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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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 알에이치코리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끈질긴 추적

 

 

 

 ▒ 책을 읽고 나서

당신은 숨기는 게 많아. 인생에서는 B+짜리 학생. 무엇보다도 바그너와 슈트라우스를 흥얼거리는 사람. 불법 외인(外人), 정서적 외인, 장르광(狂). 황화(黃禍): 신미국인. 침대에서는 훌륭하지. 과대평가되고 있음. 파파 보이. 감상주의자. 반(反)낭만주의자. _ 분석가 (빈칸은 스스로 채우도록). 낯선 사람. 추종자. 반역자. 스파이 (20쪽)

 

 이 목록의 주인공, 헨리 파크. 아내가 준 목록, 연애시라고 생각했던 그 내용은 가지각색의, 날카로운,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후 또 하나의 종잇조각을 발견한다. "언어를 엉터리로 말하는 사람". 한국계 미국인이자 스파이로 활동하는 그는 모든 것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거짓말로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짧은 목록 속에서 그는 은밀한 시선 속에서 관통당하고 있었다. 그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진짜 자신'에 대하여.

 

 이방인으로 사는 삶,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절을 추억한다. 단정한 검은 머리를 가진 아버지, 무자비한 세상을 불평하던 아버지, 강도에 휘말려 상해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들이 얽히고설켜 고민 덩어리는 더욱 불어나게 된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한국계 미국인이자 시의원인 '존 강'을 대상으로 한 스파이 업무를 맡게 되면서,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에게 접속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 혹은 "우리의 관계가 일종의 로맨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동류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유대감이나 운명적인 것에 끌리게 된 것이다. 단지 연구할 대상으로 봐야 할 '존 강'의 존재는 주인공의 속까지 깊게 들어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을 자극하는 유도제가 된다. 그 밖에도 간혹 등장하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타자(他者)로서 발버둥 치는 미국 사회 이민자들의 애환을 그리며, 세상 속에 뒤엉켜 살아가는 모든 이방인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재미교포 작가 '이창래'는 내가 생각하는 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힘과 멋진 문체를 동시에 가진 작가다. '이방인'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헤쳤던 『척하는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아와 세계가 계속해서 충돌하는 어색한 상황에 놓여있는 '닥 하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비슷한 고민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척하는 삶』의 매끈한 흡인력에 비해 이 작품은 조금씩 끊기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이, 자신과 비슷한 한국계 미국인을 스파이 대상으로 삼는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번갈아서 진행되는 과거 현재의 서술과 어느 순간 바뀌어있는 시제 등은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이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굉장히 세련된 것이라 감탄하며,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의 삶, 아마도 그것은 작가 자신을 오랫동안 골몰하게 한 가장 중요한 문제, 그리고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닐까? 원제는 Native Speaker지만 (언어에 대한 고민도 만만찮게 등장한다),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오롯이 섞일 수 없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본질일 것이다.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재미교포 작가/ 재출간도서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어머니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할까, 얼마나 나쁜 일이 생기기에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신경을 쓸까 궁금해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흠 하나 없는 우리 동네를 통과할 때면 마치 발이 아파 조심하듯 천천히 걸어야 하는 것 같았다. 와습이나 유대인들과 이웃한 우리 말 없는 가족은 그들과 스칠 때면 반드시 웃음을 지어야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우리에게는 늘 모든 일이 괜찮은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움직일 수 없고, 우리에게서 분노나 슬픔을 끌어낼 수 없는 것처럼 멋지게 예의 바른 태도를 꾸미고 다녀야 했다. 안 그러면 얼마나 나쁜 일이 생기기에 우리는 미국적인 것이면 다 믿고, 미국인들에게 감명을 주어야 한다고, 돈을 벌고, 한밤중에 사과를 반들반들하게 닦아야 한다고 믿고, 완벽하게 다림질한 바지, 완벽한 신용을 믿은 걸까. 완벽해지면서, 흑인들을 쏘면서, 우리 가게와 사무실이 불에 타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내가 나 자신에게, 그 답을 알아야만 하는 장본인에게 이 어려운 질문들을 한다면, 나는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90쪽)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서 침대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잔인하게 우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가 운 좋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폭언을 퍼부었으며, 이 땅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위험한지, 자신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아버지 개인이 쌓은 지식을 우리에게 되풀이해 전파했다.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위협 가운데도 가장 공허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부양자이자 성채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라가 개인에게 - 이것을 연장하면 가족에게 - 시련이라는 구식의 사고방식을 따르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꼭 아버지가 이민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오랜 세월에 걸쳐 고된 일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가끔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는 소인(小人) 특유의 어리석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210쪽)

나는 늘 말에서 나쁜 잘못을 범하곤 한다.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더듬거리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한다. 릴리아는 말을 하는 어떤 정신적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한번 배우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little 대신 riddle이라고 말하고, vent 대신 bent라고 말한다. 물론 억양은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늘 두 언어의 위치를 바꾸는, 융합하는 conflate - 어쩌면 큰 불을 낸다conflagrate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소리를 듣고 있다. 언어들끼리는 서로 비비고 마찰하는 게 너무 많아, 언제라도 불이 치솟을 위험이 있다. (350쪽)

당신이 나와 같은 사람일 경우, 당신은 동시에 많은 사람이 된다. 당신은 아버지이고, 독재자이고, 하인이고, 이 땅이 알고 있는 가장 기민한 배우다. 그런 사람들 역할을 하면서도 당신은 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결한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434쪽)

이 말들의 도시.

우리는 이곳에 산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외침은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언어로 이루어진다. 가장 이상한 합창곡. 우리는 상인 무리를 지나치며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간판에 주의를 기울인다. 모두가 성난 목소리로 극적으로 말을 한다. 완전히 시대착오다. 그들은 우리가 뭔가를 사거나, 우리가 가진 것을 소리쳐 팔거나 아니면 꺼지기를 바란다. 그 계속되는 외침은 우리가 여기 속해 있다는 것, 아니면 스스로 속하게 만들라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꺼지라는 것이다. (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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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4 이문열 - 이문열 편 - 시대와 불화하다, Biograghy Magazine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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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ISSUE 4. 이문열 / 스리체어스

시대와 불화하다, 한국 문단의 고집스러운 작가
 

 

  한 호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획기적인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이번 호 인물은 '이문열' 작가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작가'라는 존재를 파악하는 이번 호를 무척이나 기대하면서도, 정작 '이문열' 작가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것이 없기에 낯섦이 함께 했다. 수많은 작품을 만나오면서 요즘엔 눈여겨보지 못한 한국 작가들, 그리고 한국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 작가와는 이상하게 인연이 되지 않았다. 작품의 제목들을 읊을 수는 있지만, 그 무게감 때문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틀어줬던, 오래된 화면 속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장면들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원고지와 글자들의 향연이 왠지 모를 황홀함을 선사한다. 『젊은 날의 초상』 초판이란다. 80년대 초반이었으니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것이다. 조금 일찍 태어났다면, 조금 일찍 문학에 빠져들었다면 그의 문학도 이미 느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다양한 문화계 인물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조명하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발간된 '호' 마다 비슷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엮으면서도, 각기 다른 형식으로 항상 놀라게 한다. 이전 '심재명' 편에서 영화의 구성 요소들에 맞게 인물의 생애를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려냈다면, 이번에는 글자 하나하나 문단 하나하나 신경 써 엮어낸 것이 보인다. (게다가 사진 마저 문자로 그려냈다! )

 다소 딱딱한 듯 보일지 몰라도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재미와 무게 면에서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이문열'의 문학 세계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자전적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다뤄냈다. 그의 작품, 자전적 대하소설인 『변경』, 『젊은 날의 초상』 등은 그의 삶과 맞물려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고, 부친의 부재, 가정파탄, 연좌제, 등단, 이문열 신드롬부터 '시대와의 불화'까지 쉼없이 써내려간다. '시대와의 불화', 이번 호의 주제로도 쓰인 이 말은 작가 '이문열'을 이야기함에 앞서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동 문학이 주류를 이뤘던 80년대 한국 문단에서 발표한 『영웅시대』는 '시대와의 불화'의 시작이었다. 그 후 한국 문단의 대표 작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보수 논객으로 주장을 확고히 했던 이문열 작가는 거친 비난을 받았다. 한나라당 공천 심사위원으로 들어간 것도, 한일 합방에 관련한 거침없는 발언도 문제가 되었다.

 

 많은 시민이 그를 손가락질했고, 일부 시민들은 '책 장례식'까지 벌였다. 그리고 박완서 작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을 저지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 장례식이라, 상당히 놀랐다. 일단 그 시기에는 책과 작가에 관해서도 관심 자체가 없었으니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겠지만, 영정에 책 표지를 넣고 작품들을 불태우는 것은 온당치 못한 행동이었다. 개인적으로 문화계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와 작품을 따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는 편이라, 이문열 작가에 대한 외부적인 잡음으로 작품에 대한 평가까지 좌지우지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등장하는 Comparison에서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비슷한 외국 문학으로 『파리대왕』과 『동물농장』을 비교했고, 뒤쪽에는 현재 출간된 작품 『필론의 돼지』를 그래픽 노블로 각색해놓았다. 적나라한 그림체와 이야기의 강렬함 때문에 다음 페이지를 넘어가서도 쉬이 잊히지 않는다.

 

 

 
 인터뷰와 평전식의 글로 깊게 만나본 '이문열'의 인상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다. 그의 고집스러운 입장들과 여태껏 문제시됐던 발언들을 접하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황당함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속뜻과 작가의 인생, 작가가 가진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점 등을 읽고 나니 어쩐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단지 시선과 견해가 다를 뿐, 그 시선을 고집하는 굳건함이 매우 강할 뿐이다. 서로 다른, 각자의 진영 안에서 뜻을 고수하고 강하게 주장할 수는 있지만, 속된 말로 비난하며 싸움터로 만드는 것은 온전치 못한 세상일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지금껏 내가 왜 쓰는가에 대한 물음에 공적인 답변을 하는 데 의지했던 입장은 분화사회였습니다. 문학이 정치를 부인하지 않고 정치가 문학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 문학이 경제를 단죄하지 않고 경제가 문학을 경멸하지 않는 사회, 문학이 학문을 비웃지 않고 학문이 문학을 무시하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도 조화롭고 풍요롭게 발전하는 사회 - 실현 가능성만 있다면 별로 나무랄 데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저편보다 이편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편보다는 이편이 덜 싫었기 때문에 택한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가치가 다른 가치에 종속하거나 수단화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쓴다는 것을 평생의 일로 선택한 이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르는 자존심입니다. 이따금 맹목으로 느껴질 만큼, 극단적인 양상을 띠는 획일주의, 독선과 우둔도 싫었습니다. (93쪽)

 "독자들이 책을 선택할 때 일정한 양의 교양적 욕구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독자들의 요구를 항상 기억하려고 애쓴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속에도 곳곳에 (그의 성격처럼 굳건히) 자리하고 있던 문학적 고민들을 만난다. 나는 이제 문학으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

 

 

Written by. 리니

잡지, 매거진/ 인물 평전/ 격월간지/ 한 호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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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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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 권정생 / 양철북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책을 읽고 나서

 

 최근에 읽은 서간집이 괜찮은 느낌을 주었기에, 비슷한 형식인데도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동 문학가 '이오덕'과 '권정생'이 약 30년간 주고받은 편지는 이 책에서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었고, 출판사 측에서도 과도한 편집은 자제하고 원문 그대로 실으려는 노력이 보였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가장 사소한 구원』은 책으로 출간하기 위하여 특정한 주제를 이야기하며 스승과 제자와의 따뜻한 대화를 보여줬다면,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삶의 동반자인 두 문학가의 삶을 그대로 담은 느낌이지요. 어떤 작위적인 주제가 없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는 이 서간집은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통해서도 정다운 느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기지우(知己之友)라고 했던가요. 『강아지 똥』,『몽실 언니』 등, 평생을 어린이만을 위한 동화를 쓰며 살아갔던 권정생 작가님과 아동문학가이자 평론가, 교사였던 이오덕 선생님. 진정한 친구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분은 서로를 온 마음을 다해 걱정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편지 한 통으로도 속마음을 다 알 정도로 가까운 인연이었고, 짧은 글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조심스럽게 '선생님'이라고 서로를 칭하며, 서로의 문학을 존중하고, 어떤 문제가 있다면 세심하게 챙겨주기도 하지요 ("원고료 만 원 부칩니다"라는 말이 어찌나 뭉클하던지요). 또한, 권정생 작가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하려고, 이오덕 선생이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권정생 작가는 자신의 많은 작품을 그와 논의하고, 이오덕 선생은 자기 일처럼 앞장서서 작품을 알리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나라, 고국이었지만 권정생 작가에게 많은 외로움을 주게 했던 한국이란 땅에서, 이오덕의 존재란 어찌나 든든했을까요.

 

사실 처음에는, 짧은 글 (편지)가 어떠한 주제도 없이 묶여 있어 단숨에 읽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삶을 순서대로 따라가듯 천천히 읽다 보니, 내내 이상하고 두근두근한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30년 동안 이어진 편지 속에는 한국 사회 속의 아동문학에 대한 따끔한 질타도. 가난과 고통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들도 등장하는데요. 마음을 담은 편지이기 때문일까요. 모든 이야기는 얇은 종이 속에서 묵직한 감정으로 전해집니다.

 

 아, 이 책을 읽으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속에 있는 말들까지 싸악 비워줄 수 있는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일평생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다"는 권정생 선생의 말이 뭉클해지는 순간입니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에세이/ 서간집/ 아름다운 편지/ 아동문학 

출생지가 남의 나라였던 저는 여지껏 고향조차 없는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아홉 살 때 찾아온 고국 땅이, 왜 그토록 정이 들지 않는지요?

나에게 한국이라는 조상의 나라가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무명 치마폭에서만이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소외당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고국은 나에게 전쟁과 굶주림, 병마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위에 몸서리쳐지는 외로움을…….

누가 자기 나라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나는 무던히도 나의 이 한국 땅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메말라진 흙 속에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어, 여지껏 목말라 허덕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선생님만은 제 마음 이해해 주실 겝니다.

나라고 바보 아닌 이상 돈을 벌 줄 모르겠습니까? 돈이면 다아 되는 세상이 싫어, 나는 돈조차 싫었습니다. 돈 때문에 죄를 짓고, 하늘까지 부끄러워 못 보게 되면 어쩌겠어요? 내게 남은 건, 맑게 맑게 트인 푸른 빛 하늘 한 조각.

이오덕 선생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13쪽)

오늘도 종일 누웠다가 이제 일어났습니다. 하루 이틀 무리하고 나면 사흘쯤은 열에 시달려야 됩니다. 열이 오르면 음식 맛이 하나도 없어져요. 먹어야 살기 때문에 굶어서는 안 되지요. 아랫마을 가게에 가서 새끼 명태 백 원어치 사 왔습니다. 밥이든, 죽이든 넘어가는 데까지 삼키고 나면 `이제 살았다` 싶습니다.

지독하게도 살아왔다고 생각됩니다. 절대 남 보는 데서는 울지 않습니다. 아픈 척도 않습니다. 아픈 척, 슬픈 척, 해 봤댔자 알아주는 이 없으니까요. 도리어 업신여김받기가 십상이랍니다. 행복한 척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만이 위로해줄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이 도와줄 수 있답니다. 신 김치일망정, 쓴 된장일망정,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를 찾아오는 가난한 이웃들을 저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돈이 생기게 되면, 건강해진다면, 사회가 알아주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것을 잃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싫답니다. (55쪽)

과잉생산이란 과잉 소유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고루고루 잘살기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인간이 도대체 `생산`을 한다는 것이 잘못된 말일 것입니다. 생산은 어디까지나 자연이 만들어 낸 소산이며 인간은 다만 수확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수확의 공정성에서 벗어나 많이 갖게 되면 그것은 도둑이며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많이 가져도 된다는 권리는 누가 베풀어 준 것입니까? 하느님이 이 지구를 한자리에 고정시키지 않고 움직여 돌게 한 것은 고루고루 가지게 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요인이 바로 많이 갖는 과잉 소유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한 그릇 이상의 밥을 먹으면 다른 한 사람의 몫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가 넓은 토지를 소유할 때, 내가 큰 집을 가지게 될 때, 내 이웃은 그만큼 좁은 곳으로 쫓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188쪽)

우리 아동문학은 지금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아동문학이 아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잡지 편집자, 일반 문학인들에게까지 멸시받는 판입니다. 아동문학 작가들은 아동문학에 대한 신념을 잃고 성인 문학의 뒤를 따르려고 하여 그 흉내를 내면서 문인 행세를 하는 경향이 있고, 성인 문학지 한 귀퉁이에 작품이 실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실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동문학이 문학으로서 대접을 못 받는 까닭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작가, 시인들의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 아동문학의 정체성과 위기는 오직 우리 문학인들의 반성과 진지한 노력으로서만 타개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재미있게 읽히면서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써서 독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한편 문단과 사회에는 우리 아동문학을 옹호하고 그 존재를 과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5쪽)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고 있듯이 아동문학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고 있으니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들이 여가 선용이나 취미로 하지 않듯이, 우리 아동문학도 온 생애를 바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같이 병들고 무능한 인간이 아닌, 건강하고 역량 있는 작가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뜨거운 작가가 나와야만이, 아동문학이 구원을 받고 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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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 - #남미 #라틴아메리카 #직장때려친 #30대부부 #배낭여행
정다운 글, 박두산 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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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 정다운, 박두산 / 중앙북스

직장 때려친 30대 부부의 '다정한' 남미 여행기

 

 

 한동안 여행 에세이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이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호기심이 반쯤, 아니 80프로 정도는 떨어진 상태다.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 중 가장 많이들 얘기하는 대리만족이야 분명히 느껴지지만, 어떤 특정한 테마 - 이를테면, 음식이나 집, 자신만의 특별한 여행 모토 - 없이는 모두 다 비슷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이어서 살짝 고민했지만, 끝내 받아보게 된 것은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남미' 여행에 국한된 에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요즘 남미 지역의 책을 부쩍 접하기도 해서인지 운 좋게 다가온, 오랜만의 여행에세이.

 

 

 가장 먼저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라는 제목은 감성적인 여행 에세이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어쩌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위험한 제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라는 말이 자칫 '우리는 그만큼 여유가 있어서'라고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롤로그 처음부터 이러한 글이 있었다.

  

 

결혼한 지 2년째 되던 해였고, 둘 다 30대 초반이었다. 나는 IT기업의 과장, 남편은 게임회사의 대리, 수도권 아파트에 살며 아침이면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출근을 했고, 가끔 야근을 하지 않는 날이면 한께 장을 보고 저녁을 해먹었다. 주말에는 보통 밀린 잠을 잤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별일이 없다면 그렇게 몇 년은 더 잘 지낼 것이었다. 오늘처럼 내일을 살고, 내일처럼 모레를 사는 일은 쉬웠으니까. 출근하는 남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못 본 체할 수 있다면, 퇴근하는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모른 척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대로 쭈욱, 지낼 수 있었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그들은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고,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수많은 이유,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을 위해 둘 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들의 여행은 그동안의 바쁜 날들에 대한 보상이었고 오랜 꿈이었다. 그리고 물론, 6개월 뒤에는 다시 이전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제한된 꿈이었다.

 

 

 느낌이 좋은 곳에 머무르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들의 여행은 참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유독 젊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을 만나 함께 여행길을 걷고, 고생하면서도 그곳의 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내는 모습을 봐도 그렇고, 분명 부부의 여행인데도 여행길을 동행하는 친구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였다. 걸어서 넘는 '과테말라'와 '멕시코' 사이의 국경, 경이로운 사진들로만 구경했던 '우유니 사막', 위험한 지역이라 여겨졌지만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던 '콜롬비아'를 거치는 그들의 여행은 부러웠고, 왠지 모르게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현실적인 것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오래된 카피가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책 속의 여행은 장소와 기간은 달라도 많은 직장인(혹은 청춘)들이 잠시 멈춤 하는 여행을 하는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랄까. 그리고 비현실적인 것은, 어쩌면 모든 이들의 목표인 '행복'을 찾아 직장을 때려치웠던 그들의 용기였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 위해 당장 직장을 때려치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남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들의 '잠시 멈춤'도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친구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는 부부의 모습과 책에서마저도 한 켠을 나눠주고 있는 ('그의 시선'이라는 페이지가 간혹 등장한다) 구성이 참 예뻤다. 책의 마지막, "한동안은 손이 닿는 곳에 배낭을 둘 생각이다"라는 말은 그들이 언젠가 또 여행을 떠날 거라는 계획으로 여운을 주고 있었다. 유독 특별하지는 않지만, 담백하고 다정하게 진심을 전하는 느낌이어서 읽는 동안 참 편안한 여행 에세이였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에세이/ 여행 에세이/ 남미/ 배낭여행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식사 중에 펼쳐진 여행 이야기. 20년간 아프리카며 아시아며 전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셨단다. `환갑 기념`으로 남아공에서 번지점프를 하셨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6대륙을 넘나드는 그 길고 진한 여행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그 말씀을 허세 없이 담담히 들려주신다는 거였다.

이 정도면 책을 여러 권 내고도 남았을 텐데, 이렇게 조용히 세상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긴 여정을 시작하려는 때에 이런 어르신을 만나다니.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는 걸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우쭐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우리에게 겸손한 여행을 하라는 신호가 아닌가 싶어, 우리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분의 이야기를 새겨들었다. (23쪽)

오늘 하고 싶은 것이 오늘 할 일이 된다는 것,

어제 하지 못한 것이 오늘 할 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내일 해도 되는 일을 굳이 오늘 미리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온전한 오늘의 의미에 익숙해지면서 비로소 여유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쉬는 법을 조금씩 알 수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시간의 단위가 복잡했다. 업무 다이어리는 1년의 시간을 분기로, 월로, 주로, 일로, 시간으로 쪼갰다. 단위가 정교해질수록 열심히 일하는 척할 수 있었다. 때론 너무 비대해진,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에 단위에 짓눌리기도 했다. 일일 업무보고, 주간계획 작성, 월간목표 수립, 분기별 성과보고, 연간계획 수립, 중장기 비전 설정까지. 모니터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시간을 위해 나의 하루는 완결된 단위로 기능할 수 없었다. (60쪽)

그런데 이상하다. 이 모든 부조리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쿠바를, 아바나를 왠지 싫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할 이유보다 싫어할 이유가 훨씬 많았지만 나는 의외의 부분에서 너그러워지곤 했다. 아바나에는 어제 걸었던 그 거리를 오늘 또 걷고, 다음 날 또 걷고 싶어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비록 삐끼에 지쳐 한 시간만에 되돌아오더라도, 또 기운이 나면 바로 나가고 싶어지는 그런 에너지 말이다. (121쪽)

`이러다 차가 기울어 벼랑으로 떨어질지도 몰라요!`

나는 그만 화가 나서 사람들에게 꽥 소리 지를 뻔했다. 간신히 참고 혼자 조용히 왼쪽 끝으로 옮겨 앉았다. 그때 오른쪽 창으로 몰려간 사람들이 본 것은, 무려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는 버스. 최근에 있었던 사고라고 했다. 그때부터 도서관이고 뭐고, 다시 돌아올 길이 걱정되어 사색이 되었다. 그런 길을 3시간 반 더 달렸다.

내 인생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이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만 울 것 같아져 버렸다. 남편은 얼굴이 질려버린 나를 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나는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집에 가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집에 누워 있었으면. 내 방에는 가습기도 있고, 푹신한 침대도 있고, 빠른 인터넷도 있는데. (209쪽)

아주 가끔씩은 몇 년 혹은 몇십년째 배낭여행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찾을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이라면 사진을 그다지 즐기지 않거나 SNS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자면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애써 타인에게 전하려 하지 않고, 굳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고 그 여력으로 자신에게 보다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자기 확신이 몹시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 장기 여행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유분방함에 대한 동경도 동경이지만 세속적인 호기심도 떨칠 수가 없다. 대체 여행자금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떠나기 전에 돈을 많이 벌어둔 것일까, 부모님이 재벌인 것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입가를 맴돈다. 요컨대, 두어 달 뒤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슬퍼질 때가 있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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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이 블로그를 한다면 블랙 로맨스 클럽
멜리사 젠슨 지음, 진희경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제인 오스틴이 블로그를 한다면』 멜리사 젠슨 / 황금가지

'오만과 편견'의 오마주, 가볍게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를

 

 

 

 

  책을 읽고 나서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 제목만 수백 번 들었을 것 같은 이 유명한 소설을 전 미뤄두고 미뤄왔었어요. 너무 잘 알려진 작품들에 대해선 이상한 기피 현상이 생겨서, 언젠가 읽겠지 하고 다음 기회를 엿보다가 지금까지 와버린 거죠. (사실은 예-전에 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때, 살짝 맛만 봤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만과 편견』의 오마주 소설인 이 책을, 원작을 읽지 않고 읽게 되었습니다. 영화도 나오고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분위기나 내용 정도는 살짝 알고 있으니까, "뭐, 비교하지 않아도 그냥 읽으면 되지"라며 가볍게 읽었습니다. 그리곤 이 책을 덮고 나서 바로 ​『오만과 편견』을 꺼내 들었죠. 이럴 거면 먼저 읽었어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 순서도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어쨌든, 이 책은 색다른 로맨스 소설임은 분명합니다. 설정이 특이해요. 두 명의 십 대 소녀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현대, 한 명은 19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 뭐 이런 판타지는 아니고요. 현대의 '캐서린'이 대영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엄마를 따라 영국에 와서 우연히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과거의 '캐서린'이 쓴 일기장을 읽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에피소드를, 현대의 '캐서린'은 블로그에 일기처럼 작성하게 되죠. 그래서 이 책은 딱딱한 상황 설명 대신에 '캐서린의 블로그'와 '또 다른 캐서린의 일기장'으로만 이야기가 번갈아서 진행됩니다. 먼저, 현대의 캐서린 이야기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인 '블로그'를 통해 미국 사회를 보여주고, 십 대들의 말투와 통통 튀는 매력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포스팅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형식 파괴'의 글이 자유분방하게 쓰여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홈페이지 링크와 음악들이 등장하죠. 다른 문화에 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가족과의 문제나 좋아하는 남자와의 연애 고민을 그대로 털어놓는 소녀의 이야기가 귀엽고 공감이 가는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캐서린'의 이야기, 19세기 그녀의 일기장은 현대의 '캐서린'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액자식 구성처럼 자리하고 있기도 하죠. 『오만과 편견』을 오마주한 부분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펼쳐지는데, 시대나 분위기, 그리고 사랑 앞에 마주 선 선택에 문제 등이 비슷하게 설정됩니다. 당연히, 제인 오스틴의 글보다는 분량도, 무게도 조금은 가볍지만, 소설의 분위기를 잘 재현해내서 달달한 장면 없이 달달하며, 진지하고 담담한 사랑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어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오마주라고 너무 기대하진 않고, 가볍게 본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깜찍한 소설입니다. 로맨스 소설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아서 좋고요. 현대의 '캐서린'의 블로그가 과하게 통통 튀긴 하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과거의 '캐서린'의 진지한 일기장과 확연하게 대조되어서 오히려 오르락내리락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전 밤새워서 이 책과 『오만과 편견』을 쭉 읽었는데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네요.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블랙로맨스 클럽/ 오만과 편견 오마주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계집애, 비열한 그 계집애 무리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인간들아 : 린제이 로한에 대한 건 제쳐 두자. 장난해? 어쩌면 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문자를 보낼 수가 있어? 그리고 왜, 대체 왜 항상 어그 부츠냐???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말이지, 언제부터 `솔직해지자`는 말이 남을 거리낌 없이 비난하고, 불평하고,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온갖 끔찍한 말들을 해도 된다는 의미가 됐지? ("음, 나는 그냥 솔직해지려는 거야!"라니, 어이가 없어서 원. 너야말로 지금 좀 예민하게 군다는 생각 안 드니?)

아빠 (`곧 새엄마가 될 몬스터 같은` 그 여자가 매부리코를 어디든 들이대기 때문에, 이메일로 보낼 것.) : 왜죠? 왜 아둔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외모에만 집착하는, 아빠보다 거의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에요? 가슴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런 거라면 내 인생은 끝난 거네요. 머리가 좋은 여잔 골칫거리라고요? 난 확실히 머리가 가슴보다 큰데 어쩌죠. (42쪽)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넙죽 춤을 승낙해 버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 다시 한 번 다짐하지만 너무 갈망하는 모습은 안 된다. 절대 갈망하면 안 된다. 갈망하는 모습은 금물이다. 하트넬 양처럼 무심한 듯 속내를 숨겨야 한다. 어떤 경우든 베이커 씨는 그저 그런 신사들과 다를 게 없다는 양 행동해야 한다. 다이아몬드를 보고도 다른 암석조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척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74쪽)

한산한 곳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토마스의 눈썹이 움직이던 모습과 그가 망설이며 말하던 부분들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루이자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해하는 걸 보니 기쁘네요.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요. 그분이 확실하게 당신에게 자기의 감정을 말했더라면 제 기분이 훨씬 좋았을 거예요."

그거야, 당연히, 나도 그랬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오, 캐서린."이라고 하는 편이 "좋아요."보다 훨씬 확실하니까. 하지만 더 나은 말을 듣지 전까진 "좋소."도 충분히 괜찮을 것이다. 오늘은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내게 남긴 시를 생각해본다. 괴로우리만치 자문하게 된다.

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을까? 그분이 곁에 없는 한 주를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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