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속도 - 사유하는 건축학자, 여행과 인생을 생각하다
리칭즈 글.사진, 강은영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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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속도』 리칭즈 / 아달로그 (글담)

사유하는 건축학자, 여행과 인생을 생각하다

 

 

 

 

  여행에 '속도'를 붙인 이 책의 제목에 공감한다. 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기분과 경험을 만날 수 있다면, 아마도 난 그런 경험을 하나씩은 해본 것 같다.『여행의 속도』에서도 열거된 고속철도 여행, 도보 여행, 도로 위의 자동차 여행, 여객선 여행 ... 어떤 것이 더 좋았냐 물어본다면 역시나 각기 다른 장점이 있다 하겠다. 기차여행은 창밖에 펼쳐지는 빠른 풍경과 왠지 모를 낭만이 있고, 도보 여행은 약간 힘들지 몰라도 목적지에서의 기쁨은 더욱 배가 되고 '히치하이킹'이라는 예외적인 스릴이 있다. 직접 운전해서 하는 여행은 자유로움과 시원함이 있다.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눌 수는 없다. 모두 '여행'이란 말이 붙기 때문일까.

  속도가 여행의 재미를 좌우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속도의 여행은 어찌 됐든 풍부한 경험과 추억을 제공한다. "살아가면서 어떤 속도로 이동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풍경이 달라진다."라는 멋진 말로 시작하는『여행의 속도』는 이처럼 다양한 속도의 여행으로 만난 작가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여행보다는 다양한 건축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목차와 제목, 뒤 페이지의 소개까지 속도에 따른 여행 에세이 느낌을 확 풍기고 있는데, 내용은 세계의 멋진 건축물을 바라보는 건축학자의 시선이 대부분인 듯하다. 여행 장소와 코스는 여행자의 성향에 완벽하게 따르니, 그의 인생이 담긴 이 책에도 화려하고 독특한 건축물의 향연이다. 책 속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장소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건축물들이 가득하다. (특히 저 사진 속에 있는 곳들은 정말 가보고 싶다.)

 

  예상 밖의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죽음과 욕망의 안식'이라는 시속 0km의 묘지 여행이다. 죽음이 모여있는 묘지 여행을 시속 0km라고 표현하다니 정말 멋지다! 이 묘지 여행을 끝으로『여행의 속도』는 막을 내린다. 시속 350km에 육박하는 뜨거운 고속 열차에서 기차, 자동차, 배를 거쳐 죽음이 있는 묘지 여행까지 점점 느려지는 속도로 늘어놓은 구성은 인생과 여행이 맞닿아 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아쉬웠던 점이 있다. 이렇게 완벽한 구성과 멋진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책 속에는 여행보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여행과 건축, 물론 매력적이지만, 인생과 여행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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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 2014 제3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공간 3부작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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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김기창 / 민음사

 삶의 종착점을 향해 간다는 것

 

 

  점점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그 생각이 막연했던 이전과 다르게 '어땠으면 좋겠다-'와 같은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바라볼 날들보다 지나가버린 날들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는 것. 노인의 삶을 이 정도쯤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그보다 쓸쓸하고 고적하게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은 것 같다. 작년의 기록에 의하면 한 해의 고독사가 대략 천 건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 후에 발견되기까지 며칠, 혹은 몇 달, 그토록 오랜 시간 방치되어 죽음 이후에도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그들은 가족들이 없어 홀로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다. 이제는 가족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경우도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다.

 

 현대사회에 허다한 '노인의 고독사'를 다룬 『모나코』는 예상과는 다른 주인공을 내세웠다. ' 가졌는데 살아야 할 이유만 없는' 노인, 그는 넓은 집에 살고, 음식의 풍미를 즐길 줄 알며 철저한 운동으로 자신을 관리하고 있다. 가끔은 신에게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담배를 찾는 청소년들에게 시가를 건네면서 "나처럼 오래 살지 말라고 주는 거야."라는 말을 건네는 별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살아야 할 이유만 없다는 그가 생기있게 바라보는 것은 사랑하는 어린 여자 '진'과 환상의 공간 '모나코'에 가고 싶은 꿈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 조금은 행운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설이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허울뿐인 그 배경들이 있어 노인은 더욱더 고독하게 여겨진다.

 

  소설 속에서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지독한 아픔이 있다. 풍족한 재산과 잘 경영된 기업을 물려준 자식들은 이용만 해먹는듯 자주 나타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노인의 집을 노리는 도둑들의 묘한 시선을 느끼고, 사랑하는 여자 '진' 은 그저 형식적인 친절을 베푼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체한다. '진'의 진짜 애인은 노인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보면서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이제는 사랑조차 느낄 수 없는 '무성욕자'로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그 말에 '노인'은 슬퍼한다. 그에게도 사랑이 있고, 좀 더 멋진 것을 택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이해해주지 않는 사회의 시선에 '노인'은 체념한다.

 

  그리고 죽어간다. 블랙 유머로 가득 차있었던 초반의 소설은 '노인'의 인생처럼 스르르 죽어간다. 그렇듯 풍족한 삶을 살았고 좋아하는 이국 음식을 만들어 "나의 밤이 시작된다!"라고 외쳤던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저 곁에 살던 고양이들만 그의 곁을 조용히 맴돌 뿐. 사랑하는 여자도, 일을 도와주던 여자도 홀로 남겨진 그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홀로 있어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노인'의 캐릭터는 새로웠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격한 반응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자신의 바람을 놓아버리고 조용히 무너져가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더욱 생생하고 슬프다. 너무나 조용히 순응했기 때문에 반대로 반항하는 듯 느껴진다. 소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반전될 때, 아니 그가 '미학적 죽음 - 죽음은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고 마초 같은 노인의 죽음도, 그 마지막은 역시나 외롭게 간다는 것을.

 

 

-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입니다 :) 생각보다는 참 가볍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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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조금 있다가 따귀라도 한 대씩 주고 받을 기세였다. 현실의 노인이 한 발 물러섰다. 피식 웃었다. 플라톤은 웃음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그래서 웃음에 의해 조롱받을 수 있는 신과 영웅들을 기록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다. 노인의 생각엔 전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웃음은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재조립했다. 웃음으로써 노인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웃음으로 모든 것을 멸망시키겠다는 듯 노인은 또 웃었다. (39p)

노인이 사는 구역은 으리으리한 집, 부서진 집, 모던한 집, 부서지기 직전의 집, 조금 낡은 집, 많이 낡은 집, 다시 으리으리한 집들이 지그재그로 서 있었다. 관리인이 있는 집은 드물었다. 눈이 오면 쌓이기 바빴다. 간혹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이 나와서 자신의 집 앞만 비질하곤 했다. 그 때 젊은 사람이 탄 외제 차가 비탈길을 오르기라도 하면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스쳐 가는 운전석 차창에 대고 중얼거렸다. 반응은 없었다. 그들은 눈을 치우지 않을 때도 고독했는데 눈을 치우면서 더 고독해졌다. 하루 눈을 치우고 며칠을 앓았다. 그런 노인들마저 점점 사라졌다. 죽은 것이다. 노인은 나이와 고독의 상관성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살 만큼 살고 할 만큼 하고도 죽지 않는 것에 대한 신의 분노가 둘의 고리였다. 노인은 신에게 반문했다. "당신도 너무 오래 사는 것 아닌가?" (51p)

동쪽 하늘 위로 구름이 엷게 퍼져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얕잡아 본 감정들. 구질구질함은 경멸했다. 짜릿함은 회피했다. 무절제함은 비루하게 여겼다. 노인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고, 욕조에 앉아 연인들 사이에나 할 법한 몸짓을 주고 받았으며, 술과 담배를 끊임없이 찾았다. 이것은 일종의 신호가 아닐까 생각했다. 갈때가 되었다는,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면 제일 슬퍼할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더 오래 산다면 진은 삶이 징그럽게 생각될 것이고 덕은 삶이 고단해질 것이다. 오래 사는 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서 반대로 일찍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인은 그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144p)

밥그릇에서는 아직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인은 식탁을 치우며 다행이라고 말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노인은 그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좌표를 찍어 주었다. 남자가 티켓을 끊어 준 노인의 마지막 목적지는 죽을 날이 머지않은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였다. 거기다가 무성욕자이기까지 한. 진이 남자에게 노인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짐작이 되었다. 추측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직접 말하지만 않았지 남자는 노인에게 고맙다고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뭔가 많이 아는 남자거나 아니면 너무 모르는 남자였다.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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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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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안치우 / 황금가지

 파격적이고 용감한 작품, 추리소설로 종교를 논하다

 

 

 

  믿음이나 신앙을 강요하는 행위는 개인적으로 어떤 종교이든 안 좋게 보입니다. 간혹 이런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정당한 일이라는 양 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순수한 종교인들까지 나쁜 시선을 받곤 합니다. 종교생활의 방식도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혼자서 기도를 하든 어떤 장소에 가든 나름대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될 수 있고, 그 실천을 틀린 것이라고 매도할 순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사실 이렇게 말하지만,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든 참 민감한 부분이기는 한데, 특히나 종교의 영역이 엄청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재림』은 정말로 파격적이고 용감한 (?)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딘가 안 좋은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신앙행위를 비판하면서, 놀랍게도 '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까요.

 소설의 처음, 단순하게 벌어진 실종 (살인)에 대한 증거물이 '베드로의 십자가'로 나왔을 때 소름이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충실한 제자로 알려진 '베드로'는 예수가 예언한 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 그를 부인하고 회개하면서 순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책 속의 살인자는 이 '베드로의 십자가'를 남기고 끔찍하게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 살인의 명분은 참 치졸합니다. "놈은 자신을 신성한 응징자로 착각하고 있다."라는 말처럼, 그는 미치광이 같은 자신의 신념을, 신과 종교에 의한 것이라고 포장하지요. 『재림』은 추리 형식을 통해서, 이런 무겁고 민감한 '종교'라는 소재에 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모순적인 종교 행위와 자신만의 신념을 강요하고 몰고 나가는 행위들을 말이죠. 보다 보면 정말로 통쾌하기도 하고,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거침없어서 내용과 책 자체에 압도되는 것 같았습니다. 신성해 보이는 '종교'와 관계된 살인이어서 그런지 더욱 소름이 끼치기도 했고요. 어쨌든 사회적인 메시지도 묵직하며, 스릴 넘치는 소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반전, 이 작품은 『재림』이란 장편소설이 아닙니다. 중간 정도부터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또 다른 작품 『만남, 그리고 시작』이 등장하지요. 『재림』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프리퀄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작품도 참 재미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그려졌던 여자 탐정 '권민'에 대하여 더 상세하게 볼 수 있고, 탐정 - 우리나라에서 민간 조사단 -으로 활동하는 삼인방이 어떻게 만났는지도 볼 수가 있죠. 앞의 작품과 뒤의 작품이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왜 더욱더 무거운 작품을 앞에 두었나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아무래도 뒤의 작품은 조금 가벼운 느낌이 있어서 맞는 선택인 것 같았습니다. 혹시나 다른 작품이 나오게 된다면 다른 식으로 조합해서 시리즈로 나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편 모두, 정말 만족스러워서 다른 작품을 기대할 만큼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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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자기 눈앞에 있는 악의 무리들을 어떻게든 처단하고 싶었을 거예요. 베드로가 과오를 참회했듯이 그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원래 살인마들은 피해자를 물리적으로 복종시킴으로써 강렬한 쾌감을 느끼는 이상심리를 갖고 있잖아요. 거기다 종교적 망상까지 겹치니까 쾌감이 더 컸을 걸요."

팀장이 이맛전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주가 마저 설명했다.

"이런 놈들은 감정기제 자체가 우리랑 달라요. 살인하는 순간에 도파민이 솟구칠 걸요. 살인이 곧 오르가즘이에요. 살인할 때마다 황홀경에서 멈춰버린다고나 할까. 얼마나 치명적인 쾌락이겠어요. 그러니 살인을 끊지 못 하는 거죠."

그동안 대면했던 연쇄살인범들, 그놈들이 지껄이던 살기어린 자백들이 팀장의 뇌리로 무섭게 스쳤다. (130p)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적의 체험을 하고 있어요. 그들 중엔 사회지도층도 많고 전문직에 엘리트도 많죠. 그분들이 강철수씨만큼의 지식도 없을라고요. 지식 따위로는 설명이 안 되는 전능한 성령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다들 숨죽이고 경배하는 거예요."

흔들림이 없기는 승주도 만만치 않았다.

"그게 종교의 속성이죠. `신과 나` 내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무려 유일신의 주목을 받는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근사한 일이겠어요. 이런 판타지에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죠.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거라고나 할까. 엘리트건 아니건 이런 환상에 빠질 위험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신기루일 뿐이죠. 믿음이란 건 달콤한 자기기만이에요." (148p)

영혼이 이미 떠나버린 눈동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헤매는 듯 비통함으로 그렁거렸다. 마지막 순간에 애처롭게 스쳐갔을 한 인생의 추억과 희망이 먼지로 부서져 차디찬 육신 주위로 흩어졌다. 승주의 뇌신경은 먼지들 속에서 환영을 보았다. 없음의 환영. 아무것도 없었다. 무서우리만치 태연한 극사실의 세계만 보일 뿐이다.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이아몬드 빛깔 영혼이 빙그레 웃어주는 환영이나마 보고 싶었다. 충격받은 뇌신경이 진통용 환각으로 위로해주기를 바랐지만 인체 손상의 병리학적인 정물화만 눈앞에 또렷이 떠 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 태연히 벌어져 잇는 저 엄혹한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흔들리는 건 승주 뿐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지독히도 차분했다. 암막커튼의 가느다란 틈새로 기어들어오는 빛줄기는 빈 공간을 스치고 지나갈때처럼 무심하게, 참혹히 널브러진 손바닥마저도 여전히 무심하게 뚫고 지나갔다. 승주는 그 태연함이 슬퍼다. 한 인간의 지독한 비극은 쉽사리 과거로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토록 태연히. (196p)



들쑥날쑥 변덜을 부리는 게 인생이라고 권민은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변덕스런 상황이 던져준 패에 굳이 도전정신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가치관 속에서 인생은 상황과 의지가 씨줄날줄로 교직된 옷감이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어떤 의지로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 인생이라는 피륙의 결이 결정된다는 걸 숱하게 목격해 왔다. 누군가는 교활하게 치고 빠지며 매끈한 비단으로 인생을 직조하고, 또 누군가는 미련하게 달려들다가 구멍 숭숭한 거친 무명 한 포 남기고 산화해 버린다는 걸 권민은 종종 되새겼다. 맞서느냐, 피하느냐, 이 두가지 선택 사이에 매달린 외줄을 타는 일이 연쇄살인마를 쫓는 탐정 일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했다. (3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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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 서울대생 1100명을 심층조사한 교육 탐사 프로젝트
이혜정 지음 / 다산에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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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이혜정 / 다산에듀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 혁신이 필요하다

 

 

 

  제목이 훼이크다. 만약 이 제목을 보고 책을 집어 들었다면 예상과 다른 내용을 만나 실망할지도 모른다. 제목은 '서울대에서 A+를 받는 방법' 즉, 공부 잘하는 방법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책은 우리나라 최고의 학교 '서울대'와 '공부 잘하는 법'을 넘어서 한국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꼬집고 있다. 만약 앞에서 말한 기대를 안고 책을 본다면, '공부 잘하는 법'이라는 애매한 벽에 먼저 부딪힐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학점에 경쟁에 뛰어들 것인지, 정말 진정한 배움에 뛰어들 것인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문턱을 넘어야 갈 수 있는 서울대에서, 학점의 꼭대기에 서는 학생들은 어떤 성향을 갖고 있을까. 저자는 그들을 조사했다. 어떻게 공부하는지, 수업방식은 어떤지, 생활 습관은 어떤지. 그들은 역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교수님의 말 (농담과 웃음까지) ​ 모두를 받아 적고, 여력이 안될 경우에는 녹음기까지 대동하고, 팀 과제 때에서는 남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역량을 충분히 다하면 되며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희생 또한 자처한다고 했다. 내가 상상하던 서울대 학생들 - 소위 공부 잘하는 우리나라의 인재들 (?) - 은 창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수업을 하고, 상상력이 가득하고, 누구보다도 공부를 즐기면서 행복한 대학생활을 그려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멋진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여겼던 서울대 학생들은 다른 대학생들처럼 그저 치열하게, 대학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감정까지도 관리한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던.)

  이 책의 제목이 된 '서울대'는 책의 첫 부분에 등장하며 문제로 제기하는 사례였다. 이후 미국의 사례가 서울대와 비교해서 등장한다. 그들은 우리나라와 정반대다. 치밀하게 심층조사한 연구결과 속에서 그들은 서울대 학생들보다 비판적이고 창의적이며, 청출어람의 교육을 제대로 실행하고 있었다. 결국 이 책의 중요 포인트인 '교육은 어때야 하는가'가 등장한다. 서울대 학생들의 능력이 미시간대 학생들의 능력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사회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구조' 때문이다. ​ 교수들 각각의 방식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너무도 세세하게 정해 놓고 교사에게 이를 따르도록 강제하고 있는 구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교육의 단계에서 학년마다 통일되는 진도 (선진국에서는 통일된 공부'진도'가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너무나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교육의 창의성과 진취성을 막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발언은 안 하는 것이 낫고, 다소 엉뚱한 발언을 하면 튄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라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국제회의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도 해당되며 학교라는 작은 공간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우리가 가장 우러러보고 있는 최고의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생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왔을 때, 서울대가 아니라 어떤 대학이든, 역시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거란 상상과 함께 왠지 소름이 끼쳤다. 교육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 학생, 학부모, 교사, 누구든지 읽어본다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낱낱이 바라보면서, 교육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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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최우등생들의 자기조절 대상에는 감정까지 포함되었다. 감정의 기복에 의해 공부가 방해받지 않도록 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감정 조절에도 신경 썼다. 특히 설문조사 결과에서 학점이 높을수록 스스로 행복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더 행복한 것인가? OECD 국가 중 우리 나라가 학생들의 행복지수에서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는 사실과 배치되지 않는가? 서울대 최우등생들의 이러한 응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경향이 학점에 비례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서울대 학생들은 학점이 높을수록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84p)

46명의 서울대 최우등생들을 인터뷰하면서 내가 느낀 점은 한마디로 이들이 뜨겁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최고로 뜨겁고 열정적일 나이임에도, 이들은 대단히 절제되어 있고 완벽하게 자기조절을 하며 체력도 시간도 감정도 철저하게 관리하는, 대단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혼신을 불태우는 열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20대의 대학생, 이 때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불태울 시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들은 뜨겁지 않았다. 대부분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이성친구 때문에 공부에 지장이 있다는 응답은 거의 없었다. (88p)

서울대와 미시간대의 상반된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각 대학의 교수들이 무엇을 평가하는가를 역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수업 시간에 교수와 최대한 가까이 앉아서 교수의 모든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적고 이것을 시험 전에 다시 2차 필기로 정리하는 방식이 고학점에 유리하다는 사실은 명백히 교수의 생각을 최대한 그대로 흡수하고 기억해 내는 것이 평가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으로 미시간대에서 이러한 전략이 학점에 전혀 영향이 없다는 사실은 서울대와 평가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다른 평가 기준이 두 대학의 학생들을 대조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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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록 - 조선 최고의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조완선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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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취록』 조완선 / 북폴리오

조선 최고의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년에 지구가 멸망한다", "재앙이 일어난다" 같은 예언들은 신빙성이 명확한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끕니다. 사실 그런 예언들이 대개는 정확하지 않고, 아주 간혹 운이 맞아떨어져 예언대로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함이나 기대감을 갖게 되는 거죠. (그 무시무시한 2012도 무사히 지나갔으니까요 !)

 흥미로운 점은, 우리의 먼 옛날, 조선에도 이런 예언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거친 일종의 '예언'들과 각종 학문들과 관련되어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다고 해요. 이 예언서 <정감록>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민족사를 예언하고, 조선 후기에 가서 반왕조적인 성향을 띠게 되면서 정말로 힘든 시기에 민중들의 봉기에 힘을 실어주는 등 민중의 의식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홍경래의 난 등 많은 민중봉기가 <정감록>의 사상을 체계로 했다고 해요. )

 

  『비취록』​ 은 조선 최고의 예언서, <정감록>을 토대로 허구를 보태어 만든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정감록>의 사상을 듬뿍 담고 있는 소설 속 허구의 예언서 <비취록>을 둘러싼 음모와 살인이 나타납니다. 이야기는 한 역사학자에게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찾아와 <비취록>의 한 부분을 보여주면서 진품 감정을 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시작되는데요. <비취록>에는 소설 속 현재, 2015년의 예언이 담겨 있고, 곧이어 일어나는 살인들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역사학자와 형사, 그리고 <비취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음산한 '쌍백사'라는 절에서 비밀을 파헤치는 한 스님이 힘을 합쳐 작은 증거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고 점차 진실을 발견해가면서, <비취록>은 그냥 우스갯소리 같은 예언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와 끈질긴 인연이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었던 예언서 <정감록>이 우스꽝스럽게도 민족 대이동을 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가했고, 때로는 맞지 않은 예언들도 있었겠지만, 그때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담고 있었죠.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한, 민중을 위한 예언서였습니다. 소설 『비취록』도, 그 방향이 어긋나긴 했지만, 그들이 칼을 들게 된 그 이유에 어지러운 세상 -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한 (恨)'이 있는 세상 - 을 바꿨으면 하는 기대와 노력이 있었던 것 같아서, 그저 살인과 미스터리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상상력이 빈약해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설로 차용할 수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소설은 역사적 고증이 놀라울 정도로 탄탄하고, 거기에 어우러진 상상력도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후일'을 언급하는 마지막이 묘하게 기대감을 안게 만드는군요. 또 한 번 멋진 후속작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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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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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서에 적힌 대로라면....... 그러니까...... 조만간 우리나라에......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단 밀이유."

최용만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비취록』말미에 무엇이 적혀 있기에 그리 긴장했던 걸까? 그의 느려 터진 쇳소리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물론 최용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예언서의 매력은 불확실성에 있다. 같은 예언이라고 해도 각기 해석하는 자에 따라 내용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이를 테면 불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재앙이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한술 더 떠 원자폭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글자 하나를 가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해석의 의미가 달라지며, 앞뒤 단어의 조합에 따라 각양각색의 해석이 나온다. 이른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이중성이 예언 문구에 담겨 있다. 이는 우리나라 예언서 뿐만 아니라 노스트라다무스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언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책이나 구전을 통해 전해져 오는 예언이 적중한 것은 일 할이 채 되지 않는다. 확률로 따지자면 형편없는 수치다. 사람들은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예언 문구를 억지로 꿰맞추며 예언의 신비로움을 한층 부풀린다. 예언 내용이 틀린 것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직 예언이 적중한 것에만 열광한다. 그것이 예언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50p)

흰 바위는 미륵불의 상징이다. 이는 미륵불의 출현, 달리 말해서 복된 새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상서로운 표징이다. 쌍백사 경내에는 그와 유사한 글이 여럿 적혀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고 진인의 출현을 바라는 중생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같소. 제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한들 인간의 본성이야 타고난 게 아니겠소." 부처를 모시는 불자가 진인이라니, 유정은 왜 이런 글을 경내에 붙여 놓았는지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때로는 부처의 가르침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이런 글에서 얻을 때가 있소. 허허. 나라가 어수선한 걸 보니 진인이 나타날 때가 되긴 한 모양이오."

스님의 말이 점점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불자가 부처의 가르침 말고 또 무엇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92p)


이 글은 대정 12년(1923년)에 발생한 대역 사건과도 일치하며, 보천교 신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하는 데 일조하고 있음. 이에 따라 이 글을 철저히 분석하고 파악하여 향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임. 또한 대역 사건의 주모자를 심도 있게 심문하여 배후 세력의 정체를 밝혀야 할 것임.

명준의 두 눈이 문장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어갔다. 박열, 대역 사건, 보천교, 조선의 예언집이 한데 뒤섞여 선명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유정 스님이 적어준 글과 같은 단어가 있어요!"

그랬다. `창해적도`, `야계` ...... 무엇보다 명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두 단어였다. 이는 백화원 승려들이 적은 글귀, 유정 스님이 건네준 종이에도 적혀 있던 단어였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2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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