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그래피 매거진 5 최재천 - 최재천 편 -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Biograghy Magazine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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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고 나서

 

 자연과학이라면 평생 담을 쌓고 살아온 저에게 '과학자'란 너무나 멀리 있는, 동경의 마음보다도 위압감이 먼저 드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중 유일하게도 친밀감 있게 다가오는 인물이 바로 최재천 교수님입니다. 몇 년 전 대외활동으로 기자단에 참여했을 때, 그를 대상으로 한 첫 기사를 썼죠. 당연히 매개체는 '과학'이 아닌 '책'이었습니다. 신간 출간으로 강의하시던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긴 하지만,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과학이란, 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그 강의를 듣고 난 이후로, 그의 여러 책을 접하고 나서 호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반려견을 키우면서 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은, 그가 남긴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되새기곤 하죠.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에 항상 등장하는 TALKS AND TALES - 대중들의 의견 - 을 보면,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문과와 이과를 모두 아우르는 '통섭'과 자연에 관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끄는 면에서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학의 대중화에는 이바지했으나, 대중적인 글쓰기가 많고, 생물학에 국한한 지식을 보편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죠. 최재천 교수의 저서를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진득하게 과학을 탐구하는 책 (ex, 개미 제국의 발견, 다윈지능 등)은 읽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비판하는 말들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과학에 관련해선 크나큰 관심이 없는 제가 그의 책을 읽게 되었던 건 그가 그렇게 외치던 '통섭'의 힘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최재천 교수의 꿈은 시인이었습니다. 자연에서 맘껏 뛰놀 수 있었던 어린 시절 고향 강릉에서 많은 동물을 눈으로 보고 만지기는 했지만, 과학자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일장에서 장원한 경력으로 시인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에게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문예반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미술반에 들어갔고,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해 의예과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2지망이었던 동물학과, 담임이 쓴 것이었던 서울대학교의 한 학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입학해서도 방황을 했지만, 미국 유학을 통해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남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죠.

 

 

 

 그에게 붙는 수식어들은 참 많습니다. 석좌 교수, 국립 생태원장, 동물행동학자, 사회생물학자, 생태학자, 진화학자, 통섭학자……. 이 여러 수식어를 한 번에 통칭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식어는 '사회생물학자'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라는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해서도 그렇고, 그의 발자취와도 가장 잘 어울리는데,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좀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 생물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동물들의 행동과 생태를 진화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데, 그동안 제가 해 온 모든 일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사회거든요." 그는 넓은 범위의 '생물학자'가 아닌,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동물들에 관해 관심이 각별하다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한국 사회의 굵직한 역할을 맡기 전, 그에게는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돈 잘 버는 학과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안 좋은 시선을 받기도 했고, 동물들을 관찰하는 학과의 특성상, 연구 기간이 꽤 길 수밖에 없고 논문도 많이 나오지 못해 난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많은 우여곡절을 이겨냈고, 계속해서 다양한 연구를 하며 자신도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의 인생처럼 최재천 교수의 삶도 '우연과 필연'의 반복으로 이어져 왔지만,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겠죠.

 

 동생의 고등학교 지원이 가까워져 오다 보니, 학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마련인데 요즘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말들이 '융합'과 '통합'입니다. 그리고 최재천 교수가 줄곧 외치는 '통섭'까지, 다양한 말들이지만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만 같죠. 하지만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에서 최재천 교수는 이 용어들을 알기 쉽게 풀어줍니다.

 

 

통합은 외부 압력에 의해 강제로 섞이는 형식이에요. 통합을 해도 실제론 잘 섞이지 않죠. (...) 수소 분자 둘과 산소 분자 하나가 융합하면 물이 되는데, 융합이 되면 수소 분자를 알아채기 힘들어요. 물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는 게 융합이에요. 통섭은 융합하곤 또 달라요. 통섭을 해도 원래 것이 없어지진 않죠. (...) 정리하자면 통합은 물리적 합침이고 융합은 화학적 합침이고 통섭은 생물학적 합침이에요. (119쪽)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 -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닌 초기의 인간 -는 1년의 마지막 날, 심지어 아침도 아니고 오후도 아닌 매우 늦은 밤에야 등장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이 우주와 행성에서 가장 어린 막내라는 사실입니다. (142쪽)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으로 최재천 교수의 삶을 짚어 보고, 그리고 그가 쓴 여러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되돌려 보게 됩니다. 무한한 우주 속의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모른 척 해왔던 존재의 미미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 그리고 수많은 '살아 있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수식어, '시인의 마음을 가진 과학자'라는 말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것들이라도, 또한 누군가의 작은 생각이라도 변화시키는 모습이 너무나 좋습니다.

 

 

 

 

Written by. 리니

잡지, 매거진/ 인물 평전/ 격월간지/ 한 호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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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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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앤서니 도어 / 민음사

느릿느릿, 서정적인 문체에 걸려 왠지 맥이 빠지는 소설

 

 

 

 

  책을 읽고 나서

 

 

 전쟁을 소재로 한 책들을 좋아합니다. 잔혹하고 마음 아픈, 척박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란 더욱더 껍질을 벗겨내기 마련이죠. 악한 본성은 더욱 악하게 드러나고, 선한 본성은 때로 '고통 속에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기도 합니다. 독일 쪽을 공부했었던 저는 자연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리고 그토록 혐오하던 나치의 손길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꽤 큰 폭으로 끼쳤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전쟁의 참혹한 장면들을 다룬 문학들보다도, 일반인들의 상황과 기록을 그린 책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의 만남'이라는 카피를 통해 저에게는 예전에 보았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도시 속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행동들은 눈시울을 자극하고, 이 책은 소년과 소녀의 만남으로 어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쳐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식으로 소설은 펼쳐졌습니다. 독일 소년 '베르너'와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의 이야기가 각각의 시점을 잡은 채 따로 번갈아 전개됩니다. 전쟁 상황의 묘사는 직접적이지는 않습니다. 소년과 소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은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 상황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은밀히 조명되지요. '베르너'에게는 '히틀러 유겐트'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마리로르'에게는 한순간에 변해버린 상황과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서 전쟁의 피해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둘을 중심으로 한 채, 국가적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보석 감정사 '롬펠'의 시점이 함께 전개됩니다. '마리로르'의 아버지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그렇게 소설은 같은 날짜로 묶여 있는 다른 시점의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현재진행형으로 서술됩니다. 현재진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도 소설의 서정적인 문체와 남다른 분위기에 한껏 힘을 실어줍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잘 읽히지는 않습니다. 부제에 날짜가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뒤바뀌는 시점과 전개는 읽는 내내 신경에 거슬렸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이어지는 기록을 그리는 문체가 너무나 아름다운데도 말이지요.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는 서술도, 그 끈질긴 묘사의 글도 이상하게 아름답습니다. (좋아하는 문체입니다.)

 딱 표지 이미지와 어울리는 책입니다. 흐릿흐릿한 잿빛에,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소년처럼, 아름다운 소설이기에 수많은 상을 휩쓸었겠지요. 하지만 읽는 데는 만만치 않습니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없이 천천히 흘러가는 책이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읽어야만 합니다. 읽다 보니 맥이 빠집니다. 느릿느릿, 서정적인 문체에 걸려 푹 빠져버린 것인지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을 이렇듯 따뜻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기는 한 소설입니다.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전쟁소설/ 2차세계대전/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한 할머니가 마구 보채는 아기를 안는다. 그로부터 1.6킬로미터 떨어진 생세르방 바깥 골목에서 한 취객이 오줌을 누다가 생울타리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든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주민에게 긴급히 전합니다. 지금 즉시 공터로 가십시오.

바깥 섬들마다 대공포대가 번뜩이고, 구시가 안 커다란 독일 대포들이 또 한 차례 쏘아 대며 바다 위에서 울부짖고, 해변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 위를 응시하는 달빛 어린 안뜰에 옹송그리고 있는 나시오날이라는 요새 섬에는 프랑스인 380명이 수감되어 있다.

사 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폭격기들이 다가오며 내는 괴성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구조? 절멸? (1권, 25쪽)

그들은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을 지켜본다. 유타는 두 손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서 죈다. "내가 뭘 듣고 있었는지 알아? 우리 라디오로? 오빠가 부숴 버리기 전에?"

"쉿. 유타. 조용히 해."

"파리 방송이었어. 거기선 도이칠란드젠더랑 정반대로 말했어. 거기선 우리가 악마랬어. 우리가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댔어. 잔혹한 행위가 무슨 말인지 알아?"

"조용히 해, 유타."

"그게 옳아?" 유타가 말한다. "딴 사람들이 다 한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하는 게?"

뱀장어처럼 미끄러져 들어오는 의심들. 베르너는 그것들을 도로 쑤셔 넣는다. 유타는 고작해야 열두 살이다. 아직 어린애다. (1권, 203쪽)

그들은 노래한다. 우리는 젊다. 꿋꿋하다. 결코 물러선 적이 없다. 우리가 함락할 성들은 많고도 많다.

베르너는 탈진과 혼란, 흥분 상태를 오락가락하며 휘둘린다. 자기 인생이 전적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가사나 교실로 가는 길을 외우는 것으로, 눈앞에 기술 과학 실험실 환영을 띄워 두는 것으로 의구심을 밀어낸다. 테이블 아홉 개, 걸상 서른 개, 코일, 여러 종류 축전기, 증폭기, 배터리, 반짝이는 캐비닛 안에 자물쇠를 채워 보관해 놓은 납땜용 인두들.

그의 머리 위에선, 자기 침상에 무릎을 꿇고 앉은 프레데리크가 오래된 쌍안경으로 열린 창밖을 응시하면서 그가 이제껏 관측한 새들을 침대 가로널에 표시한다. 큰논병아리 밑에 새김눈 하나. 동유럽 나이팅게일 밑에 새김눈 여섯 개. 창밖 구내에서, 열 살 소년 그룹이 횃불과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들고 강으로 향하고 있다. (1권, 213쪽)


프레데리크는 일곱 번째 매질까지 버티다가 쓰러진다. 그다음엔 여섯 번. 그다음엔 세 번이 된다. 우는 법도 없다. 그만둬 달라고 부탁하는 법도 절대 없는데 특히 이 때문에 살해 욕구를 짓밟힌 사령관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프레데리크의 몽상가적 기질, 그의 남다름이 향기처럼 그에게 감돌아서, 누구나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2권, 40쪽)


바람, 모두 소련에서 불어오는 것이라고 사령관이 모두에게 즐겨 상기시키는 바람이. 카자흐스탄 바람, 수퇘지의 머리를 달고 독일 여자들의 피를 모조리 마실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양초를 먹는 야만인들의 바람, 지구에서 반드시 쓸어내 버려야 할 고릴라들.

치직 치직.

거기 있나?

마침내 그는 라디오를 끈다. 적막 속으로 선생들의 목소리가 들어가 그의 머리 한쪽에서 울리는 동안, 반대쪽에선 기억이 말을 건다.

눈을 떠요. 그리고 그 눈이 영원히 감기기 전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2권, 80쪽)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세포에서 생겨난다. 티끌보다도 작은, 아니, 훨씬 더 작은 세포에서. 나뉘고, 증식하고, 더해지고, 덜어지면서. 물질의 주체는 바뀌고, 원자들이 흘러들어 가고 나오며, 분자들이 빙글빙글 돌고, 단백질이 서로 합쳐지며, 미토콘드리아는 산화 명령을 보낸다. 우리 존재는 미세한 전기가 모이면서 시작된다. 폐, 뇌, 심장. 사십 주 후에 6조나 되는 세포들이 죔쇠 같은 우리 어머니의 산도(産道)에서 뭉개지면서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런 후 세계가 우리에게 들어서기 시작한다. (2권,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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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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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이노우에 유메히토 / 황금가지

바이러스와 초능력의 독특한 조합

 

 

 

 

  책을 읽고 나서

 

 아무리 생소한 작품이라도 재미만큼은 믿고 보는 밀리언셀러 클럽 신작 『마법사의 제자들』입니다. 몇 주 전 휴가 계획을 짜는 내내 들뜬 마음에 독서가 잘되지 않을 때, 이 책을 펼쳐 들었죠. 영화 <마법사의 제자>와 제목이 거의 흡사해 단순 SF 판타지 소설을 생각했으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이 책의 뒤편에도 쓰여있듯이, 책은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표방하고 있는데요. 결국엔 오락용 소설이란 말이니, 속도감과 몰입감은 놀라울 정도로 좋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점은 '바이러스'입니다. 지금은 '종식 선언'이 이루어졌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메르스' 바이러스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공포감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선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를 우리 상황에 대입해가며 읽게 되었는데요. 소설 속에서 치명적 바이러스인 '용뇌염' (드래곤 바이러스)이 발생하여 원내 감염으로 병원이 봉쇄되고, 일반인들은 정보를 알지 못해 우왕좌왕 공포에 휩쓸리는 모습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이러스를 소재로 진행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요. 치사율이 높은 '용뇌염' 바이러스에서 회복된 단 세 사람이 초능력을 갖게 되는 설정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초능력을 일종의 '바이러스 후유증'이라 표현하지만, 사람들이 한 번쯤 꿈꾸는 마법과도 같은 능력들이었는데요. 한 사람은 누군가의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게 되고, 또 한 사람은 물건을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점점 젊어지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통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지요. 이렇게 되니, 전염병으로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던 그들은 여러 사건을 만나면서 또 누군가의 '적'이 되고 맙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다양하고 신선한 소재들로 꽉꽉 채워진 이 소설은 판타지와 현실이 비교적 잘 어우러져 매끄럽게 읽힙니다. 상상 속 이야기 같지만, 간혹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바이러스'가 초능력 판타지로 이어진다는 설정이 독특했고, 단순한 이야기 진행뿐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에 주목하려 애쓰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 가지 걸렸던 건 결말. 어찌 보면 '큰 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아이디어를 끌어넣다 보니, 작가가 이것들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아쉽게 끝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의미는 괜찮게 들어맞으니 누군가에게는 느낌 좋은 결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Written by. 리니

일본소설/ 판타지, 초능력/ 바이러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건 말이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아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왜 내가 이런 거에 푹 빠져 있는 건지, 왜 이런 놈이 좋은지 아닌지, 뭐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건가 싶은 게지."

"……."

"왜 이유가 필요한 겐가? 이유를 모르면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 불안해하더군. 그러니 안심하고 싶어서 이유를 찾는 걸지도 모르지. 불안하니까 그때 떠오른 걸 이유랍시고 자신을 어르는 게지. 즐거우니까 하는 것일 뿐이라는 둥 말이네. 어떤 이유든 상관없는 게야. 중요한 건 자기만의 이유를 찾아내는 거니까." (57쪽)

의사가 하는 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격려이자 위로이기도 했다. 용기를 북돋아 줄 요량으로 해 준 말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 말,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사고로 한 손을 잃었을 때 `양손을 잃은 사람에 비하면 당신은 행운이다`라는 말을 들어서 솔직하게 기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보다도 불행한 사례를 들면 그걸 부정할 말은 없다. 없지만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아닌가? (66쪽)

의사는 그들이 드래건바이러스의 유행을 종식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고 말했었지만, 세간에서는 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교스케 일행은 오물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은 말살해야 할 존재였다. 격리상태가 해제된 순간, 교스케 일행은 이러한 현실을 보게 됐다. 드래건 바이러스는 교스케 일행들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남은 것은 정체 모를 후유증뿐이었다. 이 쇼크는 한동안 세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152쪽)

`미는 힘을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요가의 호흡법을 훈련하는 것 같았다. 민다기 보다는 어딘가 조용히 숨을 토해 내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거의 힘을 주지 않고 코끝에서 자연스럽게 숨이 흘러나가는 감각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면 마치 영상이 팔락거리며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이미지로 시간이 역행했다. 너무 돌아갔다 싶을 땐 토해 낸 숨을 조용히 멈추고 천천히 들이쉬었다. 그러면 투시하고 있는 대상의 시간이 빨리 감기를 하듯 앞으로 나아갔다.

재미있었다. 주어진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감동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건 처음으로 자신의 양발로 일어선 어린아이의 감동과 닮았는지도 몰랐다. (165쪽)

​"내일 오후 3시경에는 큰길을 걷지 않는 게 좋아."

그런 교스케의 말을 들으면 사고는 회피할 수 있다. 미래는 고정돼 있지 않은 것이다. 병실의 소녀를 보고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사람의 힘이 미치는 범위라면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우산을 가지고 나가면 옷이 젖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지진을 억제할 방법을 모르지만, 지진의 발생을 알고 있으면 미리 안전한 장소로 피난할 수 있다. 그렇다. 길흉을 점치는 건 `흉`을 감수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걸 `길`로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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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힘 2 - 합격을 부르는 최적의 효과 그림의 힘 시리즈 2
김선현 지음 / 8.0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그림의 힘 2』 김선현 / 8.0 (에이트포인트)

집중력과 마음 정리를 도와주는 아트 테라피 북

 

 

 

 

  책을 읽고 나서

 

 지금 저는 집중력 최악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원한 데서 드러누워 책 한장 한장 읽어나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을 것만 같았지만, 막상 책을 읽을라 하면 졸음도 오고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기가 일쑤. 더운 날씨 탓인지, 여행 생각에 해이해져선지 마음만 붕 뜨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래서 순전히 재미 위주의 책들을 집어 들어 읽는 도중에, 『그림의 힘 2』도 중간에 끼워 넣어 읽고 있습니다. (다 읽고 쓰는 리뷰는 아닙니다. 단숨에 다 읽는다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책이거든요.)

 

 '컬러링북'이 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사이에 베스트셀러로 오른 『그림의 힘』 시리즈가 항상 눈에 띄어서 이북으로 구매한 적이 있습니다. 컬러링북과 그림의 힘…… 이 책들은 둘 다 집중력과 힐링을 매개로 하는 책들인데요. "합격을 부르는 최적의 효과"라는 부제가 붙은 『그림의 힘 2』는 사실 별 호감이 없었습니다. 이 시리즈가 '자기계발' 분야에 해당하긴 하지만, 성공에 관련한 단정적인 부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그림의 힘'과 '아트 테라피 (미술 치료)'에 관해선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 "합격을 부르는 최적의 효과"는 아니더라도, 어떤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그 분위기와 상황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집중력이나 온화한 마음가짐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작가는 미술치료계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김선현' 교수입니다. 작가는 '국가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그림으로 치유해왔지요. 그리고 이 책에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제대로 발휘하는 일, 즉 시험에 맞춰 최적의 컨디션을 쌓을 수 있는" 그림들을 담았습니다.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이 수록된 그림들은 유명한 작품들도 있고, 처음 보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은은한 느낌을 주는 그림도 있고, 뜻밖에 강렬하고 성취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도 있지요. 이 책에서 만나보리라 생각지 못한 '이중섭'의 <황소>가 그렇습니다. 강렬한 빨강의 색채와 황소의 얼굴이 굉장한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는 듯해서, 오랫동안 그림을 바라보게 되죠.

 

 

 그리고 중반부까지 두 번이나 등장하는 '칸딘스키'의 그림이 이렇게 좋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술 시간에 '뜨거운 추상'으로만 달달 외웠던 그의 그림을 이렇게 만나니, 색다르게 바라보게 되는걸요. 단순한 도형과 흑백의 대비가 불러오는 무한한 상상이 집중력을 상승하게 한다는 효과는 잊어버리고, 어느새 그림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림의 힘』 시리즈가 인기를 끄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합니다. 작가의 세세한 설명을 줄이고, 독자가 직접 그림을 바라보고,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원본만큼 생생한 그림들을 그대로 싣고자, 『그림의 힘』은 일반 단행본의 크기보다 큰 판형을 선택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두 페이지 전체를 그림으로 담았습니다. 두툼하고 매끈한 재질의 종이를 넘기며 그림을 보는 맛이 아주 좋습니다. 작가의 과하지 않은 글이 아주 차분하게 다가오고요. 단, 천천히 읽기를 권합니다. 무언가에 집중이 안 될 때, 조금씩 펼쳐본다면 마음 정리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 『그림의 힘 2』 북 트레일러입니다.

이 책의 트레일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의외지만, 감성 가득한 북트레일러, 좋네요.

 

 

 

Written by. 리니

미술 치료, 아트테라피/그림, 예술작품/ 자기계발/ 두뇌계발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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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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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 열린책들

자신의 삶에 우위를 가지는 방법

 

 

 

  책을 읽고 나서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이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고 읽힌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에도 이 책의 제목은 간혹 내 귀에 들려왔다. 학교에서 준비했던 논술 시간에도, 필독 도서 목록에도 가끔 있었다. 사실 얇은 책인 줄 알았다. 청소년에게 권장되는 책들은 비교적 얇은 두께에, 어렵지 않은 도서일 거라는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던 어린 나이의 나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재출간된 이 책은 (열린책들의 작은 판형을 고려해서라도) 꽤 묵직했고, “용기와 신념의 이야기”라는 추상적인 제목으로 어떤 내용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도록, 어떤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먼저, 이 책은 실화 소설이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주 가운데 ‘남부 앨라바마’의 사건을 토대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제가 ‘인종 차별’에만 국한된 이야기라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인종 차별'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가치, 꿋꿋한 용기와 신념, 그리고 현대 사회에도 팽배하고 있는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두루 다루고 있다. 

 화자는 ‘스카웃’이라는,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 소녀다. 그의 입으로 ‘앨라바마’에 위치한 ‘메이콤’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빠 ‘애티커스’, 항상 함께하는 오빠 ‘젬’,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캘퍼니아 아줌마’,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형식으로 서술되는데, 그녀의 서술이 단순 초등학생의 생각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것은, 어른이 된 ‘스카웃’이 그녀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중, 아빠인 ‘애티커스’와 형제들의 대화가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으며, 중요하게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대화 속에도 남다른 조언을 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자신만의 소신과 꿋꿋한 신념은 꽤 중요하게 여겨진다. 초반에는 큰 역경도 존재할 것이다. 남들과 다른 행동으로 인한 사람들의 삐딱한 시선이 때로는 결정을 방해하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남들이 no라고 말할 때 굴하지 않고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한다.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정지우 작가의 『청춘 인문학』 중 한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러한 소신과 신념은 "삶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부 래들리'라는 인물과 '흑인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애티커스)'에 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평온한 듯 휘몰아치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옳은 일과 나쁜 일을 구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소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슬픈 일을 보고 울 수 있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 어떤 사람에 대하여 보이는 대로만 믿지 않고 이해하려는 마음…… 어쩌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들을, 소설은 이렇듯 흥미로운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학생들에게 권장도서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유혹에서 남들의 시선이나 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선물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스테디셀러/ 세계명작 

카페 서평 이벤트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나는 그날 있었던 불행한 일들을 하나하나 아빠께 말씀드렸습니다. 「…… 그리고 선생님 말씀이 아빠가 저를 잘못 가르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린 이제 더 이상 함께 글을 읽을 수 없잖아요. 제발 저를 학교에 보내지 말아 주세요. 진심이에요. 아빠.」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끝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등나무 덩굴을 살펴보신 뒤 다시 내게로 걸어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65쪽)

「아빠가 그 사람을 변호하시지 않으면, 오빠랑 저랑 이제 더 아빠 말씀을 안 들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어째서요?」

「내가 너희들에게 내 말을 들으라고 두 번 다시 말할 수 없기 때문이야. 스카웃, 단순히 변호사라는 직업의 성격으로 보면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기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이 문제에 관해 어쩌면 학교에서 기분 나쁜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나를 위해 한 가지만 약속해주렴.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봐……. 배우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건 좋은 일이란다.」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149쪽)

아저씨한테는 아주 매력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고의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을 나는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왜 아저씨는 가장 깊숙이 숨겨 둔 비밀을 우리에게 털어놓고 계신 걸까요? 그래서 그 이유를 여쭤 봤습니다.

「너희들은 어리고, 어린이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저 애가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아저씨는 딜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 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만 나이를 먹어 봐, 그렇게 될 테니.」

「아저씨, 내가 도대체 뭐 때문에 운다는 거예요?」 딜의 남자다움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고통 때문에 우는 거지. 심지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이야. 흑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생각한 것도 아닌데 백인이 흑인에게 안겨 주는 그 고통 때문에 우는 거란 말이다.」 (373쪽)


하지만 그때 나는 상당히 정신이 또렷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머릿속에 조금씩 스며 들어오던 그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 거니까요. 지난 겨울에 경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밤공기가 더운데도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이런 느낌이 점점 강해지더니 마침내 법정 안의 공기가 마치 2월의 추운 아침과 똑같아졌습니다. 앵무새가 침묵을 지키고, 모디 아줌마네 새집에서 목수들이 망치질을 멈추며, 이웃에 있는 모든 나무문들이 래들리 아저씨네 집의 문처럼 굳게 닫혀 있는 바로 그런 아침 말이지요.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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