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와 이발사
에트가 힐젠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역사 속의 죄와 벌, 그 사이의 해결점에 대하여  <나치와 이발사 - 에트가 힐젠라트>

 

 

 

 After Reading

 

 

 

 

   "나는,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것을 다시 돌려줄 능력이 없어, 그럴 수가 없어."

 

  <나치와 이발사>는 소재부터 파격적이고, 전개 또한 남다른 소설이다. 순수 아리아인 혈통이지만 유대인의 얼굴을 가진 '막스 슐츠'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강간과 사랑없는 가정에서 자라왔고,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나치의 SS단원으로 대학살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뒤이어 전쟁이 끝나자, 학살당한 자들의 수많은 금니를 채취하여 생활의 기반을 다지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자신이 살해한 사람인 유대인 '이치히'로 신분을 세탁하게 된다. 전쟁 당시 가해자였던 '막스'는 전쟁 후 교묘하게 피해자의 인생을 살며 정체성 또한 유대인으로 탈바꿈하기까지 한다. 너무나 가증스럽고 비겁한 주인공의 행보 (그러나 주인공은 마치 실없는 농담하듯 툭툭 건조하게 말한다), 과연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 인간일까.

 

  흥미로운 점이 몇가지 있다. 순수 아리아족 혈통의 주인공은 우스꽝스럽게도 유대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대인 친구는 우월한 파란 눈의 독일인 모습을 가졌다는 것, 주인공이 유대인을 미워하는 마음 없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 그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은 피라미였을 뿐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 신분 세탁을 한 후 마치 유대인의 영웅처럼 행동한다는 것, 시대에 이끌려 그리고 과거의 아픔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점 등이다. 전적으로 가해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 책은 국제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도, 정작 독일에서는 출간할 곳이 없어, 고생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거침없이 풍자하고 까발렸고, 특유의 블랙유머까지 첨가한 이 소설은 독일인들이 냉큼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간하게 된 후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나치의 대학살, 일본의 위안부와 마루타 등 역사 속 전쟁의 아픔을, 국가가 또 하나의 국가에게 행한 '죄'를 어떻게 해야 지울 수 있을까. 시대가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만든 죄이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 해버려도 된다고? 아니면 전범의 피해자인 유대인을 양심이란 이름 하에 옹호하고 지나치게 감싸고 그들 곁에 서면 용서가 가능하다고? 죄를 행한, 방관한 자들을 모두 사형대에 올려버린다고? 그렇다고 피해자의 눈물이 닦여질까.

 

  결국 작가가 말하는 것은 '죄'를 기억하는 것,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 역사 속 위안부의 아픔을 겪은 할머니들이 외치고 있는 것은 그 죄에 걸맞는 보상일까? 그것보다도 해답은, 진심어린 인정과 반성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조금 파격적이고 날카롭지만 <나치와 이발사>같은 문학은 '역사를 잊지 말자'는 듯 보이는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으며, 그것을 세상에 각인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아닐런지.

 

 

 

 Underline

 

 

 

 

 

  - 나로 말하자면, 언제나 이발사라는 일을 흥미로운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 인간의 머리통만큼 귀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귀한 머리통을 모양내고, 다듬고,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발사 일을 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긴 하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 머리통을 으깨 버린다면, 그것도 참 재미가 있긴 하겠구나...... 하는, 너무나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닌가. 그것도 두 손만 이용해서. 이 손쉬운 가능성을 실감하고 나면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이다.......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여기 누군가의 머리통이 있다! 그 머리통이 완전히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47p)

 

 

  - 도대체 어디가 몽둥이의 시작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끝은 어디인가? 끝없는 이 연쇄 고리의 어디쯤에 신이 있는 걸까? 신이 그 안에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그것들 위에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면 내가 다음 순서로 몽둥이질을 퍼부어야 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슬라비츠키의 몽둥이를 굳이 빼앗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몽둥이를 하나 구입했다. 더 좋은 놈으로...... 지금 낡아서 볼품없는 슬라비츠키의 몽둥이가 새것이었을 때보다 더욱 훌륭한 놈으로. 색깔도 노란색이나 검은 색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색을 골랐다. 나는 한 명 이상의 희생자를 원했다. 한 명뿐인 희생자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내가 받은 상처 하나당 한 명의 희생자를 원했다. (...) 오늘날 나는 그때 왜 우리 모두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가래 덩어리가 허공을 멀찍이 날아가 무고한 자들을 맞추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당시 우리는 특별히 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숨통이 좀 트이라고 답답한 이물질을 뱉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76p)

 

 

  - 그 시절 나는 피라미에 불과했다. 비록 악마의 축제에 참여하기로 서약하고 군화와 유니폼으로 무장한 채 역사의 수레바퀴에 온 몸으로 올라타기는 했으나, 내 <무게>는 너무 미약하여 수레바퀴를 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피라미 한 마리가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피라미가 걸친 유니폼은 또 무슨 의미가 있고? 피라미 한 마리가 군화를 신어 봤자지. 하지만 그런 피라미가 수백만 마리라면...... 유니폼을 걸친 피라미와 유니폼 없는 피라미까지 (...) 그 모든 불품없는 피라미들이 당시 함께 입을 모아 <예!>라고 답했으며 나를 포함해 모두들 한꺼번에 거대한 수레바퀴에 떼 지어 달려들었으니 바퀴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87p)

 

 

  - 나, 이치히 핀켈슈타인, 당시의 막스 슐츠는 단 한 번도 유대인을 미워해 본 적이 없어. 왜 내가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았을까? 그건 나도 잘 몰라. 단지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나 이치히 핀켈슈타인, 당시의 막스 슐츠는 결코 유대인을 미워한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러면 넌 궁금하겠지? 왜 내가 유대인을 죽였을까? 그건 나도 잘 몰라. 아마도 몽둥이 때문이 아닐까? 옛날 우리 집에는 노란 몽둥이와 검은 몽둥이가 있었잖아. 물론 색깔은 없는 다른 몽둥이도 있었고, 그리고 손들이 있었어. 그 몽둥이를 휘둘러 댔던 수많은 손들, 한번 휘둘러진 몽둥이는 예외 없이 내 엉덩이로 와서 부딪혔지...... 혹은, 그들이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엉덩이로...... 영혼에도 엉덩이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 영혼도 간혹은 엉덩이를 좀 맞아야 한다고! 아니 간혹이 아니라 자주! 사실은 아주 빈번하게! (299p)

 

 

  - 나무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가장 마지막 인간이다. 서열상으로 가장 마지막 인간. 모든 할례 받은 자들 중 가장 마지막. 그리고 할례 받지 않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나는 나무들에게 물었다. "내가 왜 가장 마지막 인간이란 말인가?" 나무들이 내게 대답했다. "마지막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인간!" 나무들에게 다시 물었다. "도대체 왜? 내가 뭐 남들보다 더 특별하게 쏘아 죽이고 특별나게 목매달고 특별나게 때려죽였단 말인가....... 그래서 마지막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이란 건가?" 나무들이 내게 대답했다. "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니까! 모두 부인하고 있으니까! 몰래 숨어 버렸으니까! 게다가 희생자들의 뒤에 숨었으니까......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뒤에!" (5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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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이름 '막스 슐츠'는 독일어로 max Schuld (최대 유죄)

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름에도, 작가의 관점이 드러나고 있는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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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책이다 -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들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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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생각의 통로가 넓어지는 시간 <밤은 책이다 - 이동진>

 

 

 

 

After Reading

 

 

  "책은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장 내밀하게 이어지는 통로이겠지요.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책들을 보다가 멈추어 고개를 드는 순간 제게로 변형된 채 틈입해 들어오던 그 깊은 밤의 상념들을 이제 당신에게 보냅니다."

 

  캄캄한 방에 전등 하나를 켜놓고 책을 읽는 밤은 조용하지만 시끄럽기도 한 시간입니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글들이 더욱 세밀하게 들어오기도 하고, 내 마음 속 가장 은밀한 생각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죠. 생각들이 넘쳐서 아무리 해도 졸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야행성이어서, 낮보다는 밤에 잠이 많이 없는 저에게도 '밤은 책입니다.' 밤에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에게는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능률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각, 다른 사람에겐 보여주기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운 글들을 쓰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제가 최근에 읽은 책들의 제목 중 가장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동진 기자, 아니 평론가님, 라디오 DJ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한 이 분에 대해서는 처음엔 영화를 좋아하는 언니를 통해서 처음 알았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가까운, 블로그라는 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시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 분이 쓴 리뷰는 짧지만, 그리고 심하게 화려한 수식어도 없지만 굉장히 정확한 글이여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위즈덤 하우스 활동을 통해서 빨간책방을 정기적으로 들으면서, 영화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가끔 읽고서도 이해가 안될정도로 모호한 책들이 있다면, 그것을 빨간책방에서 다루어줬을 때 얼마나 시원하고 다행인지 모릅니다. 책을 읽고, 빨책을 듣고, 이해하고, 내가 찾을 수 없었던 책 속의 무언가를 또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감사한 프로그램이죠.

 

  <밤은 책이다> 속의 글은, 책 하나하나로 따져보면 짧은 글들이지만, 대신 굉장히 많은 책들에 대한 저자의 내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항상 낭랑하다고 느꼈던 라디오 속 저자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듯 하기도 하고요. (알고보니 라디오에서 방송된 것들을 보완한 글이라고 하네요.) 스스로 책 쇼핑중독이라 부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책 보유량 중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책들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해결해주기도 합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직접 찍은 사진들도 좋네요.

 

  작가가 말하는 것들에 공감하고 행복해하면서, 오늘도 좋은 책들을 알아가며 위시리스트를 한가득 채웠답니다.

 

 

 

Underline

 

 

  - 제게 좋은 책이란 너무나 흥미로워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독파해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보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이 아닌 셈입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 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 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8p)

 

 

  - 행복이 지고지선의 가치로 알게 모르게 강요될 때, 행복 권하는 사회에서 종종 사람들은 자연스레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니라 행복이라는 표준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불행해하지요. (...) 어쩌면 행복은 확고한 의지로 추구해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실하게 시간 속을 걸어가는 자에게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일상의 보너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을 앞에 두고서 일직선으로 내내 좇아 치달리다 보면, 어느새 행복이라는 관념 자체에 쫓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할까요.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그게 강박이 되는 순간, 그건 그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81p)

 

 

  -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는 과거로 통하는 비밀스러운 문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건 점심 때 입에 넣은 음식 한 조각일 수도 있고, 오랜만에 지나가게 된 어느 골목길일 수도 있으며, 버스에서 내릴 때 훅 끼쳐왔던 어떤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추억을 잡아당기는 기억의 문고리들은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틈입합니다. 오래 함께한 연인들이 헤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두 사람이 긴 시간 속을 통과하면서 만들어놓은 문고리나 매듭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기되기 마련인 기억의 존재 형식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일 겁니다. 그렇게 기억은 무시로 우리를 급습하고, 일상의 사소한 접점에서 예기치 않게 격발당한 우리는 추억 속으로 침잠됩니다. 그렇기에 추억은 두렵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죠. (120p)

 

 

  - 책은 그 자신만의 우주를 펼쳐내며 독자를 끌어들이지만, 읽는 사람도 책에 구현된 세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만은 않습니다. 독자 역시 책의 세계를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감싸 안는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독자는 자신만의 분위기와 자신만의 리듬으로 책의 세계에 눈을 반짝이며 닻을 내리는 것이지요. 게다가 책을 읽을 때 인간은 오롯이 혼자이지만, 그 순간 그를 사로잡는 것은 누군가와의 교감입니다. 책이란 결국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장 내밀하게 이어지는 통로니까요. (152p)

 

  - 무엇보다 밤은 말합니다. 한낮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우리가 우리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밤입니다. 낮에는 수다스럽던 당신도 밤에는 기꺼이 듣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소리에는 밤의 거울에 문득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여는 당신 내면의 또다른 목소리도 있겠지요. (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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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팬심이 들어갔나요

사실, 팬까지는 아니지만 존경하는 분이긴 합니다.

그게 그건가요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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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오늘도 무사히 사계절 1318 문고 86
자비에 로랑 쁘띠 지음, 김주열 옮김 / 사계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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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무심코 되뇌게 되는 말 <제레미, 오늘도 무사히 - 자비에 로랑 쁘띠>

 

 

 

 

 

After Reading

 

 

 

  '내가 꿈꾸는 건 오직 한 가지, 이 모든 엿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

 

 청소년 소설이지만, 나름 무거운 주제가 스며든 이 책. 주인공인 제레미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았다. 군대에 가서 다리를 공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 잉여같은 일상을 탈피할 수 있을거라 여겼지만, 상황은 안좋게 흘러간다. 얼떨결에 일등 사수가 되고, 전쟁이 일어난 지역에 파견되는 제레미. 그는 신나는 음악을 함께 즐겼던 사랑하는 동생에게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메일로 털어놓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의 편지는 항상,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오늘도 무사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그 어린 제레미는 다짐하면서 쓴다. 동생 오스카는 메일을 통해 알게 된 전쟁 속 군대의 상황을 노래로 만들어나간다. 설레는 첫사랑과 함께. 제레미는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군대를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지, 되뇌고 또 되뇐다. 과연 그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

 

  첫사랑과 함께 설레는 나날들을 함께 보내고 진실을 알게 되는 동생 오스카, 전쟁 상황에서 동생과 주고받는 메일을 통해 위안을 받는 형 제레미.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주체적인 선택을 하면서, 오늘도 무사히, 성장해 나간다.

 

  전쟁의 상황은 픽션이 아닌, 작가가 직접 실제 체험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쓰여졌다. 청소년 소설이고, 글로써는 그 참혹함을 제대로 보여줄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이야기 속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오늘도 무사히' 라는 말을 심심할 때도 아닐 때도 중얼거려야 할 정도로, 다급하고 조심스러운 생활. 작가는 말한다. 그 군대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반역자'도 아니고, '비겁자'도 아닌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러나 휴전국가이며 병역이 '의무'인 이 나라에서 '탈영'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떠올릴 수 있는 이 책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너무나 힘든 군대생활 속에서 '탈영'을 떠올리는 것,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실행하는 자는, 절대 우리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이 통할까, 그들은 오직 '비겁자'라는 이름표를 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조마조마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Underline

 

 

 

  - 그들은 맹목적 복종에 대한 거부를 선택했습니다. 공포를 앞세워 강요되는 권력의 폭압을 거부하는 결단 말입니다. 이 작품에 묘사된 전쟁 장면 중 지어낸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실제 참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습니다. '전쟁 거부자들'은 반역자도 비겁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자들입니다. (글쓴이의 말)

 

  - 제레미가 내일 떠난다. 눈물을 보여선 안 돼. 이 빌어먹을 두 문장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정신 나간 새들마냥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충돌했다. (...)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진짜 홍수라도 난 것처럼. 금세기 최고의 수량 증가. 나는 멈추지 못하고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그래 제레미는 내일 떠날 거다. (98p)

 

  - 나는 일등 사수니까 수색을 나갈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나쁜 놈들', 그 개자식들을 찾아내는 게 임무야. 그놈들은 물론 우리가 주된 표적임에도 온 사방에 폭탄을 설치해. 희생자가 자기편에서 나든, 어린 아이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식이지. 모두가 그 지긋지긋한 자들을 두려워해. 그들은 어디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고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폭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래서 철칙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야. 아이들조차도. 그놈들은 우리한테 수류탄을 퍼붓기 위해 아이들을 끌어 모은 것 같아. 폭탄은 어디서든, 언제든, 또 누구로부터든 우리 얼굴에 떨어질 수 있는 거지! (119p)

 

  - 이제 곧 여기 온 지 6개월이 된다. 빌어먹을 기념일! 그동안에 내 인생의 절반이 지나간 것 같다. 이젠 진짜 생활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몸에 구멍이 뚫릴 위험이 없이 길을 건넌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겠고 여자와 콜라를 마시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것들은 정말이지 존재한 적이 없다는 느낌.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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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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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시작, 영적 세계로의 여행 <타나토노트 -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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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상상하지 못할, 영적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되다.

 

  '죽음'이란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 멀었으면 하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 걱정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유명한 말은 나에게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기억해야 한다'고 되새긴다. 하지만 역시 우울한 건 우울한 것이다. 내가 눈을 딱 감는 순간, 생각이 멈추게 되고 아예 나란 사람이 없어져버린다는 것이 가끔 두렵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무덤덤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 눈을 감는 순간이 너무나 허무하고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

 

  그런데, 죽음을 향해 직접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죽은 다음에 또다른 여행이 시작된다면 어떨까? 소설의 제목 '타나토노트'는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타나토스'(thanatos)와 항해자를 의미하는 '나우테스(nautes)'의 합성어다. 말그대로 죽음 항해자라는 말이다. 주인공과 그의 친구는 구상한 영계를 탐험하기 위해, 그들은 감옥의 지하실에서 무기징역을 사는 수감자들을 지원받아 실험을 감행한다. 소설 <타나토노트> 속 주인공들, 타나토드롬에 모인 '영계탐사 개발자'들은 죽음 후의 세상, 영계를 직접 탐사하려는 시도를 성공한다. (물론 수많은 희생양이 있었지만) 그들은 타나토노트로 선발된 사람에게, 약물을 주입하여 일시적으로 삶을 중단시키고 그들의 경험담을 통해 '영계 탐사 지도'를 만들어나간다. 처음에는 반발이 심했던 '영계 탐사'는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간다. 많은 아마추어 타나토노트들이 증가하고, 점차 전문적인 탐사와 함께 심지어 영계에서 떠돌아다니는 '영혼 아닌 영혼'의 충돌이 빈번해진다. 영계에는 생명줄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타나토노트>속 영계, 즉 죽음 이후의 세상은 많은 차원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통스러운 세계뿐이 아니라 색다른 세계도 있다. 그 유혹적인 세계를 지나면 지날수록 현실 세계와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미지에 세계에 현혹당하면서 그 세계를 계속해서 갈망한다. 자신이 직접, 자발적으로 (물론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 하에서) 죽음 속 탐험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그 미지의 세계가 미지의 세계가 아니게 될 순간,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보일까.

 

  우리가 한번쯤 상상해왔던 죽음 후의 세상을, 기막힌 상상력을 가진 작가의 눈을 빌려 볼 수 있다는 것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소설이다. 소설을 보고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을 더욱 무섭고 끔찍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삶의 끝인 '죽음'에는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곧 삶임을 생각하게 된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베르나르 시리즈의 시작, 발칙하고 흥미진진한 발판을 디딘 것 같다.  

 

 

 

Underline

 

 

  - 다섯 목숨을 연거푸 희생시키고 나니, 사람이 죽어도 이제 그다지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았다. 내 감수성이 무디어지고 있었다.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는데도, 마치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켓이 이륙하다 폭발하면, 다음 발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 그뿐이었다. 다시 다섯 명의 인간 기니피그가 선발되었다. (1권, 161p)

 

 

  - 허영주머니들, 즉 타나토노트가 되는 것을 무슨 고상한 조합에 가입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친구들이나 애인에게 으스댈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은 사절! 너무 절망한 나머지 영계 탐사를 새로운 자살 방식으로 여기고 찾아온 자들도 제외! 고통에 찬 육신이 싫어서 하늘 나라가 이승보다 더 좋은지 알아보려는 자들도 뒤로 돌아갓! 훌륭한 타나토노트는 행복하고 심신이 건전해야 하며, 죽어서는 안 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1권, 291p)

 

 

  - 전에는, 죽음을 삶의 단순한 종말, 즉 불꽃의 소진쯤으로 여기는 축도 있었고, 희망에 찬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축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죽음이 최후의 형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죽음이 최후의 형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삶이란, 언젠가는 행복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덧없는 천국이 되는 셈이었다. 삶은 축제였고 피안은 암흑일 뿐이었다. (...) 우리의 실험은 선친께서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신 두 가지 위대한 진리, 즉 <죽음은 가장 무서운 것이다>와 <죽음을 가지고 농담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해 준 셈이었다. (1권, 327p)

 

 

  -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네. 죽음은 단지 내적인 발전 단계의 하나일 뿐이네. 그 단계를 거쳐 우리 삶의 다음 지평이 열리는 것이지. 말하자면 죽음은 하나의 문턱인 셈이네. 그 문턱을 넘어서면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우리는 되도록 냉철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아야 하네. 죽는다는 걸 두려워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이 혼란에 빠지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가장 나쁜 태도일세. 평정을 잃지 않아야 순조롭게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지. (2권, 454p)

 

 

  - 삶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절실한 욕망과 치기 어린 변덕을 구별할 줄 안다. 천사들은 절실한 소원만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세상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시대에나 깨달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깨달음을 신비의 너울로 감추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2권, 602p)

 

 

  -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다. 그것은 한 세기 전의 미국 철학자 우디 앨런에게 답하는 말이었다. 사실 불멸성보다 더 끔찍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되고 연장된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금방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게 시들하고 권태롭고 짜증스러울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사라지고 희망도 한계도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어느 하루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기계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능력 있는 통치자들은 영원한 지배자가 될지도 모르고, 절대로 늙지 않을 권력자들 때문에 모든 자유가 억압될지도 모른다. 자기 삶을 끝낼 자유조차 사라질지 누가 알겟는가. 불멸은 죽음보다 천 배나 더 나쁘다. (2권, 8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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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재밌어서 밤새서 읽었당께!

그리고 다음 시리즈 (천사들의 제국)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결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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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헤세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켈스 엮음, 박민수 옮김 / 이레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펜과 붓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포도주와 같습니다 <화가 헤세 - 헤르만 헤세>

 

 

 

 

After Reading

 

 

 

  "펜과 붓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런 일에 취하면 삶이 아주 멋지고 푸근해져서 삶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열두살때부터 생각했던 시인의 꿈을 이룬 헤세의 또다른 바람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광기에 회의를 느낀 헤세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또다른 꿈이었던 그림을 독학으로 익혀서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불안정한 내적 세계를 자전적 소설로서 표현해내고 그것으로부터 안정을 찾았던 것처럼 보이는 헤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림'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얻었다. (헤세의 그림에 대한 이상은 '로즈할데'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라는 작품에도 표현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이 헤세의 인생 속 내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전쟁 중 수작업으로 자신의 그림과 시를 직접 써서 판매하기도 했으며 생계 유지에도 도움을 주었다.

 

 <화가 헤세>는 7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으로, 몇천점에 달하는 헤세의 그림을 골라 그가 쓴 산문, 시와 엮은 것이다. 산문 하나하나 옆에 붙은 그림들은 산문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우러져 마치 헤세가 그 그림을 그리는 상황이 연상되는 듯 하다. (헤세의 시와 산문은 행복감이 넘쳐흐르는 것들이 많아서, 평소에도 굉장히 좋아한다. 그 중 구름에 대한 헤세의 묘사는 정말 일품이다! 이건 나중에 따로 발췌해 올릴 예정.)

 

 

 

 

  헤세의 작품들 중 좋았던 그림들을 연도순으로 나열해보았다.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지만 그림들을 보면 느낌이 굉장히 다양하게 다가온다. 헤세가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습작으로 성장하면서 그림체 또한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첫번째 그림은 20년대 초, 단순한 선으로 윤곽을 잡고 칠한 느낌이고 헤세의 많은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간 바랜 느낌이 든다. 두번째 그림은 색채가 굉장히 다양하고 단순한 스케치에 색을 칠한 첫번째 그림보다 구조가 세밀해진 느낌이다. 세번째 그림은 26년도의 그림인데, 약간 추상적인 느낌이 듦과 동시에 동양적인 분위기까지 나는 듯 하다. 헤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그림으로도 표현되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그림은 58년도, 생을 마감하기 4년 전의 그림이다. 평화롭고 은은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헤세의 초기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나지만 이 작품도 굉장히 와닿는다.

 

  그의 넘치는 예술성은 문학으로, 미술로, 음악으로도 표현되었다. 그 중 글과 그림은 헤세 자신을 온전히 집중하고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세밀하고 아름답게, 자신을 담아 표현한 글과 그림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림이 없었다면 시인 헤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의 '그림에 대한 사랑'은, 헤세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남다른 그의 예술성과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문학과 그림작품들을 지금 보는 우리는, 그가 그림에 몰두한 시간동안 문학과의 거리가 멀어졌을지라도 그 속은 결코 좁지 않았음을, 헤세의 문학에 그림또한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Underline

 

 

 

  - 여기 앉은 내가 우리 마을에서 보는 것, 그것을 이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저 아래 바래고 갈라진 석회 벽이 하늘의 파란색을 끌어당겨 땅 위까지 물결치게 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미모사 사이에서 박공벽의 빛바랜 분홍색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하게 미소 짓는지 보는 사람은 없으며, 아다미니 집의 어두운 황갈색이 짙푸른 산을 배경으로 얼마나 풍성한 느낌을 주는지 (...) 보는 사람도 없다. 바로 이런 순간에 색채들의 조화가 가장 순수하고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 이 작은 세계에서 나타나는 색조들의 조화와 명암의 단계와 그림자들의 싸움은 단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저 아래 푸르스름한 조개껍질 같은 골짜기에서 저녁의 황금빛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저편의 산들이 공간 뒤로 더 멀찍이 물러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집을 짓고 허물며 숲의 나무를 심고 베어내고 창문틀을 칠하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보는 사람, 이 모든 행위와 일들의 관찰자인 사람, 이 담장들과 지붕들을 눈과 가슴에 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림으로 그리려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16p)

 

 

  - 전쟁은 나로 하여금 내면의 병을 앓게 하는, 혹은 나 자신과 논쟁할 수밖에 없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내면의 병 내지 불가피한 논쟁은 그 나름의 진행방향이 있으며, 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요즘 내가 일을 하는 사이사이에 뭔가 아름다운 것을 누리고 싶고 잠시 급박한 일에서 벗어나 의심의 여지없이 가치있는 무언가에 침잠하고자 할 때면, 나는 시를 짓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있어 시 쓰기와 거의 똑같은 일이며 종종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할 만하다고 여기는 유일한 영혼의 상태는 사욕이라곤 없는 내적 공감과 몰두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진정 예술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일, 즉 그림 그리기를 할 때면 여러 시간동안 그 상태에 도달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신의 왕국이 시작되며 '모든 것은 그분의 것'입니다. (140p)

 

 

  - 현실은, 이 초라한 현실은 언제나 실망스럽고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거부하는 길밖에, 우리가 현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내 문학을 읽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통상의 존중심이 내게 결여되어 있음을 흔히 아쉬워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 나무들이 얼굴을 갖고 집들이 큰 소리로 웃거나 춤을 추며 때로는 울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나무가 자작나무인지 밤나무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비난을 나는 받아들인다. 굳이 고백하자면, 내게는 나 자신의 삶도 동화처럼 여겨질 때가 아주 많다. 종종 나는 바깥의 세계가 나의 내면과 조화로운 관계에 있음을 보고 느낀다. 그런 조화로운 관계를 나는 마술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151p)

 

 

  - 내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이 몇 년 동안 나는 문학에 대해서 점차 거리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리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그런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그림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거의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산업 세계와 달리 예술에서는 시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끝에 이르렀을 때 내가 시도한 것이 일정한 집중성과 완전성에 도달해 있기만 하다면 상실된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시인으로서의 나도 그리 성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52p)

 

 

  - 이 말을 들으면 독자들은 웃음을 터뜨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일엽편주에 이야기 한 편을 싣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혹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비행하는 것에 비견된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아내고 가능한 말 세 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짓고 있는 문장 전체를 감정과 귀에서 잃지 않는 것, 문장을 다듬고 자신이 선택한 구성 방식을 실현하고 구조물의 나사를 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 전체 혹은 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비밀스런 방식으로 부단히 감정 속에 현전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다. 내 경험상 이와 유사한 긴장감과 집중은 오로지 그림을 그릴 때만 느낄 수 있다. 그림 그리기에서도 똑같다. 개개의 색깔을 이웃한 색깔과 적절하고 세심하게 조화시키는 것은 멋지고 쉬운 일이다.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금방이라도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아직 그리지 않아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그림의 전체 부분들을 정말로 눈앞에 불러내보는 것, 변화무쌍한 온갖 요소들의 아주 촘촘한 그물망을 지각하는 것은 놀랍도록 어려운 일이고, 성공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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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라인에 발췌한 글들을 읽으면

그가 글쓰기와 함께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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