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과 창조의 시간 밀리언셀러 클럽 135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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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과 창조의 시간』 로렌스 블록 / 황금가지

지지부진하게 끌지 않아 딱 좋았던 이 소설

 

 

 

 
 현재까지 단편을 포함해 18권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작가의 이름이 내겐 생소했지만, 많은 수상 경력으로 추리 작가 협회에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시리즈를 쭉 살펴보면 일단, 내용은 제쳐두고라도 제목이 꽤 세련되었다고 느껴지는데, 『살인과 창조의 시간』이란 작품도 70년대 후반에 처음 출간되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매끈하고 세련된 소설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책을 읽었는데, 정말 놀랐다.)
  추리 장르를 비롯하여 많은 소설들이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주인공을 들고 나오지는 않지만, 이 시리즈의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자못 특별한 캐릭터인 것 같았다. 경찰직을 그만두고 사립 탐정으로 일하게 된 점에서는 거의 비슷한 전개이긴 하다. 하지만 일을 할 때 진지하고 냉철하면서도 약간은 우울하고 약한 면이 있고,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약점이 있어 '살인' 자체를 싫어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잘못을 되묻고, 술에도 많은 부분 의존하며, 사건을 해결하면서 생기는 안좋은 상황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스커더'라는 사람에게 왠지 자꾸만 정이 갔다. 뭔가 사람 냄새나는 캐릭터랄까. 보통 장르 소설을 읽을 때 재미와 이야기 전개에 집중하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해서 꽤 많은 관심을 보인 건 나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이야기 자체도 특이한 편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비밀을 이용해서 공갈 범죄를 일으켰던 '스피너'가 언젠가 했던 부탁 - 만약의 사태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는 -을 통해 편지를 받게 되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스커더는 복수를 대신하게 된다. '스피너'의 사연은 일단 뒤로하고, 공갈범의 복수를 사립탐정이 대신 한다니, 놀랍다! 물론 복수는 '피'의 복수가 아닌, 사실을 캐내는 복수였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이 작품 꽤 신선하게 여겨졌다.
  생각보다 얇은 책 두께에 조금은 예상했지만, 지지부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끄는 것이 없어서 참 좋았다. 과한 떡밥을 늘어놓는 경우에 마지막이 조금 과해지는 소설도 있지만, 『살인과 창조의 시간』은 딱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만 깔끔하게 떨어지니, 읽는 데는 부담이 없어 한숨에 읽을 수 있다. 현재까지 나와있는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 어떤 면에서 이 소설과 연결되고 묶여질지, 비슷한 느낌일지 기대가 된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어둠 속의 일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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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범은 보험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공갈범을 죽여서 협박을 끝내지 못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누군가 (변호사, 여자 친구, 누구든)가 희생자를 애초에 불안하게 만든 증거를 쥐고 배후에 앉아 있어야 한다. 공갈범이 죽으면, 증거는 경찰에게 가고,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모든 공갈범들은 으레 피해자에게 이 추가된 요소를 알린다. 가끔은 공범도 없고, 경찰에 보낼 봉투가 없는 경우가 있다. 배후에 숨어 있는 증거가 그 사건의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위험하기 때문에 공갈범은 그냥 그런 증거가 있다고 `말`만 하고 피해자가 감히 그 증거를 보자고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공갈범의 말을 믿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31p)

네 번째 봉투에 자네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게 자네 거야. 안에 3000달러가 들어 있는데 자네 몫이야. 더 넣어야 하는 건지, 거기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자네가 그냥 그 돈만 챙기고 입 닦아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난 죽었을 테니까 모를 거야. 왜 자네가 이 일을 끝낼 거라고 생각했냐면 자네에 대해 아주 오래전에 눈치 챈 점이 있어서야. 자네가 살인과 다른 범죄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어. 나도 그래. 난 평생 나쁜 짓을 하며 살아왔지만 한 번도 남을 죽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거야. 난 확실히 혹은 소문에 듣기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과는 결코 가깝게 지내지 않아. 나란 사람이 원래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도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자네가 뭔가 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그러지 않아도 난 그 사실을 모를걸세. (35p)

독한 술을 한 잔 따라서 마셨다. 잠시 손의 떨림이 배 속까지 전달돼서 위스키가 넘어올 것 같았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나는 종이 한 장에 글자 몇 개와 숫자들을 적어서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옷을 다 벗고 샤워기 밑에 서서 온몸을 적신 땀을 씻어 내렸다. 기진해서, 그리고 동물적인 공포에서 솟아난 식은땀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받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단지 경고였어, 스커더."

"개소리, 넌 날 해치우려고 했지만 실력이 모자랐던 것뿐이야."

"우리는 마음먹은 건 놓치지 않아." (112p)

"살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당신은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군요."

"내가 생명이든 뭐든 신성하다고 믿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주 복잡한 질문입니다. 나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명을 죽였어요. 불과 얼마전에도 한 사람이 나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가 의도했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진 않더군요. 인간의 생명이 신성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난 그저 살인이 맘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빠져나가는 와중에 있습니다. 그 점이 내 맘에 걸립니다. 그 점에 대해 내가 하게 될 일이 한 가지 있는 겁니다. 난 당신을 죽이고 싶지도 않고, 당신의 정체를 노출시키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일들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건 이제 진력이 났습니다."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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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산다 2 용이 산다 2
초(정솔)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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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산다 2』  초(정솔) / 북폴리오

내 옆집에 오타쿠 용이 살고 있다니.

 

 

 

 

 

  이런 만화가 있다는 걸 몰랐어요. 판타지가 가미된 건 많이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네이버 웹툰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더라고요. 2권을 보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1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옆집 사는 오타쿠 용이라는 '병맛' 같은 설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서 계속 쭉쭉- 읽게 됩니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 있는 만화라서 부담없이 볼 수도 있고요. 일단,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 그러나 약간은 불편하다는 - 주인공 '김용'씨와 시크한 옆집 남자 '우혁'의 콤비가 완전 재미나지요 +_+

 

 

 

 

 

  작가의 전작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는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로, 조금 따뜻한 일상툰이었는데  『용이 산다』는 분위기가 급반전.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용의 존재도 어이없지만서도, 용이랑 같이 살면서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람 '우혁'의 모습도 웃기고, 사람보다 더 사람같고 유행어를 툭툭 뱉는 용들도 웃겨요. 뭔가 가만히 쭉 보다가 피식- 터지는 병맛 만화?!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나 하면서도 자꾸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마력의 만화 ㅋㅋㅋㅋㅋ 

 

 

 

 

 

   옆집 사는 오타쿠 용씨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에서 오랜 세월 전에 태어났지만 '김옥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ㅋㅋㅋ) 용씨의 누나와, 그의 엄마, 할머니, 사촌, 누나의 정혼자 가족까지 등장하니 이 만화 완전 용 천국 ㅋㅋㅋㅋㅋㅋㅋ 이제는 뭔가, 용이 귀엽게만 보이고. 조카인 마리의 이 귀여운 모습은, 좋아하지도 않는 인형 하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실제로 많은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작가님은, 만약 더 키우고 싶다면 고양이 말고 용을 키우고 싶다고 해요. 작가의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 만들어낸 귀여운 만화, 『용이 산다』아마도 저는 이 친근한 용들한테 반해서 만화를 계속 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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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인생질문 20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4
줄리언 바지니.안토니아 마카로 지음, 박근재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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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줄리언 바지니, 안토니아 마카로 / 글담(아날로그)

철학과 심리학의 아주 적절한 만남

 

 

 

 
 
  사람, 즉 인간과 삶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철학과 심리학은 그 기본적인 맥락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심리학 뿐만이 아니라 과학과 정치학 등의 많은 학문들이 과거의 철학에서 빠져나왔고, 심리학조차도 과거에는 철학자들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학문들도 세분화되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심리학과 철학적 사유는 많은 부분 달라져온 것 같다. 『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는 어떤 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심리학자와 철학자 각자의 시선으로 통찰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20가지 질문에 대한 심리학자와 철학자의 답이 같은 듯, 다른 듯 여겨져서 꽤나 흥미롭게 만드는 책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각 학문에 따른 답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 그 질문들은 어느 정도 식상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었지만 흥미로운 것들도 많았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거짓말, 자기기만",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지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도 될까?"하는 질문, 그리고 "외모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라는 질문까지. 그런 질문들에 대한 심리학자와 철학자의 답, 그 공통점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차이점을 인식하는 게 이 책을 읽는데 더한 재미를 주는데, 예를 들면 "외모에 대한 질문"에서 심리학자는 외모를 가꾸는 것을 어느 정도 옹호하면서 그 정도와 의미에 대하여 더욱 생각하기를 바라는 반면, 철학자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은 '외모 가꾸기'가 일종의 딜레마라고 언급하며, 철학적으로 '실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겉모습의 진실까지도 음미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한가지 주제에 대하여, 각 학문이 내놓는 답은 정말로 다양하다. 만약 철학과 심리학, 그 너머의 다른 학문까지 끌어들였다면 책의 내용은 걷잡을 수 없이 포화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담백하게 선택한 두 학문의 만남은 적절하고도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면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약간은 품격 있는 '자기 계발서'로 읽을 수 있거나 혹은 심리학과 철학의 차이에 대하여 인식하고 각 학문의 맛보기 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심리학과 철학에 둘 다 관심 있는 나로서는, 이 두 학문의 차이점에 대해 더 집중하면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심리학자의 생각이 더 진국이라 느껴졌달까. 아무래도 나한테는 진지한 철학보다는, 넘어갈 건 넘어가주며 따뜻하게 마음을 울리는 심리학이 마음에 들었다. (각 저자의 문체 차이일지도 모른다. ^^;)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뜬금없이, 심리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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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목하기 시작한다면 모종의 패턴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어떤 즐거움은 금방 지나가거나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다른 어떤 즐거움은 오래 지속되며 그것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를 계속 행복하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패턴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으며, 강렬하지만 얕은 매력을 지닌 것들에 동요되지 않고 우리의 에너지를 보다 꽉 찬 만족을 주는 것들에 돌릴 수 있다. (심리학자,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 행복해질 이유를 찾을 것, 39p)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그럴듯한 이유가 없는 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예컨대, 한 남자가 급작스런 소아성애적인 충동을 보일 때 그 이유가 뇌종양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결정한 인생의 중요한 판단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관점의 적절성을 갖춘 상태에서 행동을 실행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공정하게 책임을 평가할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된 전후 맥락에 유념하는 것과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용서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썬은 희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계선은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책임의 경감이 책임의 방면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늘 주시해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 과도한 책임감도 책임회피만큼 심각한 문제다, 128p)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고 있는지 여부를 항상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겉보기에 일상의 틀을 못 벗어나는 사람 같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넘쳐나는 삶을 영위하고 있을 수도 있다. 모험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이런 면이 결여돼 있을 수 있다. 몇 안 되는 경험들로만 이루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그 경험들이 깊이를 가지고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풍요로운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지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것을 얼마나 자주 경험하게 될지는 개개인의 성격과 가치,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고 매일매일을 음미하며 사려 깊은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충고는 필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번지점프와 같은 버킷리스트는 부차적인 선택사항일 뿐이다. (심리학자,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33p)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찌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행동에 생각이 병행되어야만 그 행동에 대한 느낌도 분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 기대되는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그것이 즐겁지 않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면 갈망의 느낌도 이내 사그라진다.

비슷한 경우의 예로, 만약 어떤 사람에게 몹시 화가 나 있는데, 확인 결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화는 가라앉는다. 어쩌면 플라톤은 마부보다는 말을 잘 다루고 돌보는 `승마치료사`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편이 나았을지 모르겠다. 승마치료사는 마부와 달리 채찍을 들지 않고 부드러운 말과 손짓만으로도 흥분해 날뛰는 종마를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머리와 가슴의 유익한 동맹 맺기, 1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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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창업가 바이블 - 전 세계 창업가들의 27가지 감동 스토리
다니엘 아이젠버그 & 캐런 딜론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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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창업가 바이블』 다니엘 아이젠버그 / 다산북스

 다양한 성공사례들을 통해 배우는 창업가 정신

 

 

 
 
   자영업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청년 창업도 늘어나고 있고, 다니던 회사를 은퇴한 뒤에 창업을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창업의 세계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실패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는듯하다. 결국엔 또 경쟁이다. 자영업자 vs 자영업자의 경쟁. 자기 사업을 갖고 싶은 사람은 많을 테지만, 취업 경쟁만큼 치열한 창업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특별한 아이템, 경영적인 안목 대신에 또 필요한 것이 있을까?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허다해지니, 창업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온다. 기본적인 창업 매뉴얼, 경영과 자기계발 도서, 다양한 사람들의 성공사례를 설명하는 책 등, 아주 다양하다. 그 중 『하버드 창업가 바이블』은 창업에 대한 기초 상식들에 앞서 창업가들이 가져야 할 '창업가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책이다. 하버드 경영 대학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가, 세계의 다양한 창업 성공사례를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창업'에 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떨쳐주고, 성공적인 창업을 수행할 수 있는 '창업가 정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 창업에 대한 안 좋은 고정관념, 즉 '나이가 많으면 창업을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던지', '창업은 비범한 사람들만이 해야 된다던지' 같은 것들을 깨부수는 역할로서의 이 책은 올바른 창업가 정신을 길러주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창업에 대한 조언보다, 수많은 열거식 사례들이 난무하는 이 책은 '창업'에 대한 크나큰 관심이 없다면 읽기 참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창업에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은 나조차도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 책을 본다고 해서 창업을 곧바로 성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도 책을 한 번에 다 소화시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언급이 있어, 필요한 부분에 한정하여 읽고 적용해도 될 것 같았다.
 
  책 속에서 저자는 "창업가정신에 있어 '정말로 확실히 그러하다'라고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라고 이야기했다. 사회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고, 저자의 나라와 우리나라의 상황은 현실적으로 매우 다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을 읽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들이 엄청난 창업을 성공시킨 사례들을 보고서, 경영에서의 온갖 리스크를 이겨내고 흐름을 거슬러 비범함을 얻게 되는 비법을 어느 정도 느껴보고, 지금 계속해서 변해가는 사회에 적용해보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나온 창업가의 정신 중 "다른 사람들이 쓸데없고 불가능하고 (혹은 상상하기 어렵고) 멍청해 보이는 것이 잠재적으로는 '가치 있고 충분히 가능하며 똑똑한 것'이라고 여기는 창업가의 역발상적 신념"이란 말은 꽤 공감이 가고, 갖고 싶기도 한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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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런가?

나는 이 `정말로`란 단어를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적어도 창업가에게 적용할 때는 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미래의 창업가정신을 소재로 영화를 찍고 싶다면서 나에게 미래의 유망 분야 세 가지를 뽑아줄 수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답변을 사양하고 그런 질문은 창업가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그에게 대답했다. 창업가의 일은 자기 혼자 힘으로 유망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망 분야에 대한 나 (그리고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자 소용이 없다. 여러 전문가들이 당신에게 유망 분야가 어디인지 말해줘도 이미 때는 늦었다. (...) 창업가정신에 있어 `정말로 확실히 그러하다`라고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31p)

누가 창업할 능력이 있는가, 언제 창업을 선택해야 하는가, 혹은 그 창업가가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미리 정해두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범한 가치를 창조하고 획득하는 사람이 바로 창업가라는 개념을 거스르는 행위다. `참신한 기술로 강력한 제품을 개발한 혁신적인 젊은이`라는 상이 바로 우리가 창업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창업가들 중 상당수는 혁신가가 아니고 기술 전문가도 아니다. 그리고 많은 창업가들은 20대와 30대 시절을 보내고 난 후에 사업을 시작했다. 혁신, 젊음, 그리고 전문성이 예비 창업가가 갖춰야 할 필수 자산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91p)

"만약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좋은 기회다. 정반대 방향으로 가면 틈새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쓸데없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기회로 보는 것, 멍청하게 보이는 것을 선택해 `똑똑한 것`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창업가정신의 역발상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아이디어라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밀고 나가는 아이디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간주하는 일련의 행동에 비이성적으로 몰입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창업가정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물론 창업을 하려는 과정에서 똑똑한 아이디어를 무모하다고 보는 주변 사람들 (즉 투자자, 고객, 파트너 등)의 부정적인 시선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가 어리석은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어리석은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매우 열정적이고 자기헌신적인 창업가들 중 상당수가 무모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똑똑한 아이디어로 전환시키는 데 실패한다. (166p)

사람들은 고객의 니즈, 요구, 고충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인식을 통해 `기회`를 찾으려 한다. 자동차 산업의 비효율성, 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 새로운 형태의 오락이나 사치품 등을 보면서 문제나 잠재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또한 감지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기회를 니즈, 고충, 요구가 거래되는 `장터`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하지만 아무도 효과적으로 응대하지 않은 무언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활용할 수만 있다면, 고객을 위해 가치의 창조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회를 보는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객관적인 실체`가 없는 것을 객관화한다는 데에 있다. 나는 이런 오류를 `기회 착각`이라고 부른다.


`누가 와서 따주기를 바라듯 나무 위에 달려 있는 열매`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회를 발견하면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야 한다." "기회가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하라." "쇠가 달았을 때 두드려라.`등 기회 착각이 드러나는 말들이 아주 많다. 이런 말들은 마치 기회가 어떤 사물인 것처럼 표현하고 창업가의 일이 기회를 먼저 발견하는 것인 양 오해하게 만든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도 역시나 그렇다.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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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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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 민음사

 슬프지만 웃기고,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웃프다'라는 말, 어느샌가 생겨난 신조어이자 속어지만, 이 소설에 어울리는 말은 이것보다 더한 게 없을 듯하다. 어느 누가, 그 시대를, 웃기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가혹하고 엄숙함을 요하는 무서운 시대를, 이렇듯 유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속의 페이소스를 잔잔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작가는 남다른 유머감각을 타고 난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나복만. 그는 80년대의 그 무서운 시대에서 살아남기엔 정말 불안한, 어떻게 보면 아주 멍청하고 빠릿빠릿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어떤 죄를 떠안게 되지만, 쉽사리 빠져나갈 재능도 없고, 그 운을 떨쳐내줄 행운과 권력의 끄나풀도 없었던 사나이였다. 사실상 그는 여자운에 있어서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행운을 얻었지만, 그 외에는 말짱 꽝인 사나이였다. 하기야 그보다 더 날쌔게 자신의 기회를 낚아채는 사람들은 뭐 달랐을까. 그때는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그 누군가의 업적을 위해 없는 죄를 술술 털어놓게 만드는 시대였으니, 주인공 나복만의 분신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으리라.

 

  그렇다. 그때는 느와르 시대 - 작가가 칭하길, "수사와 체포로 한 나라를 통치하고, 형네 집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능히 하나님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웅대한 담력을 지닌 수사관 대통령의 시대" -였던 것이었다. 나는 소설 속 느와르 장면들을 표현해내는 작가의 걸출한 입담에 빠져들어 흥미 있게 읽으면서도, 실제였을 법한 느와르 장면들을 상상해 눈살을 찌푸리고 연민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뒤에 나오는 작가의 말엔 실제 인물 김근태 님의 <남영동> 에세이를 참고했다고 나와있으니 그 연민과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차남들의 세계사』는 작가만의 걸출한 입담으로 슬프기만 한 차남들의 세계사를 정말로 그럴듯하게 재현해낸, 제대로 된 한국 소설이다. '차남'들,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의 힘을 빌려 점점 자신의 영혼을 잃어가면서까지 광기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들이다. 사실은 그들도 '보통' 사람이었을 텐데, 무언가의 눈이 멀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그들의 모습은 슬펐고, 지금도 어디선가 있을 법한 생각에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그리고 책에 특별함을 더했던 것은 단락단락 이어지는 작가의 관여 - "자, 이제 양치질이나 한번 하고 와서 들어보아라"와 같은 - 와 그 서술이 마치 판소리를 듣는 듯, 운율감이 느껴지듯 능글맞고도 재미있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에 올 이야기의 '아주 얕은 복선'을 주기도 하니, 가독성이나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는 말할 것도 없다. 자, 이제 슬프지만 웃기고,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차남들의 세계사』를, 지금도 활개치고 있을 그들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보아라 -

 

 

 

- 리뷰의 끝은, 작가님의 표현을 이용한거라는 거 아시죠? 오해하지 말라는 소심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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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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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아라니까."

나복만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 퍼뜩 일곱 살때 헤어졌던, 그때는 이미 얼굴조차 희미해져 버린 어머니를 떠올렸다. 더불어 자신이 태어나기 6개월 전 단신으로 월북을 해 버렸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그래서...... 나복만이 그 순간, 어쩌면 그 모든 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쭉 이어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복만은 아주 잠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속으로 원망했고 (그는 속엣말로 짧게 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딱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를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스치듯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움이나 애정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사는 모습을, 단칸방이지만 따뜻한 이불이 깔려 있는 거처와, 결혼한 여자도 있고, 번듯한 직장도 있는 자신의 현재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보여 주고만 싶었을 뿐,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기적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으니까. (114p)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 시절은 예지력 넘치고 날카로운 분석력과 판단력을 지닌 각종 요원들과 형사들이 전국 각지에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한데 (바야흐로 형사들의 시대, 누아르의 시대가 만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자신들의 손에 넘어온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가정주부든 성직자든,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아니 그 이상의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능숙하고 능란한 취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취조의 힘은 대개 물과 전기와 그들의 성기와 주먹과 발끝에서 나왔는데, 어떤 사람에겐 그중 한두 가지만 쓰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에겐 그것들 모두를 한꺼번에,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 시대를 가능케 했고, 또 번영케 했던 '5원소(물과 전기와 성기와 주먹과 발끝)'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7원소'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거기에 수건과 밧줄을 추가했다.) (140p)

때때로 평온하게만 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진 후, 그 틈에서 낯선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의식 중이든 무의식중이든 우리가 감추고자 애를 쓰던 유일한 진실이 눈앞에 나타나는, 아프지만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기에 급급해한다. 그만큼 우리의 진실이 더럽고, 하찮고, 추악하고,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방식이다. 그 손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다시 틈 안으로 억지로 욱여넣고 겹겹이 시멘트를 발라 버린다. 그리고 시멘트를 바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안의 또 다른 괴물을 눈앞에 호명해 낸다. (사실, 그 낯선 손은 이 괴물의 손이기도 하다.) 그렇게 불러낸 괴물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날뛰고, 제멋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도, 우리는 스스로 괴물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어쨌든 괴물 덕분에 우리는 다시 진실을 외면할 수 있었으니까. 고마운 괴물이니까....... 그것이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는 기본 공식이다. (233p)

정남운이 '3'번 방에서 한창 나복만에게 『데미안』을 읽어 주고 있을 무렵, 김순희는 원주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 쩡, 쩡, 쩡, 울리는 소리를 일주일 내내 철제 의자에 앉은 채, 졸다 깨고, 또 졸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무방비 상태로 계속 듣고 있어야만 했다. 사실 그 소리는 원주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부터 4층 화장실까지 연결된 낡은 상수도 배관에서 나는, 수격 현상 (water hammering) 중 하나였다. 물의 압력이 일정하게 배관을 진동시키면서 내는 그 소리는, 그러나 김순희에겐 단순한 소음이 아닌, 소리 자체가 지시봉이 되고, 소리 자체가 주먹이 되고, 소리 자체가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듯한 낯설고 섬뜩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그녀는 쩡, 쩡, 쩡, 소리가 울릴 때마다 계속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목을, 어꺠를, 허리를, 소리보다 반 박자 늦게 움츠리곤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녀는 「마태복음」26장을 떠올리려 애써 노력했다. 「고린도전서」 13장 속사도 바울의 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를 무의식중에 웅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진정 괴롭혔던 것은, 그녀 스스로가, 누군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벌써 나복만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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