화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은 경제성장에 실패한 사례로 유명하다. 군사독재정권이 장악한 1976년부터 1983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미국에 대비한 상대소득은 50.5에서 42.9로 급락하였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무자비한 독재자 이디 아민은 1971년 정권을 잡은 뒤 1978년 축출당하였는데 그 사이 우간다의 상대소득은 3.66에서 2.63으로 급속히 하락하였다.


 

 

경제성장

 

 

성공

실패

정치

민주주의

A

B

독재

C

D


민주주의 연구의 대가인 정치학자 쉐보르스키(Przeworski)는 1950년부터 1990년의 41년 간의 기간 동안 135국가의 224정권을 분석하여 독재와 경제성장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그는 “몇마리의 호랑이가 독재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재가 호랑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싱가폴의 리콴유 수상은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아시아에서는 독재가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서 “독재->경제성장”은 성립하지 않지만 “독재+아시아->경제성장”은 성립한다는 것이다.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대만, 중국 등의 나라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지만 경제성장에는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아래의 <표 2>에서 Ca의 사례는 풍부하고 Da의 사례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성장

 

 

성공

실패

정치

민주주의

A

B

독재

비아시아

Cna

Dna

아시아

Ca

Da


리칸유의 주장은 독재를 합리화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많은 사례들 때문에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많은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아시아가 비아시아와 다른 이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유명한 정치학자 올슨(Mancur Olson)은 독재자와 마적단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에 주목했다. 올슨은 문명의 시작은 마적단의 세계에서 독재자의 세계로 변화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고 말했다. 사실 독재자와 마적단은 민간인들의 재산과 소득을 훔쳐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렇지만 마적단은 마을을 파괴하고 다른 마을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파괴하는 마을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에 비해 독재자는 그가 착취하는 영역에 대한 포괄적 이해관계를 갖는다. 만약 착취하는 영역이 번성한다면 점점더 많은 것을 착취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관심을 갖고 이를 촉진하는 것이 독재자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마적단도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이런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재자는 정착한 마적단이다.


정치학자 에반스(Evans)는 후진국의 국가를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와 약탈국가(predatory state)로 구분하여 발전국가는 경제성장에 기여했지만 약탈국가는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구분은 올슨의 정착한 마적단과 떠돌아다니는 마적단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어떤 정권은 발전국가적 행동을 하고 어떤 정권은 약탈국가적 행동을 할까? 그 차이는 정권을 잡은 이가 자신의 권력의 안정성에 대한 확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 자신이 쿠데타나 민중봉기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독재자는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착취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에 비해 권력 기반이 탄탄하다고 믿는 독재자는 지금 당장 착취를 극대화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착취량의 증가를 추구하고 이 과정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를 하게 된다.


발전국가와 약탈국가의 차이는 권력의 미래에 대한 확신의 문제이며 이런 점에서 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발전국가적 독재자가 미래의 권력에 확신이 사라지면 약탈국가적 독재자가 될 것이다. 향후 권력의 안정성은 민중과 정치적 경쟁자에게 약속한 경제성장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받는다. 장기적인 착취를 위해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했지만 본의 아니게 단기적으로 나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민중들은 동요하고 다른 권력 엘리트들은 민중의 동요를 기반으로 권력을 흔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독재자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단기적 착취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게 된다. 이것은 쿠데타와 민중봉기를 촉발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졌던 독재자의 예상은 현실화된다.


독재자가 갖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단기적인 경제성장의 결과에 영향받고 장기적인 경제성장이 독재자의 확신에 의해 영향받는 구조 하에서 독재는 매우 불안정한 경제성장의 결과를 낳게 된다. 많은 독재자들은 처음에는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가끔 단기적인 성공으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한껏 부풀어오르지만 단기적인 실패로 인해 약탈적 행태를 띠게 되고 새로운 독재자에 의해 교체된다. 경제성장에 성공한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계속 유지한 독재자이며 이러한 지속적 확신은 집권 기간 내에 발생한 단기적인 실패가 별로 없었거나 단기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민중봉기나 쿠데타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행운이 겹친 경우에 한정된다. 경제성장에 성공한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예외없이 긴 집권기간을 유지한 것은 이러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박정희는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을, 리콴유는 1990년까지 32년간 총리를 하고 이어서 아들이 총리를 하는 동안 올해까지 13년의 선임장관을, 마하티르는 1981년에 수상에 취임한 후 올해까지 22년간 수상에 재임하였다.


올슨은 민주주의를 다수(majority)에 의한 소수(minority)에 대한 착취체제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독재는 한 사람에 의한 전체에 대한 착취체제이다. 다수는 독재자에 비해 훨씬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며 따라서 훨씬 큰 포괄적 이해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독재에 비해 경제성장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 올슨의 생각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통치자가 약속한 정책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약속을 어긴 정치인이 다음 선거를 통해 낙선되는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러한 약속 파기의 비용을 통치자가 부담하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정책의 안정성이 보장되고 착취도는 줄어들며 민간의 경제활동은 극대화될 수 있다.

통치자는 민주주의 하에서건 독재 하에서건 늘 착취를 극대화하길 원한다고 가정하자. 민간은 과도한 착취를 예상할 경우 생산을 줄이고, 낮은 착취를 예상할 경우 생산을 늘린다고 하자. 통치자 입장에서는 우선 낮은 착취를 약속한 뒤 민간이 생산을 늘리면 이 약속을 뒤집고 높은 착취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이익이다. 그런데 독재체제에서는 통치자의 약속파기의 비용은 거의 없다. 민간 입장에서는 독재자의 약속이 실제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약속을 믿지 않고 낮은 생산량을 결정한다. 결국 독재자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약속파기로 인해 통치자가 큰 비용을 치루게 된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통치자의 약속은 이행될 가능성이 높고 이에 따라 민간은 안심하고 높은 생산을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경제의 잠재력을 해치는 의사결정권자에 의한 과도한 착취를 줄인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제성장론 분야의 유명한 학자 배로(Barro)는 민주주의가 소득재분배 정책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소득재분배는 고소득자의 노력과 재능 발휘의 인센티브를 꺾고 저소득자의 자활의지와 노동의욕을 약화시키는 나쁜 영향을 준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올슨 역시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익집단의 로비가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비록 1인1표의 원리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실제 정책의 결정과정에는 얼마나 많은 돈(자원)을 쓰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비효율적인 선풍기산업을 계속 보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정부가 시장개방을 추진한다고 하자. 이로 인해 현재의 선풍기산업을 운영하는 사업주들은 큰 피해를 입는다. 이 때문에 이들은 큰 돈을 퍼부을 용의가 있으며 이에 강력한 로비를 전개한다. 하지만 선풍기산업의 개방으로 이익을 얻는 소비자들은 그 수가 많지만 한사람 한사람의 이익은 시장개방의 로비를 위해 자기 돈을 내놓고 거리시위를 할 정도가 되지는 않을 수 있다. 소비자 개개인은 자기가 나서기는 부담스러우며 남들이 나서서 시장개방을 추진해주면 좋다는 의미에서 무임승차의 경향을 보인다. 고양이 목에 방울걸기의 상황과 유사하다.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는 선풍기산업을 개방하는 것이 낫지만 개방운동에는 어떠한 자원도 투입되지 않고 개방반대운동에는 소수의 사람들의 많은 돈이 투입되어 시장개방은 좌절된다. 소수의 이익과 적극적인 노력이 다수의 이익과 소극적인 행동을 압도하는 것을 특수 이익 효과(special interset effect)라고 부른다.


소수 집단의 정치적 로비에 의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정책이 채택될 수 있다는 올슨의 주장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으로 큰 이익을 보는 소수 집단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반론에 직면했다. 정책의 향배를 둘러싸고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경쟁 과정에서 비생산적으로 자원이 낭비될 수 있고 이것은 다시 민주주의의 약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독재는 짧은 시간 안에 큰 비용 없이 결정을 짓지만, 민주주의는 긴 시간 속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비용은 민주주의가 부담해야할 비용이며 이러한 비용은 결정된 정책의 장기적 효과와 독립적으로 경제성장에 부담이 된다.


독재가 경제성장에 필요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박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는 주장 역시 그러하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은 단선적인 인과관계를 갖지 않으며 이것은 민주주의를 독자적인 가치로서 옹호하는 이들에게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확대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논리적, 실증적 근거가 없으며 민주주의의 확대가 경제와 독립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점은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촉진한다는 가설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에 따르면 경제성장이 높은 수준에 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많이 관찰되며 고소득국가에서는 어떤 이유로건 확립된 민주주의가 독재로 회귀하는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소득국가에서 확립된 민주주의가 경제성장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좀더 확대된다면 경제성장은 촉진될 것인가, 아니면 저해될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독재로 회귀할 가능성은 충분히 낮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