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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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정원』 박혜영 / 다산책방

비밀스레 숨겨두었던 추억의 문을 열다

 

 
 
  황석영 작가는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품을 보고 '묘한 빈티지의 매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읽는 도중에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추억을 되새기는 묘한 그리움을 그려내는 관조적인 문체가 참 아름다웠다. 시대적 배경이 옛날이긴 하거니와, 이야기에서는 참 독특한 향기가 난다. 세월이 흘러 빛바랜 일기장을 펼쳐놓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다락방에서 훅 끌어 오르는 먼지 밑에 앉아서 비밀스런 뭔가를 마주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정말로 '비밀스러운 정원' 같다. '노관'이라는 종갓집의 배경도 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것 같았던 '테레사의 편지'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주인공이 천천히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들 간의 남다른 보이지 않는 관계를 확인하고, 한국사의 격정적인 과도기였던 시대를 타며 성장하면서 겪는 사건들 속에서도 분위기는 남다르다. 엄마와 율이 삼촌 간의 야릇한 유대감은 소설을 읽는 독자도 애를 타게 만드는 조용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그들 관계는 소위 막장 드라마 같기도 하지만, 표현되는 방식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들의 사랑,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운명의 증거가 된 주인공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나도 담담하고, 사랑의 고통으로 온몸을 지배당한 율이 삼촌의 시선과 그의 모든 말들이 너무나 애잔하게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것에 붙는 모든 수식어들 중에서 고통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인가. 그들의 사랑은 조용하고도 너무나 강렬해서 소설의 무게를 흠씬 살려준다.
   '비밀'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로서 무겁게 중심을 잡고 있지 않은 느낌이다. 강한 긴장감을 끌지 않고, 느슨하게 가는 대로 풀어놓고, 터지는 것도 툭-하고 던져지는 듯. 사랑에 관한 비밀이 이렇게 강렬하고 독특한 내음을 뿜어낼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것은 작가의 아름답고 진지한 문체 탓이기도 하지만, 문장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옛스런 문장의 느낌이기도 하고 진지하고 고상한 대화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담고 싶은 문장이 결론적으로는 참 많았던 것 같다. 한편의 아름다운, 빛바랜 추억을 되새기는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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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오솔길에서는 삼촌이 내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마치 연결된 큰 톱니와 작은 톱니가 맞물려 가는 것 같았다. 율이 삼촌은 자신의 어깨 아래를 따르고 있는 동그란 내 머리 위에 베레모처럼 손을 얹고는 말했다.

"젊었을 때 경계해야 할 것은 무지와 천박이란다.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예절을 익히렴. 예절이란 단순한 생활범절을 넘어서 세상을 예우함을 말하는 거란다.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애정과 온순한 마음가짐이 바로 예절이지."

그의 손바닥 안에서 내 검은 곱슬머리가 좀 흩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경계해야 할 것은...... 허무와 권태란다."

나에게 완전한 이해를 바라고 말하는 거 아니었다. 삼촌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두려는 것 같았다. (60p)

"저는 좋은 시는 무조건 외워서 낭송합니다. 시를 연주하는 것이지요. 시는 노래해야 합니다. 노래가 시입니다. 인쇄된 시는 연주용 악보에 불과하지요. 시가 소리로 연주될 때 우리의 전 감각은 열리고 그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동물의 소리를 들으면 아픈지, 애달픈지, 절망적인지를 바로 느끼지 않습니까? 내용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소리만으로 감정이 전해집니다. 시는 햇빛이 섞이고 짠바람이 부는 바다처럼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건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리듬과 율동이 시를 공간 속으로 헤엄치게 한답니다. 시는 그 파동으로 전해져서 우리의 가슴을 반응하게 합니다."

손님은 무심코 달린 말이 우연찮게 물가에 도착한 것처럼 스스로의 말에 감탄해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나는 마침 쥐고 있던 수첩에 손님의 말을 기록했다. 손님은 자신의 말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모든 시들은 시의 세계라는 영토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의 세계는 실재의 세상과 아주 흡사합니다. 시구와 세상의 실재 현상은 결국 하나의 몸통에서 나온 다른 팔들이지요. 시바 신처럼 시의 형상에도 한 몸에 수십 개의 팔이 달려 있는데 그 팔들은 몸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수많은 은유들이랍니다. (142p)"



삼촌의 눈길이 허공을 향하더니 곧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삼촌은 미래로 실어나르는 시간과 공간, 이 삼라만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생의 순환 기차에 무임승차한 사람처럼 목적지를 알고 싶지도 않고 굳이 내리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삼촌의 내면을 어떤 빛이 별똥별처럼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 그는 우연한 빛에 몰입했고 전기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빛은 사라졌다.

"괜찮으세요?"

내가 팔을 잡고 흔들자 삼촌은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지는 해는 비탈로 점점 기울어 체육관 돔 지붕의 둥근 경사로 미끄러져 내렸다. 행인이 드문 뒷마당에는 고요함이 도드라졌다. 문득 삼촌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최초로 허무가 찾아온 길목을 잘 기억해둬라. 그러면 그곳을 비껴갈 수가 있지."

그 순간 율이 삼촌과 함께 앉아 잇는 이런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예감이 농익은 열매처럼 내 머릿속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눈물이 고여왔다. 삼촌이 건너고 있는 허무의 강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의 빈 울림 때문인지 그의 내면을 태우고 있는 매운 연기 때문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235p)




문밖에서는 겨울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꺾고 얼어붙은 평원에 남겨진 것들을 휩쓸어 가도 삼촌은 견고한 성채 쌓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지금 노관에서의 나날들이 삼촌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감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 이외에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고 집 안의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만을 오롯이 그의 눈과 마음에 담고자 하는 수도승처럼 한 사람만 보고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허락했다. 그는 어떤 시간을 예정해놓고 그 시간에 점점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율이 삼촌은 오 년 전에 노관의 앞마당을 처음 들어서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가을 학교로 방문했던 그 모습도 아니었다. 아니, 이전에는 그가 한 번도 지금의 모습인 적이 없었다. 삼촌의 영혼은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뜨거워서 스치기만 해도 까만 재가 되어버릴 정도였다. 그의 내면은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구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는 이 낭랑한 햇빛 아래서 그만의 사랑을, 그만의 형벌을, 그만의 봥식으로 견디어내고 있었다. (2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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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4.11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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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샘터』 2014년 11월호

이야기 '샘터'에 풍덩!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봅니다. 언젠가 서점에서 만나봤던 표지의 '샘터'라는 글씨가 기억나네요. 그동안 단행본 책들만 보다가 이렇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월간지를 만나니 새로운 기분에, 느낌도 두 배로 좋은 것 같습니다. '미틈달'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이 눈에 띕니다. 11월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아직 10월 초를 지나고 있지만 부쩍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벌써 겨울로 향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

 

 

 

 

 

  샘터 11월호를 만나면서, 표지에 나와있는 '최인호 1주기'라는 글씨에 한참을 머물렀는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참 궁금했습니다. 최인호 작가님이 별세하신지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생전에 작품들을 많이 만나본 것이 아니었지만 그분의 작품 중 가장 처음으로 만난 책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였습니다. 언니와 서점에 놀러 갔다가 정말로 우연히 꺼내들었던 책이었고 바닥에 앉아 정신없이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지금도 책장에 꽂혀있지요. 그때 작가님이 투병을 하고 계신 걸 무지하게도 처음 알았습니다. 결국엔 그 작품이 마지막 집필 작품이 되었고요...

 

  샘터와 최인호 작가님의 인연은 제가 알던 것보다 참 깊었습니다. 연작소설 『가족』을 35년 6개월 동안 연재했다고 하는데요. 이번 『샘터』에서는 '사물의 시간'이라는 코너를 통해 최인호 작가님이 남긴 사진들과 유품들을 담았습니다. 삶의 끝까지, 항암치료로 손톱이 다 빠졌지만 골무까지 끼워가면서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님의 책상을 보니 너무나 숙연해집니다. 조만간 작가님의 유고집을 읽어볼 예정이에요.

 

 

 

  그리고 '취미의 고수' 코너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글을 보았습니다. "이 남자의 비틀스 기억법" 국내 최초의 비틀스 팬클럽에 가입했던 어린 날을 지나, 이제는 회장직을 하고 있다는 '서강석'님. 비틀스가 너무나 좋아서 카세트테이프와 LP는 물론, 비틀스에 관한 책들을 원서로 읽고 번역하고, 이제는 비틀스 앨범의 이름을 딴 출판사까지 차려서 자료를 수집하기에 이르른 이 분은 진정한 매니아 ! 자신의 노력으로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 보람차다는 이 분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아요.

 

 

 

 

  그 밖에도 참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개를 길바닥에 버리는 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개회충'의 문제도, 또 하나의 인생을 배울 수 있는 '병원'에 대한 이야기도, 평범해 보이는 청춘들의 특별한 이야기도, 요즘 많이들 쓰는 '턴 업'의 해석도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을 만나고, 작지만 소중한 일상의 많은 것들을 만나는 월간 샘터는 또 다른 블로그 세상 같기도 해요. 읽고, 배우고, 나누고, 그리고 익숙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있어 약간의 짬을 내서 읽으면, 식상한 말이지만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참 소소해 보이지만 살짝 고개를 돌려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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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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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글, 에두아르 부바 사진

아름답고 정직한,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

 

 

 

 

 

 

 뒷모습은 아무런 말이 없다. 밋밋한 그 모습, 표정과 손짓이 없는 뒷모습. 그러나 그 속에 진실이 있다. "생략과 은연중의 말, 빗대어하는 말, 암시의 세계"인 뒷모습은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러나 주시하기 전엔 그 진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들은,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의 얼굴만이 진정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품고 있는 의미를, '뒤'에 감춰진 이야기를 『뒷모습』에서 풀어내었다. 어떤 사진 작품이 있다면 - 아니 사진이 아닌, 다른 장르의 작품일지라도 - 그 이야기 옆에 구구절절 이야기를 붙이는 것이 어색할 때가 있지만,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과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이 꼭 동시에 만들어진 것처럼 서로와 맞아떨어진다. 안간힘을 쓰는 뒷모습, 기도하는 뒷모습, 아이를 안고 있는 뒷모습, 젊은 여자와 중년 여자의 뒷모습, 발레리나의 뒷모습...... 흑백 사진의 명암 속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그들의 모습.

  꼭 뭐라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풍경 속의 뒷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사진들도 있다. 단순히 볼 때는 그냥 서 있는 어린아이가 응시하는 저 먼 곳을 바라볼 때 사진은 이야기가 된다. 바짓단을 걷고 바닷물에 들어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두 연인의 모습에서 약간은 초라하지만 행복한 사랑이 느껴진다. 사진을 찍고 감상하는 맛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물론 사진가의 기교와 의미를 부여함이 뛰어나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에 붙은 미셸 투르니에의 글은 사진과 같이 풍부하다.)

  이렇게 수많은 뒷모습에, 앞으로 돌아보기 전에는 아무런 표정조차 없어 보이는 뒷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이 책 때문이다. 세상의 다양한 뒷모습이 아름답고, 처연하고, 쓸쓸하고, 애수 깊기도 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뒷모습』 속의 많은 사진들이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뒷모습은 정직하다. 눈과 입이 달려 있는 얼굴처럼 표정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에 따라 꾸미거나 속이거나 감추지 않는다. 뒷모습은 나타내 보이려는 의도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다. 벌거벗은 엉덩이는 그 멍청할 정도의 순진함 때문에 아름답다." - 역자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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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말고, 사람의 몸은 / 본래 그렇게 생겨 있어서 / 누군가를 `품에 안는다`고 /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그의 등 뒤로 두 손을 / 마주 잡는 것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 얼굴을 서로 맞대고 그 들어가고 나온 곳이 / 맞물리도록 꼭 붙게 되면 / 저 뒤쪽 - 목덜미, 등, 허리, 엉덩이 - 은 / 탐험하고 소유하는 지역으로 변한다. 그렇기에 / 두 손이 그 지역에서 / 획책하는 일을 사진으로 / 찍는 것은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 그러나 여기서는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채가 / 포옹을 분리시키고 한 다발 카네이션 꽃이 / 그 포옹을 장식하며 고정시킨다. (머리털 中)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다시 공장의 / 일터로 돌아가기 전, 공원에서 잠시 쉬는 짬을 / 메울 셈으로 책을 한 권 들고 나오긴 / 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될 성싶지 않다. / 돋아나는 어린 싹에 비치는 햇살, / 살며시 움트는 은방울꽃의 새순, 먼지 속에서 / 폴짝거리는 참새들, 축복을 내리는 손처럼 / 바람에 흔들리는 마로니에 가지, 정오의 하늘에서 / 흘러내리는 나른한 무기력, 삼라만상 속의 / 약간 쓸쓸하면서도 낙관적인 행복감, 그런 / 모든 것을 두고 어찌 한동안 짧은 명상에 잠기지 / 않을 수 있겠는가.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 지나가는 행인들, 사진 찍는 사람, 그리고 심지어 / 이 페이지를 읽는 우리 독자들, / 그 모든 것들에 등을 돌린 채. 책은 물론, / 그 모든 방해꾼들에 대해서 당장은 /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세상의 생명들이 나직이 / 고동치는 소리에 까무루 홀려 있는 것이다. (세상의 노래 中)

해 저물녘에 찾아와 미래의 행복을 / 꿈꾸는 - 혹은 외로이 마음속의 / 슬픔을 털어놓는 - 사랑에 빠진 처녀와 / 원통 모자를 쓰고 자갈밭에 앉아 있어도 / 그 완강한 안락함이 든든한 중년 여인,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어쩌면 그저 삼십 년의 나이 차이? / 어쩌면 삼십 년 후에는 처녀도 / 지금은 모자란 자신감과 / 안정감을 갖추어 자갈밭과 / 부서지는 썰물과 눈부신 석양을 / 제압할 수 있을까? / 이것은 한갖 정신의 관점. / 그러나 한낱 추측만이 아닌 것이 있다면 / 그건 풍경. 그 무슨 조화의 기적이 있어 / 중년 부인의 발 아래에는 / 고즈넉하고 빛나는 공허뿐인데/ 처녀의 주위에는 바위 많은 내포 / 굴곡이 심한 암초, 폐허와 / 소나무를 머리에 인 가파른 벼랑이던가? / 두 가지 마음 자리와 두 가지 풍경/ (바닷가의 두 여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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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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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서은국 / 21세기북스

 지금까지의 통념을 엎어버리는 새로운 방식의 '행복론'

 

  
  '행복'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책들 중에서, 이 책은 가장 쇼킹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만 막연하고, 생각해보면 또 철학적이기도 한 질문. 이전에 내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아마도 행복한 이유를 구구절절 말했겠지만, 대표적으로 한 가지를 골라보자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사실, 이 질문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말 막연하고 답도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그 답은 아마 수천 개, 수만 개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의 기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암, 당연 그렇겠지, 수긍이 간다. 하지만 뒤이어 내 눈에 들어온 문장.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이럴 수가, 행복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세상의 많은 책, 힐링 책들은 조언한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 "마음을 바꾸라", "고정관념을 깨라." 일단 딱, 들어보면 괜찮은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활기차게 살아갈 힘도 난다. 하지만 갑자기 의문이 든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꿔야 할 일이 왜 이리 많은지, 하고. 『행복의 기원』의 저자, 서은국 교수는 이런 의문에 대하여, 수많은 '행복 관련 책'들의 함정을 잡고 재밌는 해답을 제시한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모든 생각과 행위의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복의 기원』에서 말하는 행복은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정의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박힌 생각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고 최종 종착지"라는 것이였다. 의미 있는 삶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행복론'이었다. 저자는 그의 생각을 '도덕 책 방식의 행복론'이라 칭하고, 또 다른 갈림길에 있는 '과학 책 버전의 행복론'을 주장한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는 우주에 살고 있으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살아온 생명체이고 많은 동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존을 위해 먹고, 투쟁하고, 도구를 만들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쯤에서 질문을 던진다.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는 본성, 즉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으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행복은 그 안에 있으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삶의 목적지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아마도 정말 자주) 지나치는 코스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결국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 특히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것. 만약 나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같이 슬퍼해줄 한 사람이라도 없다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사람, 그리고 사회성 이것은 내성적인 사람이든 외향적인 사람이든 간에 요구되는 양은 같다. 그리고 행복, 즉 생존을 위한 삶에서 유리한 사람은 유전, 그리고 성격 상으로 외향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살짝 아리송하지만, 수긍이 가기도 한다. 내성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의 사교성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행복의 기원』은 책의 첫인상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더욱 발칙하고 쇼킹한 책이었다. 우리가 이제까지 행복으로 가기 위해 '어떻게 (How)' 하냐고 항상 물어왔다면, 이 책은 우리가 왜 (Why) 행복을 찾는지를 묻는 책이다. 지금까지의 통념을 깡그리 엎어버리는 이 놀라운 책의 '행복론'. 이 '행복론'만이 진짜라고 무지막지하게 우겨대기는 어렵지만, 행복에 관한 색다른 시각을 살펴보는 흥미로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인간의 심리, 인간 본연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 사실 이렇게 잘 읽힐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저자가 참 글도 맛깔스럽게, 익살스럽게 씁니다.
과학과 관련되어 무거운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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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적 사고 대 동물적 본능, 무엇이 진짜 모습일까? 인간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다. 역으로 본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얼마나 움직이는지는 과소평가 한다. (...) 행복에 대한 책에서 왜 이성이나 본능 같은 주제를 굳이 다루느냐고?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이 악기가 언제, 왜, 무슨 목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야 행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이 악기의 주인, 즉 인간에 대한 심층적 파악이 필요하다. 생각은 그의 모습 중 아주 작은 일부다. 그는 보면 볼수록 동물스럽다. (28p)

우리는 이런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자들의 후손이 아니다. 호모사피엔스 중 일부만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짝짓기에 힘쓴 자들이다. 무엇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자아성취? 아니다. 고기를 씹을 때, 이성과 살이 닿을 때, 한마디로 느낌이 완전 `굿`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이 된 자들은 이 강렬한 기분을 느끼고 또 느끼기 위해 일평생 사냥과 이성 찾기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게 된다.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거창한 포부 때문이 아니라, 개가 새우깡을 통해 얻는 쾌감을 인간도 최대한 자주, 많이 느끼기 위해 고기와 이성에 몰두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우리에게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전달했다. (70p)

자, 여기서 좀 황당한 상상을 한번 해보자. 어떤 최신형 동전탐지기가 등장해 동전에 접근할 때, `삐`라는 신호음 대신 중독성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고 하자. 혹시 이런 경우 동전을 찾게 해주는 신호(음악) 자체에 매료되는 사람은 없을까?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음악 대신 아예 뇌에 미세한 쾌감을 준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탐지기 주인이 자기의 원래 목적(동전)보다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신호(쾌감)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 말이다. 황당한 상상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행복을 좇는 우리 모습이 어쩌면 이같은 주객전도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아주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제야 당황한다. 축하 잔치의 짧은 여흥만을 생각했지, 잔치 뒤의 긴 시간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7p)


행복을 정육점에서 판다면, 현재 시중의 고기들은 기름이 너무 많이 붙어 있다. 오컴의 칼날이 필요하다. 그 칼날로 기름기를 제거하고 나면 행복의 살코기로 남는 것은 주관적인 즐거움과 기쁨니다. 행복하기 위해 쾌락주의자가 되자는 말인가? 다소 그럴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처럼 자신을 집단의 일부로 생각할수록 행복의 쾌락적 부분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동안 우리는 내일이 없이 즐겁게 사는 여름 베짱이를 한심하게 생각하도록 세뇌받고 살았다. 두 가지 염려 때문에. 첫째, 쾌락주의자들의 즐거움은 저급하다. 둘째, 그런 삶의 말로는 한심할 것이다. 둘다 근거 없는 염려다. 세상 모든 베짱이들이 루저가 된다는 증거는 없다. 수많은 최근 연구들에서 나오는 결론은 오히려 그 반대다.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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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 쌍쌍바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5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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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 쌍쌍바』 박상 / 작가정신

 누구나 한 번쯤 미친 듯이 아름답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세상의 시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남들의 시선 따위에 관심갖지 않고 자신의 잣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자신의 기준대로 남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을 무시하긴 쉽지 않다. 무엇을 하더라도, 뭔가 특별한 일을 하더라도, 남들이 모두 그것을 할때 그것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순 없을까? 삶의 목표는 행복이지. 행여 다른 것이 될 것이라 해도 지금 내가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당신은 '일반'인 인가? 아니면 선수인가?"

  그는 대학입시가 재미있는 승부도 아니고, 공평하지도 않은 승부라고 생각했다.  최종학력을 고졸로 찍고, 가족들의 엄청난 눈치를 못 이긴 채 세상으로 나왔다. 먹고사는 일은 해결해야 하지만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인가 일을 찾을 때, 고만고만하게 건드려보곤 하는 보통 '알바' 대신에 흥미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는 세차장 일을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 '선수'가 된다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력한 스뽀오츠 정신으로, 남들보다 엄청난 스피드를 내세우며, 세차 시간 기록을 하나씩 깨나갔다. 역동적으로 손걸레를 차에 날리던 그, 선수가 되고 싶었던 그가 『예테보리 쌍쌍바』의 주인공 '광택'이다.

  기껏해야 멋진 일도 아닌, 배달 일이나 세차 일을 하면서 스뽀오츠 정신을 들먹이며, 강한 정신적 에너지를 받는 그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똘끼 찬 백수, 4차원, 약간은 병맛이 느껴지는 이 젊은 청년은 흔히 말하는 '잉여'다. '잉여'. 말만 들어도 어감이 좋지도 않고,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렇게 화사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잉여 같은 인간, 주인공 광택에 입에서 '프레데릭 라르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프레데릭 라르손의  『예테보리 쌍쌍바』다. 20년간 결투를 하며 결국엔 동질감을 느껴 싸움을 그만두고 쌍쌍바를 나눠 먹는 친구가 되는 주인공 둘은, 광택의 눈에 '진정한 선수'로 보였다. 광택은 예테보리에 가기를 꿈꿨다. 미친 듯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  다시 한번 질문을 고쳐 묻는다. "당신은 선수인가? 아니면 선수가 되고 싶은가?"

  세상의 모든 가치를, 힘이나 돈, 명예 같은 번듯해 보이는 가치 대신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과 행복을 찾아나가고 싶진 않은가? 그렇다면 선수가 맞다. 무엇을 하든지,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나가든지 간에 행복을 찾아나가고 있다면 모두 선수다. 피 튀기고 각박한 그라운드에 남아있는 우리니까. 미친 듯이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아보자. '예테보리'라는 아름다운 곳에서 쌍쌍바는 그때 나눠먹는 걸로 -

 

 

 

- 읽다보니, 천명관 작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도 떠오르네요.

그보다 양도 적고, 살짝은 가볍지만, 유쾌하고 똘끼넘치는 소설이에요.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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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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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자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알게 모르게 다양한 경기를 하며 살아간다. 승자와 패자를 감별하기 좋아하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록을 깨고, 포기해야만 할 것 같던 승부를 뒤집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기꺼이 경쟁 속에 투신한다. 나쁠 것도 없다.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려는 투지만 있다면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누가누가 술 마시면서 오래 버티나`라는 승부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기록 보유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술집 주인들이 미쳐버릴 때까지 시합을 벌인 선수들도 많을 것이다. 단순한 투지와 경쟁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멋진 승부를 펼치는 사람들을 나는 이렇게 부른다. 선. 수. (14p)

처음에 배달 일을 하며 무조건 속도만을 좇던 시절을 떠올렸다. 인생이 속도였고, 속도 아래 세상이 있었고, 속도가 세상이 지배하는 이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내가 가진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가소로웠고 나는 세상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거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배달 가는 곳의 사람들이 사는 다채로운 풍경을 관찰하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령 열 군데를 배달 가면 열 개의 각기 다른 공기와 흥미로운 표정들을 만났다. 기쁘다, 슬프다, 바쁘다, 한가하다, 쾌활하다, 무겁다, 촉촉하다, 메마르다, 똥 마렵다, 싸고 왔다 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재미를, 혹은 의미를 발견할 수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속도 말고도 다양한 가치를 좇고 있는지도 몰랐다. 업무의 성취, 정치적 야망, 경제적 안정, 사회적 명예, 사랑과 결혼의 행복, 가정의 안위, 이 세 육아, 맛있는 맥주, 세계 여행, 딱지치기, 맛있는 요리 등등. 인간의 삶을 보람 있게 만들 수 있는 가치는 정말 많아 보였다. 내가 좇는 속도라는 건 너무 일차원적이고 추상적인 가치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곤 했다. (80p)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하면 매니저의 말을 껌처럼 곱씹었다. 최후의 승자는 아티스트라. 나는 파이터로 승부욕을 부리며 이기려고만 살다가, 기술을 배웠고, 그래도 졌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아티스트가 되어야 하는 건가. 내가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가 될 수 있을가. 어쩌면 여기에 인생의 법칙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아티스트의 경지에 올라 있으면 현희가 설거지하는 나를 보더라도 조금 덜 부끄럽지 않을까.

나는 조금이라도 더 발전하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 발씩 나가면 된다. 한 번에 되는 건 세상에 없다. (1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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