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가우디다 - 스페인의 뜨거운 영혼, 가우디와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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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가우디다』 김희곤 / 오브제

스페인에 보물을 선물한 '건축의 신'의 생애를 따라서

 

 

 

 
   "스페인은 가우디다."라는 단정적인 제목을 보면서, '가우디'라는 사람이 스페인에서는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대략 짐작게 했는데 사실상 내게는 가우디에 대해서 문득 들어본 이름과 건축가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었다. 그러니 그가 남긴 몇몇 건축물들의 이름은 알고 있을 리 만무하고, 가우디의 명성과 위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은 거의 놀라운 마음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을 여행한다면, 그의 건축물을 따라 여행하는 코스가 있을 정도로 빼놓을 수 없는 '가우디'라는 존재. 저자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스페인에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들에 심어진 그의 예술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시나 천재성이 있음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노력에서 점수를 뺄 수는 없다. 그는 다리에 지병이 있었으며, 청년기에 공방의 조수로서 일했고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했지만, 남다른 고집과 예술성, 끈기 있는 성격으로 스페인의 보물들을 완성시켰다. 그가 건축가로 성공한 뒤 사람들의 평가는 조금 엇갈리긴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건축의 본질에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전 재산을 희생해 몰두한 '성가족 대성당'은 그가 '재산'이 아닌 오직 '건축'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건축물은 다양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으로서 그 웅장함이 다 표현될 수는 없겠지만, 그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 같다. 제도판에만 목매지 않고, 현장에 나와 그 건축공간과 기능, 어우러짐을 모두 생각했다던 가우디의 건축물은 그의 노력과 장인 정신을 통해 지금까지도 입에 오르내리는 스페인의 보물이 되었다. 작은 부분 하나 무시하지 않고, 건물들의 이곳저곳, 반대편까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건축물들은 실제로 꼭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건축주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 하에 예술적인 건물들을 만들었다. 그만의 고집과 뚝심이 있었던 덕이다. 곡선과 화려함, 자연적인 느낌도 함께 어우러지는 가우디의 건축물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다. 비록 그 모두가 완성작은 아님에도 엄청난 광경을 선사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사실 스페인과 가우디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책이지만, 가우디의 건축물과 열정에 보면 볼수록 마음이 가고 은근히 맘에 와 닿는 것이었다. 건축학교 졸업식 날, 학장이 그에 대해서 이야기한 연설 속에는 "오늘 우리는 천재 아니면 바보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지병이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한 채, 스페인의 명장이 되었던 가우디. 그의 이름과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꽤 뜻깊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만약 건축과 스페인에 더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나보다 더 유익하게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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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본질은 시대의 변화를 좇아 다양한 상징들로 채워 넣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예시하는 공간 질서다. 영웅과 신화의 이야기로 가득 채운 신의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양심을 반영하며 인류의 미래를 열어주는 공간의 주인공은 결국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연주하는 위대한 지휘자다.

가우디는 그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단 한 번도 고향 리우돔스와 레우스의 갑옷을 벗지 않았다. 구수한 고향 사투리도 버리지 않았다. 벌겋게 달구어진 쇠붙이의 열정은 망치질과 담금질을 피하지 않듯이 세상의 망치질과 담금질로 자신의 청춘을 강화시켜나갔다. 중세를 빛낸 건축가 미켈란젤로는 "모든 대리석은 내부에 자신만의 조각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자신만의 인생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우디의 청춘은 인생이 품고 있는 조각상의 구조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31p)

가우디는 제도판 위에서 도면을 그리는 데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설계실을 박차고 나와 건물이 들어설 대지에서 3차원 공간구조를 먼저 세우고 나서 도면을 그렸다. 대지에 들어설 건축공간이 되고자 하는 목적과 방향과 기능에 대해 충분히 질문하고 나서 춤추는 영감으로 구조와 기능과 미의 옷을 입혔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한 송이 꽃과 나무까지 그들이 자아내는 영감을 바탕으로 3차원 모델을 만들어 보고 나서 빠른 시간에 도면을 그렸다. (63p)

피카소는 구엘 궁전 맞은편에 살면서 타일 조각 모자이크로 굴뚝을 장식하는 트렌카디스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비난한다고 그 사람의 예술성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예술의 프래그멘테이션 (파쇄, 해체) 역사에서 피카소에게 영향을 미친 요소 중의 하나가 가우디의 트렌카디스 기법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이념적으로는 등을 돌렸지만 예술성은 언제나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진보와 보수는 시작과 끝처럼 서로 맞물려 대립과 공존을 반복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왔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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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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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의 역사』 최민석 / 민음사

허구와 진실이 뒤섞인 이야기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주인공 이풍, 바람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주인공은 태어났을 때부터 비범했으며, 질풍노도의 연애사 또한 독특했으며, 근현대사에 속한 우리 역사의 큰 줄기란 큰 줄기는 모두 겪어낸 엄청난 사나이다. 『풍의 역사』, 그의 일대기는 하나 건너 그의 손자에 의해, 구라와 진실이 뒤섞이며 마침내 많은 이들로부터 '허풍' 이란 우스갯소리로 불렸던 이유를 드러내며 전해진다. (그의 아들은 '허구', 또 그의 아들은 '허언'으로 불린다. 삼대에 이어지는 허풍의 인생들이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가지가지, 어떤 의도가 없음에도 오해를 받고, 사실상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빠릿빠릿한 사나이였지만 빵빵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 '이풍'은 역시나 그의 이름처럼 (자유롭진 않게) 우연과 같이 휩쓸리고 휩쓸린다.
  '입담'으로 유명한 작가답게 『풍의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주목시키는 판소리의 변사처럼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소설은 무척이나 가볍고 유쾌하다. 간혹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부분도 있는데, 현대사라는 팩션과 픽션이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면에서는 『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가, 우연처럼 역사의 큰 굴곡을 찍고 큰 역할을 하는 면에서는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으로서는 또 하나 유명한 입담꾼 중 하나인 천명관의 작품들이, 이 재밌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교훈은 마치 『큰 물고기』(영화 <빅 피쉬>)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역시나 한국의 역사가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이 작품 또한 어떤 작품에 지지 않게 내 입맛에 쏙 들어맞았다.
  그 비슷한 느낌의 작품들 가운데 서서 『풍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허구'와 '진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저 개인의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라고 얘기하는 할아버지 '풍'의 역사가 어떻게 『풍의 역사』라는 이야기가 되는지. 살아가면서 허풍과 가벼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주인공이 들려주는 그의 역사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허풍'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선사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똘똘 뭉친 이야기의 힘은,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이어진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사실상 구라를 잘 치는 사람들이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는 소설가가 되는 거라는 믿음도 들고. - 아쉽게도 전작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어깨너머로 들은 그의 작품들은 독특하고 유머러스하다고 하니, 『풍의 역사』와도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자유롭게 노닐고 싶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삶이 평범하지는 않던 삼대의 과거와 현재이자, 현대사의 질곡을 넘나든 역사다. 그 역사는 허풍과 진실이 마구 뒤섞여있지만, 어디까지 믿는지는 자유다. 주인공 '풍'의 한마디가 보탬이 될지도 모르겠다.
 "삶에는 언제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비로소 진실이 되는 게 있단다" 
『풍의 역사』 속에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유머스러운 문체 속에 웃고 넘기지 않을 진지한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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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풍이란 인간은 어찌 되었기에 여섯 살부터 백 살까지 오해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단 풍은 당시 열 살이 맞았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여섯 살이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라 해도 무리 없을 만큼 해맑았다. 그랬기에 여섯 살 금순이의 마음을 깨뜨리기에 장애가 없었다. 동시에 풍의 체구는 거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 살 때 이미 청년의 체구를 띠고 있었다. 그랬기에 서른 살 과부 정씨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아울러, 풍은 심정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가면을 바꿔 쓰듯 얼굴을 바꿔 썼다. (22p)

풍은 전투모 안에 `밤`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살아야 했던 이유이자, 이 전쟁을 이겨 내야 하는 이유였다. 풍은 미군과 싸운 것도 아니고, 일본군과 싸운 것도 아니고, 전쟁 자체와 싸우고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래서 다시 중도로 돌아가 밤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절실한 생존의 이유이자 목표였다. 그리고 이 평범한 한 인간의 절실한 희망은 세계대전이라는 광포한 역사의 억압을 기어코 이겨 내고 말았다. 누구는 우연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거짓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풍은 언제나 신이 이 땅에 자신을 보냈기 때문에 신은 단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항상 자신을 도우려 했다고 말했다. 그게 다소 허무맹랑할지라도 말이다. (46p)

여기서 잠깐 말을 보태자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풍에게는 이처럼 느끼한 면이 다소 있었는데, 당시의 맥락에서는 이게 그렇게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여자였던 밤은 이 말에 그만 껌뻑 죽어, 넘어갈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풍에게 "몰라, 몰라. 개복치야"라며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선보일 수 있는 갖은 애교를 맘껏 터뜨렸다. 근데 어찌나 기분이 좋아 마구 두드렸던지 애교라 생각하며 주먹질을 받아 냈던 풍도 그만 통증에 기침을 뱉고야 말았다. 그제야 밤은 너무했나 싶어 걱정하며 물었다.

- 어머! 자기, 괜찮은 거야?

풍은 이 사랑의 염려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 괜찮다. 이따위 통증. 아프니까 청춘이다. (61p)

풍은 이때 자신의 인생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힘의 바람에 의해 떠다녀야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왜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거리에서 자신의 소리를 외쳐야 하는 지, 왜 힘없는 사람들이 벼랑 끝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세상이 반응하는지, 왜 세상은 반응하는 자신들의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지, 왜 권력자들은 세상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도 그 생을 유지하는지.......

풍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소리 없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그림 같았다. 햇살은 따갑게 눈을 찔렀고, 땅에는 붉은 개울이 흘렀다. 그 붉은 개울을 디딘 사람들의 살아가는 발자국이 이 세계에 애달프게 남겨졌다. 땅에는 붉은 개울이 흘렀고, 공기 중에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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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일격 밀리언셀러 클럽 136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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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일격』 로렌스 블록 / 황금가지

 사소한 생각이 주는 '한 방', 실제로도 존재할까요?

 

 

 

 
  앞서 읽었던 『살인과 창조의 시간』에 이어지는 '매튜 스커더' 시리즈 네 번째 편입니다. 이전 편이 아주 깔끔하게, 뒷맛도 개운하게 끝맺어주는 소설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조금 더 복잡해졌지만, 비슷하게 재미있지요. 그리고 전편에서도 매력적으로 여겼던 스커더의 성향과 성격들이 이 소설 속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경찰을 관둘 수 밖에 없었던 개인사도 조금씩 등장하고, 알코올에 탐닉하며 우연하게 찾아온 사랑을 맞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도저히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미궁'과 같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어둠 속의 일격』. 스커더는 9년 전에 일어난 '얼음송곳 사건'에서 살해된 8명의 여자들, 그리고 그중에 뭔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의 죽음을 파악해달라는 (그 여인의 아버지에게) 의뢰를 받게 됩니다. 이미 가해자라고 판명되는 사람이 잡혀 복역하고 있고, 설사 다른 가해자가 있더라도 9년이란 오랜 시간 속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일 수도 있는 어려운 사건을, 스커더는 집요하게 파헤치게 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자리가 잡혀진 9년 전 사건을 드러내기란 쉬운 것이 아닐 겁니다. 딸의 죽음을 목격하고 잡힌 가해자를 파악하고 슬퍼했던 현실에 가까스로 적응해서 9년이란 시간을 보내왔지만,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착잡할지 모르고요. 사건과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그 관계를 파악하면서 나올 수 있는 비밀이 어떤 것일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현실이 두려운 피해자의 아버지는 의뢰를 포기하지만, 스커더는 멈추지 않습니다. "벌레가 가득 찬 깡통을 열어놓고 이제 와서 그 벌레들을 그냥 다시 깡통에 넣자고 결심할 수 없다"고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단호하게, 진실을 캐내는 여정을 끝까지 지속하지요.

  계속해서 파헤쳐도 진실이 나올 것 같지는 않은 책 속에 사건은 "탄광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 꼴"과 같은 비유가 계속 나올 정도로 어렵고 막막합니다. 마치 어둠과 같죠.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나 경찰, 프로파일러들이 그러듯이 아주 사소한 생각하나가 큰 실마리를 주기도 합니다. 그 사소한 뭔가가, 빗겨서 생각하는 작은 뭔가가 번뜩일 때, '어둠 속의 일격'이 되는 거겠죠. 이런 '어둠 속의 일격'과 같은 '한 방'은 소설 속에서도 급격한 반전과 함께 큰 재미를 선사합니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런 생각들이 사건에 크게 적용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과연, 실제로도 이런 '한 방'이 존재할까요?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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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범인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으신 거죠.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미리 알아 두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설령 밖에 살인자가 돌아다닌다 해도, 살인자가 누군지 알아낼 길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증거가 남아 있진 않을 겁니다. 누군가의 공구 서랍에 피로 얼룩진 얼음송곳이 있진 않을 거란 말이죠. 제가 운이 좋아서 실 한 가닥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배심원 앞에서 펼쳐 보일 수 있는 그런 물건으로 변하진 않을 겁니다. 누군가 따님을 살해했는데도 벌을 받지 않았고 그걸 생각하면 울분이 치미시겠죠. 하지만 범인이 누군지 아는데도 그자에게 손 하나 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게 더 열 받지 않을까요?"

"그래도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누군가 아마 이유가 있어서 따님을 죽인 것 같다고.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19p)

"날 해고하고 싶다 이거군요."

"당신이 그런 표현을 선호한다면......."

"선생님은 애초에 날 고용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날 해고할 수 있죠?"

"스커더 씨."

"벌레가 가득 찬 깡통을 열어 놓고 이제 와서 그 벌레들을 그냥 다시 깡통에 넣자고 결심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많은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것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멈추진 않겠어요."

그는 기이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날 조금 두려워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언성을 높였거나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위험하게 보였나 보다.

"긴장 풀어요. 내가 죽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죽은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수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고 나는 꺼지라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비공식적인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도와준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혼자서도 해낼 수 있습니다." (164p)

아이는 내게 아파트 번지수를 말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 이름을 말해 달라고 했다.

"세인트 마크스 플레이스 212번지요."

나는 순간 가끔 꿈에서 나오는 것 같은 순간을 느꼈다. 잠을 자면서 불가능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걸 알고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바로 그런 순간 말이다. 난 지금 앳된 목소리의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잇는데 이 아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주소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아니면 아마도 이 아이와 엄마는 톰킨스 스퀘어 공원에서 다람쥐들과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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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탐닉 - 신이현의 열대를 보내는 다섯 가지 방법
신이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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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탐닉』 신이현 / 이야기가 있는집

 열대의 묘한 향기와 열기가 느껴지는듯

 

 

 

  젊었을 때의 여행, 식도락 여행, 고생을 사서 하는 여행, 풍족한 휴식을 떠나기 위한 여행. 그 어떤 것이라도 '참 여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해보고 싶은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다. 여태껏 내가 한, 새로운 곳을 보고 만나는 여행은 늘 익숙한 사람과 함께였기에 거리감이나 두근거리는 설렘보다는, 친숙하고 편안한 여행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여행을 꼭 해보고 싶기도 하다. 낯을 퍽 가리는 성격상 내게는 큰 도전이 필요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여행 동안 소중한 벗이나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부럽다. 외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는 않지만 어색한 몸짓으로 소통하고, 낯설지만 따뜻한 미소와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 여행', 언젠가는 가능할까?

 

 

  『열대탐닉』을 읽으니, 그 바람이 더욱 짙어진다. 무덥고 끈적끈적하고 늘어진 캄보디아의 열기를 듬뿍 담아온 여행 에세이. 여행 에세이라면 뭔가 특별하고 외진 곳의 이야기를 담아낼 것 같지만 이 책의 시작과 끝은 '호텔 수영장'이다. 뭔가, 여행보다는 관광에 가까운 장소지만, '사람'에 대해서 관찰하기 위해서라면, 이곳도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뿜어낼 장소이기도 하다. 신이현 작가는 이곳에서 처음 만난, 열대에 탐닉한 다섯 인물에 관한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자 신이현은 전해준다. 건기와 우기가 반복되는 먼지 냄새와 땀 냄새, 묘한 열기와 향기가 섞여있던 열대에 제대로 젖어 있던 그들의 기분을, 그때의 감성을. 전해지는 글들은, 멀리 떨어진 나도 무르익은 분위기에 푹 빠져들 만큼 속삭이고 또 속삭인다. - 어찌 다들 이렇게 아름답게 얘기할 수 있는지, 저자가 혹 열대의 감성에 젖어 그들의 말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변형시킨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

 

 

 

  그러나 이 책의 특별함은 끝나지 않았으니, 열대의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풍겨오던 향기의 과일, 갈증을 풀어주던 과일들에 그 사람들을 빗댄다. 시시껄렁하고 낙천적이었으며 누구보다도 그곳을 탐닉했던 '잭 프루트', 몽롱한 망고의 향을 풍겼던 자유로운 '망고 아저씨', 로맨틱한지 과하게 자유분방한 건지 남다른 비밀이 있었던 '두리안', 늘 미소를 짓고 있었던 '불꽃씨', 마지막으로 파파야에 비유했던 저자 신이현의 이야기까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열대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상야릇한 과일들을 먹으면서 이상야릇한 생각을 했다고.” 『열대탐닉』은 그 곳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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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술집에서는 어디를 가든 맥주잔에 얼음을 넣어 주었다. 아가씨들이 얼음통을 들고 다니다 맥주잔에 얼음이 녹으면 재빨리 얼음덩이를 넣어주는 식이었다. 맥주는 점점 연해져서 보리 주스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얼음이 든 맥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국 좋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얼음 없는 맥주가 나오면 불평을 했다. 얼음으로 연해져 버린 맥주는 오래 마실 수 있었고 취하지도 않았다. 열대 시간에 맞춘 술 마시기의 방법이었다. 밀도가 낮은 맥주를 마시다 보면 인생의 밀도도 낮아졌다. 모든 것이 느슨해졌다.

무엇인가를 결심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결국 터특하고 가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열대의 태양 아래 누워 있었다. 그렇게 누워 맨살을 말리면 그 끝에 찾아오는 것이 있었다. 갈증이었다. 입이 바싹 타고 온 몸의 세포가 말라붙었다. 맥주를 마셔야 하는 시간이었다. 얼음이 출렁거리고 유리잔에는 물방울이 툭툭 흘러내리는 맥주를 마시는 순간 나는 인생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 압축적으로 내 입안으로 흘러들고 있음을 느꼈다. 열대의 태양 아래 갈증이 나도록 몸을 태운 뒤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 쾌감의 절정

"여기 뭐가 좋아요?"

"이 도시는 잘난 체하지 않아."

"잘난 게 있어야죠."

"잘난 게 없는 이 도시가 좋아."

그는 이제 곧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놀라는 나를 보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테라스 끝으로 갔다. 드리워진 난들을 옆으로 헤치고 골목길 어딘가를 가리켰다. 지저분한 벽 앞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해맑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숫돌이 앞에 놓인 것으로 보아 칼 가는 남자였다.

"저기가 곧 내 자리가 될 거야." (93p)

"그 남자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여기서 먼 고대 절에서였어요. 초등 동창생들이랑 여행 왔을 때였죠. 고대 돌무더기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다들 더위에 지쳐 호텔 수영장에 누워 있었죠. 그런 호사스러운 휴식이 우리에게는 무척 어색했어요. 그때 이렇게 노을이 지더군요. 풀벌레 소리 같은 건 없었어요. 도마뱀이 울었죠. 그 소리 들어봤죠? 짝을 찾는 소리라고 하더군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노을이 수영장 물을 건너 나에게 왔을 때 손가락 끝의 세포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어요. 노을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곳의 노을은 특별했어요. 몸이 나른해지면서 슬픔이 복받쳐 올랐어요. 목덜미에 무엇인가가 느껴졌어요. 잡으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노을은 내 온몸으로 내려오면서 황홀하게 나를 감쌌죠. 그래요, 바로 누군가의 손길이었어요. 붉은 열대의 공기는 내 몸을 어루만지던 어떤 남자의 손길을 떠올리게 했어요. 이곳 공기 속에는 본능을 일깨우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맥박이 조금씩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입술이 벌어졌죠. 그래요, 노을

"내 나이 열 살 때 아버지가 기타를 사주었죠. 그런데 그 다음 날 아버지가 사라졌어요. 대체 아버진 어디로 갔을까요? 집으로 오던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우주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일까요?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난 그때부터 기타를 쳤죠. 언젠가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오리라.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기타를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처음 만져 봅니다. 이 기타 줄.......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었네요. 아마도 아버지는 이 곳에 있지 않을 까요? 아마도 이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 기타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기타 소리와 함께 우주 공간의 별들처럼 빙빙 돌아갔다. 그는 기타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언어로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나의 상상력으로 완벽하게 채웠다. 공백으로 된 그 시의 반을 풀어내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다. (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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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6
장은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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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 장은호 외 9인

공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

 

 

 
 
 
   "공포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해도 듣지 않으려 해도 절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겁주는 공포 이야기의 근본은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공포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닙니다. 무언가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올듯할 때 눈을 가리고 온몸에 힘을 팍-주고 볼 정도로 싫어하지요. 하지만 공포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은 시각적인 자극이 없기 때문인지 어느 정도 잘 듣곤 하지요. '공포'를 장르로서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책을 읽기 전 '공포 문학'이란 것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귀신이 많이 등장하겠다."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살짝 떨었습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고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어릴 때 봤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꿈 혹은 환상이라 생각합니다.) 귀신이라는 말 만으로도 정말 무섭거든요. 하지만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에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공포 문학'의 향연이 펼쳐졌습니다.
 
 
 
  스릴러와 공포의 경계가 참 불분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이 책에서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작가들이 정말 다양한 '공포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스릴러와 추리가 약간은 섞여있는 듯한 작품, 그리고 어느 정도 눈을 찡그리지 않고 수월하게 볼 수 있었던 스릴러 같은 작품, 영화나 말로만 접해왔던 '고어', '슬래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모두 '공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요. 짧은 단편들이 묶여있기에, 재미있는 작품들도 있었고 흥미가 떨어지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꼽아보자면,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한 '유재중' 작가의 『돼지가면 놀이』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었던 '박해로' 작가의 『무당 아들』, 그리고 비밀이 숨겨진 시댁 방문 이야기 '장은호' 작가의 『며느리의 관문』이었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다양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스릴 넘치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간혹 어떤 작품들은 잔인하고 역한 느낌이 드는 장면이 있어 보기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노골적이고 상세한 묘사 때문에 머리속에서 그 그림들이 마구 그려지는데, 그렇게 무섭지 않을 것들이라 생각한 것들도 책 속에서는 오싹하게 느껴지니 후다닥 넘기고 싶은데 궁금해서 쳐다보니, 정말 죽을 맛이이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획기적이고 원초적인 (?) 시도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하나하나, 다른 작품을 만나갈 때마다 조금씩 소름이 끼친 것은, 바로 책 속에 나온 모든 작품들의 공포, 그 근원은 바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이 숨겨져있던 광기와 본성을 나타낼 때, 어떤 귀신이나 괴물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 공포문학, 아마 장편소설은 더더욱 무섭겠죠?

 

 

 

 

Copyright ⓒ 2014. by Rinny. All Rights Reserved.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덧글과 공감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사람들은 (...) 이야기 중간에 나왔던 귀신 존재에 더욱 주목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시시한 진실보다 강렬하고 무서운 허구를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 기억은 재생적 상상력입니다. 과거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보다 더 커집니다. 과거의 상처를 메우려 상처보다 큰 허구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일종의 방어기제로 본인 스스로도 진짜로 믿는 조직된 기억이거나, 무의식으로 현실적이지 않은 공포체험 이야기로 자신의 상처와 거리를 둔다고 했습니다. 상처받은 자가 상처에 대해 합리화시키거나 허구로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46p, 돼지가면 놀이)

"거꾸로 가는 세상이지만 자넨 훌륭하네 영맨. 그럼 내 하나 물어보지. 자네 애인이 성폭행당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치지. 범인은 누군지 알아. 그러면 그걸 그냥 법의 심판에 맡길 수 있겠나?" "그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회적인 통념상 법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그거지?"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속편한 소릴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가족이나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런 가식은 가면을 벗게 되고 본능만이 남아. 법의 심판이라는 게 한 사람의 상실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에 얼마만큼의 보상을 해 주나? 살점이 떨어지고 영혼이 찢어지는 아픔은 결코 측량할 수 있는 게 아냐. 반면에 법의 심판을 받은 놈들을 보게. 버젓이 살아가고 있지. 밥 먹고 똥 싸고 텔레비전 코미디 보면서 헤헤거리고 말이야." (125p, 무당 아들)


주파수를 91.9MHz로 바꿨다. `성시경의 음악도시` 오프닝 음악이 흘렀다. 라디오 진행자는 소양강 댐 인근 야산에서 발생한 산사태 사고 소식을 전했다. 13명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가운데 브라이언 애덤스의 `헤븐`이 흘러나왔다. 미라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며 멜로디에 맞춰 흥얼거리다가 문듯, 3년 전 이맘때 비슷한 참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소양강댐 인근 야산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팬션 두 채가 매몰되었고 희생자의 다수가 초등학교 과학체험 자원봉사를 떠났던 대학생들이라 더욱 안타까웠던 사고였다. 기묘한 건 그 사고 때도 희생자가 14명이었다. 확률로 따지자면 제로에 가까운 오싹한 일치였다. (244p, 헤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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