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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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제목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도 제한해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는, 이를테면 학력을 쌓아올리는 행위 같은 것들이요. 그다음은 저자의 이름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에 새겨져 있는 폭넓은 정의를 떠올렸죠. 비록 우리에겐 '공부'의 의미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퍽 제한적인 의미의 것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개척"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공부'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정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지긋지긋한 그 이미지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 책의 느낌은, 그동안 정여울 작가의 다른 책에서 본 느낌과 비슷했어요. 책과 인문학이 적절하게 조합된, 독서 에세이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실은 최근 독서 에세이를 멀리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느낌만 계속 읽으면 뭐 해? 내가 읽지! 하는 마음으로요) 처음에는 살짝 투덜투덜 대기는 했지만, 참 어이없게도 빠른 시간 안에 작가의 글에 설득당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공부'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인 것들을 적절하고 시원시원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솜씨, 고작 한 페이지와 한 문장에 거론된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그 책에 매료되어 한 번이라도 검색해보고 읽어볼 수 있게 만드는 설득력. 그런 점에서 정여울 작가의 연륜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작가의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제가 가장 잊지 못할 부분이자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 '동경(Sehnsucht)'은 작가에 의해 이렇게 표현되었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고(故) 박완서 선생님을 향한 오랜 동경을 해소하였고,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가슴 쿵쾅거리며 좋아했던 책의 작가들을 (지금도) 사랑하지만 동경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그 뜨거웠던 가슴이 식었다 끓었다 하는 루틴이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것에 서운해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온도가 조금 낮아졌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죠.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여울 작가는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작은 경험들을 통해, 이 힘든 세상에서 '공부할 권리'를 되찾으라고 전언하고 있어요. 서울대학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등의 내용들로 채워지는 그의 프로필이지만, 작가 자신이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이겨내게 만든 것은 '문제 풀이의 기술'이 아닌 '진짜 공부'였음을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죠.


'진짜 공부'란 무엇일까요.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내가 정말로 즐겁게 몰입할 수 있고 신명 나게 빠져들 수 있는 위로의 것이 '진짜 공부'가 아닐까요. 물론 '문제풀이의 기술'도 이 개떡같은 세상에 필요하지만, 작가는 인생을 공부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삶의 숭고한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시간, 나약함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성숙한 마음가짐을 말이죠.

 

45쪽,
『일리아드』를 읽으며 의아하면서도 더욱 감동적이던 대목은 작가 호메로스의 태도입니다. 호메로스의 조국은 그리스였지만 그는 자기 나라 편에 서서 전쟁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아킬레우스의 최후나 파리스의 최후가 아닌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이 거대한 이야기를 끝맺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은 후 남기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헥토르를 잃고 목놓아 우는 트로이 사람들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닮았습니다.

69쪽,
정의가 실현되기 이전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은 바로 `불의(不義)`의 사건입니다.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기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은 참을 수 없는 불의인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우스가 고의로 불을 숨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우스가 불을 숨겼다"는 단순한 문장 속에는 엄청난 폭력과 압제, 불의와 억압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지요.

187쪽,
끝나지 않은 이 공포와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 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분노하고 고발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국 정부가 두 손 두 발 다 들 때까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 정의와 자유의 깃발이 바로 서는 날까지.

343쪽,
프로필은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분장술`인 것 같습니다. 제 프로필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낀 절망감,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지만, 겉으로는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했지요. 늘 일은 했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 저는 항상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쓸쓸함의 밑바닥에는 `공부로는 취직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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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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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여 쪽이라는 방대한 분량보다, 이 책에 붙은 여러 수식어가 오히려 약간의 두려움을 갖게 했다. 빨간책방 강력 추천, 전미도서상 수상작, 그리고 미국의 대표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이름까지.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기에, 이 책을 읽고야 말았다.

 

어떻게 이 책을 말해야 할까. 두꺼운 책의 위풍당당함이야 감수하고 읽어나가긴 했으나, 책은 '이야기적으로' 내게 흥미를 주진 못했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혹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초반이 가장 힘들다는 혹자의 말도 나와는 반대였다. 오히려 초반보다 후반부, 더 흥미로운 서술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쉴 새 없이 박아놓은 머릿속의 글들로 지쳐있을 때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덮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끝내고 나서, 이 책이 '역사소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폭력으로 얼룩진 격동의 세계에 있었던 그들, '로레타', '모린', '줄스' 그들의 삶은 책 속에 쓰인 대로 "갑자기 풍선이 위로 부풀어 오르는 (341쪽)"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파격이기만 해서, 책 속의 그들을 따라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 의아한 감정을 계속 품었다.

 

그러나 '이야기적'으로 불만만 늘어놓아선 안 될 것이, 소설은 문학적으로는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던 사건들과 시점 변화, 순간순간 멈칫하게 하는 수많은 구절은 '조이스 캐롤 오츠'라는 이름의 명성이 어떻게 얻어졌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중반부쯤 나오는 '모린'의 편지다.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 책에 관한 영감을 얻었던 실제 경험 (편지의 수신), 그리고 큰 상처를 받았던 '모린'이 깨어나는 이 부분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아주 짜릿한 부분이다. 그들(them)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냉소적인 말들을 던지는 '모린'의 모습은 묘하게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텍스트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현실'과 '환상'이 줄타기하고 있는 듯 상상이 되는 부분이랄까.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야?

 

사랑을 갈구하고, 충동적인 선택을 반복하고, 집착하고, 끝끝내 살아가고, 때로는 사악하기까지 했던 '그들'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로 한 '모린'은 행복했을까? 끊어질듯 아슬아슬한 줄이라도 부여잡고 각박한 인생을 살아가야 했던 그들의 모습을, 언젠가 다시 천천히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29쪽,
나중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언뜻언뜻 기억했다. 마치 화면이 뚝뚝 끊기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웃기는 영화에 나오는, 웃기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고통도 고뇌도 느끼지 못했다. 저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을까? 줄스 웬들은 과연 아이였던 적이 있을까? 정말로 아이였을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의미의 아이였던 적이 있을까? 그런데 아이였던 적이란 과연 무슨 의미지? 예전 아이였을 때의 줄스가 그의 골격 안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뜻일까?

197쪽,
이제 그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시내의 성당들이 지나가는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우울한 유혹.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신비로운 물살로, 비밀, 보상,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특별한 지식에 대한 약속으로 꾀어들인다는 전설 속의 거대한 동굴 같았다. 줄스는 개이치 않았다. 아버지도 그런 일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 안에는 분노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두개골 위에 하얀 피부가 팽팽하게 덮여 있는, 매끈한 공백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였다.

341쪽,
그는 자신이 육체라는 늪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몸부림치는 순수한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육체라는 지구, 중력의 힘, 죽음과 씨름하는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을 이렇게 보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폐한 순간들, 예를 들어 사우스웨스트 일대에서 설치고 다닐 때나 병원 침대에 누워 다시 살아나려고 애쓰고 있을 때에만 자신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은 미친놈이 상상한 이야기 같구나!`

449쪽,
모린의 몸의 조각들, 축축하고 따뜻한 그 조각들이 짝을 맞춰서 덩치 큰 그녀의 몸이 된다. 변장이다. 그녀는 불편한 잠을 잔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릴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텔레비전의 단조로운 소리 너머로 새로운 소리들이 들린다. 바깥의 소리들, 계단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밖에 있는 사람들……. 아주 많은 사람들……. 따뜻한 날씨로 창문들이 열리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귀를 기울인다. 호기심과 수줍음과 약간의 분노, 두려움으로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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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며 NFF (New Face of Fiction)
카릴 필립스 지음, 안지현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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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F (New Face of Fiction) 라는 시공사의 문학 시리즈의 이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소설에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소설이었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장편소설에, 인물과 형식이 다른 네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으면서도 조화롭지 못하거나 생뚱맞지 않았다. 문체 또한,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러 개의 악장이 모여 하나의 교향곡이 이루어지듯, 이야기는 작가가 말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강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장편소설로 탄생되어 있었다.

 

절박한 어리석음이었다. 흉년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팔아넘겼다. (11쪽)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네 편의 이야기는 미국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흑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서문'과 공통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강 건너, 미국 남부 혹은 또 다른 어떤 곳으로 도피하고 떠나야만 했던 그들의 흔적을 추적한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그저 '보이는 대로' 추적하고 잔잔한 문체로 전해주며, 그 속에 품은 '경고'나 '물음'을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먼저,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1부는 자신이 교육하고 지원하여 아프리카로 선교를 보낸 노예 '내시'를 찾아 나서는 주인 '에드워드'의 이야기다. 미국에서 얻은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창조된 땅에 뿌리내리려 했던 모순된 자신감을, 그로 인해 아프리카인이자 선교사였던 '내시'가 받은 상처와 병폐를 지적한다. 2부와 3부에 숨은 이야기는 가장 끔찍하다. 흑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2부는 강 건너 지옥으로 떠나지 않기 위해 개척자로 향하다가 죽어갔던 마사의 이야기를 아주 생생한 증언으로 다룬다. 그리고 3부는 노예를 수송하고 '무역'했던 선박의 항해일지로, 아주 건조하게 당시의 (잔혹한) 일상을 전한다. 가장 분량이 많았던 4부는 언뜻 '흑인 디아스포라'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외된 한 여성과 그가 사랑했던 흑인 병사와의 이야기를 통해 '흑인 디아스포라'에서 더욱 대상을 확대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메시지로 목소리를 높인다.

 

버림받고, 뿔뿔이 흩어지고, 상처받고, 차별받고, 소외되었던 모든 사람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소설 『강을 건너며』. 작가가 남겨놓은 어떤 '여지'와 관련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내시. 나의 마사. 나의 트레비스. 그들의 부서진 삶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또 다른 '내시', '마사', '트레비스'의 삶의 기록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105쪽,
매디슨은 이 모든 질문을 빨아들인 후 뒤로 돌아 자신의 전 주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드워드의 얼굴 반쯤은 짙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춤추는 불길에 따라 그 색깔과 형태가 바뀌었다. 매디슨이 질문 세례를 받고 답을 하려고 하는 찰나에 에드워드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위로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매디슨의 손을 맞잡았다. 고향과 자신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매디슨에게 부드럽게 속삭였고, 백인과 흑인을 포함하여 자신의 종족이 있는 곳에 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매디슨은 에드워드를 쳐다보며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점점 더 꽉 쥐어오는 손을 신호로 보고 매디슨은 '아니요'라고 답했다. 작은 오두막에 그 말이 퍼져 나갔고, 그 묵직함과 의도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압도했다.

 

118쪽,
이제 다시 그는 우리 쪽으로 몸짓을 한다. 내 목은 타 들어간다. 일라이자 메이는 몸을 뒤척이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아이가 운다. 조용히 하라고 아이를 꼬집는다. 미안하지만, 아이를 위해 그렇게 한다. 경매인은 상인들을 향해 오라고 손짓한다. 그들은 처음엔 남자들을 구경한다. 상인 한 명이 막대기로 루카스의 알통을 찌른다. 상인이 남자를 사면, 강 아래로 데려간다. 죽음을 향해. 그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집안일을 할 노예가 필요한 가족이나 번식할 처녀가 필요한 농부들은 건너편에 있는 우리를 보고 차례를 기다린다. 나는 번식하기엔 너무 늙었다.

 

183쪽,
사랑하는 당신, 나 역시 심한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오. 하지만 증오심이야말로 나의 자연스러운 열정을 설명하기엔 그 표현이 지나치게 과격한 듯하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무역을 계속 마음껏 하면서 깊은 신앙심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듯, 실로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사랑과 증오심이 서로 싸우며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215쪽,
그는 서른 하고도 일곱의 나이였다. 그들이 내가 있는 걸 잊고 끄덕거릴 때가 난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랜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는지 난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랜과 나는 한 몸이어야만 하니까, 세상에 대항해 한 팀이 되어야 하니까. 남자와 부인. 그이와 나. 내가 그들 편을 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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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그래프 Monograph No.3 손열음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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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리체어스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인물 평전의 두 가지 버전 중, 비교적 젊은 멘토를 선정하는 『모노그래프』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다. 표지에 적힌 '해시태그'부터 선정되는 인물까지 핫트렌드와 젊은 감각을 내세운 것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막 가볍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삶을 다뤄내는 손짓은 조심스럽고,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선정하기에 독자들에게 기본 지식 또한 전해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모노그래프』 3호의 인물 특성상, 기본 지식은 그 인물을 이해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피아니스트를 알기 위하여 그들이 연주하는 곡의 작곡자들을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에서는 초반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 작곡자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즐겨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소에 이런 내용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지만 한 페이지에 (그들의 인생에 비하면) 짤막하게 요약된 글들 속에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많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재미있는 코너는 '클래식 에티켓'이다. 클래식 콘서트에서의 아주 기본적인 매너들과 사소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보기 민망한 궁금증까지 다룬다. 책 속의 당연한 절차일지도 모를 클래식 에티켓을 모두 읽고 나면, 이제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악 속으로 깊이 들어갈 차례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다 보니 '손열음'이라는 이름도 어깨너머로 들어봤을 뿐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나의 무심함이 살짝 미워졌다. 검색 한번, 유투브의 동영상 한번 클릭하면 수두룩하게 쏟아지는 그의 영상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영상 하나를 눌러보았다. 지휘자가 손열음의 힘 있는 연주에 맞춰 따라가는 듯한 모습이 신기했다. 덧글 창에는 칭찬 일색이었다. 감동에 감동이라고.

 

『모노그래프』가 끌어내고 있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음악 천재로 주목받았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준우승을 차지한 차이콥스키 콩쿠르까지의 오랜 과정이 담겨 있다. 절대음감, 초등학교 때 나갔던 국제 콩쿠르, 그리고 수상, 결코 잊을 수 없는 스승들의 이름까지. 전혀 다른 세상이라 여겼던 클래식 연주자의 삶에 신기한 감동을 할 무렵, 어떤 구절이 마음을 끈다.

 

"손열음은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직업을 물으면 '콘서트 피아니스트'라고 답한다.
'음악가'라고 하면 추가 질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클래식 연주자를 딴 세상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똑같이 땀 흘리며 살아가는 직업인이다. (61p)"

 

 

인터뷰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과 인성이 짧은 한마디에도 전해져오는데, 손열음의 인터뷰 또한 그렇다. 의외의 성격이 눈길을 잡는다. "야심도 없고, 고집도 없고, 경쟁심도 없는데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었을까." 에디터님의 말처럼 의아했지만, 솔직하면서도 무던한 말투가 읽기에도 받아들이기에도 편안하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가들, 연주할 때의 감각 등 음악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도 함께하지만, 좋아하는 술이나 요리, 휴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도 있다. 클래식 연주자를 향한 원인 모를 경외심도 느껴지고 친근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재미있고 좋다, 라는 생각이 든 건 이 부분. "제2의 손열음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이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더 큰 사람을 보고 꿈을 꾸세요. 하하" 왠지 호탕한 (또 다른 천재) 김연아 선수가 생각난다.



'음악'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책에서 만나기에 낯설고 당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을 바에야, 읽고 난 뒤 '음악'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역할은 다 한 것 같기도 하다. 손열음의 음반, 손열음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유투브 스타의 영상 등 다양한 '들을 거리'들도 가득 채우고 나면, 그것들을 직접 듣고 싶어질 것이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도 음악을 틀었다. 손열음의 연주 중 건반과 혼연일체가 된 장면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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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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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싶기도 하고, 포기한 채 입을 다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쓰다 보면 감정이 과잉될 것 같아 주저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과연, 넘칠 만큼이 아니더라도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는 것인지 마음 한쪽이 싸해지기도 한다. 부끄럽다. 이 책을 왜 끝까지 외면해왔을까.


 꾹꾹 눌러 넣은 문장 속에 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동호야"라는 가냘프고 애처로운 목소리와 그것과는 반대로 너무나 강한 이야기들이 마음 한쪽을 콕콕 쑤신다. 우리가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고, 여러 곳에서 읽고 보아왔던 '기억'들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죄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 감정이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을 경험한 사람 만큼에 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아프고 슬픈 감정들은 어느새 일상 속에서 다른 일들 사이로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쩔 수 없이 금방 잊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강'작가의 글은 이상하다. 도무지 빠르게 잊어버릴 수가 없다. '너'라는 이인칭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동호, 정대, 은숙 누나, 어머니, 수많은 사람의 눈을 통해 목격한 영상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텍스트 너머에 있는 독자들을 아주 조용히, 그곳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성을 버리는 그 순간들,
인간이 순결함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에서 양지로, 빠져나가야만 하는 애수 어린 과정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야 만다.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눈은 시리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작가에게도 분명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잔혹하고, 슬픔으로 흠뻑 젖은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전달자의 역할로서는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부담과 좌절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펜 끝에 모아둔 모든 이야기를 잠시나마 놓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현재의 한국문학에서 그려내고 있는 쓰디쓴 이야기 중에서도, 너무나도 견딜 수 없게 쓰디쓴 이 이야기는, 상처를 온전히 내보이면서도 희망적인 밝은 불빛을 내고 있다. 사실 밝은 빛이란, 어쩌면 어두운 곳에서의 작은 촛불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촛불 하나의 잔상은 어쩌면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있기에. 희망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확신보단 바람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동호야" 라는 가냘픈 목소리를. 소리없는 울음을. 본능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미련스런 마음을. 그리고,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무엇을 응시해야 하는지를.

 

- 담아둔 문장


45쪽,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79쪽,
거칠게 꿰매어진 문장들, 문단째로 검게 지워진 자리들, 우연히 형상을 드러낸 단어들을 그녀는 생각한다. 당신을. 나는. 그것은. 아마도. 바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당신은. 어째서. 바라봅니다. 당신의 눈은.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그것은. 또렷이. 지금. 좀더. 희미하게. 왜 당신은. 기억했습니까. 숯이 된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서 그녀는 숨을 몰아쉰다.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115쪽,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134쪽,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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