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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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ter Reading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어떤 사건의 결과에 의해서나, 어떤 목적에 의해서 상당 부분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말'과 '기록'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역사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논의점인데,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꼭 읽어야 할 도서로 지목되고 있는 '성경'의 경우도 일종의 오류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부분은 '예수'에 대한 것이다. 종교를 접하다 보면 너무나 모호하게 생각되는 '예수의 정체', 신인지 인간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예수의 정체를 파헤치고 있다. 일단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건'이란 첫째로 예수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중 운동을 일으킨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과연 사실일까? 신앙의 대상이자 부활의 기적을 알려준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대항해 민중 운동을 일으켰던 나사렛의 예수 중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건 '그리스도의 예수'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원자였던 예수 말이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에 관련된 부분들은 성서나 여러 복음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수정되었다. 교회의 주요 전도 대상이 로마인으로 된 현실 속에서, 팔레스타인과 하느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예수의 혁명적인 수고를 드러낸다면 로마인의 화풀이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던 것에 이유가 있었다.

 이 책에 의하면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된 위대한 인물이며 영향력 있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정의를 위해 싸웠고 피 흘리며 죽어간 영웅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책의 제목인 '젤롯'이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열심'이라는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 힘쓰고, 극단적으로 폭력까지 빌리려는 사람들이었다. 일종의 혁명가이며, 로마인과 아첨꾼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했다. 그들의 언어에서 '열심'을 의미하는 '젤롯'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후에 '젤롯당'과 '시카리'라는, 하느님의 원수를 처치하는 활동단으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을 행사하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젤롯당도 아니었다. 단지, 하느님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적인 신념을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종교적 경건의 모범(젤롯)을 보인 선구자였던 것이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책이다. 어릴 때부터 의무감으로 성당을 다녀왔지만, 자연스럽게 '냉담자'가 돼버린 나에게도 살짝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지금은 성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잊고 살고 있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수'의 존재는 단연 '신'과 같은 존재였고, 인간으로서 투쟁하던 예수의 모습은 상상 밖이었달까. 그러나 '혁명가'라는 해석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신앙이 얕게 남아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신적인 존재든 단순히 인간이었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열정적인 신념을 가진, '존경할 인물'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끝에는 쓰는 자에 의하여, 목적에 의하여 바뀌게 된 각 복음서의 차이도 비교한다. 또한 주석은 100페이지, 어마어마하다. 신앙이 깊은 종교인들에게도 어렵지만,
종교에 관련된 단어들과 성경의 역사를 포함한 이 책이 단연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던 시기, 수많은 인물들과 예수와 관련된 복음서들의 해석까지, 최근에 봤던 책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방대한 책이다. 다소 읽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종교의 지도자와 종교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인간 예수'로서의 삶을 파고들어 연구해낸 것은 엄청난 일이며, 연구서로서의 가치는 훌륭한 책이다. 물론 종교인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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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미가 5:2)라는 예언자 미가의 말씀 때문에, 누가 기자에게 예수는 새로운 다윗이며 유대인들의 왕이다. 하느님의 왕좌에 앉아 약속의 땅을 통치할 인물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도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또 그렇게 읽히도록 기록된 것 역시 아니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예수의 지위를 확인시키는 신학적 진술이다. 예수는 다윗 왕의 자손, 즉 약속된 메시아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창조의 근원인 영원한 로고스로서의 예수라든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베들레헴의 더러운 말구유에서 포대기에 싸인 채 태어났다. 곁에는 목자들과 선물을 들고 온 동방박사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러나 진짜 예수는 기원전 4년과 기원후 6년 사이에 피폐한 갈릴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농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나사렛의 어느 작은 마을, 벽돌을 엉기성기 쌓아 진흙을 발라 만든, 흙이 풀풀 날리는 초라한 집이었다. (75p)

  요한의 세례가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이라든지 예수의 선교에 끼친 영향력은 복음서 기자들에게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요한은 매우 인기가 좋고 존경도 받았다. 또 널리 인정받는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다. 그의 명성은 너무나도 자자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절대 숨길 수 없을 만큼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탈이 생기지 않도록 이야기를 각색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어야만 했던 것이다. 예수가 우월하고 요한은 열등해야 했다. 그래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네 복음서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축소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는 위대한 예언자이자 예수의 스승으로 묘사하는데 반해, 마지막에 기록된 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그의 역할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하는 정도로 제한된다. (140p)

  도시며 마을이며,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들었다. 예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은 것, 즉 예수가 일으킨다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를 하느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다윗의 왕국을 이을 후계자로 인정했다. 반면 로마는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라고 여겼다. 또 율법학자와 성전 제사장은 그를 신성을 모독하는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다. 유대교에 대한 지배력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 사는 대부분의 유대인들 (예수는 자기가 이들을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에게 예수는 메시아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갈릴리 지역을 떠돌며 재주나 부리는 전문 축귀자일 뿐이었다. (162p)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채찍질당해 멍든 몸으로 필라투스 앞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예수가 받은 질문이 단 하나였다는 점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와 폭도를 다스리는 표준적인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앞에 끌려와 대답해야 했던 유일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193p)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 정도 창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삶에서 혁명적 열정의 흔적을 모두 제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인들의 책임을 완전히 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뜻하지 않게 대제사장 카야파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대제사장이 예수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는 합법적으로 예수를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속여 이 비극적인 오판을 하게 했던 것이다. 가엾은 필라투스는 예수를 살리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끝까지 예수의 피를 요구했고, 결국 필라투스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준 것이다. 실제로, 더 늦게 저술된 복음서일수록 (해당 복음서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파괴 사건과 시기적으로 멀수록),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필라투스의 역할은 감소한다.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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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프랑크 비베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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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ter Reading                                                                                                                                     

 

  

​  흔히들 정보화 사회라 불리는 요즘은 소비자들이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에 따라 기업에게는 생산품의 질을 넘어서 윤리적 책임 또한 평가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다양한 정보 속에는 정확한 정보뿐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정보와 근거 없는 정보 또한 분별없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 정보의 신뢰성 또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데, 정확한 정보와 부정확한 정보를 나누는 판단은 어떤 객관적인 '평가 기관'이나 '매체'등의 도움이 없다면, 소비자가 직접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보다 날 선 눈을 가지게 된 소비자들과 마녀사냥처럼 창을 던지는 소비자들에 의해서, 기업의 실수는 사실보다 크게 부풀려져 비판되거나, 어떤 경우에는 기업의 노력이 물거품 될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정보, 그리고 조금 더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기업의 윤리 속에서 소비자의 통찰력이 더없이 중요하게 여겨지며, 기업들도 경영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많은 것들을 보다 투명하게 소비자들에 제공할 의무가 더해지고 있는 단계에 놓여있다.

 

  윤리와 시장, 그 사이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일반인들이 다소 접근하기 쉽지 않은 '윤리학'의 기본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기업의 모습들을 따져보고 있는데 이 부분은 1부인 '공정성이란 무엇인가'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기업의 윤리를 평가한다는 이 책은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라는 다소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부터 잡고 들어간다. 몇몇 윤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기업을 인격체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인격까지 부여한다."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나온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도덕적 자질의 총합이 아닌, 기업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과 기업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관련해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2부에서는 각 기업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평가한다. 저자가 고른 기업들은 세계 모든 나라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만한 기업들 대부분 - 맥도날드, 애플, 코카콜라, 아마존, 페이스북 -을 다루고 있으며, 저자인 프랑크 비베의 모국인 독일 기업들도 여럿 등장시킨다. (아무래도 독일 기업들이 많이 등장하긴 한다.) 윤리적 문제의 영역에서 이러한 기업들의 점수는 하청업자의 노동조건 - 개발도상국, 아동 노동 등과 같은 - 과 원자재 등과 관련한 환경적인 측면의 영향도 받는다.

 

  평가를 받은 기업들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기업을 몇몇 살펴보면, 시 유일하게 별 다섯 개를 받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별 다섯 개라니, "이 기업이 이렇게 완벽한 기업이었나." 하는 질문과 함께 읽어내려간 부분에서는, 이 책이 원래 기업의 창업주가 아닌 기업이 논의의 대상이지만 다른 모든 재단을 압도하는 '게이츠 재단'을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고점을 받았다는 것이 나와 있다. 물론 게이츠 재단도 환경 파괴의 기업에 투자하거나, 게이츠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 재단을 운영한다거나 재산의 축적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재단 그 자체는 너무나 훌륭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기업은 환경이나 에너지 소비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플러스 점수를 받기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어쩔 수 없이 재단의 힘을 강력하게 적용할 수 없는 예외의 대상인 것이다.
 

 유일하게 등장하는 우리나라 기업 삼성의 경우, 생각보다는 별점이 보통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서 '삼성'은 가장 막대한 힘을 갖고 있는 기업이면서도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기업 중 하나다. 최근에는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영화가 개봉할 정도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비판을 강력하게 받고 있고, 생산품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선 큰 관심의 대상인데, 세계의 전자제품 시장에서도 '삼성전자'는 저자가 50개의 기업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어느새 '강세'로 변화해있다. 별점에 대해 조금 걱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보통의 점수를 받게 된 이유는 하청업체의 의존도가 낮고 기업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도 '삼성전자'는 많은 분쟁을 안고 있는데, 세계 시장에서 조금 더 높이 발돋움하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더욱더 투명한 프로필이 필요하다는 과제를 받았다.

 

 저자는 "흔히들 탄식하는 것처럼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잘 사는 나라의 소비자인 우리는 누구보다 힘이 세다. 우리의 돈이 누구에게로 갈지 결정하는 사람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소비자들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하기보다는 기업의 윤리적 측면을 제대로 평가하고 기업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기 위한 책임감까지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인터넷에서 마구잡이로 떠도는 부정확한 정보보다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소비자들의 똑똑한 선택을 도울만한 이러한 책들이 더욱더 필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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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기업들이 거짓말하기가 점점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휴대폰으로 공장의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거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릴 수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기업을 감시하는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짓말은 곧 들통나기 마련이다. 다른 한편으론 다음의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기업은 흔히들 하는 비유처럼 결코 슈퍼 뇌를 가진 몇몇 수뇌부와 영혼 없는 수천 명의 직원들로 이루어진 괴물이 아니다. 모든 대단위 공장과 경영진 내부에는 사회적 문제와 환경에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 문제들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여론과 소비자들이 그런 문제에 관심을 보일수록 기업 내에서 그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입지는 더욱 강해질 수 있다. (13p)
  ​제약 회사의 또 다른 특수한 문제는 실험과 관련되어 있다. 동물 실험은 동물 보호 단체의 비난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약을 사람에게 실험하려면 더 큰 윤리 문제가 불거진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실시하는 실험은 아주 민감한 문제다.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나 현지의 느슨한 규정을 악용한다는 비난이 즉각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비판에서는 가끔 한 가지 사실이 간과된다. 현대 의학만큼 삶의 질을 개선한 분야가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중병에 걸린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현대 의학의 이런 유용성을 인지한 사람은 제약 회사가 받는 비난을 좀더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78p, 노바티스)
  베르너 회장은 1퍼센트의 수익만으로 만족하며, 그 이상의 수익은 모두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고객에게 돌려주겠다고 공언했다. 물론 독일 소매업의 영업 이익률 (매출에서 영업 이익이 차지하는 비율)은 어차피 그리 높지 않다. 영업 이익률을 자기 자본 이익률 (자기 자본을 사용해 이익을 내는 비율)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어쨌든 그럼에도 베르너 회장의 이런 자기 절제적 태도는 <우리에게 돈만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신호를 만천하에 보내고 있는 셈이다. (98p, 데엠)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일본이 특히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전자 산업과 자​동차 분야에서 일본을 몰아붙이고 있다. 현대와 기아는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 같은 차에 익숙해져 있는 독일 소비자들에게도 더는 외국의 이름 없는 자동차가 아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토요타를 비롯한 일본 자동차들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그런 경쟁은 전자 산업 분야에서 더 강력하다. 전에는 소니가 세계를 매혹시키는 브랜드였다면 지금은 삼성전자가 선두로 올라섰다. 삼성은 그사이 애플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움을 가질 정도로 강해졌다. 실제로 애플과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삼성이다.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두 기업 사이에서 벌어지는 특허 전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66p, 삼성전자)
  필립모리스는 웹사이트에서 흡연의 위험을 알리는 동시에 세계보건기구로 바로 연결되도록 링크를 걸어 놓았다. 거기에 적힌 핵심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담배 제품에 대한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규제에는 찬성하지만, 성인 흡연자가 자유롭게 담배를 사서 피우는 것을 방해하거나 합법적인 담배 거래를 불필요한 방식으로 어렵게 하는 규정은 지지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담배 광고의 의무 조건, 공공건물에서의 흡연 제한, 법적 최저 연령 등에 대한 찬성 의견이 이어진다. 결국 필립모리스도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는 바꾸지 못할 시대적 흐름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259p, 필립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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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녀
케이티 워드 지음, 고유라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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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장의 초상화와 일곱 명의 예술가, 그리고 일곱 명의 '책 읽는 여인들'"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기분 좋다. 그리고, 책을 소재로 하는 책은 언제나 반갑다. 그러나 '책 읽는 소녀'라는 제목은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무난하고 특징 없게 들렸다. 그래도, 일곱 가지 이야기를 묶을 수 있는 제목이라면 이것이 유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이 소설은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책 읽는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깃거리까지 집어넣는다. 짧은 소설의 제목이 등장하고 나면 그림에 대한 정보와 QR 코드가 제공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고 그림을 볼 것인지, 읽기 전에 그림을 보고 먼저 상상해보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소설 속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가 된다. 첫 번째 단편을 예로 들면, 명화 '수태고지'가 등장하면서 그 그림의 모델이 되는 한 소녀의 삶을 간단하게 다룬다. 그리고 그 소설과 간혹 소설 속의 주인공은 다음에 올 소설들의 소스가 되기도 한다.

  그림과 텍스트를 연결 짓는 소재 - 여기서는 실제 인물들까지 붙여 넣었지만 - 는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접했던 적이 있다. 피카소의 삶을 소설로 재현해낸 <피카소의 색>에서는 물론 소설의 주인공이 화가이기 때문에 그림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시되지만, <책 읽는 소녀>와의 공통점은 QR코드로 그림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페이지에 그림을 넣어주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때로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마치 그냥 아무것도 연상되는 것 없이 쓰인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책을 보다가 그림이 나오는 순간, 퍼즐처럼 이야기를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QR코드를 하나씩 찍는 수고 없이도 이런 효과를 볼 수도 있다. 황경신의 <눈을 감으면>에서는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의 말이 끝나는 시점에서 페이지에 꽉 차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을 보는 순간, 이야기는 더욱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텍스트로만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시각적인 그림으로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QR코드를 책에 심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읽다가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한 장의 사진에도 수많은 것들이 들어있듯이, 한 장의 그림에도 그 그림을 만들어낸 사람의 추억 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어떤 예술작품들 중에는 묘하게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그림들이 많다. (물론 평소에 그런 그림들을 보고 굳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안의 어떤 소품들, 그리고 모델의 표정, 그 안의 상황들... 그것들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을 준다. 그림과 이야기를 연결짓는 상상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작가들에게도 흥미롭고, 감미로운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인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의 문체 때문일까, 특이한 분위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저 무난하게 읽히는 정도다. 기대보다는 살짝 달랐지만, 특별하고 새로운 시도의 책을 접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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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에서 일어난 화가는 그녀가 건드리지도 않은 올리브 접시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올리브를 집어 그녀에게 내밀지만, 그녀는 또다시 거절한다. 그는 올리브를 먹고 손바닥에 뱉은 씨를 그대로 들고 있다. "올리브를 먹을 때마다 난 씨를 뱉고 버린다. 넌 올리브를 먹고 남은 씨를 어떻게 하느냐?" "저도 버려요."

  "그래. 사람들이 올리브를 한 알씩 먹을 때마다 그 씨앗을 전부 땅에 심어 나무로 자라게 한다면 이상하겠지. 너도 알다시피 올리브나무는 신성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테나라 불리는 여신이 포세이돈 신과 어느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고, 그 도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올리브 나무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승리했단다. 난 또 하나의 위대한 도시가 우리처럼 강력한 수호자를 지녔다는 것이 마음에 든단다.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훌륭한 이야기지. 아무 이유도 없이 다 자란 올리브나무를 베어낸다는 것은 너무나 파괴적인 생각이다." "정말 나쁜 생각이에요...." "정말 나쁜 짓이지."

  (...) "넌 신께 기도를 올리지만,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 나는 어째서 신이 너와 내가 만나도록 했는지를 묻는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없구나. 조심하거라, 라우라 아녤리.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말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어린 라우라야, 그건 네 결정이다. 네 양심을 보듬어야 하고 네 행동이 결정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은 바로 너란다." (69p,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일요일이 돌아오자 사람들이 온다. 미친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괴롭힌다. 그들은 입장료를 냈고, 유흥거리를 요구한다. 문명인의 옷을 입은 그들은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지만, 못된 계략을 꾸며 그를 썩은 냄새가 풍기는 어두운 불길이 타오르는 구멍에 던져넣고, 온갖 벌레들이 그의 살갗을 타고 기어올라 그를 산 채로 잡아먹게 할 것이다. 그는 살갗을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느낄 수 있다. 벌레들은 그의 몸속에도 있다.

  방문객들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즐거워한다. 그가 우스운 몸짓을 하며 허공으로 팔을 아무렇게나 흔들 때마다 그들은 재밌어 한다.

  "뭘 하는 거죠? 풀무질 흉내를 내는 건가요? 아니면 끌로 뭔가 새기는 흉내를 내는 건가요? 있지도 않은 못을 박는 건가요?"

 그들은 그가 자기만의 상상 속에서 대장간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84p, 그녀가 빛 속으로 걸어나올 때)

  그들을 갈라놓았던 세월이 이렇게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깊이 교감한다.

  "공평하지 않았어. 네가 원했잖아. 난 아니었고. 서로 바꿔서 해볼 수 있었다면...."

  "하지만 바꿀 수가 없잖아. 차라리 잘된 거야."

  그들은 서로 꼭 붙어 팔짱을 끼고 추위에 맞서 앞으로 걸어간다. (249p, 골트 가의 쌍둥이 자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전 아름다움을 위해 시빌을 만들었어요. 우리 인간들은 직관적으로 아름다운 사물들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죠. 우리는 아름다움에는 힘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좇고 그래서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키죠. 아름다운 사물들에는 목소리가 있어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과거와 결부된 목소리들이죠."

  "당신의 발명품은 예술작품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입니까?"

  "시빌은 우리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게 해줘요. 그리고 전 시간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빌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했겠죠. 우리는 아직 시빌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릅니다. 시빌은 우리에게 더 보여줄 것이 많아요."

  "자랑스러운 부모처럼 말씀하시네요."

  "예전과는 달라요, 디렉터 페르난드. 지난 세대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진품인 작품들을 직접 볼 수가 없어요. 우리는 메쉬에 접속해서 정부가 보증하는 작품들과 개인 소장품들을 고스란히 모사한 작품들을 볼 수는 있지요. 하지만 후대를 위해 보호하고 있는 진짜 작품들을 우리는 대부분 보지 못해요. 우리는 전 세대보다 불행해요. 우리는 동굴 속의 죄수가 된 건가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빌은 더 열등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빌을 통해 경험하는 예술작품들은 진품과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399p, 클라우드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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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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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After Reading                                                                                                                                              
  
 
  ​인간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사례는 현대인 지금도 간혹 일어나고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끔찍하고 추악한 억압 중 하나는 '노예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는 일본의 위안부와 나치의 학살 등을 떠올린다.) '인간'이라는 이름 하에 왜 등급이 나눠져야 하는 것이며, "우리는 당신들보다 우월하다."라는 말도 안 되는 무식한 배짱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최근에 읽은 '만델라 평전'에서도 '노예제도'는 끔찍한 모습으로 설명된다. 1800년대, 미국에서 '노예 해방령'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남부의 농장 쪽에서는 오랫동안 극심한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때 아마도, '솔로몬 노섭'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북부에 살고 있던, '자유인' 증명서를 받은 흑인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길에서 납치되어 자유를 짓밟히고 노예로 팔리게 된다.
  ​그 12년 동안의 일기가 바로 <노예 12년>이다. 그러니까, 이건 저자의 실제 경험이 담긴 에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봐왔던 노예 소설들과는  - 어릴 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등 - 다른 무언가를 전달한다. 여러 주인들을 거치면서 힘든 노동을 겪고, 거의 동물 취급을 당하는 다른 노예들을 목격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장 특별한 점은 화자의 특수성에서 나온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고된 노동과 핍박을 받아온 여타 많은 노예들과는 달리 노섭은 자유인이었고 (흑인이었지만 법적 제도를 통해 인권을 보장받았다 ) 결혼을 해서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운하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고, 똑똑하고 바이올린마저 멋지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도 "자유에 대한, 백인과의 똑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과거가 있었다.' 그래서 노섭은 어떤 권력에의 음모로 노예가 되고,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는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해낸 이 책을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런 정신력은 자유를 되찾기 위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다.
  ​'노예 제도'라고 하면 생각나는 장면들, 흉악한 주인이 온갖 이유를 만들어 노예들을 억압하는 장면들은 이 책 속에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등장하지만, 예외적인 장면들도 등장한다. 저자 솔로몬 노섭이 만난 주인들 (그를 산)의 경우, 포악하고 인간이길 포기한 주인들이 있는 반면에 몇 년 동안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었던 주인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들의 재주를 인정하고, 적당한 노동과 휴식을 주고 인간으로서 보살핀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끔찍한 장면들을 보고 굳어진 마음을 조금 풀어내릴 수는 있었지만, 여기에도 역시 의문은 남는다. 그들에게 적당한 대우를 해주더라도, 그들을 '소유하는 것' 그 자체에 인권 유린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면 많은 말들이 필요하겠지만, 그 제도를 행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인간적인 행동이든, 비인간적인 행동이든 '노예 제도'는 그 자체로서 야만적이고 상상하지 못할 끔찍한 제도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노예로서의 삶. 솔로몬 노섭이 경험하고 목격한 그들의 삶은 글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과 행실 모두에서 바람직한 여성 노예 '패치'가 인간으로서 가장 모욕적인 처벌을 받았을 때, 노섭과 동료들은 천국 - 노예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그들에게는 지상낙원인 - 으로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시련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예 12년> 속의 '노섭'은 비로소 자유를 찾은 모습으로 결말을 맞이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를 완벽하게 되찾지 못했다. 책이 많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어떤 강연장에서는 야유마저 받았다고 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노섭의, 책에 나온 이후의 삶을 부정적으로 추측한다. 다시 납치되어 노예로 되돌아갔거나, 가난으로 인해 죽었거나, 살해되었거나,라는 것이다. 물론 낙관적인 견해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이런 추측들이 난무한다. 그에게도 '자유'는 죽음으로서만 넘어설 수 있는, 높고 높은 언덕이었던 것일까.
 
  자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으로서만 되찾을 수 있는 그들의 자유는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 것인가. "잃어버리기는 너무도 쉽고 되찾기는 너무도 어려운" '자유'.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자유를 부르짖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왜 세상은 이토록 부조리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할 순 없는 것일까.
 
 
 
​  Underline                                                                                                                                                     
 
 
 
  ​그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유에 대한 비밀스러운 욕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러 몇몇은 도주하겠다는 아주 뜨거운 열망을 표현했고, 그걸 실현할 최선의 방법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붙잡혀서 돌아가게 될 때의 처벌을 그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어떤 경우가 됐뜬 분명히, 처벌의 두려움이 그들의 시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북부의 자유로운 공기를 숨 쉬며 살아왔던 터라, 내 가슴에도 백인들의 가슴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감정과 정서가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나아가 나보다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 적어도 그중 일부와는 지능도 다를 게 없다는 걸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비참하게 노예로 살아간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지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독립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노예제의 원칙을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법률 혹은 그런 종교의 정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자랑스레 말할 수 있지만, 나를 찾아온 어느 누구에게도 기회를 엿보라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33p)
 
  불행한 삶을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지상의 슬픔이 끝나려 할 때 죽음에 대한 명상 - 지치고 힘든 몸을 위한 안식처로서의 무덤에 대한 명상 - 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자꾸 거기에 빠지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그런 명상은 위기의 순간에는 사라진다. 죽을 힘을 다하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죽음의 대왕> 앞에서 두려움 없이 버틸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생명은 소중하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도 생명을 위해 싸운다. 그 순간 나에게, 노예가 되어 학대받는 나에게 생명은 소중했다. (136p)
  ​나는 그날 하루 온종일 내가 겪은 다양한 두려움과 감정에 관해 캐물었고, 언제든 기도하고 싶은 때가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온 세상에서 버림받은 느낌이었으며, 내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고 대답했다. 그럴 때면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창조주를 향하기 마련이지, 라고 그는 말했다. 잘나가고, 다치거나 두려울 일이 없을 때면 사람은 신을 기억하지 않으며, 신을 부정하게 되지만, 그러나 사람을 위험의 한가운데 놓고 도움의 손길을 막아 버리고, 그 앞에 무덤을 열어 놓으면 - 그제야, 고난의 시간이 닥쳐서야, 비웃으며 믿지 않던 그 사람은 신의 품 외에는 다른 희망이나 피난처, 안전한 곳이 없다고 느끼며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150p)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인간적인 주인들도 있을 것이다. - 헐벗고 반쯤 굶주린 비참한 노예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잘 입고 잘 먹고 행복한 노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목격한 그런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용인하는 제도는 잔인하고 불공평하고 야만적인 제도이다. 비천한 삶을 있는 그대로, 또는 그렇지 않게 묘사하는 소설을 쓸 수는 있다. - 어쩌면 진지한 척 엄숙한 태도로, 무지라는 축복을 자세하게 열거할 수도 있다 - 노예 생활의 즐거움에 관해 안락의자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어 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밭에서 노예와 함께 일하도록 해보라 - 노예들과 오두막에서 같이 자고 - 곡물 껍질을 같이 먹도록 해보라. 노예처럼 채찍질을 당하고, 사냥을 당하고, 짓밟히도록 해보라. 그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갖고 돌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가련한 노예의 마음을 알도록 해보라 - 노예의 비밀스러운 생각들 - 백인이 듣는 곳에선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생각을 알아보도록 해보라. 밤에 깨어있는 노예 옆에 조용히 앉아 있도록 해보라 -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관해 노예와 진심 어린 믿음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해보라. 그러면 노예들 100명 가운데 99명은 충분히 똑똑해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사람들 자신과 똑같이 열정적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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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짜툰 1 - 고양이 체온을 닮은 고양이 만화 뽀짜툰 1
채유리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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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을 키우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부모님 때문에 그렇게 좋아했던 강아지를 키워본 적도 없었다. (그때는 나도 고양이에 관심이 없었다.) 늦둥이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동생이 워낙 동물을 좋아해서인지, 우리 집에도 동물들이 꽤나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동물들은 어떤 한정된 공간에서 나올 수 없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거북이, 잉꼬 새, 햄스터, 관찰용 곤충들 같은 것들. 그런데 철통보안의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침범한 적이 있었다. 물론 실내가 아니라, 실외의 경우다.

  

 

 

  아파트 1층이라 작은 텃밭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집에서는 가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꽤 오랫동안, 그리고 큰 소리로 들리는 걸 보면 마당까지 길냥이들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어느 날 굉장히 크게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당 한쪽 구석에 새끼 고양이 네 마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본 고양이 중에 가장 예쁜 얼굴을 가진 고양이들이었다. 내 손바닥보다 살짝 큰 크기였다. 동물을 무지막지하게 사랑하는 동생이 키우고 싶다며 난리가 났다. 나도 딱 한 마리만 데려와서 길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의 말에 의하면) 다른 쪽에 어미로 보이는 고양이가 있었다고 한다. 어미가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들을 데려올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그리고 만약 데려온다 해도 자신은 없었다. 이런저런 장애물이 많이 떠올랐다.


 

   ​책임 지지 못할 거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데려오는 것은 안될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비어있는 집에 혼자 놔둘게 뻔했고, 제대로 된 지식으로 키워보기도 겁났다. 어찌 보면 어미가 함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어떤 애완동물과 함께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외로움을 주지 않고 사랑만 주면서 잘 키워나갈 수 있을까?

 

 

  이 귀여운 만화의 작가는 고양이 네 마리를 키운다. 자유롭게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게 나는 부러웠지만, 작가에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걸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동물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작가는 자취를 하면서, 없는 형편에도 고양이를 키우며 생활했다. 처음에는 두 마리, 그리고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가 어떤 우연한 기회로 작가의 곁으로 들어왔고, 그녀는 그 기회를 '일단 잡고 봤다.' 지나친 애착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작가의 동물 사랑은 남달랐다. 
  책 속에는 귀여운 그림과 함께 네 마리의 고양이가 작가의 집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 그리고 고양이를 싫어하고 귀찮아했던 다른 가족들이 서서히 4마리의 고양이를 가족으로 인식하는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와 함께 애완동물에 대한 책임과 관심에 대한 문제도 짧은 만화 속에서 이야기한다. 작가가 한 많은 경험들을 느껴보지 못했으니 모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에 얼마나 큰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뽀짜툰>, 고양이 체온처럼 따뜻하고, 고양이의 털처럼 기분 좋아지는 만화다. (뽀짜툰이라는 이름은 네마리의 고양이 중 형제 고양이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듯 하다.)

 

 

 

 

<뽀짜툰>은 다음 웹툰에서 연재 중입니다. 고양이들이 너무너무 귀여워요 ;)

위 그림을 누르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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