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의 대북 공급가격은 중국의 경우 그들의 세계시장 판매가격과 비교할 때 1980년 이전은 17~32%, 1986~1990년은 평균 58% 수준에 불과했다. 소련의 공급가격은 1986~1990년 국제시세 대비 평균 57% 수준이었다. 그러나 1991년 이후 양국 모두 원유를 국제시장가격으로 공급함으로써 공급단가는 1990~1991년 중국은 2.1배, 소련은 2.5배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결국 결제능력을 갖추지 못한 북한의 대소 원유수입은 1990년 44만 톤에서 1991년 4만 톤으로 급감했고, 1992년부터는 원유도입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 (같은 책, 189~190쪽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rbUfZQ2CbD7hyE677

김진환, 《북한위기론》, 선인 2010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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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극질서로의 재편을 위해 미국이 들고 나온 것은 전 지구적 개입global activism정책이었다. 이것은 유일 초강대국 미국 자신은 물론 여타 국가들의 정책과 행동 방향까지도 미국적 규범에 따르도록 바꾸어놓고자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서로의 정통성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냉전 게임의 룰이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에 의한 싸움으로 바뀌어 전개되기 시작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JeNcJzxUYZv4aE4v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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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결과 6개항으로 이뤄진 공동성명서가 6월 11일에 발표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북한은 3개월 전 선언한 NPT 탈퇴를 유보하기로 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17개월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유엔 헌장을 통해 간접적, 원론적으로만 표시되어 있던 관계를 당사자에게 확인받은 것이다. 17개월 전 너무나 싸늘하게 퇴짜맞았던 후속 회담이 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착하게만 굴 때는 주어지지 않던 기회가 NPT 탈퇴선언 한 방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다. 나쁜 행동이 상을 받는다는 이치는 미국이 북한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dPjQSLr9Zwe2E9J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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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표부에 가자 대표단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성명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나는 북한이 원하는 것은 북·미 공동성명으로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과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유엔 헌장 처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유엔 헌장 몇 구절만 바꾸면 그대로 성명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유엔 헌장에 서명한 나라로서, 또 북한의 유엔 가입을 찬성한 나라로서, 우리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Zff3nHEsg9GxWBY6

워싱턴의 국가안보회의에 전화를 걸어 통과 또는 승인 요청을 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빡거리는 초록색 글자들을 읽었다. 그 단어들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그런 말들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이라고 암시하다니 북한 사람들한테 완전히 넘어간 것 아닌가.”
친구와 나는 그들의 입을 막을 답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 말들이 실제로 유엔 헌장에 있는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에 무슨 새로운, 과격한, 유별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4qkoEMJX4Yu75Ys5

케네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노순옥 옮김, 중앙M&B 2000)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FvndoEHSHAhVY9J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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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후반 소련 해체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게 핵우산을 제공하지 못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에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물려받은 소련 핵무기의 통제가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소련 핵무기를 물려받은 여러 나라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배치했던 미국 핵무기를 철수할 필요가 있었고,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는 그 일환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SKmat5GcPnvGZLVA

1991년 하반기 중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해빙 현상의 배경에는 미국이 소련 핵무기의 통제를 위해 호전적 태도를 삼가야 했던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소련 해체에 따른 제반 문제가 정리되고 나자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뽐내는 데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1992년 10월 이후 미국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비롯해 북한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1년 사이의 상황 변화가 작용한 것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k1h4UGirTgvCzPi8


북한은 1992년 5월 초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미국이 제기함으로써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5개월 후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오면서 사태가 마구 악화되기 시작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yGpzvb3qwMCQLAz8

IAEA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이 예산도 제공하고 정보도 제공하면서 사찰을 엄격하게 하도록 몰아붙인 것이다. 걸프전 이전의 관행과 전혀 다른 엄격한 사찰 기준에 첫 번째로 걸려든 것이 바로 북한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3jzNgtdURdMT62fu5

1993년 NPT 탈퇴 당시에 북한의 핵기술이 핵무기 제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져왔다. 북한의 국제질서 진입 노력을 그 시점에서 미국이 도와줬다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어내며 핵무기를 만들어냈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PijSXq3TRAzUx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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