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탐구생활
김현진 지음 / 박하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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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요즘엔 '폴 오스터'의 『겨울일기』라든지, '다니엘 페낙'의 『몸의 일기』라든지, 육체로 인생을 회고하는 책을 줄곧 사들이는 중인데, 이 책도 그 관심의 연장선으로 내게 들어왔다. '육체 탐구'라 하면 모든 오감을 총동원하여 어떤 일과, 사건과 때로는 찰나의 순간까지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육체 탐구'라는 단어와 깊게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초반의 강렬한 기억을 빼놓고서는. 오히려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쭉 나열한 에세이에 가깝다. 간혹 육체의 고통과 육체가 느끼는 사랑 같은 게 등장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책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육체 탐구'라는 말을 붙였느냐 하면은 말이지. 아마도 이 '김현진'이라는 에세이스트의 '글을 쓰는 방식'에 있는듯하다.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는 책에서 처음 만난 '에세이스트 김현진'은 당당하고 솔직하게 청춘을 대변하고 있었고 그 책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약간의 친절함과 편지글의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약간의 공손함을 갖고 글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그녀는 모든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거침없음을 넘어 다소 거친 듯한 어투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육체파 에세이스트' 혹은 '육체파 칼럼니스트'라고 불린다. 몸으로 뛰고 실제로 겪어보며, 글을 쓰기 위하여 단식까지도 불사한다. 파업 현장에 뛰어들어 플랜카드를 들고 온몸으로 맞서기도 한다. (그것은 물론 글감 때문이기보다도, 그의 관심이 반은 들어가 있는 듯 보인다) 그렇게 발로 뛰고 얻은 글감들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만의 독특한 문장으로 재탄생한다. 녹즙을 배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도시 빈민, 자칭 타칭 미스김,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말 그대로 '음성지원'이 되는 듯 하는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지만 왠지 머리를 땡땡, 하고 울리게 하는 외침 같다는 느낌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시체'가 등장하는 책의 시작은 못내 당혹스럽다. 너무도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초반에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뒤로 갈수록 조금씩 나아진다. 작가가 쓰는 글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고부터다! 툭툭 뱉는 말 속에서 느껴지는 위트,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동질감, 그래서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아픔과 슬픔. 온몸을 부딪치며 살아온 그의 일상이 힘들지라도, 그의 신념은 무겁게 버티면서 자본주의 사회 속의 비정함과 그 비정함을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고, 노동자들이 겪는 부정함을 그려낸다. 특히나 인상 깊은 것은 2008년 MB 정권의 시위를 <안티고네>에 비유하여 묘사한 장면과 자칭타칭 '미스김'의 일상을 3인칭으로 그려낸 장면들이다. 전자는 아프고 분노가 치밀며, 후자는 말그대로 '웃프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 아니 대다수가 보기에, 나는 30대 초반에 이미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준으로 보면 얼마든지 책을 보고 마음대로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사람이다. 돈을 많이 벌 수는 없지만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벌 수 있는 거래 관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내가 원할 때 일할 수 있다. 아, 왜 나는 좋은 회사원이 되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걸까. 아마 그건 내가 이 사회의 낙오자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떨며 몸부림친 것일 테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경쟁 시대에서, 누군가는 낙오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을 때 즐기지 못했던 가을 정취 속을 개를 데리고 천천히 걸으면서, 인정했다. 그렇다 나는 낙오자다, 또한 하자품이다. 그리고 아주 낭만적인 낙오자다. 지금은 이것으로 좋다. (52쪽) 

 

  "알고 있어요? 이렇게들 살아요."하고 보여주는 그는 자신에게, 그리고 또 다른 자신에게 살아갈 의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쿨한 위로를 건네준다. 그의 육체는 힘들지라도, 그는 분명 뜨거운 삶을 살고 있다. 직설적인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 것도 이 '살아가는 힘'에 있다. 굳세어라, 미스 김! 굳세어라, 또 다른 미스 김이여!

 

 

 

Written by. 리니

한국에세이, 칼럼/ 사회 비평/ 노동, 도시빈민의 에세이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더 구질구질한 기분이 드는 건, 좀 없이 사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들이 그 고함도 훨씬 노골적이고 적나라하다는 것이다. 너 돈 없지, 당장 급전 빌려라! 애들 수학 학원 보내라! 편한 알바 안 해볼래? 싼값에 아가씨 끼고 술 마셔라! 그러다 보니 아아 돈 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소리를 평생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돈 있으면 이 꼴을 안 볼 것이 아닌가. 돈 있으면 회사 바로 앞으로 이사 가서 광고 안 볼 수 있고, 돈 빌려가라는 광고지 꽂힌 지하철 탈 일이 없어서 그 고함 소리를 안 들어도 될 게 아닌가. 돈이란 건 좋은 것을 주기도 하지만 나쁜 것을 막아주는 기능도 있어서 다들 돈을 좋아하는 거였다. 다들 사치하고 싶어서, 좋은 걸 누리고 싶어서만 돈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이 꼴 저 꼴 안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돈을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하고 뒤늦게 아주 절절히 깨닫고야 말았다. (39쪽)

화내야 할 때 화낼 줄 모르고 참아야 할 때 참을 줄 모르는 불균형한 어른이 되면서 내 영혼은 몸에서 달아나는 법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모멸과 슬픔에 맞서 싸우지 않고 천장 어디쯤에서 남처럼 자기 몸을 쳐다보면서, 저기 가서 좋은 일이 없었다면서. 잊고 싶은 기억이 불로 지지듯 들고 일어나 어제 일처럼 쿠킹호일 구기듯 마음을 구겨버리면 술을 찾아 사고를 저지르고 후회한 게 지난 10년이었다. 누구 탓도 할 수 없고 이제 나를 때릴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그런데 내 영혼이라는 년은, 천장 어디쯤에 붙어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저기 가서 좋은 일이 없었어, 하고 되풀이하면서. (83쪽)

사람들이 언제 `멀쩡한 일 가질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짜증이 와락 치민다. 멀쩡한 일과 안 멀쩡한 일의 구분은 뭐고 녹즙 배달하는 건 어디가 어떻게 안 멀쩡한 일이며 도대체 어느 정도로 멀쩡해야 멀쩡한 일 취급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며칠 전 프로야구 우승 결과를 가지고 내기하자는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대강 짐작이 갔다. 내기를 해서 자기가 이기면 한 달 녹즙 공짜로 해달란다. 미스 김이 이기면 어떻게 할까 묻기에 그럼 나 대신 한달 배달하라고 했더니 사람 시간이라는 게 단가가 있는 건데 너무하다면서 자신은 단가가 비싼 사람이니 한 달 공짜 녹즙 대 자신이 하루 대신 배달하는 게 공평하단다. 녹즙병으로 때려주고 싶은 사람 명단에 이렇게 한 명이 추가되었다. 사람 시간 단가 운운하는 건 그 사람의 값을 매기겠다는 이야기인데, 한마디로 내 시간은 네 시간보다 몇십 배 비싸다는 이야기를 너무 당당하게 하니 미스 김은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92쪽)

그런 대접을 당하고 싶지 않았으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일 할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런 일 할 사람들의 일, 남의 일 이렇게 칼같이 줄을 그을 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그런 일 할 사람, 아닌 사람으로 우리가 남을 판단한 바로 그 잣대로 나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의 시장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사람 사는 질서라고 칼같이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나처럼 시장 가치가 없는 사람과는 별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겠지만, 나 역시 그런 분들과는 마구 척지고 싶다. 있는 대로 척지고 싶다. 평생 척지고 싶다. 만나봤자 서로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확실하게 척지고 사는 게 피차 정신 건강에 좋으니까.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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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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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한밤에 깨어있는 걸 좋아해요. 큰 판을 벌이지는 않죠. 조용한 집안에서 혼자, 하루의 시간 중에 가장 활발한 상태로 읽고 쓰는 게 일상이지만, 때로는 작은 일탈도 감행해요.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간식을 사러 나가는 거예요. 신호등의 불이 모두 주황불로 깜빡이는 새벽, 엄마 차를 빌려 끌고 나갔다 오는 거죠. 집에서 입던 추레한 옷, 혹은 잠옷에 외투만 걸친 채로 아무도 안 만나기를 바라며.

 

 바깥의 세상은 온통 조용해요. 꼭, 그 길가에는 누구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조금 올려다보니 죄다 불 꺼진 창문 사이에 밝게 켜진 집이 보여요. 그리고 차로 한 코너를 돌아 넓은 길가로 들어서면,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게 되죠. 반짝거리는 간판, 이보다 더 역동적일 수 없는 사람들의 움직임. 이 어둠 속에 누군가는 깨어있고, 고요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그런 신기한 풍경인 거예요.

 

 『애프터 다크』, 어둠의 저편에는 갖가지 풍경이 있고, 하루키는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하루의 자정부터 아침까지의 시간을 촬영 카메라로 담고 있어요. 도시의 넓은 풍경을 광각으로 조명하다가, 세세하고도 아주 사실적으로 피사체를 쫓기 시작하죠. 그 프레임에 들어온 사람은 자매인 '마리'와 '에리'예요.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거리의 심야 식당 '데니스'에서 동생인 '마리'는 밤을 지새우고 있어요. 그녀의 공간 속에서는 수시로 사람들이 바뀌어 가며 말상대를 해주고, 어떤 사건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잔잔히 음악도 흐르죠. 그러나 언니인 '에리'는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어요. 동생의 말에 의하면 언니는 "오랫동안 잠을 자겠다"고 선포하고 침대에 누웠다고 했어요. 그리고 두 달째, 그녀는 분명 잠을 자고 있는데 어렴풋한 움직임을 보이며,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작가는 이 둘, 생동감 있는 '마리'의 시간과 멈춰있는 '듯'한 '에리'의 시간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새벽에 나가면 한 코스 너머로 밝고 시끄러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그들의 시간도 비슷하죠. 공통적인 건 그들을 쫓고 있는 카메라는 마치 감시하듯 그녀들의 일분일초를 훑고 있다는 거예요. '마리'가 만난 새로운 인물들, 호텔 '알파빌',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창부, '다카하시'와의 은밀한 대화들은 어둠의 저편에서도 생동하고 있는 움직임을 포착해요. 그리고 '에리'의 방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왠지 모르게 오싹한 세계를 그려내죠. 아주 철저하게 단절된 세계를 기계적으로 서술하고, 의식의 흐름을 딱딱하게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어요.

 

 소설은 역시나 무엇인가를 결론 내거나 판단하지 않은 채, 새벽 흘러가는 시간처럼 그들을 조용히 따라다니고 있어요. 자매의 '밤'은 움직임도, 분위기도, 냄새도 확연하게 다르고, 하루키는 자매의 '밤'에 특별히 개입하지도 않아요. 대신에, 그녀들의 삶의 접점을,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접점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지요.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시라가와'라는 남자의 기계적인 일상, '마리'와 '고오로기'의 기억에 관한 대화, '에리'의 동창인 '다카하시'를 통해 그 접점을 하나씩, 하나씩 터치해가며 그려내요. 어쩌면 그 접점은 둘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죠. '다카하시', 혹은 그들의 부모님, 심야식당 '데니스'에 앉아 있는 누군가, 호텔 '알파빌'에 묵었던 사람의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이어지고 지나치는 삶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며, 누군가의 밤 속에는 또 누군가의 순간이 깃들고, 누군가의 냄새가, 손짓이 깃들어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그 접점이 어둠을 관통하며 '각성'할 수 있는 도구가 되죠.

 

 어둠을 관통하는 도구를 집는 법요? 그것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 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듯해요. 두 자매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렌즈, 그 경계는 어디를 바깥이고 어디를 안쪽으로 나누고 있을까요. 카메라가 그들을 찍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항상 확실하게 호불호를 찍을 수 없는 하루키의 소설이지만, 한 편의 잔잔한 영화 같은 『애프터 다크』 는 제게 확실하게 와 닿은,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았어요. 한 방울의 알코올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알딸딸하고 희미한 새벽, '결론 없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에 읽기를 바랄게요.

 

 

 

Written by. 리니

일본 소설/ 하루키/ 『어둠의 저편』 개정판 ​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현재 카메라는 침대 바로 위에 위치하며 그녀의 잠든 얼굴을 포착하고 있다. 사람이 눈을 깜박이듯 간격을 두고 앵글이 바뀐다. 그녀의 잘생긴 조그만 입술은 한일자로 곧게 다물어져 있다. 언뜻 보면 숨을 쉬는 기척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목에서 이따금 어렴풋한, 아주 어렴풋한 움직임이 엿보인다. 호흡은 하는 것이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얹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눈꺼풀은 겨울철 단단하게 오므라진 꽃봉오리처럼 닫혀 있다. 잠은 깊다. (32쪽)

"프로 뮤지션이 될 거야?"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난 그런 재능은 없어. 음악을 하는 건 재미있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순 없어. 어떤 걸 잘하는 것하고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하는 것 사이엔 크나큰 차이가 있단 말이지. 난 트롬본을 꽤 잘 분다고 생각해. 칭찬해주는 사람도 있고, 칭찬받으면 물론 기뻐. 하지만 그뿐이거든. 그래서 밴드는 이달 말까지만 하고 음악에서 손을 뗄까 해."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 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그러게…… 음악을 마음속 깊이 전달하는 걸로써 자기 몸도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슥 이동하고, 그와 동시에 듣는 사람의 몸도 물리적으로 슥 이동하는, 그런 공유적인 상태를 낳는 거야. 아마도." (112쪽)

이윽고 에리의 얼굴에 또다시 움직임이 나타난다. 뺨에 앉은 조그만 날벌레를 쫓듯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이어서 오른쪽 눈꺼풀이 몇 차례 바르르 떨린다. 사유의 물결이 일렁인다. 그녀의 어둑어둑한 의식 한구석에서, 한 작은 조각과 또 하나의 작은 조각이 말없이 호응해 파문을 그리듯 엮여간다. 우리는 그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단위가 형성된다. 이어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단위와 그 단위가 엮여 자기 인식의 기본 시스템이 형성된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녀는 한 발짝, 한 발짝 각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각성은 답답하리만큼 느리게 진행되지만, 역행은 없다. 시스템은 이따금 당혹감을 내비치면서도 조금씩조금씩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공백의 시간도 점차 단축된다. (131쪽)

"그전엔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고등학교 나와서 오사카에서 그래도 이름 있는 상사에 들어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유니폼 입고 일했어. 너랑 비슷한 나이일 때. 고베 지진이 일어났을 무렵 이야기야. 지금 생각하면 어쩐지 꿈같지만.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었어. 아주 작은 계기가.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았어. 그런데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까 옴짝달싹 못할 상황에 이르렀더라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래서 직장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188쪽)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 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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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사자 1 블랙 로맨스 클럽
송주희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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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책을 읽고 나서

 

 익숙하지 않은 작가의 이름, 그리고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 이 책을 고를 때의 장애물이라면 내게는 바로 이런 것들일 것이다. 특히나 '판타지'는 내가 낯설게 느끼는 장르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 이유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과 색다른 로맨스를 지향하는 '블랙 로맨스 클럽'의 신작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로맨스도 색다르게 표현해내며, 탄탄한 구성이 뒷받침하고 있을 터. 가끔은 로맨스도 당길 때가 있으니, 한번 읽어나볼까 하고.

 

 이렇게 펼쳐진 『안개의 사자』는 일단, 독특하고 새로웠다. 주인공은 무려 신들이다. (신들의 이야기라니, 호기심부터 인다) 작가는 가장 오래된 신화인 '수메르 신화'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소설 속 세계를 구축했고, 안개와 얼음의 나라인 '셰올'에 군림하고 있는 여신 '헬'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재밌는 건 그녀의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들의 아버지 '아누'에게 버림받은 '헬'은 흉한 외모를 가졌고 믿는 건 힘밖에 없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여신의 머리를 뜯고, 님프의 피를 짜고, 세이렌의 목을 뜯어 갈취했다. 그렇게 완벽한 '여신'이 된 헬은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잔혹한 여신의 등장은 로맨스 소설의 캐릭터로서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라 할 수 있는 동시에, 로맨스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역시나 등장하게 되는 삼각관계, 아니 사각 관계 속에서 그 잔혹한 여신의 행동들은 역시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머물고 있었다. 독특해 보였지만, 그렇게 파격적이진 않다고 해야 할까? (로맨스가 돼야 하니까!) 하지만 그 사랑의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는 아주 능수능란하다. 그녀와 비교하면 약자인 듯하지만, 왠지 모르게 말려들게 하는 인간 '아담', 그리고 시종일관 애정을 보내는 오빠 '카옐' 사이에서 방황하며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이 다른 이야기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나타난다. 초반에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듯 했던 사랑은, 후반부로 갈수록 무겁고 복잡한 감정의 사랑으로 변화되는데, 인생을 송두리째 걸만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다. 로맨스 그 너머의 이야기들, 주인공이 정체성과 비밀을 찾는 과정에서도 소설은 슬픔과 공허, 집착, 갈등과 같은 이들의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판타지에 신화가 곁들여진 장르기 때문에, 신들의 싸움이나 생생하게 그려지는 환상적인 액션들은 또 다른 볼거리다. 친숙하지 않은 용어들이나 상상 속 풍경들이 양날의 검처럼 가독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꼼꼼히 읽는다면 색다른 세계를 느낄 수도 있겠다.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된 신화를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책장 속 묵혀 두었던 북유럽 신화를 읽어 뒤늦게라도 소설의 몇몇 장면들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소설/ 판타지 로맨스, 신화/ 블랙로맨스 클럽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제가 그렇다 말하면 어찌하실 셈입니까?"

"죽여 줄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헬이 서슴없이 제의했다. 어떻게든 이 인간 사내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그는 헬의 눈동자를 보고도 현혹되지 않았고, 그 자태에도, 체취에도 홀리지 않았다. 신들이 내린 축복 때문인지 아버지가 수를 쓴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헬에게 달갑지 않은 건 맞았다. 어쩌면 이제 막 태어났으니 욕정을 아예 모를 수도 있겠다. 헬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담이 아연하며 웃는 채 다가오는 순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권, 32쪽)

"이것만은 기억해 두렴, 아담. 나는 너에게 뭐든 해 줄 수 있어. 지금처럼 세계 사이를 여행할 수도 있고, 막대한 재물이나 오랜 젊음, 신과도 겨룰 수 있는 정도의 강한 힘 따위를 아낌없이 선물하는 것도 가능하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수고를 아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단 한 가지, 내가 줄 수 없는 게 있단다."

아담이 헬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그게 무엇이죠?"

"영원한 사랑. 그건 내가 누구에게도 바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야." (1권, 112쪽)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이 모든 건 아버지 아누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 남자만 사라지면 너도 나아질 것이다.

모든 게 본디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한 모습으로…….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그릇된 존재인가? 옳지 않은가? 카옐을 잊어버리고 아누가 빚은 이 육체 안에 있기에? 헬은 혼란스러웠다. 떨리는 입술을 이로 꾹 깨물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미 카옐의 언사는 비정하게 마음을 후벼파고 간 뒤였다. 단 한 마디로 난도질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이토록 지나치게, 또한 철저하게 갈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아, 이것은 물론 나도 안다. 하지만 카옐의 말은 제 생각보다 공격적이었고, 꽤나 비틀려 있었다. 설마 싶었던 추측이 확신을 얻고 현실이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애석하게도 아주 찰나였다. 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권, 129쪽)

그를 미치도록 싫어하면서도,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헬은 완강하게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필요에 의해서도 있었고, 그가 주는 애정이 몹시도 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도 있었다. 때때로 그의 손길에 기분 좋았던 적도 없지는 않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엔 죽을 만큼, 생명을 다해 증오했었다. 그가 없으면 저도 사라질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미치도록 불안해서. 그가 제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치고, 손을 뻗고, 안아 달라 조르고, 나와 너에겐 서로밖에 없음을 만족할 때까지 확인하다가 다시 내치고, 거부하고 욕을 퍼붓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감정이 뒤틀리는 바람에 마음을 헤아리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과거의 기억을 엿본 지금까지도 격정적으로 치솟는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2권,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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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71쪽)   

 

 지금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이토록 사랑하게 한 그동안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했던 경험,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은 흐릿하게라도 기억이 나지 않고, 사랑해서 낳은 아이의 존재만 알뿐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떨까? 과거가 없다면, 사랑하는 감정 또한 식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우리 사랑은 어디서 온 걸까?

 

 

 『파묻힌 거인』 속의 노부부, 토끼굴 마을에 사는 그들은 언젠가부터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들의 이름을 알 수 없고 어디로 떠나버렸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여자는 어느 샌가부터 사라져버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잊혀버렸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같은 현상을 겪는 듯 보이지만, 아무도 그 의문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금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기억들, 그 속에 있었을 수많은 추억을 찾기 위하여, 액슬과 베어트리스 노부부는 모험을 떠난다. 당최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아들의 집을 향하여.

 

 

 고대 잉글랜드의 평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의 영상미는 훌륭하다. 노부부가 모험을 떠나는 길목에는 도깨비, 용, 황야, 뱃사공 같은 환상적인 풍경들이 그려지는데, 회색빛의 을씨년스러운 안개가 텍스트 전체에 걸쳐있는 듯 오묘한 느낌을 준다. 모험 길에 오른 그들이 만나는 전사들과 풍경들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도 하고, 신비스러운 뱃사공의 에피소드는 마치 신화 같기도 하다. 그 풍성한 볼거리들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바로 '사랑'이다. 낯선 모험 속에서도 끈질기게 드러내는 '사랑'의 철학 속에는, 기억과 용서, 복수,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망각이라는 슬픔, 기억의 소중함, 그리고 그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 해체나 르완다 대학살 등의 역사적 사건에서 이 소설의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작품은 또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개인적인 취향과는 잘 맞지 않은 작품이었다. 신비스러운 배경과 계속해서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대화들이 좋았지만, 무거운 주제와 낯선 풍경 탓인지 읽는 속도는 매우 더뎠다. 하지만 읽는 속도와는 별개로, 몽환적인 분위기와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쉽게 잊히지는 않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는,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부부의 모험. 그들은 계속해서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언제까지나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영국문학/ 기억과 망각/ 사랑과 용서에 관하여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위스턴 씨." 비어트리스가 끼어들었다. "내 남편 얼굴에서 뭘 찾고 있는 건가요? 이 기사님은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 모두에게 낯선 사람이었는데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용서해주세요, 부인. 이 고장은 제게 많은 기억들을 일깨웁니다. 하지만 기억들은 마치 가만히 못 있고 언제라도 바람 속으로 날아가버리는 참새 같아요. 남편분의 얼굴은 온종일 제게 뭔가 중요한 기억을 떠올려줄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진실을 말하자면 두 분과 동행하겠다고 제안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163쪽)

"제가 말씀드린 사람들은 잔인함의 끝을 체험했어요. (…) 이런 일이 곧 다가올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적들이 나중에 저지를 짓에 대한 대가를 먼저 치르는 며칠 동안의 포위 작전이 소중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복수를 해야 할 곳에서 하지 못하는 이들이 미리 복수의 맛을 보는 거지요. 그런 이유로 우리 색슨족 형제들이 이곳에 서서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적들이 잔인하게 죽을수록 그들은 기뻤을 겁니다."

"믿을 수 없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그토록 깊이 증오할 수 있단 말이오?" (212쪽)

어둠 속에 누워 여전히 잠이 오기를 바라는 액슬은 조너스 신부 방에 있던 내내 자신이 왜 그렇게 이상할 만큼 아무 말이 없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뭔가 이유가 있었다. 비어트리스가 안개의 원인을 알고는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띠며 그에게 소리쳤을 때에도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에게 손만 내밀었다. 그는 뭔가 강렬하고 이상한 감정의 고통에 휩싸여 있었고,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단어가 여전히 또렷하게 귀에 들리는데도 그 자신은 거의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추운 강물 위에서 배를 타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배에 서서 멀리 짙은 안개 속을 바라보면서, 언제든지 안개가 걷히고 그 사이로 저 앞 육지의 또렷한 모습이 보일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공포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동시에 호기심 - 아니면 아주 강렬하고 어두운 어떤 느낌 - 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속으로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확인해볼 거야. 내 눈으로 볼 거야." (233쪽)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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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그래프 Monograph No.1 최현석 - 창간호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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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읽고 나서

 

 여러 번 리뷰를 남겼던 인물 잡지 『바이오그래피 매거진』과 연계로 새롭게 창간된 『모노그래프』 매거진 입니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 정계나 예술, 학문 등의 인사를 중심으로 진지하고 빼곡하게 다뤘다면, 『모노그래프』는 현재 트렌드를 이끄는 젊은 멘토를 선정합니다. 무게감은 이전보다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면서도, 꼭 '가볍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스리체어스'만의 디자인과 구성으로 빼곡하게 한 권을 채우고 있습니다.

 

 창간호에서 다룬 인물은 '최현석'입니다. '쿡방', '요섹남'등의 용어도 만들어질 만큼, 셰프 전성시대인 요즘입니다. 그중 최현석 셰프는 방송에서 '허세 컨셉'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사로서의 실력 또한 갖추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각인된 분이죠. 『모노그래프』는 방송에서 볼 수 없던, 최현석 셰프의 인생과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 보이고 있습니다.

 

 

 셰프가 주인공인 만큼, 목차는 메뉴판으로 대신합니다.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면, 이전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에서의 'TALKS AND TALES'이 댓글 창으로 바뀌었습니다. 살펴보았더니 아이디와 이모티콘이 있는 댓글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재미는 있지만, 가독성은 그리 좋지는 않아 뭔가 낯선 기분도 듭니다.

 최현석 셰프의 이야기에 앞서, 셰프의 의미나 그와 관계된 셰프들을 비교한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최현석의 인생 요리'나 '크레이지 레시피' 등 그를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것 같은 이야기도 있군요. 전체적인 구성의 흐름이 참 좋아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최현석 셰프가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특별한 이력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리를 배우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 그리고 해외파 셰프가 넘치는 요리계에서 실력으로 한 계단씩 정상으로 올라섰기 때문이지요. 아버지도, 엄마도, 형도 요리사였던 집안에서 자라긴 했지만, 학교에서 요리를 배운 적도 없고 해외에서 요리를 배워온 적도 없습니다. 순전히 실전에서 한층 한층 올라섰습니다. 'Poisson', 최현석 셰프의 인생 전환점을 요리로 표현한 부분에서 그의 인생 스토리를 엿보게 됩니다. 밥벌이를 위해 자연스럽게 요리사를 생업으로 택했지만, 처음 취직한 레스토랑에서 20킬로가 넘는 홍합을 갔던 기억, 요리사 어머니의 잊을 수 없는 계란말이의 맛,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는 요리 철학을 갖게 된 에피소드, 자신의 요리를 알아주고 발전하게 해준 미식가 손님 'cosmos7'의 이야기. 그에게도 역시나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시련과 우여곡절이 많았더군요.

  

 

 

* 분자요리 - 음식을 분자 단위로 쪼개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하는 요리법 

 

 요리에 대한 기본 철학을 완성하고, 자신만의 직관으로 레시피를 만들다 보니 '분자 요리'*를 공부하게 되었다는 최현석 셰프. 끝없는 연구와 국경 없는 레시피는 그에게 '크레이지 셰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죠. 그와 관계된 '크레이지 레시피'도 이 책 속에 들어 있습니다. '두부김치 모양의 엔다이브 샐러드'. 생긴 것은 우리나라의 포기김치 같은데, 이탈리안 정통 대표 음식이라 합니다. 가짜 두부, 가짜 김칫소를 만들어 넣은 이 맛이 무척 궁금합니다. 점점 군침이 돌고 입맛을 다시는 글이 잔뜩인데, 엎친 데 덮친 격 '오감에 대한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함민복의 시집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우울 氏의 一日>이라는 짧은 단편이 오감을 자극합니다. 역시, 광고가 잔뜩 실려있는 잡지와는 다른 색다른 매거진이라는 느낌이 이런 곳에서 나오지요.

  

 이어서 나온 장에는 최현석 셰프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요리계의 조직문화, 셰프의 취미, 논란이 되었던 '강레오' 셰프의 발언, 연예계로 진출하는 셰프들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하고 솔직한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인상 깊은 이야기는 이런 거네요. 재벌 집으로 들어가 요리해준 이야기를 하다가 이어지는, 그의 말.

 

"살면서 점점 더 느끼는 건 자기가 대단하다고 사람 무시하는 것. 그게 제일 병신 같은 거예요. 다 똑같거든. 그 사람들은 하루에 몇천끼씩 먹는 거 아니잖아요? 삼시 세끼 먹는 거 똑같은데.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고 절대 무시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어요."


 

 

 위의 사진은 그에게 필름 카메라를 주고, 생활 속 장면들을 찍으라고 해서 나온 사진입니다. 주방에 꽂혀 있는 칼, 그리고 유러피안 음식을 만드는 그가 제일 좋아한다는 라면. 까만 배경의 사진 한 장이 때로는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후배 셰프들과 함께 찍힌 그의 사진을 보니 더없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요리계의 '크레이지 셰프', 그리고 방송계의 '허셰프'. 언제까지나 그 균형을 잘 맞추어 우리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셰프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젊은 멘토를 조명한 『모노그래프』.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든, 『모노그래프』이든, 누구나 있을 삶의 진솔한 부분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이 매거진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음 『모노그래프』의 주인공은 누가 될지 궁금해집니다.

 

 

 

Written by. 리니

잡지, 매거진/ 인물 잡지/ 트렌드, 젊은 멘토/ 크레이지셰프, 허셰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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