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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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과 끝은 숱한 인생사와 책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감정은 어떤 사랑이든 비슷하다. 시작엔 설렘이 함께 하고, 끝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강도는 다를지라도 어느 정도의 환멸이 함께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여러 권의 책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별여행』 같은 책들을 말이다. 이들을 읽으며, 책 속의 사랑이 만들어낸 감정의 곡선을 그려보면, 그 시작과 끝은 비슷한 지점에서 머무르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의 형태는 어떠한가? 인생사에서도, 인생을 담은 책 속에서도 너무나 다양해서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 힘든데, 『슬픈 카페의 노래』의 사랑은 유독 기이하다. 6척 장신의 독하디독한 여자, 카페 주인 '미스 어밀리어', 그리고 그의 옛 연인 '마빈 메이시', 어느 날 찾아온 꼽추 '라이먼'. 그들의 사랑에 완전함은 없다. 복잡한 외사랑이다. '미스 어밀리어'는 우연히 만난 '라이먼'을 챙겨주며 사랑하게 되고, '라이먼'은 폭력적이며 당당한 '마빈'의 모습을 보게 된 후 그를 동경한다. '마빈'은 복수심으로 가려져 버린 사랑 (혹은 집착)을 분명히 '어밀리어'를 향해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의 속한다 (50쪽)" 고 했던가. 그들의 기괴하고 일방적인 사랑은, 그 별개의 세계가 만날 틈도 없이 불현듯 찾아왔다가 불현듯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세 가지 사랑은 고통과 파국으로 남는다. 마을의 따뜻한 사랑방과 같은 '카페'라는 공간은 이 모든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사랑의 끝을 처절하게 겪고 나서 문을 걸어 잠근 '미스 어밀리어'의 감정을,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왜 그토록 작고 초라한 꼽추 '라이먼'에게 사랑을 느꼈는지, '라이먼'은 그녀의 사랑을 알지 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척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이지 않은가. 작가는 덧붙인다. "표면에 드러난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65쪽)" 고. 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사랑에 자의 혹은 타의로 관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뭐라 하든, 당사자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온 우주이며, 당사자가 하는 선택을 적극적으로 막기도 힘들다. 그러니 사랑의 선택, 사랑의 고통은 모두 당사자의 것이다. '미스 어밀리어'의 사랑 때문에, 마을 공동체의 소중한 공간이 황량해질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22쪽,

미스 어밀리어의 술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게 있었다. 혀 끝에서는 정갈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내고, 일단 배 속으로 들어가면 화끈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백지 위에 레몬 즙으로 메시지를 쓰면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종이를 잠시 동안 불에 대고 있으면 글씨가 갈색으로 변해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볼 수가 있다. 위스키가 바로 그 불이고, 메시지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쓰인 글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어밀리어가 만든 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무심히 흘려버렸던 일들, 마음속 깊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이해가 되는 것이다.



45쪽,

그녀는 마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고통, 당혹감, 그러면서도 불확실한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도 않았고, 종종 침을 삼키기도 했다. 피부는 창백해진 듯했고,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큰 손에서는 진땀이 나는 듯했다. 그날 밤 그녀의 표정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 눈은 피안을 향하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50쪽,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65쪽,

이렇게 표면에 드러난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105쪽,

그들은 미스 어밀리어의 카페에 오기 전에 세수를 했고 카페에 들어올 때는 정중하게 문지방에 신발을 문질러 흙을 털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만은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쓰라린 생각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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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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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하나가 한 권의 책을 읽게 만든다. 희한한 일이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못 견디게 만드는 문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잔잔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투명한 막'처럼 읽는 이를 쏘옥 빨아당겼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통과해 자그만 빛으로 향해가는 기차를 타고, 나는 이제 그 한 문장을 통하여, 하얀 설국雪國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여름에 설국을 읽는다니, 어찌 됐든 상상으로라도 은은한 추위를 맛볼 수 있으니 행운인지, 이 책을 겨울에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눈의 고장' 속에 머무르게 되었다.

 

 니키타 현의 온천 마을에 방문한 '시마무라'는 두 명의 여인을 본다. 이곳으로 다시 발걸음 하게 만든, 사랑하는 여자 '고마코'와, 유리창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처녀 '요코'. 소설은 그 여자들을 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을 철저하게 따라간다. 그 여자들에게 얽혀 있는 사연과 관계는 중요치 않다. 그저 담담하게 허무하게,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인상과 이미지를 그려갈 뿐이다. 그런 '시마무라'의 허무적 시선과 어조가,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 깊어지는 때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이다. 새하얀 설경 속에 떠오른 여자의 붉은 뺨, 한기 어린 유리창에 떠오른 여자의 투명한 얼굴은 청결하고 아름답다. "이런 모습으로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13쪽)" 여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단지, 사랑에 빠진 '시마무라'의 눈 속에서 너무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존재할 뿐.

 

​ 그러나 그는 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모든 게 흩어지고 말지 (102쪽)" 라는 그의 말처럼, 그들의 사랑도, 어쩌면 인생도 쓸쓸하고 결국엔 흩어져버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 그는 방 다다미 위에서 죽은 벌레들을 관찰한다. 이미 죽어서 바스락거리는 나방, 쓰러질 듯 살아나려 애쓰는 벌, 그는 곤충들을 보면서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곤충의 자연스러운 죽음 앞에서 존재를 생각한다. 사랑과 그 자신, 다분히 직업적인 의미밖에는 없는, 그가 쓰는 논평, '고마코'의 샤미센 소리. 현실에서 떠나온 이곳에선 아마 모든 게 흩어져버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 일지도 모른다고. 두렵고도 아찔한 모든 것이 눈의 고장 속에서 사르르 사라져 버려도 뭐라 할 수 없는.

 

 지겹지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책의 첫 문장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이 짧은 문장 하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가는 그 과정을 통해야만 '명문장'이 된다고 생각된다. 청명한 하늘, 아득히 깊은 은하수의 이미지가 책 속에서 쏟아질 듯 흘러나오는 소설의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눈물겹고 꿈같은 순간들을 담은 처음과 끝의 아릿한 맛을.

 

 

12쪽,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75쪽,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 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寒村)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간 뺨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

113쪽,
창문 철만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미 죽은 채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있었다. 손에 쥐고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142쪽,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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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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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독서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무엇인가를 못 견디게 쓰고 싶어진다. 뚜렷한 것은 없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수다 떨듯 끄적이는 잡글이든 어딘가 배출할 곳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서평으로 그 답답함을 해소해왔다. 처음에는 한 줄 한 줄이 막막했고, 한편의 글이라는 느낌보다는 순간순간 떠올리며 쓴 메모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떤가? '어떻게든 쓸 수는 있다'라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 결과물은 어떤가? 글쎄, 대단한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서평을 블로그에 적다 보니,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책'에 기대지 못하면, 쓰기가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쓸 수는 있다'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쓸 때마다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오래전이었다. 이승우 작가의 책을 하나하나 고르고 읽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보였던 책이었다. 그러나 '쓰기'에 대한 궁금증과 욕망이 더 커졌을 때로 미뤄두고 싶었다. ​'소설 쓰기'에 관련된 책이지만, 무엇인가를 '쓰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문학을 읽는 것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쓰기'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 읽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보다 황홀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덤벼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소설 쓰기는, 어떤 글을 쓰는 것보다도 집요하고 꾸준한 작업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에 혹하여, 소설 작법을 배우거나 소설을 쉽게 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편이 좋다. 이승우 작가는 '문학청년들을 향한 시적 노트'라고 이 책을 표현했으나, '문학청년들을 향한 호된 강의'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쓰는 기술'보다는 '쓰는 정신'을 더 강조하는 강의다. 절대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기대가 모든 것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채찍질하는, 무섭지만 (맞는 말만 하는) 강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멋들어진 문장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자신이 쓰는 소설과 일치된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을 지겨울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장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소설가가 문장을 쓰는 것부터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해내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히 따져 설명해가면서 끝엔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힘들지만, 해볼래? 그러나 신중하게, 확신 있게"

 그러나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의 초반, 그는 소설 창작에 대한 '운명론'을 부정한다. 소설 쓰기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가 하는 것인가. "(소설을)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이 잘 쓴다." 결국은 문학을 읽는 것에서부터 소설 쓰기는 시작된다는 말이다. 소설 지망생에게 권하는 '필사'도 이런 주장의 연장선에 있다.

 

 날카롭지만 시원한 책이다. 좋아하던 이승우 작가의 신념이 더없이 존경스러워지기도 한다. 단언컨대 정말 당찬 포부를 가진 사람들만이 덤벼야 하는 것이 '소설 쓰기'다. 그 당찬 포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특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쓰기'에 대한 작은 의문을 가진 (아직 읽기에 머무는) 나에게는, 더 잘 읽고 세상을 좀 더 바라봐야겠다는 투지를 선사해주었다. 아직 나는 출발선 앞에서 달리기를 준비하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소설가의 꿈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정신을 본받아 찬찬히 밑그림을 쌓아 올릴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들, 이미지나 사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에 다름 아닌 그것들에 실체를 부여하는 육화 肉化의 과정이다. 막연한 것, 추상적인 것, 모호한 것, 자기 자신도 아직은 무언지 확실하지 않은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시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써나가다 보면, 지금은 모호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양인가가 만들어지겠지, 어떻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 축적해놓은 것이 없으면 나올 것이 없다. 차면 넘치는 이치다. 일정한 기간의 소설 창작 교육이 소설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까지 축적해온 그의 삶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구질구질함이 소설 쓰기의 과정이다. 구질구질한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소설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임동헌의 소설 ​「아이 러브 토일럿」에는 슈퍼마켓에서 산 여행용 화장지와 주유소에서 선물로 제공한 화장지의 장 수를 비교하는 인물이 나온다. 소설가는 아마 그 글을 쓰기 전에 실제로 두 화장지의 낱장을 헤아렸을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작업이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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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치미교 1960
문병욱 지음 / 리오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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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책은 『사건 치미교 1960』 단 한 권이다. 공식적으로는 그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지만, 예상보다 더욱 대담하고 능수능란한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보통의 미스터리 소설은 스릴감이나 속도감이 돋보이기 마련이지만, 장면 속에 흠뻑 빠지는 이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답 스토리 공모전'의 최종 수상작답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할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놓는 '스토리 텔링'이 탁월한 소설이다.

 소설의 소재가 된 '백백교 사건'은 한국사의 실화이자,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는 사건이다. 일제강점기의 절망과 혼란을 틈타 사이비 종교를 창설하여 수많은 교인을 이용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였으며, 여성들은 교주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런 '백백교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치미교'라는 끔찍한 종교를 소설 속에서 탄생시켰고, 그 탄생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교인들을 통한 세력 확장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게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약간의 픽션을 더했다.

 '치미교'의 교주인 '해용'이 (이는 '백백교 사건'의 실제 교주 이름인 '전용해'와 비슷하다) 이 일제의 마루타 실험에 참여하였다는 전제로 기상천외한 일들을 펼치고, 그 얕은 지식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협박하는 모습들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하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의학계와 오묘하게 맞물리는 구성은 아주 흥미롭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교인이 되어 종교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상원'의 모습으로 소설은 더욱 박진감 넘치게 흘러간다. '상원'은 과연 그들을 구해내었을까.

 

​ 전쟁, 혹은 가장 어려운 시기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은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는 상술을 벌이고, 누구는 가장 궁핍한 이들을 꼬여 낸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또 다를까. '사이비'라 불리는 종교는 여전히 존재하며, 강매 혹은 다단계로 서민들의 부푼 희망을 이용해 삶을 짓밟기도 한다. 조금 더 가보자면 당장 지금의 일들도 많다. 연예계의 큰 가십이 터지는 순간, 가려지는 무서운 사실들은 그들이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지 짐작게 한다. 『사건 치미교 1960』라는 작품의 여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29쪽,

의학이라는 건 지독히도 실체로의 파고듦을 기초로 하는 학문이라네. 치료를 위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약을 개발하는 일도, 살을 찢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수술을 시행하는 행위도, 모두가 생명연장으로 향한 실체들이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근간과 근원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네. 의학은 단순한 장사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의 생명에 숫자로 표시되는 가치를 적용하는 비극이 실현되고 말 테니까.



275쪽,

성훈은 참으로 무섭고 거대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다. 마치 별 볼일 없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듯 문장을 나열하는 식이다. 성훈의 어조와 어투는 설명을 시작하고 나서 끝을 맺을 때까지 짧지 않은 동안 한결 같다. 또한 설명 안에서 굳이 상원을 설득하려는 의도도, 혹은 위압적인 분위기도 일절 내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상원은 치가 떨린다. 단순한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닌 안하무인에 인간백정이나 다름없는 족속들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어서 치가 떨렸다. 더구나 해용은 성훈이 설명을 하는 동안 그 옆에서 교만과 우월감에 찬 얼굴을 해서는 암묵적으로 자신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300쪽,

이렇듯 자신의 책임은 전무하고 남의 허물만을 묻고 앉았으니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의가 진행되기는커녕 근본적인 문제점마저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보건복지부에서 병원균의 정체를 밝혀냄으로 해서 요란하기만 했던 치졸한 토의장이 잠시나마 소강상태를 맞을 수 있었다. 소강상태를 맞았다고 일컫는 근간은, 이들은 당장 눈앞에 닥쳐있는 사태만 어찌어찌 넘기고 나면 또 다시 경박하게만 입을 놀려댈 것이 여실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어쩌면 옛날 나랏일을 보았던 벼슬아치들로부터 유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백성의 본보기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자기 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꼬락서니라니. 예나 지금이나 그곳의 의지는 총명하고 올곧았던 인물들까지 졸부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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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이토 씨
나카자와 히나코 지음, 최윤영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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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기 전부터 어떤 책을 판단한다는 것은 참 미안한 일이지만, 유독 (나를 향해) 강한 아우라를 뿜는 책들이 있다. 내게 소중한 책이 될 것 같은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이 책은 좋아야만 한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확 끌리는 그런 책들이 있는데, 『아버지와 이토 씨』는 분명 그 정도의 아우라는 아니었다. 그냥 '좋은' 느낌으로 다가와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따뜻한 시간을 보낼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예상이 빗나갔다. 딱 일본의 감성 소설 느낌인 이 책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며칠, 또 일주일이 지날 정도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가족'이라는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 '감성 소설'의 조건과 분위기, 그 모든 것들에서 이 소설은 아주 약간, 한 발짝 정도 물러나 있다. 웃겨지나 싶다가도 진지하고, 독특하다 싶다가도 정말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집에 아버지가 무작정 짐을 싸고 들어온다는 설정은 기가 막힌데, 그 뒤에 오는 상황들은 현대의 가족 문제와 아주 닮아있기도 하다. 아버지와 딸의 미묘한 감정, 갈 곳 없이 떠도는 노인들, 가정을 이루는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누가 먼저, 그리고 누가 더 잘못했냐"는 물음이 불필요한 가족 간의 문제가 현실에서도 쉽사리 풀리지 않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도 아버지의 비밀을 시원하게 터뜨리지 않은 채 그저 결과로만 가족들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다른 '가족 소설'이나 '감성 소설'이라면, 비밀을 터놓고, 이해하고, 시원하게 화해! 이런 순서였겠지만,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점이 재미있다.)

 아버지가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딸인 '아야'는 상반된 감정에 고민한다. 언제나 무례하고 티격태격했던 아버지가 맘에 들지 않지만, 그의 존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의 관계와 아버지의 진심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딸 '아야'의 동거남 '이토 씨'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여유로운데, 무례한 아버지에게 따끔한 말을 던질 줄 아는 대담함도 가진 독특한 캐릭터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고, 답은 정해주지 않은 채 오로지 정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조언가이기도 하다. "도망가지 않으니까-"라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입버릇은, 어떤 부정적 미래에도 불구하고 딸이 아빠의 손을 잡게 하여주는 짠한 대사가 되기도 한다. 제목의 한 자리를 꿰찰 만큼의 공이다.

 이 책의 작가인 '나카자와 히나코'는 원래 희곡을 전문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사에 힘이 있고, 장면 장면에 강력한 한 방이 있다. 아버지의 고향 집, 번개에 터져버리는 박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비교적 조용한 소설 속에서 번쩍, 하고 빛난다. 내가 이 소설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영화로도 나온다 하니 또 한 번 이 감동을 즐길 수 있음에 설레는 마음이다.


80쪽,

​상대 좀 해 주라는 마음과, 다시 어디든 나가 버리라는 마음. 상반되는 두 감정이 내 안에 있다. 어느 쪽의 감정이 보다 강하게 말로 스미어 나올까.

91쪽,

"이래저래 우울하던 때에 아이가 세 살 정도 됐을까,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이것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육아가 힘든 시기는 대개 오 년 정도로, 그건 긴 인생 중 겨우 오 년이잖아.`하고. 한창 힘들 때에는 잘 모르기 쉽지만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야. 대부분의 것은. 그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꽤 편해졌어. 그 뒤부터는 `기간 한정, 기간 한정`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어."​

​ 설마 간마니와 씨의 입에서도 `기간 한정`이 튀어나올 줄은. 어쩌면 정말로 마법의 주문인 걸까.

136쪽,

똑 닮은 할아버지들은,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오래도록 살아온 작은 집에서 쫓겨난 개처럼 무료한 듯했다. 조금 전 자유 공간에서 본 여자들이 모두 반들반들 빛나고 생기가 넘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여자들은 이곳에 오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이지만, 할아버지들은 `강요받고 있다.`는, 그런 느낌.



208쪽,

​"……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말이야, 의미란 게, 세상 모든 일이, 그 한가운데에서는 좀처럼 안 보이잖아? 그 당시에는 `왜 이런 짓을.`하면서 어리석다고 생각하거나 귀찮게 여기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아- 그런 의미였구나.`하고 수긍이 간다고 할까, 납득하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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