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 1. 대토지소유자들은 세금(전세, 부역, 공물을 모두 포함)을 회피할 능력 또는 자격이 있다.

명제 2. 황제 또는 임금은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해 또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수를 늘리려고 한다.

명제 3. 황제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소토지소유자들을 살찌워서 그들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을 늘리거나 아니면 대토지소유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방식 둘 중의 하나를 취할 수 있다.

명제 4. 대토지소유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방식은 조선시대 대동법처럼 공납을 지세화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명제 5. 소토지소유자들을 늘리는 극단적인 방법은 혁명의 시기에 대토지소유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토지소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 공신들이 새로운 대토지소유자들로서 등장함에 따라 이런 정책은 결국 실패하였다. 예를 들어 명태조는 귀족과 공신관리에게 장원토지를 분배하였는데 이를 축소하려는 태조말년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명대 전체를 통해 이런 계획은 성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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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은 북송(960-1127) 중엽 신종 때 개혁정책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추진한 개혁정책 중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균수법(均輸法)이란 예산을 미리 짜지 않던 재정운용 관행을 혁신하여 미리 예산을 짜고 물자를 조달할 때 가깝고 값싼 곳에서 조달하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적으로 물자를 조달하는 정부에 기생하여 부를 축적하던 政商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청묘법(靑苗法)은 농민에 대한 저금리 융자를 주는 법이다. 농민들은 빌릴 때는 돈을 빌리지만 나중에 변제할 때는 곡물로 하도록 한다. 농민 입장에서는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으므로 고리대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고 정부 입장에서는 곡물로 변제받음으로 인해 군량미의 일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정부는 민간으로부터 강제로 곡물을 징발하고 돈을 지불했으나 지불한 돈이 넉넉치 않아 민간 입장에서는 여간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청묘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시역법(市易法)은 창고업을 겸한 은행업을 시행하는 것으로서 아직 팔리지 않는 물품을 근거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토박이 대상인들이 외부로부터 반입되는 물건을 싸게 전매하여 내부에 비싸게 팔지 못하도록 외부 상인의 금융환경을 개선시켜주는 것이다. 이것은 과점체제를 뒤흔들었다.

모역법(募役法)이란 농촌의 부유계급이 지었던 요역(徭役)을 합리화하는 제도이다. 요역은 현 또는 주 아문에서 아전의 역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이때 조세의 관리, 운송감독 등을 농촌의 상위계층이 담당하고 있었고 그 비용을 농촌 상등계층이 현물로 제공하였다. 자신이 직접 운송감독을 맡고 필요한 경비를 현물로 부담하는 과정에서, 농촌의 상층계급들은 관리의 착취나 과도한 위험부담을 떠앉게 되었다. 모역법의 시행에 따라 미리 비용을 예산으로 짠 뒤 부유계급 전체에 면역전(免役錢)이라는 세금을 부과하여 이 재원으로 요역을 행할 사람을 뽑아서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개혁정책은 이후 신법당과 구법당의 치열한 정책대립으로 이어졌고 어느 파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 정책이 뒤집어졌다가 다시 뒤집히는 일이 이어졌다. 사실 왕안석의 개혁정책들은 기존의 강자가 가진 기득권을 건드리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강자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했다. 미야자키는 왕안석이 부자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부자가 재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겸병하는 행위를 미워했다고 평가했다. 미야자키는 소철(蘇轍)이 “왕안석은 소장부다. 빈민을 연민하여 부호를 깊이 증오함으로써 빈민에게 인정을 베풀고도 그 옳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완전한 오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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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제가 해체되고 예농은 사라지고 지주는 부재지주로서 소작인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 매우 싼 비용으로 과거준비를 할 수 있고 과거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신분적 제약은 거의 없어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세상, 미신과 마술, 그리고 비합리성을 배척하는 유학이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 이러한 명청대의 중국사회의 모습은 서구 근대사회가 갖고 있는 근대적 속성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노비가 있고 천인이 있지만 이들을 제외한 양인들의 세상은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청대 중국사회와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 사회 간의 남아 있는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다. 사회적 이동성이 원리적으로 보장되지만 실질적으로 일정한 집단이 계속 피해를 감수하며 살아야하는 구조에서 피해를 보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권익을 찾아나갈 수 있는 정치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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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신분제사회는 고정된 사회지만 송대(960-1279)에 들어가면서 사회는 침체를 깨트리고 발랄한 활동을 개시한다. 송대는 중국의 르네상스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후한 이후 당까지 긴 경제의 하강국면이 반전되어 호경기가 도래한다. 석탄의 이용, 철의 생산액 급증, 은의 유입 등이 어우러지면서 상승세가 최고조에 이른다. 그런데 호황을 지나면서 송대는 점차 정체경향을 보이게 되었다.(미야자키, p. 46)

 


1300년경(원 중기)부터 1500년경(명 중기 홍치제) 사이에 중국 중세의 경제혁명은 멈추고 중국의 경제는 쇠퇴했다. 비록 1500년과 1800년 사이에 활기찬 경제성장이 재개되었지만 양적 성장만 있었을 뿐 과거 시대의 활발한 기술혁신과 발명과 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경제의 활력이 소멸한 이유는 첫째, 변경의 미개척지(미국의 프론티어를 떠올리면 된다)가 사람에 의해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해외무역 및 외국인과의 접촉이 감소하면서 외국 은의 공급이 줄어들었다. 명태조의 경우 해금(海禁)을 단행하였고 공식적인 조공무역만을 인정하였다. (엘빈 p. 207)

 


이스트만 역시 엘빈과 마찬가지로 송대를 중국경제의 최전성기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스트만은 15세기 이후의 경제의 부침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송대(960~1279)에 중국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이후 경제는 침체되었다. 그 이유로는 13세기 몽고침략, 14세기 역병의 만연, 1450~1540년 사이 전세계적인 냉각화 경향, 명대 초기의 해금정책(海禁政策) 등을 들 수 있다. 경제적 침체의 징후는 인구의 감소로 나타난서 1200년 1억 1천만명이었던 중국이 명초에 겨우 6500만~8000만명 정도 수준이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화폐경제의 진전은 호황에 동반되었다. 1581년 단행된 일조편법은 화폐경제를 촉진시켰다. 18세기까지 경제는 대체로 완만한 성장세를 유지했으며 19세기에는 경제가 어려움에 처했다. (이스트만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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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는 귀족사회였다. 귀족들은 대토지소유자였다. 그들의 장원을 형성한 것이다. 장원에서 사용된 노동력은 당률에 나와있는 부곡(部曲)이었다. 이들은 귀족의 장원에서 집단으로 노동하는 예농(隸農)이었다.(미야자키 p. 36)

송대에 오면서 귀족이 몰락하고 사대부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신분제 사회가 사라지고 서민계급이 전일화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사대부는 상층 서민이었다는 점에서 상층과 하층의 계급적 차이가 있었지만, 무력과 혈연에 의존한 귀족집단이 사라지고 양인 모두가 응시자격을 갖는 과거를 통해 상층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송대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미야자키 p. 39)

귀족층이 몰락하고 그들의 소유지가 소멸하자 이에 예속되었던 농민들은 예농의 지위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14세기경(원대 중기, 명초)에 이르면 이들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소작하는 자유를 얻었으며 마음대로 이주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했다.(이스트만, p. 108)

송대에서 지주는 토지소유를 통해 단순히 지대를 얻을 뿐, 소작인의 신분을 지배하거나 생계에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송대의 전호(佃戶)는 계약에 의하여 지주의 토지를 빌리고 지대를 지불하는 소작인이며 하나의 경영자였고 농노(農奴)가 아니었다.(미야자키 p. 35)  

 


하지만 전호가 농노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호를 토지에 딸려서 팔거나 노역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근대적인 방식의 착취는 존재했고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副租이, 雜役 등이 강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송대 전호를 농노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엘빈의 경우도 명시적이지 않지만 전호를 농노로 간주하기도 한다.

 


농노제는 이미 송대부터 시작하여 쇠퇴하고 있었지만, 명조(14C~17C)와 청조의 초기 동안에 장원질서는 여전히 지방에 잔존하고 있었다. 지방의 장원질서를 지탱했던 것은 전호와 노복이었다. 전호는 이미 소작인에 가까웠지만 부분적으로 농노적인 성격이 잔존해 있었다. 노복은 가내노비로서 직영토지의 농업노동자로도 활용되었던 존재이다. 노복과 전호의 폭동이 빈발하는 과정을 거쳐 18세기가 되면서 장원제는 마침내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고1) 지주와 전당업자가 장원영주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비세습적 노복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가내노비로서 남아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업, 전당업, 도시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의 자본수익률이 높음으로 인해 대부호들이 더 이상 토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았고 더 이상 시골에 거주하지도 않았다. 태호지역의 연구에 따르면 15세기까지 대토지 소유자는 농촌에 있는 저택에 살았다. 16세기 상업화와 수공업활동의 발전과 함께, 지주는 도시에 투자하고 도시로 거처를 옮겨갔다. 청대에는 대다수 지역 엘리트들이 도회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엘빈 p. 255, 이스트만 p. 110) 

둘째, 자유롭지 못하고 통제된 노동력으로서의 노동자들이 대규모단위로 일하는 것보다 가족단위로 일하는 자유로운 전호의 생산성이 높았다.2)

셋째, 수공업의 발전과 시장의 발전에 의해 수공업에 의한 수입이 증대함에 따라 농민들이 지주에 의존해야하는 정도가 약화되었다.(엘빈 p. 260) 태호 주변 지역의 연구에 따르면 16세기 들어서 상업화의 진전에 따라 면방, 제사, 방직이 농가에서 시작되고 농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연수입의 절반이 수공업을 통해 얻을 수 있게 되었다.(이스트만, p. 111) 

결과적으로 19세기 중국사회는 동시대 전세계에서 가장 사회적 이동성이 활발한 사회로 변화하였다.(엘빈 p. 260)

 

 

 

지방의 권력 성격이 변화했다. 17세기까지 농촌에 거주하는 대지주들은 향촌의 질서유지, 징세, 중소규모 수리사업의 감독과 같은 임무를 맡은 지방의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나 대주주가 더 이상 지방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대지주들이 맡은 역할을 대신한 것이 향신(지방신사)들이었다. 현령이 임명한 지방관청의 서기와 保 및 長이 향촌질서유지의 임무를 인계받았고 신사는 조세징수 담당자, 지방사업 관리자로 전문화되었다.

(엘빈 p.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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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81년 강희제는 안휘선 순무에서 ‘금후로는 지주들이 토지를 매매할 때 전호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지주는 전호를 토지에 딸려서 팔거나 노역을 강요할 수 없다’는 상주문을 재가하였다. 옹정제는 18세기 초 세습적 노복을 방면함으로써 해방사업을 종결지었다.

2) 엘빈은 p. 259에서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지주가 노복을 전호로 전환시키는 것이 유리했을 것임을 시사하는 간접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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