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과 유토피아 - 니체의 철학으로 비춰본 한국인, 한국 사회
장석주 지음 / 푸르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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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크로스 인문학 <동물원과 유토피아 - 장석주>

 

 

 

 

 

 

 

After Reading

 

 

 

  작가 장석주는 독서광이라 불릴만한 풍부한 지식과 시인이라 불릴만한 멋진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마흔의 서재>를 통해 그의 몇십년 묵은 책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역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글들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다면 니체는, 수없이 많이 불리우는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이며 역시 수없이 많이 인용되고 재탄생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장석주 작가는 40여년동안 되풀이하며 읽어온 니체의 책들 속에서 그의 사유를 발견하고, 비록 같은 시대가 아닐지라도 현재에도 통용되는 그의 철학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이면들을 관찰해보고자 했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차라투스트라..>를 읽어보지 못하였으나 이 책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낙타, 사자, 원숭이, 뱀, 독파리, 거머리 등의 동물들.. 그 동물들은 우리가 흔히 오락적으로 보는 동물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마치 인간의 부조리하고 부끄러운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하고도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장석주는 한국 사회가 동물원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내부에 위험과 불안이 비등점을 향해 치솟고, 도덕과 정의, 원칙과 규범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힘이 으르렁거리며 맞서는 정글'과도 같은 사회가 바로 그가 말하는 동물원 사회다. (장석주 작가 이외에도 인간의 동물에의 비유는 니체와 라작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 왔다.)

 

  작가는 책 속에서 니체에 의한 동물의 상징성에 대응되는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파악해나간다. 이를테면 반값등록금은 학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약해진 아버지의 권위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없이 자란 아이들이 남성성에서 부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중간쯤에 나오는 '이타주의'에 관한 단상은 우리가 동물보다 더 발달된 본성을 확인시켜줌으로서 보다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힌트를 주기도 한다.

 

  다소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 끝에 '한국인의 정서(진정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국인의 '한'과 고통, 가난, 전쟁, 빠른 성장과 같은 역경 속에서 견뎌낼 수 있었던 우리 고유의 힘은 문학 속에서, 노래 속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월드컵의 붉은 함성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삭막한 사회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한국인에게 내재되있다. 그 힘이 과잉되어 부정적으로 작용하느냐, 긍정적으로 작용하느냐의 길은 똑똑한 사유와 깨끗한 얼굴을 가진 미래의 우리 모습에 달려있다. 많은 것에 대한 불안과 부조리함, 시시각각 행해지는 부도덕적인 일들. 이런 동물원 사회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해서.

 

 

Underline

 

 

 

  - 사람은 모든 동물들을 다 합해놓은 것보다 더 동물적이다. 아울러 그 동물성을 도약대 삼아 더 높은 존재의 위상을 획득하는 게 사람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다른 동물보다 더 병들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틀림없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합쳐진 것보다 더 대담하고, 더 새로운 것들을 행하고, 더 과감하고, 더 운명에 도전해왔다. 그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실험기구인 인간은 최후의 지배권을 위해서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하는 자, 불만을 터뜨리는 자,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자이다.(니체, 선악의 저편)" 자기 자신을 실험 기구로 쓴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람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주인의 도덕을,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 대한 최후의 지배권을 찾기 위해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한다. 그 투쟁의 동력은 기꺼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제 운명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40p)

 

 

  - 왜 우리가 불안한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파도들은 더욱 난폭해지고 그에 따라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타이타닉'호에 함께 타고 있다. 자크 아탈리는 '타이타닉'이 '우리 사회'라고 말한다. 그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예측되지만, 예측의 수단만큼은 예측되지 않는 사회"다. 한국인들이 승선한 '한국호'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한다. 미래는 불확실한데, 그것은 우리 삶이 예측불가능한 위험들 속에 있다는 반증이다. 그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 우리의 삶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 마음에 불안을 키운다. (124p)

 

 

  - 목구멍을 물어뜯는 무거운 뱀을 물리친 젊은 양치기도 웃고, 차라투스트라도 웃는다. 웃는 자가 되려면 먼저 마음에 있는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려야 한다. 젊은 양치기는 그의 목구멍을 물고 몸에 매달렸던 묵직한 뱀의 대가리를 끊고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웃었다. 웃음은 하나의 출구다. 웃는 자는 억압과 불행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무거운 것 모두가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알파이자 오메가라면. 진정,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알파이자 오메가렷다! (니체, 일곱개의 봉인) 웃는 자는 더 바라지 않는다. 웃음이 바로 궁극의 그것이기에. (137p)

 

 

  - 말 속에도 침묵이 깃든다. 말들은 그 내부에 긴 침묵과 짧은 침묵을 갖고 있다.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소리만 듣지만, 깊이 경청하는 사람들은 말 속에 숨은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책은 타인의 말과 세계를, 저 멀리서부터 오는 의미들을 겸허하게 경청하려는 자의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집중하면 할수록 주변 소음을 잠재우는 힘은 강력해진다. 소음이 잦아들고 침묵의 오의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생략법의 글쓰기, 불명확한 재현, 단속적인 대화체,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말없음표(마르크 드 세메트, 침묵예찬)"등은 가장 흔한 침묵의 양태들이다. 말줄임표는 통사적 망설임, 판단유보의 기화다.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는 그 침묵들은 독자를 책 속으로 끌어들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읽히는 침묵. 그것은 음향적 현실에 겹쳐지는 하나의 부주제, 자아에 대한 성찰과 세계 인식의 장소다." (250p)

 

 

Add...

차라투스트라 책은 당분간 읽어볼 엄두가 안난다. 아마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할듯.

그러고 보면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끌어주고, 또 그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끌어주는 게, 참 독서의 묘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참 어려웠어 니체철학 ㅠㅠㅠㅠㅠㅠ 나중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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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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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간은 기억의 '정착제'가 아닌 '용해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After Reading 

 

 

  사람의 머리속에 새겨지는 기억들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장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의 경우엔,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다는 기분나쁜 기억들과 오래도록 머릿속에 지니고 싶은 행복한 기억이 거의 비슷한 저장기간을 갖는다. 그렇지만 정말 간혹가다가 그 기억들을 왜곡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과연 드물지 또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 생각하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쪽팔린 짓을 해놓고서 '아, 그정도는 아니었어. 정상적이었어. 보통 사람들도 그럴껄.'하는 경우 혹은 가족이든 친구이든 독한 말을 퍼붓고서 '내가 언제 그랬지.'하는 경우. 그리고 가끔 그렇게 비슷하게 행동하는 주변 사람을 볼 때, 참 사람의 마음이란 의도치않게 제일 간사하고 무서운거라고 느낀다. (나는 정말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와 약속시간에 늦을 때. 그때의 합리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니다. 사람들은 정말 많은 것을 예감하고 (흔히들 여자들의 감이나 촉이나..) 운좋게 그것을 맞추기는 하지만 예감이 정확하게 맞는 경우는 당연히 드물다. 어쩌다 그 우연이 맞춰진 것을 예감이 정확했다 하고 여긴다면, 인생은 그렇게 복잡한 미로같이 어려운게 아니라 퍼즐처럼 어떠한 사건들이 맞춰져 있는 그런 스릴없고 재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인 토니의 경우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 그 말이 정확한 예감이 된 것처럼 그렇게 인생에서 뒤통수를 맞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우연히 누군가의 큰 사건의 불씨를 (후에 돌이켜봤을때) 피운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는 예감하지 못했다. 멍청한 그는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

 

  이 책의 반전은 기대했던 것보다 충격적이어서 그리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다가와서 나는 반전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잠깐 멍해졌다. 책 속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그 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단서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갈팡질팡하고 답답하게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기억의 정착제가 아닌, 용해제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 속에서 이기적이고, 주인공인 토니의 기억도 모질고 모질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지금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지금, 인생의 끝자락에 갈 때 세상과 나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또다시 무섭고 겁나기 시작했다.

 

 


 Underline  

 

 

   -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12p)

 

  - "(...)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 단 한장의 문서, '엄마, 미안해'라고 쓴 한 장의 유서가 있습니다. 최소한 브라운이 한 말은 그렇습니다. 그 유서가 아직도 존재하나요? 폐기되었나요? 누구나 아는 동기나 이유를 넘어서, 롭슨에게 다른 동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그의 마음 상태는 어땠을까요? 뱃속의 아이가 그의 자식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롭슨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여자친구도 사라져버리고, 어쨌거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에, 어느 누가 롭슨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까요? 문제점이 보이시나요, 선생님?" (35p)

 

  -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도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2p)

 

  -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183p)

 

  - 나 자신이 아둔하고 굴욕적으로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 불과 이삼일 전에 나 혼자 명명했던 대로- '인간의 마음에 영구히 존재하는 기대심리' 때문이었다. 또한 그 이전에, '타인의 경멸을 극복한다는 것의 묘미' 때문이기도 했다. 평소 자만심 때문에 큰코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해온 편인데, 사실은 스스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혼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유증을 통해 내 소유물이 된 걸 찾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 변이를 거쳐서 뭔가 더 거대한 것, 뭔가 평생에 달하는 내 삶과 시간과 기억, 그리고 욕망과 연관된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나는 - 나라는 사람의 어떤 층위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를 역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223p)

 


 Add...  

 

 

  충격적인 반전이라 끝에가서 멍했다. 부커상 수상작이 너무 짧지 않냐는 사람들의 말에

작가는 '독자들은 200페이지나 되는 이 책을 끝에가서 다시한번 또 읽게 될 거라고' 했다.

 역시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도 다시 읽으면 더욱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했던 것보다 책이 조금 어려워서 빨간책방의 힘을 빌렸다. 이동진, 김중혁 두 임자님의 해설은 정말 최고다 :)

 

 

* 네이버 오늘의 탑에 소개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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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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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아트리스와 버질 이야기 <20세기의 셔츠 - 얀 마텔>


 

 


 After Reading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의 어원은 원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죽이는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당시 같은 인간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목숨을 끊어버리는 행위가 인간에게 해서는 안될 정도로 잔혹했기에 '동물 학살'이라는 이 단어는 현대에 와서 유태인 대학살을 칭하는 말로 변화하였다. 독문학을 공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던 전쟁과 홀로코스트. 그래서 예전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20세기 셔츠>(원제 :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여느 홀로코스트 문학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을 것 같아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셔츠는 어디에나 있다'라는 표지의 카피가 눈길을 끌었다.

 

  일단, 단순히 우화만으로 되어있을 줄 알았던 이야기는 내 예상과 달랐다. 효과적인 홀로코스트 문학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 헨리가 베아트리스와 버질(당나귀와 원숭이)을 박제한 박제사를 만나게 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여러가지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는 이 박제사와 희곡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간다. 소설은 역시 민감한 소재와 만만치 않은 메세지를 담고 있는 만큼 읽는데 녹록지 않다. 소설 속 희곡은 어떠한 사건없이 거의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 그리고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희곡과 희곡을 만든 박제사의 말에서 많은 부분, 상징적인 것들이 드러난다. 폭력과 고문, 그리고 그것을 당한 사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끝에서 나온 '호러스'라는 단어,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국가, 줄무늬 셔츠, 잘린 꼬리, 미친듯이 학살하는 소년... 이런 것들을 보고 실제로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현실을 나는 떠올릴 수 있었지만 작가만의 표현과 상징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아 난감했다. (그것은 너무 작가만의 것이었던 듯..) 소설의 대부분의 내용보다 오히려 나는 마지막에 따로 묶여있던 '구스타프의 게임'이라는 질문들이 더욱더 와닿았는데 이것은 역시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정답이 없는 질문들, 누구나 해석하기 나름의 질문들을 모아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군인이 당신들을 한꺼번에 '진료소'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곳은 진료소가 아니라 군인의 표현을 빌리면 '알약 하나로 병을 고치는'웅덩이다. 달리 말하면, 뒤통수에 박히는 총알 하나로 이 세상을 하직하는 웅덩이다. (...) 손녀딸이 당신을 쳐다보며 질문을 한다. 뭐라고 물었겠는가?'와 같은 것들.

 

 너무나 어려워서 아직도 이해가 되지 못하는 <20세기의 셔츠>. 일단 지금까지 느낀걸로 보자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적 사실, 책 속에서의 '홀로코스트'이던 어떠한 문제이던간에 이것들은 이미 언어로만 남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언어는 이미 사실과 함께 주관적으로 쓰여졌다는 것,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일종의 안내자(예를 들면 베아트리스와 버질 희곡처럼)를 바탕으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Underline

 

 

  - 동물들은 부드럽고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쥘리앵을 바라보며, 그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나 쥘리앵은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거나 단도로 찌르며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았다.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살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시간이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모든 것이 꿈에서처럼 쉽게 일어나는 환상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사냥꾼이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녀석들은 한데모여 입김으로 서로 몸을 녹여주고 있었다. 입김이 안개에 감싸인 구름처럼 보였다. 멋진 피의 살육을 머릿속에 그리자 그는 너무 좋아 한참 동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쥘리앵은 말에서 내려 소매를 걷어 올리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 (59p)

 

  - 내 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네가 너라는 것을 절대 잊지 못하게 할 것처럼, 너랑 똑같은 모습으로 항상 너에게 달라붙어 있는 그 어둑한 부분을 떨쳐낼 수 있냐고? 결코 떨쳐낼 수 없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144p)

 

  - "셔츠는 어느 나라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셔츠에는 보편적인 감응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셔츠를 입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셔츠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맞습니다. 외투, 셔츠 바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독일 폴란드, 헝가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149p)

 

  - 어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죽어갈 때 고통의 붉은 천을 움켜잡고 바싹 끌어당겨 찢으며, 그때까지 어떤 것도 붉은 천만큼 그들의 감정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던 것은 없었고, '나는 죽어간다! 나는 죽어간다!'라는 강박감을 안겨주며 그들의 지적 능력까지 마비시킨 것도 없었으므로 붉은 천은 그들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되고, 그들이 존재하는 방의 벽과 천장 모두에 붉은 천이 둘러지고, 건물 밖에서 죽어갈 때는 둥근 하늘 전체가 붉은 천으로 뒤덮이지만, 고통의 붉은 천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와 마침내는 옷처럼 그들의 몸을 휘감지만 좀 더 갑갑할 뿐이고, 다음에는 붕대처럼 그들의 몸은 휘감지만 좀 더 갑갑할 뿐이고, 이리하여 결국 붉은 천이 그들을 질식시키므로 그들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붉은 천은 자석이 끌어당긴 것처럼 사라지며 그들의 몸만이 남는데,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존재여서 붉은 천을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삶이 승리를 거두고 계속될 거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붉은 천이 여러분의 눈앞에서 펄럭이며 여러분에게도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닫는 날, 여러분은 깜짝 놀라 어떻게 저런 걸 전에는 보지 못했을까, 어떻게 저런 걸 무시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겠지만 여러분의 그런 생각은 금세 끝나고 말텐데, 왜냐하면 그때쯤이면 여러분은 이미 뒤로 나자빠져 고통의 붉은 천과 씨름하며, 그 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을 테니까요. (226p)

 

 

Add...  

 

후.. 요즘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어려웠던 소설이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잘 이해는 안되는데.

그런데 표지를 보면 자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영화가 떠올라서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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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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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절보다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 <표류도 - 박경리> 

 

 

 

 

 

  박경리 작가의 유달리 힘들었던 인생은 그녀의 문학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숙했던 그녀 개인의 철학적 사상 때문인지 그 당시 지금과는 꽤나 다른 생활상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굉장히 세련된 작품을 써냈다. 또한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작품 속 여자 주인공들에 투영되어 여러번 다뤄지게 되었고, 그 고달픈 삶 속에서 작가가 갈망했던 낭만적인 사랑의 모습이 <표류도>에서 나타난다.

 

<표류도>는 작가의 초기작이자 불륜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소위 막장 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불륜소설과 비슷한 내용인가 싶다면, 전혀 아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가정을 책임지며 일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였다. 그녀는 불륜이란 것에 통상적인 윤리의식 너머에 존재하며 자신의 사랑에 대해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고 말하는, 죄의식이 부재한 당찬 여자다. 또한 계급격차로 인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기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작가는 이러한 여성을 통해 불륜의 사랑을, 불륜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사랑의 의미를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이야기를 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 너머에 있다.

 

 주인공인 현회가 운영하는 다방 마돈나. 그곳에 사람들이 걸어 들어온다. 피로한 사람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 불순한 목적의 사람들, 그리고 살아갈 수단을 찾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표류도>는 사랑에 대한 것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에의 문제, 고독, 전쟁의 아픔, 여자로서의 삶, 어머니와 같은 또다른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소설을 그려냈다. '표류도'라는 제목의 의미는 소설 후반, 사람은 모두 외로운 섬이며 각자 외롭게 떠내려가는 섬이라며 등장한다. 외롭게 떠내려가는 섬, 바로 인간. 결국 '인간의 숙명적인 슬픈 고독'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그것에 의하면 그들의 불륜적인 사랑은 정처없이 푸른 바다를 헤메는 고독한 두 섬의 만남일 뿐이다. 고독한 두 섬의 만남인 '사랑'은 외로움의 도피이며, 그리고 그 도피 또한 외로움을 백퍼센트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숙명적인 외로움, 쓸쓸하다.

 

 

 

 

 

  -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몸서리쳐지게 두려운 것이다. 나는 그를 생각할 적마다 죽음을 연상한다. 그를 생각하지 않을 때도 번번이 죽음의 문제에 부닥친다.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그런 생각은 내 가슴에 절벽을 준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병의 징조이며 음악에 눈물흘린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쓸 값싼 감상의 찌꺼기, 그리고 연애를 생각한다는 것은 굴종이다. 통틀어 슬프다는 것은 청승맞고 궁상스럼고 - 확실히 청승맞고 궁상스럽다. 거대한 차량 밑에 깔려 죽어야 할 생각들이다. (11p)

 

  - 어둠 속에 솟아 있는 건물과 가로수, 쭉 뻗어 있는 길과 전선 줄과 전차 선로, 이런 것이 멀리 가까이서 비치는 불빛과 그 불빛들의 여광속에 잠겨 있다. 그것들은 암색과 원색을 짓눌러서 그려낸 신비로운 그림들처럼 한 폭 한 폭 전개되고 사라진다. 도시가 갖는 밤의 음률, 바람 소리, 차량들이 일으키는 금속성까지도 그림들 속의 여운처럼 안개처럼 깔리며 흐르고 있다. 나는 지금 환상에 싸여 밤을 밟고 가는 것이며 이 환상의 연속은 드디어 상현 씨에게 이를 것이다. 신문지가 발길에 감겨든다. 낙엽처럼 감겨든다. (27p)

 

 - 여행을 결행했다.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자 우리는 불안과 초조를 잊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참 떠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룻밤을 기약하고 떠나온 여행이다. 그러나 이 여행이 우리의 숨이 지는 그날까지 연장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서글픈 집착이 아닐 수 없다. 가는 곳도 Y마을이 아닌 더 깊은 산속이기를, 그보다 숫제 인간들이 서식하지 않는 밀림이나 동굴 속 같은, 흔히 표류기에 씌어진 고절된 곳이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황한 집착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육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욕망과 집착은 무한정하게 커갈 뿐이다. (156p)

 

 - 누구나 다 몇만 년을 살지 못합니다. 속된 말이지만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죽어갈 수밖에 없지요.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각각 떨어져서 떠내려가는 외로운 섬들입니다. 어렵게 생각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연이란 혈육이건 혹은 남이건 섬과 섬 사이의 거리, 그러한 원근에 지나지 못합니다. 내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외롭게 떠내려가야 하는 섬입니다. (272p)

 

 

 

  박경리의 소설들이 좋긴 하지만 가슴이 무거워져서,

이젠 좀 다른 걸로 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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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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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고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욕먹는 이런 시대에 고독은 사치와도 같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은연중에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그러고보면 이렇게 바쁘고 힘든 피곤한 사회가 우리에게 소중한 고독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혼자서 그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듯한 캄캄하고 조용한 새벽이 너무 좋습니다. 혼자서 책읽는 그 새벽의 거실이 저한테는 '저만의 고독의 방'이 된 것 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뭘 쓰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무지 힘들긴 해도 그 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깝거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침시간은 헤롱헤롱... 이미 시간을 갉아먹지만 전 새벽이 좋아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노재희 작가는 그의 첫 단편소설집에서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고독'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작가를 꿈꾸는 샐러리맨, 아파트에서 사는 두 노인, 반복되는 코스를 매일 운전하는 버스 기사, 책 읽기를 거부하는 한 남자. 그들의 삶을 보면 안쓰럽기도, 또 공감이 가기도 해서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판타지는 고독 속으로 달아나는 일, 현재의 고단함을 떨치고 자신만의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일일 거에요. 신기하게도 작가의 단편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아버지, 어머니 또는 그 역할을 하게 된 아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바람을 미룬 채 지겹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을 아버지, 어머니들을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집니다.

 

  외로워보이기만 하는 '고독'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노재희 작가는 처음 만난 분인데 첫 소설집 느낌이 참 괜찮은 것 같아요.

  

 

 

 

 

  - 문득, 어릴 때 학교 선생님들이 주던 벌이, 때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팔을 들고 있게 하는 것뿐인데, 왜 벌이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팔은 본래 아래로 늘어뜨리는 게 자연스러운데 중력을 거스르고 위를 향해 들고 있자니 힘이 드는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야말로 벌인 것이다. 벌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기가 굉장히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마다 괴로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며 괜히 힘만 드는 인생인 것이었다. 이것은 진짜 인생이 아닌 것이었다. (15p, 고독의 발명 中)

 

  -  "이런 얘기 아니? 이 우주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자기를 막아서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그 속으로 흡수되거나 혹은 그대로 소멸되는 대신 방향을 바꾼다는 거야. 그럼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꾸느냐, 자신의 안쪽으로 바꾸는 거지. 나선형을 그리면서 자신의 안쪽으로 점점 말고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하다보면 나선의 중심이 탄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긴 나선의 중심이 어떤지 아니?" "......."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고요하단다, 아주." "......." "태풍의 눈을 생각해봐라. 같은 이치지. 그래서 그 중심을 고요한 눈이라고 한대." "고요한 눈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요한 눈. 나는 그 고요한 눈이 자기 안에 똬리를 튼 우주라고 생각한다. 멋지지 않니?" (135p,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中)

 

  - 해진이 말하길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안방의 누추한 이부자리나 병원의 소독된 시트같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바로 시간 속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시간에서 지워진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시간이라는 좌표에서 지워졌다.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공유한 시간이 별로 없으니 내 마음속 시간의 좌표에는 '부친 사망'이라는 간단한 흔적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드디어 내 인생의 반이 꺾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한 기분인데, 벌써 반이 꺾어졌다니. (169p, 시간의 속 中)

 

 - 자석은 영혼을 가지고 있대. 언젠가 어머니가 말했다 영혼은 뭔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인데, 자석은 철을 움직이니까.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잘못을 딱 잡아떼고 있던 참이었다. 접촉하지 않고도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작용하는 힘에 대해, 이를 테면 자기력 같은 것에 대해 말한 후 어머니는 본론을 꺼냈다. 내가 널 때리려면 팔을 뻗어서 너에게 닿는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잖아? 그치만 나는 너를 때리지 않고도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할 수 있다. 네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 우리에겐 영혼이 있으니까. (291p,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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