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괴베클리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 학자들은 끌로 반쯤 깎다가 만 무게 50톤의 기둥을 발견했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3nQ42dStD5sS39B87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1i6YBB2vahjY91w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경의 잠금 효과 그리고 악순환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 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JxZwHKhKHhxQoy67

농업혁명은 해당 지역의 모든 무리의 동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동이나 중미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경이 급속한 인구성장의 조건을 만들어준 덕분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들판과 목초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끝난 것이었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dzFDhaF8beg1T3i5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업혁명은 사기다

온갖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 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지난 2천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식물을 작물화하거나 동물을 가축화한 사례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7BgKar9E9QnR52y8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 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곡류를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조직에 해롭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었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cDMpccFaRqgo5n66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xGawJ52WKngPaPVA6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Tb86pkgjkUZiG8CE9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 <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BAvdMhhUnHGXxwU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생대 중에서도 지금으로부터 260만~1만 2,000여 년 전의 시기를 플라이스토세라 부른다. 이때는 대체로 지구 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5~10도가량 낮았고, 빙하기가 이어졌다. 특히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1만 8,000여 년 전에는 지구 전체 지표의 35퍼센트가 완전히 빙하에 덮여 있었다. -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이동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JCqsfnfSubhtWTmw7

우리에게 익숙한 기후와 자연환경은 홀로세라 불리는 1만 2,000여 년 전에야 비로소 형성되었다. -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이동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LyyqoGq3Nu9792Gr8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2만~9만여 년 전에 드디어 남아프리카를 벗어났다. 이 무렵에 접어들어 지구 자전축이 바뀌면서 사하라사막에는 습기를 가득 품은 계절풍이 불었다. 때마침 지구 기온도 계속해서 낮아졌다. 그 덕분에 메마른 사막에는 비가 자주 내렸고, 기온이 낮아지니 수분의 증발량도 줄었다. 사하라사막은 강물이 흐르고 동물이 뛰노는 초원으로 바뀌었다. -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이동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DsHJZVf4VadVf6X8

수만 년에 걸친 이주 끝에 인류가 분포하는 영역은 아라비아반도가 있는 서남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주 행렬은 7만~6만여 년 전에 일어난 기후변화 때문에 잠시 멈추게 되었다. 빙하기로 인한 기후변화가 사하라 지역을 또다시 사막으로 만들면서 사하라 북쪽으로 이주한 현생인류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이동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LbLWr4ycvNyKYU3j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노의 일


중앙 맨스에 부속되어 코트에 사는 농노예가 땅을 경작하지만, 그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영지에 사는 다른 땅의 소작농들이 해 주어야 한다.
영주의 맨스 옆에는 다수의 소규모 하급 맨스들이 있다. 이 맨스들은 서로 다른 신분의 남녀들이 소작하는데, 반드시 영주 맨스에서 부역을 해야만 한다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HRZtmw6brn4cqRW8

가장 중요한 사람은 콜로니(coloni : colonus의 복수형)로서, 법률상 자유인이지만 토지에 매여 있는 신분이다. 그래서 소작하는 땅을 떠나지 못하며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면 함께 팔려갔다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giTNRjncBbAmdhH9

농부들은 이런 시설과 땅을 제공받는 대신, 일주일에 약 세 번 정도 영주의 맨스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YHMs4SQ8Te6gT3N9

하나는 들판에 나가서 하는 노동이었다. 농노는 해마다 영주의 땅에 가서 일정한 양의 농사일을 해야 했다. 다른 하나는 강제 노동이다. 이는 할당량이 정해지지 않은 노동으로, 관리인은 매주 노동이 필요할 때마다 농노에게 요구할 수 있다.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7G2xk9YWYSrfJK17

일정한 소작료도 내야 했다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yN7B84YnmxBviVM7

수도원 관할의 숲에서 땔나무를 주워올 때는 대가로 영주관에 장작 한 짐을, 농가의 돼지들을 숲에 방목하는 대가로 여러 호그스헤드(약 50갤런)의 와인을, 들판에 양들을 방목하는 대가로 3년마다 양 한 마리를 바쳐야 했다. 그리고 1인당 4펜스의 인두세를 내야 했다.
이런 특별 세금 외에 해마다 닭 세 마리, 달걀 15개, 집 수리에 들어가는 다수의 널빤지를 내놓아야 했다. 때때로 돼지 두 마리를 바치거나, 와인, 꿀, 왁스, 비누, 기름 등을 내놓아야 했다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rv4nL8CcWXhpoZyD8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교회 덕분에 보도는 일주일에 한 번씩 휴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교회는 신앙심이 깊은 황제를 설득하여 일요일과 성인 축일에는 농노의 일이나 기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포고를 반포하게 했다. 827년 샤를마뉴의 아들은 이 포고를 다시 내렸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짐은 교회의 율법에 따라 또 예전에 포고를 내린 선제의 명령에 따라, 일요일에는 농노의 일을 하지 말도록 포고하노라. -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yGHs6X3F8at9d6Z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