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군사적 우위
- 선형대형 전술
- 섬광격발법

구스타푸스 아돌푸스의 뒤를 이어서 유럽에서 군사개혁을 선도한 인물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재위 1740~1786)였다. 그는 이른바 선형線形대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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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병들을 3열의 선형대형으로 정렬 배치하여 근거리에서 신속하게 일제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선형대형으로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요인은 개인화기의 개량과 그에 따른 보병전술의 발전이었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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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륜식 머스켓에 이어서 수석식 머스켓(flintlock musket)으로 알려진 발전된 개인화기가 등장하였다. 이는 격침擊針과 약실이 결합된 형태로, 방아쇠를 당기면 용수철의 작용으로 격침이 불심지 대신에 들어 있던 부싯돌을 때리면서 약실에 담겨 있는 화약에 불꽃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그 덕분에 불씨를 보존하느라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비가 심하게 내리지 않는 한 우천 시에도 전투 수행이 가능해졌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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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선을 사용하는 머스켓(matchlock)의 경우에 높은 불발률로 적 기마병의 돌격에 취약하였기에 밀집대형을 이룬 창병의 보호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섬광으로 화약을 점화시키는 새로운 격발법(flintlock)을 사용하는 머스켓의 개발로 장전속도가 향상되면서 이제 소총병은 창병의 엄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개인화기로 무장한 보병부대를 이용한 공격적 전투대형의 유지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 신형 군대를 지휘하여 프리드리히는 로이든 전투(1757)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할 수가 있었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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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격된 사고 : 원격적인 힘과 증여의 영/물신


길버트의 자석론은.......원격적인 힘을...영적인 힘을 다루는 마술이라는 이유로 배격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긍정하여 재판을 받은 갈릴레오도, 그 후 탄압을 피하면서 근대자연학의 방법을 확립한 데카르트도 원격적인 힘에 관해서는 마술적인 것이라며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원격적인 힘으로서의 중력을 인정하지 않고 무거운 물체의 낙하를 자연운동으로 간주했다"운동에 대하여』 1590). 또 데카르트는 행성의 운동이나 중력의 원인을 공간에 충만한 에테르의 압력차나 와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점에서 그들의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같았다. 그들이 자연학에 결정적인 패러다임 시프트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온 것은 코페르니쿠스보다 오히려 길버트와 같은 사고였다고 말해야한다. 그런데 그는 그저 배격되었을 뿐이다.

그 후 힘을 원격적인 작용으로 본 것은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687년)다. 그가 말하는 ‘만유인력‘도 커다란 논란과 비난을 불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나 그 일파는 뉴턴이 오컬트적인 힘을 도입했다고 비판했다. - P71

과학적 태도란 그저 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것이다. - P77

요컨대 영적 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꼭 과학적 인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영이 있든 없든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일단 인정하는 것에서 ‘과학적‘ 인식이 시작된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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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의 증여의 영 : 하우

따라서 선물이란 1)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2)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3) 받으면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물건 자체가 쌍방적 연결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연결은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 P98

이처럼 말할 때 그는 증여교환을 강제하고 있는 것을 물건에 부착된 영이라고 생각했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은 그것을 하우 hau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증여된 물건에 부착된 하우는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있다. 따라서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모스는 포틀래치에서 증여의 순환은 이처럼 물건에 부착된 영의힘에 의해 생긴다고 말한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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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성립의 지체
- 지속된 유동과 지체된 농경
- 정주와 교환의 동시발생
- 늦은 국가의 성립


사람은 쉽게 정주하지 않았으며 또 쉽게 농경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제임스 스콧은 농경의 배신 Against the Grain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처음으로 발견된 작물 재배와 정주 커뮤니티의 유적은 대체로 1만 2,000년 전의 것이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국가의유적은 기원전 3,300년 무렵의 것이다. 즉 작물재배가 시작되고 국가가 생길 때까지 8,000년 이상이나 걸렸다. 그것은 인류가 오래 정주를 했지만 본격적인 농경이나 목축으로 향하지 않고 수렵채집을 계속했다는 것, 그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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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철의 활용과 화포의 주도
- 화약을 견디는 선철의 화포
- 방어에서 공격으로
- 콘스탄티노플 함락


화약무기 발전에서 필수적인 또 다른 요소는 야금술의 진전이었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K97LuPMxkCmmorH6

기존의 청동 화포와 더불어 화력이 한층 향상된 선철제 주조 화포가 유럽의 전장에 배치되었다. 물론 화포의 탄환도 선철제 철환으로 교체되어 파괴력이 보다 향상되었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RyVSneo7ywiWHHPt7

화약무기의 사용으로 전술 및 교리가 공격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화포는 공성용 무기로 활용되어 성城에 의존하던 봉건시대의 전술을 깨뜨렸고, 기사 위주로 구성된 중세 기병대도 마찬가지로 개인화기의 발달과 더불어 쇠퇴하였다.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2YtyCCFghDUKXWQn7

화포의 위력 앞에 아무리 견고한 성곽도 무력화될 수 있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는 터키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었다. 당시에 콘스탄티노플은 3중 성벽으로 구축되어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 출신의 화포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초대형 화포-포신 길이가 8m에 석환의 무게만도 600kg에 달함-의 포격에 육중하던 도시의 성벽이 무너지게 되었 - <서양 무기의 역사>, 이내주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swBY2BMp4bWawpN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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