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과 화승총 부대
- 화승총의 한계
- 장창의 역할
- 기마부대의 부족


초기에 등장한 화승총은 사거리가 100~200야드에 달하였지만,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발사속도가 3분에 2발 정도로 기존의 장궁 및 석궁에 비해 느렸고, 불심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우천 시에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이외에도 연기, 냄새, 그리고 불씨 때문에 적군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eCdbSrZQ2vJfyUD6

스페인은 기후가 건조하고 토양이 척박한 탓에 기사용 말을 사육하기가 부적합하여 상대적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기사 계급의 발전이 미약하였다. 그 덕분에 프랑스와는 달리 보병을 천시하는 전통이 약하여 귀족들도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XgfgdYfivsXhgJxE8


16세기에 걸쳐서 스페인군의 우위를 보장해 준 테르쇼는 기본적으로 장창과 화승총의 혼합부대로서 단병기와 장병기의 혼합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화승총이 도입된 이후에도 장창은 소총병들이 재장전하는 동안에 적 기마병의 돌격을 막는 역할을 하였기에 장기간 그 효용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격발장치의 발달로 개인화기의 발사속도가 빨라진 이후에야 장창은 전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2SvD7FizX9puFE6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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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대 리처드

1192년의 야파 전투를 끝으로 드디어 살라딘과 리처드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내용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소유하되 기독교도들의 성지순례를 보장한다는 것, 지금까지 3차 십자군이 정복한 영토를 인정하며 양측의 포로를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리처드는 훗날 다시 돌아와 반드시 예루살렘을 회복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살라딘은 만일 성지를 잃는다면 그 상대가 반드시 리처드이길 바란다고 멋지게 응수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후 살 - <지도로 읽는다 세계사를 바꾼 전쟁의 신>, 김정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ELQ85SYsqht2MDi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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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과 카를 대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은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이다. 그 후 전개된 유럽의 대략적인 역사는 동쪽에서 로마 제국의 법통을 이은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는 사이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는 양상이었다. 서유럽인들은 잇따른 내홍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지자 차츰 번영과 질서가 있었던 로마 제국을 그리워했다.
8세기 후반 그들의 염원대로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며 현재 서유럽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였다. 샤를마뉴(Charlemagne)는 프랑스어 이름이며, 영어 이름은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독일어 이름은 카를 대제(Karl der Große), 라틴어 이름으로는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로 부르기도 한다. - <지도로 읽는다 세계사를 바꾼 전쟁의 신>, 김정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W6j4J9NaCo6NRRM7

다만 봉건제에는 장점만큼이나 커다란 단점이 두 가지 있었다. 우선 왕은 제후들에게 1년에 통상 40일 정도의 군역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하고 체계적인 전술을 익힐 수 없었다. 더구나 엘리트 의식이 강한 기사들이 보병과 제병합동전술諸兵合同戰術을 구사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 큰 문제점은 쌍무적雙務的 계약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봉건제하에서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국왕이 있을 때 비로소 결집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군주가 유약하거나 국왕이 외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독자적 군사력을 지닌 제후들이 제멋대로 난립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봉건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과 신성로마 제국이 유럽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각각 샤를마뉴와 오토 대제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 <세계사를 바꾼 전쟁의 신>, 김정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2939

프라하와 카를4세

독일어: Karl IV. (카를 4세)
체코어: Karel IV. (카렐 4세)
이탈리아어: Carlo IV (카를로 4세)
라틴어: Carolus IV (카롤루스 4세)

나무위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 왕국의 왕. 체코어로는 카렐 4세로 부른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는 달리 다소 이색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했던 황제.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다.

카를 4세는 부계 혈통으로 체코인[2]이 아니기 때문에 혈통상 완전한 체코인으로 보기에는 애매할 수 있지만, 어쨌든 본인이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통치했고, 스스로 보헤미아에 애정을 갖고 체코 문화에 동화된 인물이었기에 체코인으로 보는데 큰 무리는 없는 편이다.

오늘날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주로서 체코인에게 매우 높이 평가받는다. 오늘날 체코의 아버지, 체코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며 체코의 100코루나 지폐에도 들어가 있다. 2012년 체코인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체코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반면 보헤미아를 제외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그의 치세는 긍정적이진 않았는데, 그가 1356년 발표한 금인칙서로 인해 선제후들이 사실상 독립한 군주와 같은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황권이 약화되어 명목상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인보다 체코인들에게 더 좋은 평을 듣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셈이다.[3]

알함브라와 카를5세

나무위키
이사벨라 1세가 인근에 신도시이자 그라나다 포위망의 완성인 산타페를 건설하고 결국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기독교 세력은 이 궁전도 접수했다. 이교도 상징이 빼곡한 공간이었음에도, 스페인 국왕이나 귀족들은 이 곳을 궁궐로 쓰길 원했다. 이사벨라 1세의 손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세)는 이 궁전에서 거주하기 위해 새로운 카를로스 5세 궁전을 알함브라 한가운데에 지었다. 그렇지만 양식이 이질적이었고 오랜기간 완성되지도 못했다. 그는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이교도 상징을 지우기 위해[10] 궁궐 일부분인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하고, 성당에 딸린 수도원도 짓고, 궁궐의 일부도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이전에 있던 아름다운 여러 건물들과 장식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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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 보편화, 사서동례

예학이 발달하면서 사서동례士庶同禮라 하여 서민들도 선비들과 같은 예법을 따르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평민들조차 4대 봉사, 곧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를 제사 지냈다. 심지어 선비들의 예법을 왕실에 적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법은 본래 차별의 상징이었으나, 그것이 누그러져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게 되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gn63cZeycUBGrD7A

17세기 조선 사회가 예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선택한 것은 그들 나름의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 세기 전만 해도 형이상학이 선비들의 총아였으나 그것으로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구현할 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때문에 선비들은 새로운 희망을 예학에서 찾고자 했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예학이 크게 발달했다. 그의 제자들과 손제자들이 대대로 예학에 종사함으로써 17세기 조선의 예학적 이해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cYGsJ3e5BUdh1Sy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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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로 폐어와 연어와 잉어 등등을 ‘어류’라는 하나의 분류군에 모아 넣고 싶다면, 그 분류군에 그들과 조상을 공유하는 모든 후손도 함께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베시도 들어가고 오리어리 부인도 들어가며, 지구상의 모든 소도 들어간다.
소만 포함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어류’라 불리는 이 분류군을 유지하고 싶다면, 거기에 모든 포유동물도, 심지어 인간도 포함시켜야 할 터이다. -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 정지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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