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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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 이순

슬픔이라 하기에도 모자란

 

 

 

 

  책을 읽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에 잃는 슬픔이란 어떠할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 감정은 슬픔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라며, 세상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일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것을 아직 '상상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놓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죽음으로 떠난 적도 없거니와, 나와 직접 관계하던 이가 떠나간 적도 없다. 그리고 이전의 수많은 죽음 -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다는 외할아버지의 경우- 도 내가 아주 어릴 때 혹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행운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두려움은 너무나 크다. 이런 두려움은 절대 누구도 적응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롤랑의 마망(엄마)이 그의 곁에서 떠나간 뒤 날짜와 함께 써 내려간 이 기록은 어떤 수정도 거치지 않은 아주 날 것의 글로 보인다. 제목에 붙여진 '일기'처럼 각각의 순간마다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을 그대로 적어낸 글은 너무나 솔직해서 애달프다. 이 책, 『애도일기』를 중심으로, 롤랑은 다른 작품들에 애도와 스스로에 대한 위안을 쏟으며 글쓰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에게 문학은,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관한 한, 어떤 효과가 있다고 깊게 믿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가장 순수하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치료제라는 것이다. 헤세는 정신적 고통을 위해 수많은 소설에 자신을 투영하며 글을 썼고, 하루키는 상실의 아픔을 자신의 펜촉에 그대로 녹여놓았다. 그리고 수많은 작가의 자전적 작품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롤랑은, 이 글쓰기로부터 치유를 얻을 수 있었을까 물어본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다. 자신을 파괴하는 모든 것 중에서도,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과 그것을 잊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어떤 일보다 절절하고 애달픈 것이기 때문이다. (아, 갑자기 세월호가 떠오른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 

 

 슬픔의 정도에 대하여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크나큰 슬픔을 잊으려는 몸부림이 어떤 의미라고 규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풀어낸, 롤랑을 괴롭히던 생각들 - 좌절감, 허탈감, 무미건조함, 우울함, 그리고 마망의 죽음 후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회의감 - 은 결국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으로 치환되어 다가왔다. "내 슬픔은 사랑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그리고 생생하고 집요한 '애도'의 기록이 결국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혹은, 그토록 간절한 사랑의 절규를 보는 이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나의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리니

영미 에세이/ 애도 시/ 삶과 죽음, 그리고 슬픔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우습고도 말도 안 되는 시도). (20쪽)

……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그건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31쪽)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 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62쪽)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나와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 (204쪽)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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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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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 열화당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창고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거닐었던 모든 공간과 우리가 만지던 모든 사물은 깊이가 불분명한 기억의 항아리처럼 존재한다. 누군가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그곳에, 나의 기억도 살포시 얹어 놓고, 그 흔적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것을 여는 순간, 다음에 거쳐 가는 사람들의 생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나에게는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동네 거리가 그렇고,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사물들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책들이 그렇다. 나는 실제로 중고 책에서 꽤 의미 있는, 누군가의 생의 기록을 발견한 적이 있다. 내게도 인생의 책이 돼버린 한국 작가의 소설 맨 앞 페이지에서,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사는 게 별거냐, 잘 먹고 잘 웃고 잘 살자."라는 메시지는 가볍게 던지는 말 한마디였지만, 꾹꾹 볼펜으로 눌러 쓴 글씨에 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흠뻑 담고 있어, 그 책을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한 지금의 나에게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리스본, 제네바, 크라쿠프…… 그리고 마드리드까지의 여정을 담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기억과 흔적에 관한 책이다. 분야는 소설이지만 에세이로도 읽힌다.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이라는 한 묶음의 글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장르를 다시 확인하게 하고 앞표지를 왔다 갔다 하게 한다. 하지만 의심은 뒤로하고 그저 읽어본다. 작가는 소설 속에 투영되어 또 다른 ‘존’의 모습으로 길을 걷고, 서로 다른 매력을 뿜고 있는 도시의 장면들을 관찰하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까마득한 옛날에나 존재했을 선사시대의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대화와 서술 속에 작가가 사랑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한 꺼풀씩 드러난다.

 

 

,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그래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장소는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다.

, 이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란다. 이제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밤에 몇 시간만 빼고. (16)

 

 

 그들을 만나 ‘존’은 묻는다. 가장 사소한 질문부터, 다소 무거운 질문까지. 그들을 자신과 연결해주는 특별한 이 공간 속에서, ‘존’은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헤아릴 수 없는 생(生)들을 느낀다. 잊어버린 순수함, 소중한 기억, 누군가의 에피소드, 한 번쯤은 귀에 들어왔었던 익숙한 소리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죽은 자들의 것이지만 숨을 쉬며 살아있는 것들을 통해, 어둠 속의 얇디얇은 희망을 배운다. 선을 긋는 인생의 문제, 수많은 사람의 얽히고 얽힌, 굵고 얇은 선들을 피해 나만의 색깔로 빛나는 한 획을 그어 나가기 위한 희망 말이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입 베어 물던 신선한 과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몇 토막의 글은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뒤이어 그 과일들은, 낡디낡은 어떤 사물이 되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건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된다. 나의 모든 오감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 창고가 된다. 소설의 끝, 누군가의 입을 빌려 "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이라고 답하는 장면까지의 여정은 분명 작가가 소유하는 기억이지만, 어떤 통로를 거쳐 나에게로 들어온다. 누군가의 인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찌릿한 감정을 선물해준다는 생각과 함께.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기억과 공간, 흔적들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하얀 나비 두 마리가 어머니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만한 높이의 수도교 위에는 나비가 꼬일 만한 게 별로 없으니 어머니를 따라 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은 탄생이라 생각하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게 일반적인 오류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도 그 함정에 빠졌구나!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탄생이 일어난 건 -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 - 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하지만 진짜로 여기에 계신 건 아니잖아요?

너는 어쩌면 그렇게 멍청할 수 있니? 우리 - 우리 말이야 - 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생겨났다고요?

존재하게 됐다고.

아무도 뭔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든 원하는 대로 선택하렴. 네가 할 수 없는 건 모든 것을 희망하는 거야. (59쪽)


책을 돌려줄 때면 그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며 읽은 것을 그만큼 나도 더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책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도 많았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읽은 후엔 『카탈로니아 찬가』가 읽고 싶어졌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사람도 켄이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지. 그가 말했다. 그 상처를 지혈시킬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지혈`이라는 말을 직접 듣기로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집에서 당구를 치던 중이었다. 당구봉에 초크 바르는 거 잊지마.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94쪽)

내가 글쓰기를 처음 배운 건 지금 마드리드 리츠 호텔 라운지에 앉아 파슬리로 장식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타일러 선생님의 녹색 오두막에서였다. 글자를 그리는 법은 유치원에서 이미 배운 후였다. A부터 Z까지 전부. 그 글자들은 사마귀나 모반이나 가짜 점처럼, 내가 좋아했던 릴리 선생님의 날렵하고 예쁘고 둥글둥글한 몸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린헛에 간 첫날 타일러 선생님이 지적했듯이, 글자를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달랐다. 글쓰기에는 철자법, 직선, 띄어쓰기, 적당한 기울기, 여백, 크기, 가독성, 펜촉을 깔끔하게 다듬는 것, 잉크가 절대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연습장마다 예법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150쪽)



우리를 한데 묶어준 건 뭐였을까? 피상적으로 볼 때는 호기심이었다. 우리는 나이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이 어떻게 감춰 볼 도리 없이 달랐다. 우리 사이에는 처음으로 하는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를 한데 묶어준 건 같은 슬픔에 대한 말 없는 이해였다. 자기 연민은 없었다. 내게서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녀는 그걸 뿌리채 뽑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확신을 사랑했고, 그것과 자기 연민은 양립할 수 없었다. 보름달을 보고 미친듯이 짖어대는 개의 울부짖음 같은 슬픔.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은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선 스타일이 필요불가결하며, 사람이란 희망을 가지고 살거나 아니면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중간이란 없었다.

스타일? 어떤 가벼움. 어떤 행동이나 반응을 배제시키는 부끄러움. 어떤 우아한 제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멜로디를 기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찾을 수도 있으리라는 가정. 하지만 스타일은 희박하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찾아 나선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일과 패션이 같은 꿈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그 둘은 서로 다르게 창조된다.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것이 인고의 기질과 세월을 대하는 무던한 자세를 요구하고 키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스타일은 음악과 매우 흡사하다.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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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소한 구원 -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서른두 통의 편지
라종일.김현진 지음 / 알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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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소한 구원』 라종일, 김현진 / 알마

답 없는 청춘을 위한 가장 소중한 구원

 

 

 

 

  책을 읽고 나서

 간간이 친구와 얘기를 나눈다. "전화해도 돼?" 혹은 "나 고민이 있어"라는 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대개 고민 상담이다. 청춘, 그리고 사회 초년생이라는 경계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우리는 서로 될 수 있는 한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조언을 남긴다. 하지만 역시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출발선에서 달려, 비슷한 거리에 머물러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원할 것 같은' 답을 내어줄 수밖에 없고, 선택 또한 자신의 몫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아직 선택의 끝을, 결과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는 바라던 정도의 위안을 얻고, 다시 집에 돌아가 같은 고민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이럴 땐, 제대로 인생을 경험해본 누군가의 말 한마디라도 있었음 좋겠다. 답을 내려주진 않더라도, 약간의 힌트라도 누가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도 필요로 하는 애송이 같은 청춘에게 말이다.

꽤 여러 번이나 답답함을 맛보고 나니, 속마음을 진심으로 내보일 '인생 선배'가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모든 것을 터놓을 만큼 가깝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직접 대면해서도 좋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서신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여기, 나의 부러움을 한가득 담은 책 한 권이 있다.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가장 사소한 구원』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도망칠 틈새를 찾아내듯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구원에 매달렸다. 그것이 선생님과의 서신 교환이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고통을 활자로 옮기라며 단호하게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된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 당신이 그 고통들을 글로 쓸 수 있을 때 당신은 비로소 낫게 될 것이다." (7쪽)

 돈도 빽도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에세이스트 김현진이 보내는 ‘은밀한 연서’는 차근차근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라종일 교수에게 닿는다. 자기 비하와 한탄이 가득한 청춘의 편지에 답하는 노교수의 회신에는 "기다렸다."라는 따스한 말과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온 조언이 함께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행복에 대해,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청춘이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 꼭 갖춰야 하는 게 뭘까요?"라고 물으면, 스승은 "왜 어른이 되려고 합니까?"라고 다시 묻는다. 청춘이 "우리 사회 청년들의 곁길이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조언을 구하면, 스승은 "에덴의 낙원 이후에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리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라는 따끔한 말을 던져주는 것이다. 질문이 질문을 부르고, 당연하게 답이 나와 있을 것 같은 물음에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 이 스릴 있는 서신 교환은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현실과 맞물려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늘 당신 편입니다"하고 모든 이야기를 마음을 다해 들어주고, 투정 섞인 신세 한탄에 내가 보지 못한 이면을 가르쳐주는 누군가가 못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편지의 수신자를 나에게로 돌려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나의 이야기'이기에 허공에 질문을 던져보고, 스승의 따뜻한 말들을 되짚어 읽어본다.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 이름 붙인 그들의 서신이 나에게 닿아 '가장 소중한 구원'이 될 때까지.

 

Written by. 리니

한국 에세이/ 편지, 서간집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선생님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그렇게 할 수 있는 청년들이 몇이나 될까요. 오히려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을 온몸을 다해 준수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자긍심을 가지면서 경쟁이 극도로 격화된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젊은 세대의 생존법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주류 사회의 길에서 벗어난, 혹은 낙오되어버린 저 같은 사람은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만, 한때 그 안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람으로서, 또 한사람의 (늙은?) 젊은이로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 스스로 생각해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71쪽)

그런데 얼마 전 "우리나라의 앞날은 십 년 후 필리핀처럼 될 것이다."라는 글을 봤습니다. 지금처럼 자기계발로 역량을 높여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는 시대는 지금이 마지막이고, 결국 계급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도 이제 우리나라의 `계급`은 완전히 고착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교육 문제도 그렇고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이제 저물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좀 천한 소리까지 동원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대학을 가느냐가 그 사람 인생 절반 정도는 결정해버리는 것 같아요. (120쪽)

우리가 어려운 일들은 잘 헤쳐나왔으니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닥쳐오는 문제들은 어쩌면 이제까지 당면했던 문제들보다 결코 쉽지 않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불합리한 장애 없이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공동의 공적인 사안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적인 존재에만 안주하지 말고 공적인 인간으로서 함께 참여하고 함께 노력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140쪽)

제가 너무 낙관적인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낙관적이지도 않고 더구나 우리나라가 훌륭하다는 생각도 않습니다. 제가 진보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면에는 구석구석 어려운 일들이 도사리고 있겠지요. 그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날카롭게 바라보고, 그 내부의 부정적인 면을 파헤치는 것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겠지요. 적어도 "부러울 것이 없다"든지 "아름다운 것만 보라"는 것보다는 좋은 일입니다. 단지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 가족, 친구들, 자기가 사는 세상 등을 우선 귀하게 여기고 부족한 것을 고쳐 나가는게 좋아 보입니다. 항상 현실에 비판적인 안목을 유지하면서 개혁과 개선을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이뤄놓은 것을 평가하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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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웃었다 - 오늘, 편애하는 것들에 대한 기록
장우철 글.사진 / 허밍버드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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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생각들  

 일단은 참 예쁜 책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이 빼곡한 책은 언제나 예쁘니까. 하지만 책을 열었을 때 살짝이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일기장 형식의 사진과 글. 이런 배치를 보면 '자신만의 사소한 기록'을 책으로 뽑아낸 것에 대한 일종의 시샘과 함께, 약간 삐딱한 생각이 든다. "예쁘고 감각적인 책"이라는 것을 넘을 수 있을까? 글은 어떨까? 어차피 느낌이 좋아 읽기로 선택한 마당에, 쓸데없는 질문은 뒤로 한 채 열심히 읽어본다.

 

 

 어,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했던 것보다 느낌이 훨씬 좋다. 글밥이 적다고 생각했던 페이지는 예쁜 '시'가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거창하지 않게 적어낸 글인 것 같은데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에 푹 잠긴다. 그래, 어쩌면 2015년의 마지막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흔적과 흐름을 따르는 이 글이 더 좋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잘 짜인, 그리고 잘 꾸며진' 일기장으로 보일지 모를 테지만, 이 책은 신기하게도 '시'로도 읽히고, 글밥이 적지만 절대 단숨에 읽을 수 없는 '사진집'으로도 읽히고, 매정하게 또 한 번 여행의 욕구를 자극하는 '여행 에세이'로도 읽힌다. 저자인 '장우철'에 대해서는 GQ Korea 에디터라는 것과 언젠가 언뜻 보았던 『여기와 거기』라는 책을 쓴 사람이라는 것만 아는데, 그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기록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의 글을 보고 있자면, 정말 묘하게 그가 편애하는 것들이 사뿐사뿐 다가와, 나도 '좋아서 웃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거창하지 않게 자신을 표현하는 문체도 마음에 들었다. 이 작가, 글 참 잘 쓰신다. (사심 가득)

 

 

 ​ 그의 진심이 담긴 글들을 쭉 읽고 나니, 순간순간을 담는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는 건, 의도가 어쨌든 세심하게 순간과 인생을 돌아보는 행동이기에. 새삼스럽게도, 스쳐 지나가면 금세 잊힐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잊어버릴 만큼 시간은 야속하니까) 꾸준하게, 그리고 꼼꼼히 담아내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일기를 쓰면 좋은 이유'와 같지 않을까. 

 

 

Written by. 리니

 

봄이라 말하려니

겨울에 나는 어울리는 값을 치렀던가?

막무가내 눈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 혹시 그 몫이었나?

공원을 나와 요쓰야 쪽으로 걸었다.

붕붕거리는 소음이 유난히도 봄처럼 들렸다. (39쪽)


향나무 아래 팥알만 한 열매가 지천이라 갸웃했더니, 향나무의 것이

아니라 팥배나무가 떨군 것이었다. 만져 보면 딱딱하다. 맛이 떫고

시큼해서 사람보다는 산새가 좋아하겠다. 그런가 하면 향나무는

한껏 제 몸을 구부려 회오리를 흉내 낸다. 팥배나무가 까르르 웃는다. (99쪽)

빵이란 무엇인가. 빵이란 대개 턱없이 부족한 맛의 요소를 엉뚱한 덩어리감으로 귀여운 척 만회하려는 모종의 시도, 혹은 그 덩어리 자체를 가리키는, 한국어 중에서는 제법 희귀한 발음을 지닌 말이다. 나는 빵같이 생겨 가지고 왜 빵을 싫어하느냐는 반박하기 힘든 핀잔도 듣지만, 빵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빵을 볼 때나 먹을 때나 똑같이 생각한다. 어디서 맛없는 빵만 먹었느냐, 맛있는 빵도 있다, 똘똘한 누군가는 끊임없이 설파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너나 드세요." 하며 고개를 쌩 돌리지는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긴 다 받아먹으면서도 `역시 빵은 이래`, 확신한다. 빵은 웃기는 짜장면도 아닌 그냥 빵이다. 가끔 좋아라 이 빵을 고를 때도 있지만, 빵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찌개가 좋다. (123쪽)

나는 코트를 도로 입는다.

혼자 산다는 건

이제라도 다시 나갈 수 있다는 뜻이라서 나는

코트 주머니에 땅콩을 한 줌 넣는다.

아예 양파를 넣을까?

혼자서 그럴 수도 있다.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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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진짜 여행에 대한 인문학의 생각
정지우 지음 / 우연의바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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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지은이) | 우연의바다 | 2015-12-05

 

 

남겨진 생각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과감히 떠날 용기'는 잃게 된 나에게, 여행의 가치를 묻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의 의지는 편안함 속에 묻혀 버렸고, 장소에 대한 갈망에는 두려움과 "언젠가는"이라는 말이 끼어든 지 오래다. 하지만 몇 번 되지 않은 나의 여행 중에 정말로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기억이 있다면, 대학 초년생 때 친구와 떠난 일주일의 국내여행이었다.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로 했기에, 친구와 나는 떠나기 위한 계획을 '떠나는 기간'보다도 더 오랫동안 준비했고, 그만큼 기대와 두려움도 크게 부풀어 올랐다. 친구는 긴 여행의 경험이 많은 편이어서, 설렘이 어떤 설렘인지도 모르는 어리숙한 나를 이끌었고,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즐거웠다고 묻는다면 1초 만에 답할 수 있지만, 순탄했냐고 묻는다면 100%라고 답할 순 없다. 어쩔 수 없는 '여행지의 우연'이 항상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계획했던 장소가 없어져 버린 '우연', 생각했던 시간이 어긋나버린 '우연', 마냥 즐거울 거로 생각했던 걸음이 꽤 힘들게도 여겨졌던 '우연'. 그러나 그 우연들은 그것을 회상하는 지금도, 그 당시에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재미난 우연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몇 년 후 새롭게 떠난 패키지여행에서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친구가 "그때처럼 즐거워 보이지 않아."라고 했던 이유는, 편한 여행의 행복감과는 또 다른, 우연으로 가득한 여행의 활력을 나의 첫 여행에서 듬뿍 받았기 때문이었다. 해 질 녘 노을이 지기 위해 올라갔던 산기슭의 공원에서 태풍을 만나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운 좋게 히치하이킹에 성공했지만) 소리 지르고 실실 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그 활력과 풋풋함 때문이리라.

 

 인문학자 정지우 작가는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활력과 즐거움을 보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인문학적인 감성으로 풀어낸다. 떠나기를 선택하기부터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여행 과정을 상세하게 말이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고. 벗어남을 통해 우리 인생 전체를 쥐고 흔들고 있는 어떤 추상적 존재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의도도 방식도 그에 대한 만족도도 다르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여행'은 여행지를 걷고 수많은 우연을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속을 걷는 것이다. 갈 곳 없이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내면, 쓸모없는 몰입과 허영으로만 치부되는 내면에 대한 성찰, 그것을 통해 마치 '번뇌'처럼 내 삶과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 몸을 표백시키는 여행이 되고, '자기만의 삶'과 '이미 정해진 현실' 중간쯤에서 두 가지를 조율하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한다.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이제 '성숙한 여행자'가 된다. 여행을 통해 자유를 얻고, 자유를 통해 '현실에 적응할 힘'이 아니라, '현실에 맞설 힘'을 얻는 '삶의 혁명으로서의 여행'을 진정으로 즐기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작가는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라는 책에 녹여놓았다.

"여행은 현실 속에서 무뎌진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 회복이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감격하며, 이 순간을 사랑하고, 또 눈물겹게 슬퍼하는 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여행자는 그렇게 얻은 능력을 가지고 또 새로운 도시로 향한다. 그는 여행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여행은 삶이 되고, 삶은 여행이 된다"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되어 빠져들었던 『삶으로부터의 혁명』부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인생의 지침을 얻었다. 정지우 작가의 글은 언제나 냉철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나의 마음을 강하게 죈다. 때로는 머뭇머뭇대면서, 혹여는 외면하고 있는 진정한 나 자신을, 그와 맞닿은 삶의 자세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건드리는 탓이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인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하기 위해 역사를 발전시켜 왔지만, 현대 기술력의 궁극점인 도시조차도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사람은 도시의 안락에 파묻혔다가도, 도시를 떠나는 자유에 몸을 맡기고 싶어 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에 노출되면 다시 돌아가 안락해지길 갈망한다.

세상은 인간의 모든 욕망과 충동을 어떻게든 충족시켜 주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시대 여행의 유행 역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갈망인 `자유`에 대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은 어쩌면 영원히 자유와 안락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23쪽)

여행의 묘미에는 분명 `우연`이 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낯선 땅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운의 사고든, 행운의 인연이든 어떤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우연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여행에 뛰어드는 이들은 기꺼이 온갖 고생을 각오한다. 무슨 일이든 정해진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면 그만큼의 고생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우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을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대체로 우연보다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기획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특별한 우연이 가득한 것이기보다는, 정해진 현실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심각한 불운을 겪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리 특별한 일이 없는 `안정된` 인생을 갈구한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라며 하루하루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편에는 이 영원히 틀지어진 인생 루트를 벗어나고 싶은 갈망도 있다.(47쪽)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쓸 사람도 없던 유럽의 낯선 도시를 걷다가, 나는 `그런 나`란 씻은 듯 사라지고 걸음 그 자체가 되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의 나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걷고, 그저 보는 하나의 동물이나 생명체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걸 경험하고 있는 `또 다른 나`가 있었다. `그 나`는 걷고, 보고, 만나고,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감각들을 끌어안고, 종합하며, 간직하는 그런 나,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전체를 관장하는 그런 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91쪽)

여행에서 우리는 새롭게 표백된 자기 자신과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한다. 나의 세계를 지배하는 건 나의 시간관과 장소성이었다는 것, 결국 내가 어떤 시간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내 삶도, 내가 느끼는 세계도, 나의 생각도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우는 것은 이 반복적인 성실성에 적응함으로써 내 삶이 새로운 양식으로, 창조적이며 건강한 양식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162쪽)

여행자가 이별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별에 무뎌진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행의 끝에 다가갈수록, 여행자는 각 도시의 일몰에서, 도시를 떠나는 버스 밖의 노을에서 더 깊은 슬픔을 느낀다. 그는 자신에게 도래하는 감정의 깊이를 승인한다. 일상적 삶에서 너무 깊은 감정은 용납되지 않는다. 깊게 느끼게 되면, 삶은 감정에 의해 중단되고 우리가 현실에서 수행해야 할 일들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에서는, 특히 한 도시에서 모든 일정이 끝나고 그저 다음 도시로 실려 가는 일만 남은 상황에서는 그 깊이가 용인된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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