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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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앙 비베스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라는 그래픽 노블의 표지가 참 색다르고 귀여워서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건 읽어보지 못하고, 그의 전작인 <폴리나>를 먼저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발레에 관한 이야기고, 느낌이 참 좋다는 평에 구매했었지요. 아마 작가마다 특유의 그림체를 가지고 있겠지만, 대개 흑백으로 표현되는 그래픽 노블 중 제가 만나본 것들은 왠지 날카롭고 건조한 느낌이 들었었는데요. <폴리나>도 마찬가지로 과도하지 않고 심플한 선과 명암 표현만으로 멋진 느낌을 주고 있었어요.

 

 

 

 

  줄거리를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어린 소녀가 발레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고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빠른 속도의 전개로 성장해나가는 소녀(폴리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발레 교습 장면들을 통해서 생동감 있는 동작들이 만화의 질을 높여주고 있는 듯했답니다.

 

 

 

 

  꿈을 이루고 싶은 소녀(폴리나)는 단지 '발레'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왜 하고 싶은가'에 대해선 관심이 없죠. 그런 그에게 예술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과 표현하는 방법을 전해주는 진정한 스승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런 사실을 그때는 깨닫지 못하는 폴리나의 모습이 나오지요. 우리도 항상 많은 행동에 대해 후회하는 것처럼요. <폴리나>는 비록 만화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이렇듯 마음을 콕 지르는 문장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발레를 표현하기 위해서 간단한 선만으로 그린 동작들이, 굉장히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불 꺼진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모습처럼. 그래서 어느샌가 숨을 죽이며 보고 있었답니다.

 

 

  꿈을 이루고 싶은 소녀와, 그녀의 성장, 예술성의 표현, 삶과 예술, 사랑의 감정... 그림으로 표현된 이야기. 특히나 발레의 섬세한 동작들은 문학이 표현해줄 수 없는 부분들을 잘 묘사해주어서, 너무 아름답고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단, 시간 전개가 굉장히 빨랐고 간단한 몇 컷으로 표현된 부분들에 특별한 해설이 (뒤 페이지에도 많이 없어요.)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눈으로 보고 넘어갈 수 없는 장면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굳이 해석하려 들지 않고 책을 보는 시간 동안, 깊게 그림을 보고 넘어가는 것만으로 느끼는 무언가가 있지요. 그게, 이런 만화 작품들의 묘미인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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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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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챙겼지만,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동생 '아돌피나'를 포함한 누이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결국 누이들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동생 '아돌피나'를 '누이들 중 가장 다정하고 착한 동생'이라고 여겼는데,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면 '아돌피나'는 가족들 중 가장 안쓰럽고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기도 한 외로운 여자였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실제 있었던 기록. 작가는 이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배경으로 이 소설을 만들어냈다.

 

  참으로 격정적이고 잔혹한 시대였다.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아픈 생애를 살아왔다. "널 낳지 않았다면 좋았을걸"이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하는 어머니로 인해 삶은 온통 결핍이었고, 자신을 사랑하고 챙겨주는 오빠 프로이트에게 많은 부분 의지했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사랑의 끝은 너무나도 아팠고, 그 사랑으로 생기게 된 아이마저 지워버린다. 결국 여성의 지위를 위해 싸우다가 많은 상처를 입게 된 친구 '클라라 클림트' (소설 속에서는 실제 화가인 클림트의 누나로 등장한다.) 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자유롭기 위해 자신을 감금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아돌피나는 병원에서 나와 지낸다. 그저 그렇게 살고 난 후,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인물의 '끝'과 마주한다. 나치 수용소에 잡혀간 가스실에서 그녀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망각하기를, 그저 추억뿐인 것들을 잊어버리기로 결심한다.

 

  책 속에는 '프로이트'가 연구하고 써 내려간 기록들, 그가 남긴 말과 실제들을 이용하여 생생한 장면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아돌피나'가 오빠 '프로이트'와 함께 존재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아버지를 따라 정신의학을 연구하게 된 딸 '안나'에 대한 언급, 친구 클라라를 통하여 만들어진 '구스타프 클림트'라는 인물들은 이야기에 한껏 더 몰입하게 만들어준다.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책은 시대를 알고 읽으면 물론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책 속에 많은 부분 등장하는 어느 한 시대의 관념과 사상 - 이를테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든지, 여성들의 지위가 굉장히 약했던 그 당시의 상황들, 프로이트의 정신의학 이야기 - 들은 허구로 구성된 이야기를 더욱 탄탄하게 해줌으로써, 역사 속의 사회를 작은 부분이나마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소설의 첫 부분, 기록으로 남아있는 '수용소'에서의 죽음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나서, 마치 영화의 회상 장면처럼 '아돌피나'의 삶의 시작으로 되돌아간다. 어느 정도 사실과 허구의 경계인 셈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았던 소설 속 '아돌피나'.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정말로 이런 모습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녀의 마지막, 소설의 끝에서 반복되는 '망각'에 대한 외침은 책을 다 덮고 난 뒤까지 가슴을 울린다.


 


 

 

  어릴 때 이미 최초의 어렴풋한 의식에서 무거운 시간을 감지했고, 우리의 존재는 모래알로 이루어져 바람이 불면 흩어질 것이라는 흐릿한 예감, 우리를 온전한 우리로 묶어주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 곧 나라는 감각밖에 없고, 종국에는 마지막 모래 알갱이, 그러니까 삶의 마지막 유물이 바람에 흩날릴 때 나도 사라지고 남는 것이라곤 시간의 바람뿐이라고 희미하게 예감했다. 어쩌다 세찬 바람이 불어 모래알 조금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의 일부를 날려버리면 바람이 모래와 함께 나까지 날려버려 평생 할당된 모래알이 전부 날아가기도 전에 먼저 소멸해버릴 것 같아서 나는 곧 무력해지고,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나, 다른 나를 찾아 시간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동행하려는 것이다. 이렇듯 다른 나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는 물질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살아남기 위해서다. (108p)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질문인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라는 질문은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었다.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울이자 존재할지 말지를 저울질하는 질문을 던지는 어둠의 그림자였고, 그래서 나는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눈을 뜨기도 힘든 날에도 거리를 쏘다니고 하염없이 다리 위를 서성이고 회당이나 교회에 들어가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면서 고약한 냄새가 밴 헝겊을 말리듯 내 영혼을 바람에 말렸다. 시내를 배회하며 우두커니 커다란 유리창을 보거나 강물의 수면이나 웅덩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의도치 않게 내 얼굴과 마주하곤 했는데, 그 얼굴의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무리 내 안의 그림자를 잠재우려 해도, 그림자를 없애는 빛으로 눈을 돌려도, 그림자는 끈질기게 물었다.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142p)

 

 

  둥지 안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 비명이 서로 충동질하고 서로 부추기고 서로 강화할 때, 우리는 마치 어떤 미지의 무시무시한 세계 안으로 떨어져 사방으로 둘러쌓인 병실의 벽으로 보호받는 것 같았다. 가끔 끔찍한 비명이 둥지에 울려 퍼지는 순간, 비명이 서로 충동질하고 서로 부추기고 서로 강화하는 순간, 클라라가 '우리 방은 자궁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 (205p)

 

 

  "삶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그저 끝없이 행복하길 바라는 감춰진 욕구일 뿐이야." 오빠가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의미를 찾고 싶은 욕구는 영원한 행복을 실현하기 불가능해서 생기지. 하지만 행복이란 엄밀히 말해서 억눌린 욕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충족되는 현상이고 본질적으로 단편적인 현상이지."

  "오빠가 정의하는 행복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행복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요. 그래도 오빠의 정의를 잘 생각해보면 모든 것에 의미가 가득하다는 뜻인 것 같아요. 비단 행복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슬픔이 오류나 우연일까요? 그리고 슬픔은 어디로 갈까요? 모든 과거와 지난 시간에 일어난 모든 일이 다 어디로 갈까요? 생각, 감정은 어디로 갈까요? 처음 시간이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모든 몸짓과 말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처음부터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면 애초에 왜 일어났을까요?" (279p)

 

 

  나는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죽음은 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다짐한다. 나는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은 그저 추억일 뿐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죽음은 그저 망각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나는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다 잊어버릴 것이라 되뇌었다. 나는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되뇌었다.

  저들이 이 방으로 날 끌고 온 일을 잊을 거야. 매캐한 이 냄새를 잊을거야. 내 주위에서 늙은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내지르는 비명을 잊을 거야. 비명을 지르거나 기도하는 걸 잊을 거야. 내가 동생의 손을 꽉 잡고 동생이 내 손을 맞잡은 것도 잊어버릴 거야.

  그렇게 죽겠지. 그렇게 잊겠지. (286p)

 

 

 

* 가장 관심있게 보는 분야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분들은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진 않네요.

그러나 굉장히 임팩트가 큰 장면들로 나옵니다. 정말로 가슴아픈 역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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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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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관심이 없다"

 

 누구에게도 그 독특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그 독특함의 정도가 높아서 어떤 사람에게는 '호', 어떤 사람에게는 '불호'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호불호가 갈릴듯한, 너무나 독특한 소설이다. 메시지를 전해줌에 있어 거리낌이 없다. 황정은의 작품은 '앨리스씨'를 통해 처음 만난다. 뭔가 독특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욱 뜻밖의 독특함이다.

 

  도시의 사거리, 여장을 한 부랑자가 등장한다. 누군가에게 불쾌함을 주겠지만, 그 불쾌함을 풍기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앨리시어'. 그는 자신이 자란 '고모리'라는 곳을 회상한다. 야만이 시작된 곳, 온통 야만과 '씨발됨'으로 가득했던 그곳. (씨발이라는 욕은 소설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단순히 하나의 욕이 아니라 많은 것을 내포한 단어인듯하다.) 씨발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어머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노인 아버지, 약해빠진 동생, 그리고 사회의 폭력까지 더해져 ...'씨발'같은 덩어리가 뭉치고 뭉쳤던 그 시절.  '앨리시어'에게 폭력으로 뒤덮인, 사연 가득한 '고모리'의 이야기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만난다. '끝나겠지 생각하겠지만 끝나지 않아서, 이게 안끝나네 하면서 떨어지고 있는' 기억 속 이야기. 앨리시어는 지금 오래전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씨발'년으로 거리에 서 있다. 슬프고 아픈 그 기억을 가진 채로, 그리고 끝나지 않을 그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발췌된 글이 맘에 든다면 읽어보아도 좋겠다. 사실, 이렇게 썼지만 나에겐 조금 불편한 감이 있었다. 날이 서있고 어두컴컴하고 비릿하지만, 우울의 끝까지 치받지는 않는 이 소설의 느낌이 너무나 낯선 느낌이라 살짝 놀랐던 것 같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 무겁고 절망적인 느낌보다는, 그보다 살짝 가벼운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참 묘한 작품이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앨리시어의 체취와 앨리시어의 복장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앨리시어를 추구한다. 누구의 지문으로도 뭉개버릴 수 없는 앨리시어의 지문을 배양한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8p)

 

 

  여기 그 순간들이 있다. 앨리시어의 꿈 말이다. 현재의 앨리시어가 불쑥 터져나오는 과거이고 과거의 앨리시어가 창백한 싹처럼 문득 돋아나는 현재이다. 앨리시어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는 지금 모퉁이에 서 있다. 설탕가루로 장식한 케이크와 과자가 놓인 유리진열장을 통해 그는 그의 얼굴을 본다. 타오르는 불이라곤 한 점도 볼 수 없는 이 거리에서 발생한 검댕으로 그의 얼굴은 상당히 검다. 그의 뺨, 팔뚝, 손마디의 피부가 마른 떡처럼 하얗게 굳은 채로 갈라져 있다. 그는 몇 살일까. 상당히 늙었을 것이다. 언제나 꿈꾸고 있으므로 전혀 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라, 라고 그는 말한다. (38p)

 

 

 지금쯤 얼마나 멀어졌을까.

별도 뭣도 없는 갤럭시의 공간은 얼마만큼 불어났을까.

하여간 근사할 것이다. 거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별과 우주가스가 모인 곳은 붉은 머리카락 다발 같고 보라색 꽃 같고 용맹한 말의 머리 같고 노랗고 파란 눈동자 같을 것이다. 지금도 부지런히 팽창하고 있을 것이다.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63p)

 

 

  아직도 떨어지고, 여태 떨어지고 있는 거다. 상당히 어둡고 긴 굴속을 떨어지면서 앨리스 소년이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상당히 오래전에 토끼 한 마리를 쫓다가 굴속으로 떨어졌는데...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를 않고 있네... 나는 다만, 떨어지고 있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계속... 더는 토끼도 보이지 않는데 줄곧... 하고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언제고 바닥에 닿겠지, 이제 끝나겠지, 생각하는데도 끝나지 않아서, 이게 안 끝나네, 골똘하게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132p)



 

 

* 저한테는 사실 황정은 작가의 소설이 그리 잘 맞지는 않았습니다. 불편함이 있었다면 완벽하게 맞진 않은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무척이나 독특하고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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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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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건축·인테리어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유럽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작은 공간이든 큰 공간이든 오밀조밀하게 '그곳에 사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충족시킨 집들을 보았다. 땅덩어리도 좁고 집을 만들어 살기보다는 만들어진 집, 이를테면 아파트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어지간히 부러워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꿈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 꿈은 현현된다. 이 에세이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영화 <건축학개론> 속의 멋진 집, 그리고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남자 주인공이 벽돌 한 장 한 장 올려 만든 집. <엄마와 집짓기>는 이런 꿈을, 영상이 아닌 이미지도 아닌, 실제로 실현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집짓기', 누구나 꿈꿀법한 이 일이 더욱이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부르기만 하면 애정이 샘솟는 '엄마', 미안할 걸 알면서도 굳이 투정 부리고 짜증을 부리게 되는 '엄마', 저자가 '모녀 사이의 특별한 우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엄마가 나, 그리고 형제들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왔음을 알기에, 정말로 편한 가정(집), 엄마에게 맞는 집을 선물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엄마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미 여러번 '감성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과 감동, 여운을 함께 주었던 저자는 엄마와 함께 '인문학적 집짓기'를 실행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의 스타일'에 꼭 맞게, 즐겁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60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엄마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하여 집을 짓는다. 방에 들어오는 빛, 창의 크기, 바닥재, 돌담과 주차장, 물길, 창고... 저자가 건축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신중하게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은 욕심이 가득 찬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라,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 채워진 따뜻한 삶의 공간이 된다.

 

 

  <엄마와 집짓기>에는 엄마를 위한 집짓기와, 자식을 위한 집 만들기가 함께 있다. 집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를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도 같이 있다. 이제 마흔이 넘은 저자가 자식을 위해서 꾸며나가는 공간에 대한 것들이 후반부에 펼쳐지는 것이다. 딸로서의 삶, 엄마로서의 삶을 모두 겪고 있는 그 시점은 내가 언젠가 맞이할 때이기 때문에 묘하게 와 닿는다. 아마도 여자들이라면 책 속의 감성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인문학적 사색들이 담겨있는 이 책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과 깊은 생각들이 꾹꾹 담겨있어 더없이 소중한 느낌이다.

 

 


 

 

  집짓기는 엄마의 서러웠던 과거가 흙부스러기처럼 조금씩 부서져 내려 평평한 바닥에 고요히 얹히는 일이기도 하고, 그 엄마의 딸인 내 과거가 함께 햇빛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두 과거의 반석 위에 미래를 짓는다. 집짓기는 늙으신 엄마와 늙어가는 딸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며, 어쩌면 후에, 그 후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와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한 딸의 기획이기도 하다. 엄마는 차츰 집을 당신의 존재 자체로 여기신다. 엄마는 이제 엄마 자신, 아니면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 집을 지으려 한다. (20p)

 

 

  하이데거의 관점을 거칠게 요약하면 불안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 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불안이 생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불안의 감지와 자신의 무(無)에 대한 자각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지금의 나'는 '염려적 현존재'라고도 했다.

 엄마의 불안도 궁극에는 시간에 닿아 있다. 새집 앞에서 당신은 낡아간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그 부조화가 안타까우신 것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나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 엄마의 집을 지으면서 나는 자꾸만 엄마의 노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불안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불안이 좀 덜 잦게 찾아오게 만드는 것만이 최선일 것이다. (107p)

 

 

  어두운 방으로 들어온 태양광뿐만 아니라, 밤의 어둠에 하나씩 켜진 조명도 빛을 만들고 그 빛은 공간에 깊이를 부여한다. 작은 공간도 빛과 어둠의 무수한 결 때문에 더 깊어지고 아늑해진다. 그래서 '감성조명'이란 말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깊은 공간에서 더 감성적이 되는 법이다. 감성이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이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기 시작하는 어스름 무렵이나 한밤의 간접조명 아래에서 감성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빛' 때문만도 아니다. 빛과 어둠, 그 사이에 있는 켜켜이 다른 빛의 자질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빛과 어둠이 만드는 깊이 속에서 세상과 관계에 대해 더 아름다운 생각,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69p)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어둠이 메타포일까. 사랑하지 않아도 어둠은 많은 것을 변질시킨다. 가령,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밀을 누설하고 싶어진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취기가 돌고 '내일'이라는 시간이 의식되지 않고 다만 '지금 여기'만이 팽창할 때, 그때 우리는 감춰두었던 어떤 '사실'을 들키기 위해 애쓴다. 그때 진실게임 같은 것을 한다. 상대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진실게임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게임이 아니다. 비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소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그 진실이란 것은, 결코 비밀이 될 수 없는 부분에 한정된다. 비밀은 그냥 비밀로 묻혀 잇는 것이다. 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앎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앎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진짜 비밀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앎에 포함된다. 혹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 앎에 해당된다. (176p)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의 엄마는 빌리에게 "항상 너 자신이길......(Always be yourself)"이라는 말을 남긴다. 엄마가 아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자기 자신을 믿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믿는 또 다른 존재와의 만남 사이에서 증폭되는 에너지이다.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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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울 것인가 - 존 맥스웰 기적의 성장 프로젝트, 그 두 번째
존 맥스웰 지음, 박산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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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계마다 질문을 던져라 <어떻게 배울 것인가 - 존 맥스웰>

 

 

 

 

 

 

 

 

  "삶의 단계마다 질문을 던져라, 나는 여기서 무엇을 배웠는가?"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돌발 상황들에서 '배움'에 대한 의지는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만약 역경이 닥쳐도, 그저 가만히 그 파도에 휩쓸려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배움의 기회'로 확장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살면서 좋은 일만 일어날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불행과 행운이 반복되는 삶, 어느 누구든지 끊임없이 행운만 닥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다양한 삶 속에서 많은 일을 대처하면서 살아나간다. 중요한 것은 '대처 방법'이다. 어려운 시기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초반에 등장하는 로드맵이다. 삶과 관련된 키워드 들에 '배움'을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은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발전을 일으켜주지만, 살면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배움'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안 좋은 일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반전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코카콜라'나 '셀로판'은 실수에서 창조된 놀라운 제품들이다. 순간의 착각과 뜻밖의 실수가 위대한 발명가의 이름을 얻게 해주었다. 저자인 '존 맥스웰'은 많은 사례를 자신의 주장에 보태가면서 공감되는 말들을 남겼다. '실패는 피할 수 없지만, 변명은 선택이다.',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에는 지속적인 대가가 따른다.' ... 그는 '의도적인 개선'을 통해 삶의 부분들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시간에 집중하고 기회를 발견하라고 말한다.
 
  '실수에서 배우고 생각을 바꾸는 것'. 말 그대로 읽어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상상도 못할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고난을 통해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소한 마음가짐의 변화만으로 긍정적인 일을 일구어낼 수 있다는 점에는 나도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다. 불평과 불만은 끊임없이 그 좌절감을 이어지게 하지만, '이럴 수도 있지'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배우려고 하는 의지는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추지 말고 성장하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교훈들은 당신에게 다양한 형태로 제공될 것이다."
 
 


 

  배움이란 졸업장을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바로 그 시점에서 진정한 배움이 시작된다.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교훈들은 살아가면서 평생 지니고 갈 것들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교실 밖에 있는 진짜 세계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도구를 제공할 뿐이다. 진짜 세계는 거친 곳이다. 그곳에 나가면 필연적으로 다치게 된다. 가끔은 세게 부딪쳐서 멍이 들기도 하고, 쓰러질 때도 있을 것이다. 실패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크기로 다가와 돈 문제부터 시작해서 당신의 마음과 건강을 비롯한 삶의 모든 면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칠 것이다. (21p, 추천의 글, 존 우든)

 

 

  당신이 겪는 실패의 횟수나 심각성보다 그 실패를 경험하는 방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다, 모든 실패는 아프다. 그리고 그런 실패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런 영향이 긍정적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실패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실패에 휘둘리면 안 된다. 바보처럼 보일까 봐, 혹은 무능해 보일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마비돼선 안 된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까 봐 두려워서 모험을 피하면 안 된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미래가 일그러지는 것은 관 속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47p)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는 게 힘들다는 건 인정할 용의가 있다 쳐도, 많은 사람들은 내심 이 진실이 자신에게만은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해야겠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문제들, 실패들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삶의 고난을 헤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시인인 랠프 왈도 에머슨이 남긴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걸음이란 앞으로 추락하는 것이다."라는 말. (87p)

 

 

  낙천주의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함께 상황이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낙천주의는 수동적인 미덕이고, 희망은 능동적인 미덕이다. 낙천주의자가 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지만, 희망을 가지기 위해선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165p)

 

 

  손을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잡는 게 잘못된 일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게 손을 잡는 열등한 방식인가?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다르다는 건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 내 말이 믿겨지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앞으로 2주동안 매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두 손을 맞잡아 보라. 2주가 끝날 대쯤이면, 원래 방식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것이다.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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