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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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 황금가지 

갑자기 어긋나버린 기억, '나'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하다

 

 

 

​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와 미래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억'때문이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지배하고, 우리 삶의 결정에 관여하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보내온 삶을 잊어버리는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대비하려 한다. '기억상실', 만약 내 기억이 갑자기 없어지고 내가 알던 모든 기억이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내가 알고 있던 삶이 진짜 내 삶이 아니라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  일러스트레이터인 '도리야마'는 결혼 후 처음 맞게 된 생일날 집으로 들어와 아내 미유키의 죽은 모습을 발견한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마음을 다잡을 시간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아내의 목소리다. 아내는 자신 앞에 죽어있는데, 전화 속의 아내는 태연하게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경찰이 다짜고짜 찾아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순식간에 아내의 시체는 사라져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당황하던 그에게 다행히도 한줄기 빛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도와주려한다. 그리고 추격을 피하다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도와주게 되는 '지아키'라는 여성의 등장. 그녀는 누구이고, 왜 자신은 이렇게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니고 있는 것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짙어지는 동시에, 도리야마는 자신의 정체 또한 흐릿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분명히 알던 사람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갑자기 영어 원서가 술술 읽히고, 생전 알지 못하던 화학재료를 훔쳐서 도주에 이용하기도 한다. 나 자신이 '무명인'이 된 상황, 마치 영화 <트루먼쇼>를 생각하게 만드는 두려운 앞날, '도리야마'는 점점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면서 자신의 삶의 기억조각을 맞춰가기 시작한다.


  원래 게놈 해저드 (Genome Hazard)라는 원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일반적인 장르소설의 스릴과 더불어, 과학적인 상식을 보탠 소설이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명인'이 되버린다는 발상은 도플갱어, 쌍둥이, 기억상실증, 다중인격 같은 소재들을 상상하게 만드는데,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다소 판타지스러운 이야기 전개를 상상했었지만, 뇌과학적인 박식한 지식이 펼쳐지면서 이야기 구상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뒷부분에 가서 조금 흐지부지해진 감이 있기는 하지만 가독성만큼은 참 좋은 소설이었다.

 

 

* 이 책은 한일 유명 배우 김효진과 니시지마 히데토시 주연으로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왠지 영화로 볼때 더 스릴있게 진행될 것 같기는 한데,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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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제까지 미유키와 내가 살고 있었다. 그런 집에 6개월이나 전부터 나카니시라는 부부가 살고 있다니. 누군가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지금 말할 수 있는건 당신 머리가 어디 이상하지 않느냐 하는 정도죠. 누군가도 말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여자가 한 말이 한 가지 적중하고 있다는 거라고. (111p)

"무슨 소리예요, 그건? 당신이 말한 건 전부 엉터리잖아요. 이게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뭐예요?"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면 더 근사하게 했을 겁니다."

"그래서요?"

"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실을, 내 스스로가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걸 말씀드리고 있다고요. 그런데 그게 실제 사실과 다르다, 그런 이야기죠."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군요. 당신이 미쳤거나 이 세상이 미쳤거나. 그중 어느 쪽이에요?"

나는 오른손을 구부려 시계를 보았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사건이 있은 지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조각조각 영상이 되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미쳐 있고, 지리멸렬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120p)

나는 하나의 캔버스에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이었다. 한 장의 그림 밑에 또 한 장의 다른 그림이 숨어 있었다. 위에 칠해진 물감이 조금씩 벗겨지고, 벗겨진 곳부터 아래에 칠해진 물감이 서서히 드러나 보였다.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질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확실한 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가슴 어딘가에 떨쳐 버리기 힘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꿈쩍도 하지 않으려 했다.

위에 칠해진 그림물감은 요 이삼일 사이에 점점 벗겨져 떨어졌다. 1년 동안이나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벗겨지기 시작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유코가 바닥에 늘어놓은 촛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에는 소인과 유인이 있다. 유인이 그렇다 치더라도, 소인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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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중 야구부
김형주 지음 / 책에이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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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중 야구부> 김형주 / 책에이름

꼴찌들의 반란, 실화여서 더 아름다운 아이들의 기적

 

 

 

 

  ​한때 몇몇 스포츠 영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스포츠를 대상으로 한 영화는 이전까지 많은 관객들을 끌어오거나 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예외적으로 그 영화들은 큰 성공을 맛봤다. 그들의 레파토리는 거의 비슷하다. "어리숙한 사람들이 팀을 꾸려 때로는 패배를 맛보기도 하며, 기적처럼 승리를 맞이한다. 그들의 승리는 극 속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극 밖에서의 관객들에게 동시에 희망이 된다." 이 비슷한 레파토리를 보고, 우리가 식상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혹은 배제하고 큰 감동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화'를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놀라운 현실은 생각보다 곳곳에 존재하는 거라는 생각을 종종 들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 영화의 범주에는 들지 않았지만 소설 <원동중 야구부>의 이야기도 그렇다. 경남 양산에 위치하고 있는 원동면은 원래 비옥한 땅과 물길로 꽤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 폭이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이전하고, 아이들이 가득한 학교마저 비어가면서 원동중학교는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양산의 희망은 '야구'였다. 양산 야구 대표 팀과 리틀 야구단이 많은 성과를 올려가고 있었고, 중학교 야구부를 만들어야 했다. 그때 허구연 해설위원은 크나큰 결정을 하게 된다. 원동중을 '야구 특성화 학교'로 만들겠다는 것. 전교생이 38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를 야구협회에 등록시키고 한화의 신민기 선수를 영입하여 감독을 하게 하고, 그나마 '야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들을 뽑아 훈련시켰다. 야구라면 그저 즐겁기만 했던 아이들은, 고된 훈련 속에서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차츰 성장해 나간다.

  공부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원동중은, 모범학교를 만들기 위해 성적에도 제한을 두었다. 점수가 낮은 학생들은 시합에 나갈 수 없었고, 부족한 아이들은 아침 보충을 들어야 했다. 고된 훈련, 그리고 공부까지 놓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두 배 혹은 몇 배나 더 힘들었지만, 야구에 대한 집념과 팀의 결속력으로, 서로를 다독여가면서 결국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소설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흘러가지만, '야구'에 빠지고 자신의 소속감을 찾아가며 꿈을 이루고자 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참 예뻤다. 아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도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참 예뻤다. 각각의 사정이 있던 친구, 선후배들을 서로 보듬어가며 이해하고 팀을 위해 노력하던 모습이 소설 속에서 표현된 것보다도 더욱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꼴찌들의 반란과 여러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난 뒤의 승리가 퍽 스릴 있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우리가 수많은 실화 원작 영화를 보고 느꼈던 큰 감동처럼, 이 책도 실제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한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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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야구인들은 야구를 흔히 인생에 비유한다. 야구의 이닝이 9이닝이듯이 우리의 인생을 90으로 보는 거지. 너희들은 지금 십대니까 1회 초에 해당하는 거고, 이제 막 인생의 경기가 시작된 거야. 생각해봐라. 앞으로 끌고 가야 할 경기가 8이닝이나 남았는데, 기본기가 막장이면 무슨 수로 버틸 건지 말이다. 살면서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성공을 해야 인생이 재미있어지듯이 야구도 마찬가지다. 기본기를 살려서 3루타도 치고 홈런도 쳐야 야구할 맛이 나지 않겠니? 도루하다가 잡히고, 파울볼이나 치고, 병살타나 맞는 야구를 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기본기 훈련이 지겨워도 이겨내야 한다. 내가 확신하는데 1년 후에는 기본기는 물론이고 너희들이 해야 할 운동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큰 발전이 있을 거야." (62p)

아이들은 다시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모두 바닷물 속으로 몸을 풍덩 담갔다. 아이들은 목까지 바닷물이 차오른 상태에서 다 같이 어깨동무를 했다. 차가운 물속에서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약간의 온기마저 느껴졌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악을 쓰듯이 외쳤다.

"원동중 야구부 파이팅!!!"

"원동, 원동, 아자, 아자, 아자!!!"

바닷물 속에 몸을 담그고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생전 처음 진한 동료애를 느꼈다. 아버지와 어머니, 선생님과 친구들은 절대 대신해줄 수 없는 동료애. 이제 아이들은 추운 겨울 바다에서 느꼈던 동료애를 영원히 기억할 터였다. 순간, 아이들의 눈빛이 바다 위를 비추는 태양보다 강하게 빛났다. (146p)



"훈이, 파이팅! 젖 묵던 힘까지 다하래이!"

관중석의 응원에 힘입은 훈이가 3루를 지나 홈까지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우샤인 볼트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홈인!

5대 4로 원동중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프로야구에서도 보기 힘든 드라마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더니, 내 살다 살다 이런 극적인 장면은 처음인기라. 원동중 야구부! 7회 말 2아웃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아이가."

시의원이 놀랍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학부모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경기를 끝낸 아이들도 이내 하나로 뒤엉켰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산 구덕운동장은 이내 울음바다가 되었다. (234p)



아이들은 각자의 포지션으로 돌아가면서 서로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이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하면 된다는 거을, 그리고 값진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번 게임을 최선을 다해서 뛰어볼 생각이었다. 비록 연습게임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이번 게임도 또 하나의 실전이었다. (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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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21
찰스 디킨스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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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 열린책들

족쇄가 되버린 인생역전의 꿈,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요

 

 

 

 

 After Reading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 하늘에서 돈이 마구 쏟아졌으면 좋겠다" 요행을 바라는 것, 어리석은 일이지만 가끔은 당신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건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엄청나게 극소한 확률이 주어지는 일)이지만 혹시 로또에 당첨되거나 상속돼있는 유산을 받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할까? 아마도 제일 먼저 당혹스럽고 어리벙벙할 것이고, 정신을 차린 후엔 엄청난 기쁨이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사람들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인생역전, 갑자기 뒤바뀐 삶은 감당하기 너무 버겁거나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인생역전 스토리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많은 곳에서 다뤄지는데, 그중 꽤 오래전에 쓰였을 이야기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이 바로 이 행운의 사나이다. 소년 '핍'은 어려서부터 누나와 매형 '조'의 집에서 '손수' 키워졌다. (손수 키워졌다는 것은 모유가 아닌 분유나 우유에 적신 빵조각을 먹이거나, 혹은 매를 때려 키운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소설은 핍이 마을의 묘지에서 탈옥수를 만나 협박을 당하고, 그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걸로 시작된다. 탈옥수의 협박에 벌벌 떨어 굴복하고 몰래 음식을 가져다준 '핍'의 행동은 오랫동안 소년의 삶 속에서 죄의식으로 남아 있게 된다. 다소 괴팍한 누나와 스무 살 차이의 '조'와 함께 생활하던 어리숙한 소년 '핍'에게 어느 날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은둔자 '미스 해비셤'을 돕는 역할이 주어지게 되는데, 해비셤의 양녀인 '에스텔라'에게 마음을 뺏기게 된다. 그러나 항상 그를 멸시하는 '에스텔라'의 행동으로 '신사가 되고 싶다'라는 바람이 '핍'에게 생기게 되고, 어느 날 그 바람을 이룰 수 있는 행운이 그에게 찾아오게 된다. 바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유산을 받고, 그 대신에 '제대로 된 신사가 되어야 한다'라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고, 멋진 신사까지 되는 꿈을 이루게 된 '핍'. 과연 그는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책표지에 나와있는 그림, <하편>에서 기울어진 의자와 흔들리는 촛불, 금방이라도 넘어질듯한 유리 잔은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까. 사랑하는 여자를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멋진 신사가 되고자 하는 순수한 바램은 영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만나면서 조금씩 흔들리게 되고, 갑자기 신분이 상승한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핍'은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씩 걷혀지는 비밀들과 추악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지를, 그리고 무엇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를, 그리고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꽤 많은 사람들이 예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소설의 구조 때문에 지루할 틈 없이 편안하고 재밌게 읽어낼 수 있다. 또한 깔끔하고 통쾌한 마무리가 인상적이기도 하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가 왠지 정석적인(?) 고전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이 소설이 1860년대에 주간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하니, 지금 읽어도 절대 어색하지 않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소설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Underline                                                                                                                                                  

 

 

  ​한때 조의 도제가 되어 소매 깃을 접어 올리고 대장간에 들어가게 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상 내 손아귀 안에 그런 현실이 쥐어지자 내가 싸구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먼지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그리고 비교를 해본다면 모루가 깃털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겁고 육중한 짐이 내 일상의 기억 위에 놓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뿐이었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 훗날 내 인생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지루한 인내의 삶 말고는 그 어떤 일에도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도록 한동안 모든 재미난 일들과 낭만적인 일들 위로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발을 들여놓은 조의 도제 생활이라는 길을 따라 내 인생행로가 쭉 펼쳐져 있던 그때처럼 그런 커튼이 너무나도 무겁고 공허하게 드리워진 적은 결코 없었다. (상권, 184p)

  세상의 모든 사기꾼들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사기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런데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구실들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자신을 속인 사람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든 0.5크라운짜리 가짜 동전을 아무것도 모르고 받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 낸 가짜 동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 동전인 양 생각하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낯모르는 사람이 친절을 베풀며 안전을 위해 내 은행권 지폐들을 꼬깃꼬깃 접어 주겠다는 구실로 그것들을 사취한 뒤 내게 가짜 지폐들을 내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손기술은 내가 스스로 접어서 진짜 지폐들인 양 나 자신에게 건네고 있는 내 손기술에 비하면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 것인가! (상권, 384p)

  아직도 세 시간가량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모두 소비하면서, 이처럼 감옥과 온갖 죄악의 오점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다는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때의 그 오점은 퇴색해 버리긴 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그동안 두세 차례 튀어나와 내 앞에 재등장했었다는 생각, 그러다 그 오점이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내 운명과 내 행운에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 등을 했다. 이런 생각들에 열중하면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도도하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에스텔라도 생각했다. 그리고 감옥과 그녀가 너무 대조되어 끔찍한 혐오감을 느꼈다. (상권, 28p)

  「그래, 이게 바로 -」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가 두 손으로 내 두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이게 바로 내가 만든 신사다 이거지! 진짜배기 신사 말이다! 너를 바라만 봐도 좋다, 핍! 내 요구 조건은 그저 네 옆에 서서 바라만 보는 거란다, 얘야!」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손을 빼냈고, 그제야 내 처지를 숙고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쉰 목소리를 들으면서 양옆으로 잿빛 머리카락이 나 있고 주름이 깊게 파여 있는 그의 대머리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비로소 내가 어떤 육중한 쇠사슬에 묶여 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권, 14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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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14 - 편집자가 알아야 할 편집의 모든 것
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 열린책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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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열린책들 편집부 / 열린책들

편집에 관한 거의 모든 것, 책에 스며든 정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  대학교 신입생 때 책에 대한 관심이 커질 무렵, 자연스럽게 출판사에 대한 관심도 커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도 살짝 있었는데, 출판사의 세분화된 업무 중에서도 '편집' 일이 유독 끌렸다. 편집에 대한 정보도 거의 문외한이었고, 국어학적인 지식 또한 출중하진 않았지만 '편집'이라는 일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다. 아마도 그때, 이 책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이 책을 읽고 편집 업무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들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는데, 그만큼 '편집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든 문법이란 문법은 대부분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다른 외국어를 배울 때는 기본적으로 문법부터 짚고 넘어가면서 그 쓰디쓴 고생을 하곤 하는데, 이상하게도 한글 문법은 모국어라서 그런지 소홀히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편집 일의 기본이 되는 이 책의 첫 부분, 한글 맞춤법은 꽤 방대한 양을 뽐내고 있다. 공식적인 <한글 맞춤법>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과 예시까지 정확하고 상세하게 들어주는 이 부분은, 편집 업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띄어쓰기와 틀리기 쉬운 철자까지 확실하게 다루고 있으며 200페이지 가량이 넘는 이 부분을 보면, "저술은 인간이, 편집은 신이 한다 (스티븐 킹, 책의 뒤편에 나와 있다.)"는 말에 새삼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
 
 

 
 
  ​많은 외국도서들을 다루고 있는 열린책들 답게 외래어 표기법까지 다루고 있는데, 일단 우리에게 친밀한 영어, 중국어, 일본어 이외에도 절대 나올 거라고 여겨지지 않던 (세르보크로아트어, 체코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국가의 언어들까지 나와 있으니 또 한번 놀라게 된다.
 
 

 
 
 
  국어와 관련된 지식들 다음으로 책의 제작에 관한 것들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디자인적인 것이라던가 책을 구성하는 - 보통 사람들은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겠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궁금해할듯한 - 요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예전에 책 비닐을 싸는 포스팅을 올리면서 책의 여러 부분을 부르는 명칭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또한 우리나라 고유의 이름으로 책의 부분 명칭을 부르는 노력 또한 하고 있는데, '책발', '책입', '덧싸개' 같은 용어들은 거의 많이 들어보지 못 했던 명칭이지만, 왠지 올망졸망한 우리말 느낌이 나서 친근하다.

 
 
  ​그리고 이 책은 편집 기초 지식 테스트와 각종 부록들을 통해 마무리된다. 4백 페이지 남짓의 책은 왠지 책이라기보다는 사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가끔 국어적인 부분의 보충이 필요하거나 지식이 필요할 때 펼쳐봐도 좋을 듯하다. 편집 업무, 어떤 출판사든 행해지는 일들은 거의 비슷하다고 상상이 들지만, 독자 입장에서 이러한 책을 접하게 되니 뭔가 책에 대한 신뢰도도 커지고 책의 작은 글자 하나, 예쁘게 디자인된 띠지 하나가 더욱 정성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독자가 볼 수 없는 부분들을 이렇게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가. 책에 대한 관심, 출판사와 출판인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커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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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계십니까 -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권중서 지음,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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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계십니까> 권중서 글,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당을 다녔고, 그리 독실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종교는 서서히 내 삶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만약 어릴 때 어떤 종교도 갖지 못했다면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이 불교였다. 이 둘에게는 고요하고 신성한 느낌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느낌만은 전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의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찰'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그리고 얕은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곳곳의 산을 조금만 오르면 볼 수 있는 곳, 여행을 가서도 볼 수 있었던 곳, 갑자기 불쑥 찾아가도 낯설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줄 듯한, 조용히 종과 염불소리가 울려퍼지는 평화로운 곳.

 

 

 

  ​풍경을 오롯이 다 담아낸 사진도 아니고, 화려한 색깔을 머금은 수채화도 아닌, 간단한 펜터치로 그려진 일러스트는 생각보다 사찰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아낸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밤중의 사찰 위에 진하게 깔린 구름들, 눈감고 기도하고 있는 불상은 누군가 쓱쓱 한붓에 그려낸 것 같이 단순한 그림으로 볼 수 있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사찰을 방문할 때의 호젓하거나 평화로운 느낌을 가득 품고 있다.

  전국의 유명한, 혹은 숨겨져있는 멋진 사찰들을 그려낸 그림들과 함께, 작가는 글의 첫머리에, 자신이 보고 있는 사찰의 모습을, 기둥과 다리, 구석구석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사찰에 얽힌 이야기, 간혹가다 들려주는 사찰과 딱 맞아떨어지는 문인들의 시는 너무나도 잘어울린다. 꽤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사랑의 문화가 조각되어 있는 환성사의 수미단, 도시의 아등바등한 집착을 퍽 덜어줄 수 있을 듯한 (이름마저 좋은) 능가산 내소사, 최근 영화와 소설을 통해 더욱 감정이입한 인물인 정조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화산 용주사...... 25곳의 산사들은 꼭 한번쯤 가고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지만 유독 마음에 든 곳들이다.

  가장 최근에 간 사찰은 부산의 태종사였다. 2년전엔가, 친구와 여행을 할 때였다. 그때는 그 곳에 잔뜩 피어있는 수국꽃에 마음이 홀려 사찰을 주의깊게 바라보지 못했다. 조만간 산 속 깊이 있는 산사를 방문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템플 스테이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진다.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고 표현한 작가의 마음을 보고 "절은 북적이는 곳이 아닌데, 사람을 보러가?"했던 의문이 사라지고, 산사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그곳에서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환성사를 찾아가는 계절은 역시, 봄이 좋다. 깊은 골짜기로 빨려 들어가듯 벚꽃과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이런 날은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찾아가도 좋겠다. 조용하고 호젓한 산사는 꽃들의 잔치로 무릉도원을 이룬다. 잠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도원을 거닐면 마음이 통하여 우리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연리지처럼. 환성사는 팔공산 주변의 산이 고리를 이루어 성처럼 둘러싸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생과 부처가 함께 손잡고 둥근 마음의 고리를 만든다면 내가 바로 너이며 네가 바로 나인, 부처와 중생 그리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깨달음의 일원상이 될 것이다. (37p)

미인은 반 측면에서 보라 하였던가? 옆으로 살짝 드러난 무량수전과 공중에 떠 있는 안양루의 팔작지붕이 '극락세계의 궁전은 이렇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신기루처럼 떠있는 안양루에 옛 시인들은 바람난간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늘 위에 나타난 천상의 누각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일직선이 아닌 45도 각도로 틀어진 길이다. 우리 조상들은 획일성을 싫어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길 보다는 구불구불 틀어진 길에서 세상 사는 재미와 인생의 여유를 느꼈으리라. 다가갈수록 다르게 보이는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기 위하여 일부러 길을 돌렸다. 우리들은 그저 그 길을 따라가며 아름다움에 취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의도적 공간 연출은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서양의 사상과는 달리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불교의 사상을 마음껏 발휘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이다. (53p)​

​제주도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어머니 같은 섬이다. 해녀들이 자맥질해 들어가는 넓고 깊은 바닷속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된 자궁 같다. 휘-잇, 휘-잇, 길게 내뿜는 아가의 첫 울음과 같은 숨소리는 살아 있음을 알리는 희망의 신호가 되어 제주의 봄을 재촉한다. (86p)

구층암에는 천불보전 법당과 좌우로 승당인 두 요사채가 있는데, 바깥뜰에는 부서진 탑이 겨우 몇 자 높이로 서 잇다. 절 앞에는 대숲이 있으며, 절 우측에는 푸른 빛이 도는 맑은 개울이 흐른다. 절에서는 달이 돋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구름이라도 살짝 내려앉으면 주변의 뭇 산봉우리들이 촘촘히 늘어서 모두 부처를 향한 채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펼쳐진다. 별빛과 달빛이 허공에 가득하며, 대나무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적막을 깨는 풍경소리의 울림에 오만가지 생각이 일시에 텅 비니, 이것은 화엄의 진수인가, 구층암의 빼어난 흥치인가?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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