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센던트
카우이 하트 헤밍스 지음, 윤미나 옮김 / 책세상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앨리스 먼로의 단편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주인공 '그랜트'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조금씩 변해가는 아내의 행동을 감지한다.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점점 감정을 조절해가며 익숙함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되새긴다. 사랑의 가장 숭고한, 마음과 마음의 진한 연결의 스토리. 그 이야기가 <디센던트>를 읽으며 또 한번 생각났다. <디센던트>는 앞에 언급한 먼로의 소설보다, 조금 더 극적이지만 비슷한 느낌을 들게 한다.
하와이에서 변호사로 살아가는 주인공 '맷'은 반응도, 의미 없는 대화도 할 수 없이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본다. 당돌하고 화끈했던 아내는 보트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고,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 남편 '맥'에게 딸들과,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저 누워있다. '맥'은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던 아내가 그립고 필요하다. 이후 아내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맥'은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딸에게서 듣게 된다. 그에게 주체할 수 없이 이리저리 튀는 딸들을 책임지고, 모든 결정을 맡아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사랑했던 그녀를, 비록 그녀의 마음이 자신과 조금 달랐을지라도 마지막을 행복하게 장식해주기로.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 육체적인 혹은 두근거리는 달콤한 사랑보다 더욱더 고차원적이고 진실된 사랑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맥'은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의 과거 혹은 현재의 마음을 부정하거나 배신하지 않는다.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분노했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지만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맥'은 진실된 자신의 마음을 따르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용서할게" (...) "그는 당신을 사랑했어. 나는 당신을 사랑해." 용서와 진정한 화해로 한층 성장하게 된 '맥'은 그 사랑으로 남은 가족들을 품는다. 결코 뭉쳐지지 않을 것만 같던, 물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방울 같았던 그들은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주며 새로운 삶을 발견한다.
<디센던트>는 혈육의 정으로 지켜나가야 할 가치에 대하여 조언한다. 가족과의 대화와 공감이 너무나도 부족한 이 시대에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잠깐의 시선의 교환, 인내, 진심 어린 대화 같은 작은 것들이 어떻게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려낸다. 그리고, 떠나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갑자기 마주치게 된 가족의 비밀을 주인공은 행복했던 기억으로 덮는다. 마지막은 조금 아쉬웠을지라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추억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떠나간 사람의 마지막은 행복했고, 가족들은 파란 바다와 따뜻한 햇살의 시원한 '하와이'의 풍경 속에 남았다.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녀는 많은 의미가 담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루한 삶을 좀 봐. 당신이 통통 튀는 내 성격을 어떻게 망쳐놨는지 보라고. 나는 좋은 의미에서 화산 같은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뻔한 사람이 됐고 2킬로그램이나 살이 쪘고, 토요일 밤에 집에 앉아 봉봉을 씹으며, 약혼자가 입에 음식을 퍼 넣고 트림을 삼키는 걸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어." (84p)
"맙소사." 나는 말한다. "난 머저리야."
"머저리." 스코티가 말한다.
"그래." 나는 말한다. "그게 나야."
"아빠는 머저리예요. 넌더리나는 머저리."
"맙소사." 나는 말한다.
나는 아내를 본다. 당신이 필요해,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딸아이들과 나를 도와줘야 해.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법을 몰라. 나는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몰라. (90p)
플랜 B.
빨간 불빛들이 일제히 들어오고, 나는 속도를 늦춘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사람들을 모으고 이제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화로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부터도 의사에게 전화로 그런 이야기를 듣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사 말대로 정리할 걸 모두 정리하려면 일주일쯤 걸릴 것이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정을 꾸려가는 방법을 어떻게 배우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하지?(128p)
에스테르가 차곡차곡 쌓은 행주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녀는 딸아이들을 보고, 그다음에는 나를 본다. 틀림없이 나는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완전히 얼이 빠져 보이리라.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서랍에 행주를 넣는다. 그리고 알렉스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더니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온다. 나는 한 발짝 물러나지만 그녀가 내 머리를 잡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긴다. 나는 경악하며 에스테르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굴복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진짜로 운다. 내 아내와 나, 그리고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 막 깨달은 것처럼. 아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우리 가족을 맡아야 한다. (160p)
우리는 더이상 집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조류에 밀려온 파도가 급히 물러나면서 두 파도가 충돌하는 바람에 간헐 온천처럼 물이 솟구치는 곳까지 걸어간다. 한동안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문득 스코티가 말한다. "엄마도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렇게 된다. 뭔가를 경험할 때 그 사람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나는 매일 낮에 있었던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가십거리들을 챙기고 머릿속으로 번호를 매기는 것도 모자라, 밤에 잠자리에서 조애니에게 말해주기 전에 연습까지 했다. (276p)
* 조지클루니 주연의 영화로도 나온 작품입니다 ;)
대책없는 딸들과의 모습에 피식-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감동있고 좋은 작품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