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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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 은행나무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엄청나게 인기를 끌거나 제목 하나만으로 열풍이 돼버린 책들은 그 열풍이 사그라지기 전에 읽는 것을 피하곤 한다. 무슨 건방진 배짱이냐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읽지 말자"고 생각하기 전에 손이 잘 안 가는 걸 어쩌랴. 여기저기서 불러지는 제목들이 기대감을 증폭시켜서 반대로 작품을 읽을 때는 재미가 급격히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평 또한 쓰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역시 정말 좋았어요." 하는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사실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안 해봤지만 말이다. 약간은 재수 없는 강박관념일지 모르겠고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규칙, 혹은 몹쓸 버릇일지도.

  <7년의 밤> 역시 제목을 알고 난 뒤 3년이나 끌었다. 박범신 작가는 정유정 작가에게 '괴물 같은'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소설이었다.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7년의 시간을 끊임없이 행진하게 만든 오싹한 그날의 밤을, 주인공과 우리 모두 목격한 채 어두컴컴한 곳으로 달아나고 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사이코패스 같던 오영제의 '교정'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렸을 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그날 밤 자신의 내부에서 손쓸 엄두도 없이 빠져나왔던 최현수의 제2의 손과 심리적인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선 그러나 속에 깔린 악,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궁금해하면서.

  친절하게도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 소설의 키워드를 제시해주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보면 유사한 단어로 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사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 혹은 현상, 진실은 Truth 왜곡되지 않은 '참'이다. 사실에 가려 잘 보지 못하는 것이 '진실'이고, 알면 위험할 수도 불편할 수도 없는 것이 '진실'이다. 때로는 아주 작은 뜻밖의 상황이 엄청난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누군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진실을 가려버릴 수도 있다. <7년의 밤> 소설 속에서 수많은 장면의 전환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사실과 진실 사이에 숨겨져있던 무언가였고, 주인공들이 죽자고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이 무언가 속에 들어있었고, 우리가 수많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도 이 무언가가 아닐까?

  너무나 유명하고 인기 있는 소설이기에 큰 기대감이 있어 중반부쯤에서 살짝 긴장이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강한 힘에 또 훅 끌려들어 갔다가 정신 못 차리고 나온 듯하다. 잘만 만들어진다면 영화 또한 엄청난 열풍을 불러올 것 같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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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입을 막았다. 전화벨은 그의 심장을 천둥처럼 두들겼다. 어둠이 세상을 삼켰다. 아득한 곳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빠....... 메아리가 끝났을 때, 그는 취수탑 다리 위에 서 있었다. 팔을 늘어뜨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의 턱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녀와 그가 있던 자리에서 취수탑은 100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 거리를 이동해 취수탑 다리에 다다른 몇 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아니, 그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머릿속 조력자가 대답해왔다.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에는, 안개가 짙고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인적이 없고 어두운 호숫가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눈을 뜨고 "아빠"라고 속삭여 올 때에는, 자기를 찾는 전화벨이 심장을 두들기는 순간에는, 흔히들 무의식이라 부르는 '혼돈'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좀 보여줄까? (122p)



편지를 봉투에 담았다. 봉투에 찍힌 발신날짜는 올 1월 20일이었다. 나머지 편지는 보지 않았다. 두려웠따. 그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내 앞에 도달한 그 여자의 슬픔, 나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연민과 관용이 두려웠다. 연민하지 말고, 관용하지도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의도적으로 피해온 수많은 희생자들의 눈물과 딱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 눈물을 피해 창문을 보고 앉았다. 소금기와 먼지가 부옇게 들러붙은 창문을 오래오래 쳐다봤다. 신기한 마음이 일었다. 저 더러운 창으로 하늘과 구름과 달과 별똥별과 빗줄기와 눈보라와 바다와 등대를 봐왔다는 게. 문득 배가 고팠다. (285p)

"그냥 직장생활이 싫었어요. 싫어서 미치겠던 어느 날, 하필 제 근무때, 젊은 여자가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뛰어들었어요. 나중에 장의사가 와서 시신을 수습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손가락 하나와 귀 한 짝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긴 집게하고 비닐봉지 들고 선로를 더듬기 시작했죠.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야 받침목 밑에서 귀를 찾았는데 찾고 보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초등학교 나와 한강에서 시체 찾는 아버지나, 대학 나와 선로에서 시체 귀를 찾는 나나, 두 인생이 다를 게 뭐냐.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자. 마음 변하기 전에 사표 쓰고 튀었죠. 한 2년 내키는 대로 굴러다니다 여기까지 왔고요. 아버지 뒤통수치고 꽁지 빠지게 내뺀 셈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긴 집게를 쥐고 형태만 다른 기찻길에 서 있더라고요. 그걸 열흘 전에야 알았어요." (324p)

절대로 애비처럼 안 산다며? 살아보니 넌 별 수 있든?

그를 통제하던 마지막 줄 하나가 툭, 끊겼다. 현수는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오는 '꿈속의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가 그의 몸을 빌려 행동하는 시간, 그의 몸이 벌이는 신나는 복수극을 관전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집 안 풍경이 조각나듯 흩어졌다. 현수의 시야에는 남자와 거울 속 아버지만 남았다. 현수는 남자가 지지대에서 그의 왼손을 빼내는 걸 기꺼운 마음으로 지지했다. 왼 주먹이 아버지를 향해 뻗어가는 걸 기쁘게 지켜봤다.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아버지의 얼굴이 산산조각 나는 걸 후련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잡동사니 속에서 휴대용제초기를 찾아 쥐는 왼손을 기대에 차서 내려다봤다. 꿈속의 남자는 용팔이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왼손잡이 슈퍼맨이었다. (3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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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엄마 목소리 - 태교 동화를 읽는 시간, 사랑을 배우는 아이 하루 5분 태교동화 시리즈
정홍 지음, 김승연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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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엄마 목소리』 정홍 글, 김승연 그림 / 예담

정서지능을 통한 아이와 엄마의 상호작용

 

 

 

 

  아직 '태교'에 대해 배울 시기도 아니고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지인에게 선물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받아보았다. 태교의 방법은 다양하다. 정확히 알아보진 못했지만, 가장 대중화되고 많이 이용되는 것이 음악 듣기, 책 읽기, 그리고 요즘엔 바느질과 여행 등이 있는 듯하다. 원래 '태교'의 의미는 임신 중에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일'이라고 되어있으니, 엄마의 마음가짐이 편안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활동들을 적용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하루 5분 엄마 목소리』의 경우 '태교동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엄마가 책에 담긴 동화를 읽고서 다시 아이에게 전해주는 방식이다. 저자는 "엄마가 느끼는 감정(정서)"가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엄마가 동화 속에 새겨진 감정을 읽고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전환하여 아이에게 전달한다. 아이는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정서지능'이 크게 발달되어 자라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정서지능을 어느 능력보다 특별하게 바라보고 있따. "이성과 논리가 아닌 마음에서 솟아나는 능력"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어떤 학습능력보다 으뜸가는 능력"이라 말한다.

 

  

 

 

  읽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예쁜 동화들이 끝난 뒤에, '엄마의 생각보따리'가 마련된다. 아이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기 위하여, 엄마가 먼저 마음속 품고 있는 감정들을 솎아내는 것이다. 정서가 풍부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배우는 아이. 아이를 편안하게 해줌과 동시에, 엄마 또한 편안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최고의 태교방법이다.

 

 

 

   『하루 5분 엄마 목소리』에는 태교동화 뿐만 아니라, 동화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이 수록된 CD가 포함되어 있다. 동화와 클래식 음악, 아이와 엄마 모두 행복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코스인 듯 하다. 물론 조용하고 여유로운 시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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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리부트 - 전2권
에이미 틴터러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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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트』 에이미 틴터러 / 황금가지

죽음을 넘어 기계가 된 인간, 그들의 '디스토피아' 로맨스

 

 

 
 
 ​ After Reading                                                                                                                                      

 

 

 

  무언가를 '재시동하다'라는 뜻의 영어 동사 Reboot.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이 된다면 어떨까요. 적잖이 무서운 상상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재시동' 시킨다는 이 단어는 마치 사람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시동'이 가능하려면 일단은 '죽음'이 있어야 하죠. 『리부트』라는, 알고 보면 무서운 제목의 이 책은 책의 제목으로 쓰인 이 단어를 어떤 식으로 표현해낼까요.

  '리부트'는 소설 속에서 새롭게 나타난 인류와도 같습니다. KDH 바이러스가 세계에 침투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소설 속의 사회. 그러나 몇몇 어리고 강한 사람들에게는 이 바이러스가 다르게 작용하여 '리부트'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그들은 죽고 난 뒤 '리부트'라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데, '얼마나 죽어있었다가 살아났는가'에 따라 더욱더 능력 있는 리부트가 됩니다. (외모도 더욱 멋져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길수록 인간과 다른 면이 많아지죠. 감정이라든가.) 인간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가 생겨난 세상. 그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길을 모색합니다. 정부 (인발진 : 인류 발전 진흥회)는 어리고 강한 리부트들을 한곳에 모아 훈련시키면서, 범죄자들이나 성인 리부트 (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를 죽이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이용합니다. 그리고 마치 기계처럼 실험도 하지요.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렌 178'은 리부트가 되기까지 장장 178분이나 걸린 강력한 여자 리부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감정이 거의 없으며, 키가 작은 어린아이인데도 엄청난 위력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갓 변화된 '리부트'들이 들어와, 기존에 있던 리부트들이 조교가 되어 그들의 훈련을 맡게 됩니다. 가장 강력한, 즉 가장 높은 숫자를 가진 리부트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숫자들의 후배를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사실은 대부분에게 공공연히 여겨지고 있는 일종의 규칙이었지만, 가장 높은 숫자를 가진 강력한 '렌'은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신입 리부트 중에서 가장 낮은 숫자를 가진 '캘럼 22'에게 이상하게 끌려, 그를 선택한 것이죠. 숫자가 낮기에 '거의 인간'과 흡사했던 '캘럼'은 하루 종일 '렌'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로맨스의 시작.

  '디스토피아 로맨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헝거게임』을 떠올리면 될 듯 합니다)라는 장르인 『리부트』에서 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측면은 '디스토피아'인데,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게 만드는 장치는 바로 '의심'입니다. 현대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대화되어 드러나는 가상사회를 그려내면서, 감시와 통제를 뚫을 수 있는 기폭제가 '의심'이기 때문이죠. 그 사회에서 가려지고 가려진 부정적인 측면을 '의심'을 통해 찾아내기 시작하면서, '디스토피아' 문학은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로부터 시작되는 '탈출을 위한 싸움', '감시와 쫓김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 그 움직임이 얼마나 스릴 있고 긴장되게 그려지느냐에 따라 재미는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리부트』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던 흥미진진한 소설이었죠. 곧 영화로 나온다고 하는데, 굉장히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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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서 인간이 지르는 비명이 퍼져 나갔다.

비명 소리가 싫었다. 그들의 비명은 내 비명이었다. 리부트로 깨어난 직후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은 벽에 반사되어 내 고막을 울렸던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어떤 멍청이가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하고 생각했었다.

나였다. 바로 내가, 이틀 동안 약발이 떨어진 마약 중독자마냥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참을성이 꽤나 강한 점을 스스로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왓었는데. 어른들이 참을성을 잃어 갈 때도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던 애가 나였는데. 하지만 가슴에 총을 세 발 맞고 죽은지 178분 만에 병원 시체 안치실에서 깨어났던 열두 살 때, 나는 비명을 질렀다. (1권, 15p)

뛰려고 돌아서는 레브를 향해 말했다. 레브는 골목길로 사라지기 직전에 어깨 너머로 내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어붙었다. 레브는 '가'라고 말했다. 어느 길로? 어디로? 전설의 리부트 자치구역이 진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깨닫자 공포가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빈민가에,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인발진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렌."

나를 훔쳐보는 캘럼의 흥분된 표정을 올려다봤다. 캘럼은 내 헬멧에서 카메라를 떼어 내고, 꼭 쥔 내 손에서 컴을 빼앗아 둘 다 땅바닥에 내던졌다.

"우리 달려야 할 것 같은데."​ (1권, 233p)

우리는 동물을 사냥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비명이 정적을 갈랐고, 나는 의도치 않게 거의 공포탄을 쏠 뻔하며 펄쩍 뛰었다.

​비틀거리면서 나무 뒤에서 나왓더니 마이카가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계속해서 발포하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더러운 강물을 철벅거리면서, 탈출하려고 애쓰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줄과 카일이 우리 반대편 숲에서 나타나서 마이카가 놓친 사람들을 잡았다.

되돌아오는 발포는 없었다. 사람들은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홱 둘러봤다. 천막들, 장작불 하나, 버려진 식량, 인발진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였다. 여기에 살고 있던, 그냥 일반 사람들이었다.

"렌!"

마이카는 미친 사람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이게 마이카가 말한 관리 안 되는 감정일까? 사람들을 죽이는 데서 기쁨을 얻는?

"어서 해 봐!" 마이카가 외쳤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총구를 낮췄다. 나는 비무장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 나는 이런 엄청난 괴물이 아니다. (2권, 95p)​

"합리적인 계획." 렌이 내 눈을 피하며 정정했다. 마이카에 대해 '합리적'이라 표현한 것에 짜증이 폭발하려는 것을 억눌렀다. 마이카를 표현하는 데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나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렌을 바라봤다.​

"마이카는 여기에 있는 모두를 보호하려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를 실행하는 거야. 본인 경험 때문에 인간과 리부트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고."

"모두를 죽이는 선택 말이야?"

"모든 게 흑백은 아니잖아, 캘럼." 렌이 조용하게 말했다.

나는 살인에는 옳고 그름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렌에게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는 말을 멈췄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죽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거라고.

인발진의 주사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탓에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죽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죄어 오는 고통스러운 죄책감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완벽하게' 흑백은 아닐지도 모른다. (2권, 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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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여행법 - 세상의 모든 길들
미셸 옹프레 지음, 강현주 옮김 / 세상의모든길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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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여행법> 미셸 옹프레 / 세상의 모든 길들 (2013.3.15)

정해진 장소를 따라, 사이를 가로지르며, 찬란한 순간을 맛보는

 

 

 

 

  ​'여행'이라는 말 한마디로 가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는 가족들과 오랜만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누군가는 일상의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목표했던 곳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곤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여행자의 상황, 기분, 준비과정에 따라서 가지각색이겠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혹여 그 기쁨에 더하여 큰 만족을 얻고 싶다면, 그 답은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철학자의 여행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한줄로 함축해보면, 여행이란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아가 이끄는 대로 니체의 원근법으로 세상을 보고 바슐라르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해석하며 사이(entre-deux)의 시공간을 꿈처럼 떠다니다가 현실 속 이타카로 귀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으니 굉장히 어려운 철학서인듯하지만, 읽는데 어렵지는 않다. 대부분의 철학적 상식들은 주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본문은 주옥같은 문장들과 함께 물 흐르듯 읽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자아에 대한 탐험'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의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고 또 다른 상황에서의 자신을 직면하고, 자아가 이끄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나'를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자신을 잊지 못함은 물론이고, 가장 두려웠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유목민의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여행을 갈망하고 또 갈망한다. 여행의 장소를 정할 때부터 우리는 흥미로운 경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우리가 여행할 지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들에 의해 우리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우리 기억 속에 뿌리 깊이 존재하는 무언가가 갑자기 어떤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작, 그것은 딱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다. 그리고 여행자는 그때부터 '사이'의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사이'의 상황이란, "더 이상 떠나온 장소에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우리가 갈망하던 장소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오가며 무가치한 말을 주고받는 곳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목적지가 다른 누군가의 출발지가 되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공동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교차의 장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꿈꾸던 장소에 도착한다. 이후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이는 여행, 그 순간들은 "세공해야 할 원석과 같은 기억"이다. 그래서 어떤 것으로든 가장 편한 방법으로 기록해야 한다. 냄새와 향, 소리, 맛, 시각과 같은 모든 감정들을 사진이나 그림, 시, 녹음 등으로 기록한다. 그것에 대한 기록은 "여행을 어느 정도 불멸시키고, 강렬한 순간들을 고정시킨다."

  <철학자의 여행법>​은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 그리고 여행의 기억을 빛바래게 하는 위험한 행동들 몇몇을 언급하면서, 철학적 맥락에서의 '참 여행'을 말하고 있다. 떠나고자 하는 용기는 있지만 시간이 잘 나지 않아서 쉽게 떠나진 못하는 오늘 우리의 '여행'. 그러나 갑자기 뭔가에 끌린 듯이 떠나게 되는 여행에서의 빛나는 순간을 재창조하기 위한 생각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선, 여행의 모든 순간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을 하는 도중, 어떤 책을 읽어야만 한다면 난 이 책을 고를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은, 다른 많은 물품들을 제외한 오로지 내 마음을 위한 '준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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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일종의 시작 의식과도 같다. 독서는 이교도의 신비를 밝혀 준다. 욕구가 점점 더 커질수록 한층 정제되고 세련되고 독창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인위적이거나 문화적인 환희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자연스러운 욕구가 넘쳐흘러야 하고,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관능적인 여행이 가능해진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는 존재론적인 공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단지 이미 가지고 있던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자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여행은 공허해진다. 따라서 풍부한 준비는 뛰어난 여행을 만든다. (33p)

고장나 있던 모든 감각들을 여행을 통해 다시 살아나게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할 때 이 모든 훈련이 가능하다. 거대한 강 하구의 반짝거리는 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트란실바니아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의 둥근 유리창 옆에서, 수천 헥타르에 달하는 아프리카 평야 한복판에 외롭게 자리 잡은 어느 카페에서, 피곤한 육체 위로 공기를 낮게 보내 주는 선풍기가 달린 이집트의 호텔 방이나 공항 대기실에서 시를 쓰거나 구겨진 종이에 글을 써 보는 것은 단어에 대한 연금술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백열하는 여행의 소재를 경험이라는 도가니 속에 쏟아부어서 한 줌의 이미지라는 황금을 얻는 것이다. (39p)

​온갖 정보들이 끝없이 밀려들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모든 정보들을 다 붙잡을 수는 없다. 여행은 사실 우리의 오감을 확대시키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 생생하게 느끼거나 듣게 되고, 더 강력하게 쳐다보거나 지켜보게 되고, 더 주의 깊게 맛보거나 만져 보게 된다. 새로운 경험들을 준비하느라 불안하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한 몸은 평소보다 더 많은 것들을 기록하게 된다. 매일의 사소한 일과보다는 현상학적 시련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일상 속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의지와 의식의 작용에 의해서 자신이 제한된 존재임을 깨닫고, 결정하지 못한 자질구레한 일들 속에서 허무함을 경험한다. 그러나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의 감각은 완전히 기능하게 된다. 감동, 애정, 열정, 놀람, 의문, 감탄, 기쁨, 경악, 이 모든 감정들이 아름답고 숭고하고 낯설고 색다른 경험과 뒤섞인다. (67p)

우리가 우리 자신과의 동행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길을 나설 때 우리의 영혼 속에 담겨 있던 것들은 여행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열 배 정도 더 커져 있게 된다. 우리 안에 있던 고통과 상처, 권태와 번민, 아픔과 불행, 슬픔과 우울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 점점 더 확대된다. 세계일주 여행을 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정점에 달하게 되고, 우리는 그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여행은 우리에게 치료제로 작용하기보다는 우리 존재에 대해서 정의해주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준다. 단지 자신을 잊기 위해서 떠난다면 자신, 그것도 가장 직면하기 두려웠던 자신을 직면하게 될 위험이 더욱 크다. (1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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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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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 사계절

 조금은 부끄럽고 씁쓸한 '세속의 리얼리티'

 

 

 

 

  "세상 물정 좀 아십니까?"

  모르고 살면 물론 편할테지만, 자꾸만 물고 늘어지고 싶은 세속의 모든 것들. 가끔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문제가 눈깜짝할 사이에 다가올때,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모두에게 좋은 삶이란 없을 것이다. 세상물정에 정해진 답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저자는 좋은 삶을 이렇게 말한다. "좋은 삶은 한편으로 영리하되 영악하지 않은 지혜로움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선함이 지나쳐 주어진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비판적 태도와 거리를 둘 때 가능하다."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 즉 '처세'는 우리에게 이미 안좋은 이미지로 박혀버렸다. 기본적인 뜻과 다르게, '권모술수'와 비슷한 말로 변해가고 있는 '처세'. 그 변화에는 처세를 위한 목표에 있다. 좋은 삶을 위한 공부였던 '처세'가, 물질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성공을 위한 '처세'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타락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처지로 전락한 처세술이라는 단어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좋은 삶을 위한 '처세', 작가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그 '처세'를 방해하고 있는 세속의 여러가지 키워드를 붙잡아 비판하고 있다. 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전해지는, 진짜 우리 사회의 '리얼리티'를 보면 한숨과 동시에 자책감이 밀려온다. 나도 이 사회에 포함되어 있으며, 언젠가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거라는 자책감. 그리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부담감.

  우리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상식이며, 각자의 상식적인 판단이 모였을 때 무시무시한 몰상식이 생겨난다.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 또한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 책에서 나온 사례를 잠깐 빌려오자면 "불우이웃이나 수재민을 사회복지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성금으로 도와야 한다는 건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상식에 바람직함이 더해지면 '양식'이 되는데, 진지하게 훈계하는 듯한 양식은 항상 상식에게 진다. 양식에의 허기짐은 우리를 책, 그리고 고전으로 이끈다. 아마도 얼마전부터 일어난 인문학 열풍이 이런 허기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  또하나의 한국 사회를 말하자면, '취향 전쟁의 시대'다. 취향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개인의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남들의 선택, 남들에 기호에 관하여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개성은 죽은듯이 사라진다. 취향전쟁은 "개인들의 기호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참여자들의 경제적 지위가 경쟁하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 더욱 커져, 취향 또한 구매하게 되버린 사회. 그 사회에서 위로 올라서는 자는 '가장 영악한 사람'이다.

  저자는 사회학자를 탐정에 비유한다. 사회학자는 고립된 사건을 일련의 사건으로 변형해서 보이지 않던 실마리를 찾아내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흔적에 주목한다.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의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이 때문에 이런 책들을 읽고 우리는 약간은 부끄럽고 혹은 씁쓸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리얼리티를 발견한다. 그러나 무조건 아름답지만은 않을, 무조건 추악하지만은 않을 사회의 양면을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선택을 보다 똑 부러지고 강단있게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준다. 이것이 바로 상식이 아닌, 올바름을 더한 '양식'이 되지 않을까. 

*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함께, 생각의 정리에 도움이 될 책들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일석이조 +_+

 

Copyright ⓒ 2014. by Rinny. All Rights Reserved.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덧글과 공감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중산층이 이러한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한, 실제 럭셔리 상품의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과시적 소비가 만들어 내는 유행이 우리들의 사유를 지배한다. 이 시대에 부자들은 정치인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영리하게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이 부러움에 근거해 우리의 뇌를 장악한다. (39p)

독주를 한잔 들이킬 때마다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때론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도 포기해야 하는 평범한 호모 파베르가 명예를 선택해도 굶어 죽지 않는 사회가 그리워진다. 그 사회는 특정한 신분에 속한 사람만이 명예를 위한 놀이의 경쟁을 벌일 수 있었던 과거와 다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무리 부유해도 돈의 위력으로 명예를 참칭할 수 없다면 더 바랄 바 없다. 누구에게나 명예를 둘러싼 경쟁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호모 파베르조차 호모 루덴스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소박한 기대마저 유토피아적 이미지로 다가오게 만든다. 돈벌이를 위해 명예를 내던질 필요가 없기에 청소부도 품위 있을 수 있고 농부도 고상할 수 있고 회사원도 우아할 수 있는 사회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꿈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는 선택이 아니라 원칙이라고. 먹고 사는 것과 명예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제하지 않는 그 사회는 원칙으로서의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 유토피아 속에선 누구나 호모 루덴스일 수 있다. (134p)

체면치레가 유행에 따른 삶이 되고, 수치심이 소비주의에 의해 속류화되면 의인의 자리를 '셀레브리티'가 대신한다. 셀레브리티가 먹는 음식, 그들이 꾸민 집, 그들의 자녀 교육 방법, 그들의 노후 대책까지 흉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따라 하면 된다. 시대의 트렌드에 뒤쳐질까 봐,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시콜콜 알려준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마치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배우기 위해 기숙형 예절학교에 입학한 학생과도 같다. (143p)

개인의 취향에 대한 세상의 참견은 끝을 모른다. 누군가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다고 하자. 차종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이다. 붉은색 자동차를 골랐다면, 그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견과 관심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사회에선 타인이 선택한 자동차의 색조차 논쟁의 대상이 된다. 취향은 개인의 개성이 발휘되는 영역인 한 본래 수평적이다. 하지만 개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의 영역인 취향에 대한 참견이 끊이지 않는 이중적인 사회는 수평적인 취향을 수직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기호의 문제인 취향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뀌어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취향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149p)

편안함은 때론 사유의 독이 되기도 한다. 익숙한 곳은 낯설게 보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습관적인 사유를 반복하게 만든다. 너무 익숙해졌기에 편안한 곳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집도 그렇다. 집은 편안한 곳이지만 편안함의 대가로 우리의 사유는 타성에 젖는다. 자기의 집에선 좋고 나쁨이라는 범주가 갖는 힘이 약화된다. 호사스럽든 소박하든 아니면 초라하든 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집은 가장 친밀한 공간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을 성찰적으로 볼 수 없듯이, 편안함의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집에서 집에 대해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여행은 친밀한 공간인 집에 대해 생각하기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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