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센던트
카우이 하트 헤밍스 지음, 윤미나 옮김 / 책세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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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스 먼로의 단편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주인공 '그랜트'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조금씩 변해가는 아내의 행동을 감지한다.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점점 감정을 조절해가며 익숙함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되새긴다. 사랑의 가장 숭고한, 마음과 마음의 진한 연결의 스토리. 그 이야기가 <디센던트>를 읽으며 또 한번 생각났다. <디센던트>는 앞에 언급한 먼로의 소설보다, 조금 더 극적이지만 비슷한 느낌을 들게 한다.

 

  하와이에서 변호사로 살아가는 주인공 '맷'은 반응도, 의미 없는 대화도 할 수 없이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본다. 당돌하고 화끈했던 아내는 보트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고,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 남편 '맥'에게 딸들과,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저 누워있다. '맥'은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던 아내가 그립고 필요하다. 이후 아내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맥'은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딸에게서 듣게 된다. 그에게 주체할 수 없이 이리저리 튀는 딸들을 책임지고, 모든 결정을 맡아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사랑했던 그녀를, 비록 그녀의 마음이 자신과 조금 달랐을지라도 마지막을 행복하게 장식해주기로.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 육체적인 혹은 두근거리는 달콤한 사랑보다 더욱더 고차원적이고 진실된 사랑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맥'은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의 과거 혹은 현재의 마음을 부정하거나 배신하지 않는다.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분노했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지만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맥'은 진실된 자신의 마음을 따르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용서할게" (...) "그는 당신을 사랑했어. 나는 당신을 사랑해." 서와 진정한 화해로 한층 성장하게 된 '맥'은 그 사랑으로 남은 가족들을 품는다. 결코 뭉쳐지지 않을 것만 같던, 물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방울 같았던 그들은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주며 새로운 삶을 발견한다.

 

  <디센던트>는 혈육의 정으로 지켜나가야 할 가치에 대하여 조언한다. 가족과의 대화와 공감이 너무나도 부족한 이 시대에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잠깐의 시선의 교환, 인내, 진심 어린 대화 같은 작은 것들이 어떻게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려낸다.  그리고, 떠나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갑자기 마주치게 된 가족의 비밀을 주인공은 행복했던 기억으로 덮는다. 마지막은 조금 아쉬웠을지라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추억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떠나간 사람의 마지막은 행복했고, 가족들은 파란 바다와 따뜻한 햇살의 시원한 '하와이'의 풍경 속에 남았다.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녀는 많은 의미가 담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루한 삶을 좀 봐. 당신이 통통 튀는 내 성격을 어떻게 망쳐놨는지 보라고. 나는 좋은 의미에서 화산 같은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뻔한 사람이 됐고 2킬로그램이나 살이 쪘고, 토요일 밤에 집에 앉아 봉봉을 씹으며, 약혼자가 입에 음식을 퍼 넣고 트림을 삼키는 걸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어." (84p)

 

 

  "맙소사." 나는 말한다. "난 머저리야."

  "머저리." 스코티가 말한다.

  "그래." 나는 말한다. "그게 나야."

  "아빠는 머저리예요. 넌더리나는 머저리."

  "맙소사." 나는 말한다.

  나는 아내를 본다. 당신이 필요해,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딸아이들과 나를 도와줘야 해.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법을 몰라. 나는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몰라. (90p)

 

 

  플랜 B.

  빨간 불빛들이 일제히 들어오고, 나는 속도를 늦춘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사람들을 모으고 이제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화로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부터도 의사에게 전화로 그런 이야기를 듣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사 말대로 정리할 걸 모두 정리하려면 일주일쯤 걸릴 것이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정을 꾸려가는 방법을 어떻게 배우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하지?(128p)

 

 

  에스테르가 차곡차곡 쌓은 행주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녀는 딸아이들을 보고, 그다음에는 나를 본다. 틀림없이 나는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완전히 얼이 빠져 보이리라.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서랍에 행주를 넣는다. 그리고 알렉스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더니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온다. 나는 한 발짝 물러나지만 그녀가 내 머리를 잡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긴다. 나는 경악하며 에스테르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굴복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진짜로 운다. 내 아내와 나, 그리고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 막 깨달은 것처럼. 아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우리 가족을 맡아야 한다. (160p)

 

 

  우리는 더이상 집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조류에 밀려온 파도가 급히 물러나면서 두 파도가 충돌하는 바람에 간헐 온천처럼 물이 솟구치는 곳까지 걸어간다. 한동안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문득 스코티가 말한다. "엄마도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렇게 된다. 뭔가를 경험할 때 그 사람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나는 매일 낮에 있었던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가십거리들을 챙기고 머릿속으로 번호를 매기는 것도 모자라, 밤에 잠자리에서 조애니에게 말해주기 전에 연습까지 했다. (276p) 

* 조지클루니 주연의 영화로도 나온 작품입니다 ;)
대책없는 딸들과의 모습에 피식-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감동있고 좋은 작품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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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식당의 비밀 - 마흔 사장이 꼭 알아야 할
조환묵 지음 / 새로운제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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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갈수록 짧아지는 은퇴시기와 대규모의 취업 경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돌리는 곳은 '창업'이다. 그중 가장 많이 도전하는 분야가 '식당(음식점) 창업'이다. '먹는 것'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인데다가, 비교적 간편하게 창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수의 신생 음식점은, 생겨나는 수만큼 폐업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음식점 과잉이다. 맛집은 수두룩하고 제대로 된 정보까지 찾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돌아보면 생겨나고, 없어지고를 반복하는 음식점들. 은퇴 후에 식당 창업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업으로 식당 창업을 고려하고 있는가? 식당 창업은, 생각보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사업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3개월 ~1년의 짧은 계획기간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곤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식당 창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조언을 건넨다. 창업 준비와 창업과정, 경영까지, 창업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제공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어려운 경영정보보다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조언들이 많다. 가장 중요하게 건네는 말은 '마음가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 창업을 시작하면서 조급함부터 앞서는 모습을 보인다. 장기적으로 보지 못하고 일희일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간의 선택과 순간의 실수가 많은 것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이 직종이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식당의 성공 비결로, 저자는 튼튼한 몸과 따뜻한 마음, 차가운 머리, 이 세 가지를 꼽는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이 합쳐진 식당 일은 절대 얕보지 못할 힘든 자리다. 소비자의 까다로운 눈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차가운 머리는 학력과 전공에 관련이 없으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인 '형식지'와 삶과 연륜에서 얻어지는 '암묵지'가 어우러져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인 많은 40~50대들이 지금,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어려워진 경기에, 집에서 가사를 하던 주부들도 요리를 특기 삼아 음식점 창업을 꿈꾸고 있다. 이제 식당 창업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자신의 바른 자세와 마음, 그리고 자신만의 특별한 비법이 필요하다.

 "식당은 디테일 경영"이라고 한다. 기본적이고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돌봐야 하는 경영. 어렵고 힘들지만, 빠져나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물론 주어질 것이다. 이 책은 식당 창업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객관적인 조언과 함께 섣부른 창업을 경고하는 동시에, 식당 창업을 꿈꾸는 많은 이들을 독려하고 있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나 성공할 수 없는 식당 창업" 그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오래 전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생각난다

  "잘하는 일은 직업으로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취미로 해라."

  그러나 최근 자기계발서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어떤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고,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기왕이면 후자의 인생이 더 행복하고, 더 좋은 성과가 있고, 더 많은 자기실현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후자의 인생이 제1의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외식업은 제1의 인생으로 삼아야 할 직업이다. (40p)

 

 

  식당 창업 전에는 한 가지 노동에 충실해서 좋은 성과를 내면 인정받았던 직장인이었지만 식당 사장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식당 사장이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식당 사장은 그 많은 일들을 잘해내야 한다. 온종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육체노동'도 거뜬히 이겨내야 하고, 항상 웃으면서 고객을 맞이하는 '감정노동'에도 익숙해야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노하우를 터득하는 '지식 노동'에도 능력을 발휘하는, 그야말로 만능이어야 한다. (53p)

 

 

  지식이란 사람들의 심성이나 삶 속에 깊숙이 녹아 있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큼 얻기도 어렵다. 형식지와 암묵지의 두 가지 지식이 한데 어우러져야 온전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삶의 지혜가 더해지면 어떤 혼란과 위기가 닥쳐와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다. (61p)

 

 

  "눈으로 배우지 마. 눈으로 배운 것은 반드시 한계가 있어. 스스로 움직여서 알아내고 이해해야 해. 그리고 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야.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깨닫지 못한 그것을 찾아야 해." (...) 사람들은 이미 식당에 대해 많은 상식이 있다. 음식이 맛있어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깨끗해야 하고, 게다가 가격마저 저렴하다면 최고라고 다들 입 모아 얘기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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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에 본 것들
재클린 미처드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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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도 몇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새로운 소재를 가진 책들만이 신선함을 얻고 흥미를 자극한다. <우리가 밤에 본 것들>의 경우엔 '색소성 건피증(XP)'이라는 희귀병이 신선함의 바탕이다. 주인공들 - 앨리, 줄리엣 로브 삼총사 - 는 같은 병을 앓고 있고, 그것도 같은 마을에 살기까지 한다. 햇빛을 보면 피부에 이상이 생기는 병의 특성상 그들은 주로 밤에 활동한다. 낮에 활동할 수 없어 밤에까지 집에 숨어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주간형 인간'이라 배척하며, 자신들의 시간 '밤'을 자유로이 정복한다. 그들은 밤에 건물 사이를 구르고 뛰어넘어 다니는 '파쿠르'를 한다. '밤'이기에 더욱 자유롭고 스릴 있는 그들만의 운동이다.

 

  그들은 '주간형 인간'이 아닌, '야간형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또래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본다. 그들은 목격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주인공 '앨리'만 목격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마 셋 중 한 명은 함께 보았을 것이다.) 어떤 수상한 남자와 시체처럼 목이 늘어진 여자를. 그리고 그 사건은 파쿠르에 심취하며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흔들기 시작한다. 갑자기 도착한 경고의 문자메시지와 갑작스러운 친한 친구의 죽음, 흐릿하게 드러나는 조그만 단서들은, 그 사건을 목격한 '앨리'로 하여금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 줄리엣과 로브 또한 사건에 알게 모르게 말려들게 된다.

 

  의문의 사건과 수상한 남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죽음'들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소설을 이끄는 작용을 하며 우리를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지만, <우리가 밤에 본 것들>은 스릴러를 가미한 청춘 혹은 성장 소설적인 부분이 많다. 감추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듯한 희귀병 XP를 앓고 있음에도, 밤이라는 시간을 이용하여 그들만의 여흥을 즐기는 삼총사. 그리고 각기 다른 성격의 주인공들 - 삼총사 - 의 우정, 가족과의 관계, 사건을 목격 후 자신의 꿈을 만들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밤'이라는 어두컴컴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사건의 긴장감과는 별개로, 따뜻함과 풋풋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었을 때, 이 책이 시리즈일 것 같다는 정보도 상상도 하지 않았었지만, 소설의 끝은 마치 2편이 나올 것 같은 여지를 둔다. 열린 결말을 염두에 둔 작가의 손짓이기엔 너무 사건을 잔뜩 펼쳐놓은 느낌이랄까. 아마도, 곧 2편이 나올 것 같다. (사건의 정체를 알아야겠다고....!)

  

  

  사람들은 '유전 공학'이니 '줄기 세포 연구'니 'DNA'복구와 같은 이야기를 마치 다음 주에 월마트에 가면 살 수 있는 물건처럼 말한다. 그러나 비록 조물주나 정부가 금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들의 실현을 기다리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길지 않은 우리의 인생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 나이 또래의 소녀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너는 앞날이 창창하지 않니. 그렇다. 별 볼 일 없는 마을에서 성장기를 보낸 것이 아쉽겠지만 언젠가 어른이 되면 거친 폭풍우와 물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를 추억하며 그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데 감사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 좋은 얘기다. 나에게는 이런 동화 같은 얘기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면. 이곳에서 보내는 소녀 시절이 나에게는 인생의 전부다. 그러니 시간이 많지 않은 우리 같은 아이들이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현재를 즐기려 하는 것을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으리라. (43p)

 

 

  나는 어스름하게 찾아드는 어둠 속에서 미소 지었다. 로브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극도로 집중하느라 그대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극명한 차이였다. 로브는 줄리엣이 없을 때에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줄리엣은 존재 자체만으로 주위 사람들까지 들뜨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파쿠르를 할 때마다 우리는 장갑 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이렇게 외쳤다. "한 번뿐인 인생이야!" 그건 좋았다. 그것을 통해 파쿠르는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파쿠르는 그래야 마땅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 로브와 이렇게 단둘이 앉아 있는 것은 평범한 생활 방식을 갖고 평범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평범한 두 사람의 인생을 엿보는 일종의 가상 체험 같은 거였다. (130p)

 

 

  "우리는 왜 늘 가정만 하고 진짜 미래에 뭐가 될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을까?"

  내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니까 그렇지."

  "난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게 신물이 나. 내가 일찍 죽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싫어."

  로브가 웃음을 지었다.

  "앨리, 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늘 그랬지."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내가 말했다.

  "현실은 변하기도 해. 모든 천재들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아." (131p)

 

 

  그것은 로브로부터 온 문자가 아니었다.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온 문자였다.

  "맘껏 즐겨라. 그런데 다치면  안 되지."

  본능은 거짓말하지 않는 법이다. 인간은 본능을 제어하는 유일한 동물이지만, 로브가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단지 그렇게 하는 데 익숙해진 것뿐이다. 파쿠르는 본능을 재발견하는 방법이면서, 어떤 대가가 따르든 생존을 위해 잠자고 있던 본능을 일깨워야 하는 게임이다. 호숫가에서 느꼈던 근질근질한 감각,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반사적으로 그 문자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잘 아는 누군가가 보낸 경고였다.

  도대체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자만이 그걸 알고 있다. (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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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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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의 예술적 감수성은 그가 남긴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드러난다. 단순히 작가라서 당연히 따라올 수 있는 문학적 감수성 뿐만 아니라, 헤세는 그림과 음악에 관해서도 열정과 감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유리알처럼 여리고 섬세한 내면이 묻어 나온다. 생전엔 정신적인 고통도 많이 느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청소년기에는 그야말로 '질풍'의 시기를 보냈고,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대한 폐해를 비판함으로써 받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가정의 불화는 그의 정신을 약하디 약하게 만들었다. 이후, 헤세는 내면을 굳게 하기 위해 자연을 접하며 문학을 통해 스스로가 치유하기 시작했고, 그때 만들어진 작품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다. 즉,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다.

 

  '클링조어'는 헤세의 분신과도 같다. 헤세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 소설 또한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클링조어'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 자체인 그림을 그려나간다. 소설 속 그는, 친구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태백의 시를 읊고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자연과 마을, 수많은 형상을 채색하던 실제 헤세의 체험이 그에게 입혀졌고, 정신적인 죽음 앞에 서있던 헤세의 모습은 '클링조어'가 그대로 재현해냈다. '자신의 몰락을 앎으로써 열광적으로 생기를 얻는'다는 '몰락'의 개념은 이 소설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어떠한 극적인 사건 없이 이 소설은 '클링조어'의 내면, 감수성, 예술혼을 표현함으로써, 헤세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풀어놓았다.

 

  또 하나, 색다른 점은 소설 속에 그려진 '클링조어'는 화가 '고흐'를 떠올리게도 한다는 점이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 '고흐', 그리고 화가 친구와 각별한 사이를 이루어나가는 모습이 닮았다. 실제로 헤세는 '고흐'의 삶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언급했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과 절규' 그리고 삶과 운명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거칠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소설은 음악의 선율처럼 자유자재로, 그리고 마치 그림을 덧칠하는 것처럼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문학과 음악, 그림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 소설 속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예술혼이 뿜어내는 광기, 그리고 생동하는 열정은 그 모습이 닮았다. 그를 몰두하게 만들었던 세 가지의 예술, 이 책은 아름다운 색채와 감미로운 선율, 매력적인 문체가 담겨있는 예술 그 자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일 년쯤 지나면 - 혹은 더 이를지도 모르지만 - 그 두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그의 가슴속 불도 꺼져 버릴지 모른다. 그래, 그 누구라도 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을 오랫동안 지켜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또한, 열 개의 목숨을 가진 클링조어 또한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오랫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불을, 자신의 모든 화산을 불태울 수는 없으며, 그 누구라도 밤낮으로 계속해서 불꽃 속에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속해서 즐기면서, 계속해서 창조적으로, 모든 창문들 뒤쪽에서 매일 낮 음악이 울리고 매일 밤 수천 개의 촛불이 반작이는 성처럼 계속해서 모든 감각과 신경을 명료하게 극도로 긴장시킨 채, 그는 매일 낮 여러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작업하고, 매일 밤 여러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힘은 많이 소진되었고, 시력도 많이 약해졌다. 삶은 많은 피를 흘렸다. (11p)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릴 거야. 당장 내일부터라도. 그러나 집과 사람, 나무는 더 이상 그리지 않을 거야. 악어와 불가사리, 용과 심홍색의 뱀, 그리고 태어나고 있는 모든 것, 변화하고 있는 모든 것, 인간이 되려는 충만한 동경, 별이 되려는 충만한 동경, 충만한 탄생, 충만한 소멸, 충만한 신과 죽음을 그릴 것이야." (51p)

 

 

그는 증오로 가득 차서 집시들이 몰고 온 초록색 마차 아랫부분의 주름을 파리 블루로 할퀴듯 그려 넣었다. 그는 격분한 나머지 크롬 옐로를 방충석 모서리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칠하지 않고 비워 둔 곳에다 치노버를 찍어서 튀어나온 하양을 죽여 버렸으며, 영속을 얻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고, 잔인한 신을 표현하기 위해 옅은 노랑과 나폴리 옐로로 고함을 쳤다. 그는 신음을 내면서 더 많은 파랑을 무미건조한 먼지투성이의 초록에 내동댕이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속의 불을 저녁 하늘에 붙였다. 작은 팔레트는 불의 힘을 가진, 순수한, 섞이지 않은, 가장 밝은 색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색들은 그의 위안, 그의 탑, 그의 무기고, 그의 기도서, 사악한 죽음을 겨냥하여 쏘는 그의 대포였다. 자주는 죽음의 거부였으며, 치노버는 부패를 조롱했다. 무기고는 훌륭했고, 작고 용감한 그의 군대는 광휘를 발했다. 재빠르게 발사하는 대포는 빛을 내며 위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모든 발사는 헛되었다. 하지만 발사는 상당히 훌륭했으며, 그것은 행복이자 위안이었고, 여전히 생명이었고, 여전히 승리의 함성이었다. (59p)

 

 

그를 조롱하기 위하여, 나는 반야를 노래 부르네,

취한 나의 노래는 웅얼거리며 지친 숲 속으로 퍼진다네,

내가 부르는 노래와 내가 마시는 술의 의미는

그의 위협을 비웃어 주는 것이라네.

 

나, 기나긴 노정의 방랑자는 많은 것을 행하고 또 겪었다네,

이제 이 저녁에 앉아, 술을 마시며 불안하게 기다린다네,

번쩍이는 낫이

내 머리를 움찔거리는 심장과 분리할 때까지. (89p, 클링조어가 친구 두보에게 보내는 시)

 

 

* 헤세가 이태백의 시를 좋아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 책 속에서도 이태백의 시가 등장합니다,

* 원래 좋은 글을 만나면 포스트잇을 붙이는데, 이 책에는 장난아니게 붙여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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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실수하라 -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모든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조언
닐 게이먼 지음, 임헌우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흥미롭고 놀라우며 찬란하고 매력적으로, 즐겨라 <멋지게 실수하라 - 닐 게이먼>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모든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조언"  작가인 '닐 게이먼'은 <샌드맨> 시리즈와 영화로 만들어진 <베오울프> 등 SF, 만화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소설가라고 한다. 나는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안그러면 아비규환>이나 <픽션> 등 영미 작가들이 함께 써낸 책(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다)에 들어있는 그의 이름을 보니, 꽤 유명한 작가인듯싶다. 이 책은 '닐 게이먼'이 한 예술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예술가로 활동하고 싶은 사람들, 프리랜서, 크리에이터로 멋지게 일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다. '연설문'이라 하면,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한 연설이 떠오른다. 길이길이 남아 다시 읽힐 정도로 열풍이 분 '잡스'의 연설만큼, '닐 게이먼'의 연설도 가슴 울리도록 감동적일까.

 
 
 
  꽤 길지 않은 분량의 연설은 한 책에 담기기 위해서, 디자이너 '임현우' 교수를 통해 멋진 타이포그래피 작품으로 꾸며졌다. 페이지 한쪽 한쪽 등장하는 강렬한 핫핑크 색은 우리 눈을 번뜩 뜨이게 한다. 일단 책이 참 예쁘다, 자유자재로 편집된 글들이 참 재미있다.
 
 

 

 
 
 
  작가 '닐 게이먼'은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척해보아라'고 대답한다. 주어진 모든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멋진 작업'으로 만들어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의 해답이다.
 
 

 

 
 
  짧은 연설문은, 통통 튀는 핫핑크 색의 책처럼 유쾌하다.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잘 될 거야'라고 격려하는 듯하다. 자유롭게, 즐겁게, 흥미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할 수 있다'라는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연설이다.
 
  그대로 읽고 있으면, 재치 있게 디자인된 글에 나도 모르게 몰입하고 신나게 즐기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는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으니, 첫째는 20분의 연설문의 내용이라 책 자체의 글씨는 몇 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왠지 글을 쭉- 늘인 느낌이 든달까)이고, 둘째는 청춘에게 '뭐든지 즐겨라'하는 류의 책들을 기피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그러나 디자인적인 면에서도, 애초 책 제목에 달려있는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조언'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또다른 가치가 있는 듯하다. 아티스트들에게 생각의 반전을 주고, 남들과 다른 영감을 번뜩이게 하지 않을까. 단순히 연설문을 담은 에세이 책이라고 하면 뭔가 허전하지만, 멋진 한글 타이포 그래피 작품집이라고 하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 청춘들, 창조적인 작업을 시작하는 발판에 서 있는 사람들, 짧지만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깨달음을 주는 무거운 글은 싫고, 가볍고 유쾌한 책을 즐기고 싶다면)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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