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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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얼굴이 벌게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내 문장도 이렇게 보였을 것 같아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칭 독후감이라고 하는, 블로그에 쭉 나열된 리뷰에 나는 정성을 다해왔다. 비공개라면 모르지만, 불특정 다수에 공개되는 글이었다. 한 페이지의 글을 쓸 때, 적으면 몇 시간, 집중이 잘 안 될 때는 오늘은 날이 아니라며 접어두고 하루를 넘기기도 했다. 수정과 검토를 여러 번 했다. 하다가 더는 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싶지 않을 때 '확인'을 눌렀다.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데 글은 왜 이 모양이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누군가가 교정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쓰다 보면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더 잘 쓰고 싶은 욕심. 유려하고 멋진 문장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 그러다 보면 함정에 빠진다. 꾸미고 꾸미다가 기본을 잃는다.

 

 그러다가 책을 중간쯤 읽을 때쯤, 문장에 기본(혹은 정석)이 있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문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규정한 것인가. 누군가의 문장에는 누군가의 생각을 넘어서 삶이 반영되어 있기에, 그것을 수정한다면 '그것을 쓴 누군가'의 힘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특히 문학에서는. 그러면 문장의 교정은 어디까지여야 할까.

 

 교정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정확한 문장'을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의 구성 때문이다.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이라는 부제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제목의 내용은 책 속에서 번갈아 배치된다. 20년 동안 교정 일을 하며 경력을 쌓아온 저자는 교정 일을 하면서 조금 특이한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며 문장을 다듬는 기준을 묻는 편지였고, 회신과 회신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저자에게는 자신의 직업을 되돌아볼 특별한 사건이 된 듯하다. 이 편지 '에피소드'와 '문장 교정법'의 내용이 각각 진행되면서, 저자는 '정확한 문장'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상한 문장'과 '정확한 문장'의 경계에 관해 고민한다.

 

 "문장의 시선은 결국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의지와 당겨지지 않으려는 풍경 사이의 긴장감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146쪽)"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소감은 '결국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교정일을 봐온, 일명 전문가인 저자는 그 긴장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글을 읽을 사람의 시선을 좋은 간격으로 맞춰주는 것. 그래서 교정은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는 표현'이란 책 속의 말에, 그동안 썼던 나의 글들이 스르르 스쳐 가며 나를 겁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쓸 때마다 이 책의 내용을 떠올려 스스로 괴롭힌다면 좋은 영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적당히, 가끔 들춰보며 되새기면 충분할 것 같다. 어쨌든 정답이란 없으니까.

 

 

 

36쪽,
꿈은 말하고 있었다. 네 삶은 비단 길이었다가 자갈밭이었다가 다시 비단 길이었다가 자갈밭일 것이다. 아니, 꿈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 아닐까.
삶은 엉덩이다, 알겠느냐?



64쪽,
말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인데, 이거야말로 반복해 쓰면서 중독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대하다`의 활용형인 `대해(서)`나 `대한`만큼 문장 안에 자주 등장하는 낱말도 드물다. 문제는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까지 무슨 장식처럼 덧붙인다는 데 있다.



99쪽,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그건 심지어 맞춤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맞춤법이란 그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죠. 게다가 지금처럼 국가기관이 맞춤법을 통제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맞춤법에 그렇게 목을 맬 이유도 없지 싶습니다. 다만 책을 사서 읽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제가 하는 일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게이트키퍼라고 하나요. 문지기. 맞습니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뿐이죠. 가끔 그런 꿈도 꿉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이 저마다의 표현법이나 문장 규칙에 따라 쓰인 걸 구경하는 꿈. 멋지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112쪽,
나는 생각했다. 저 문장은 얼마나 이상한 문장일까.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 얼마나 이상한 삶들이 얼마나 이상한 내용을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한 문장일까. 그리고 만일 저 길고 긴 문장을 손본다면 어떤 표기가 맞고 어떤 표기가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표현이 어색하고 어떤 표현이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들어내거나 고치거나 다듬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미처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들일까. 아니면 빨랫줄에서 떨어져 흙이 묻은 빨래들일까. 그것도 아니면 제 어미를 쫓아가지 못하고 뒤처져 울고 있는 고양이 새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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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살해자
윤재성 지음 / 들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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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로움을 없애고 싶었다." (17쪽)
 소설은 현대사회에 뿌리내린 '외로움'을 완벽히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이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디서 어디까지를 외로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외로움의 증세는 다양할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 사람들의 관계에 목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갈증을 느끼는 것…… 이런 가벼운 증세도 외로움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평소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고, 오히려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추켜세워왔다. 하지만 종종 느끼는 가벼운 외로움이 진짜 '외로움'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든다. 내게 주어진 모든 소유물과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나는 진정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무시무시한 상상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다뤄지는 외로움은 내가 상상하던 정도를 넘어선 무게를 갖고 있다. 이것이 '진짜' 외로움과 고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구들과 술 한 잔,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완전히 다른 외로움. 이미 닳고 닳아진, 묵직한 순간들이 돌처럼 얹힌 아주 지긋지긋한 외로움. 아마도 내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을 지독한 외로움이 책을 온통 감싸고 있다.

 

 

 이런 외로움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 소설에 등장하는 '외로움 살해자'다. 살해자라는 이름 때문에 판타지나 스릴러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소설 속) 현대 사회에 새롭게 생겨난 '직업'이다. 엄청난 경쟁률로 뽑힌 그들은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고객들과 시간을 보낸다. 회사에서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고객의 마음을 캐낸다. 외로움이 발생하고, 그것이 커지고,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된 지점들을 파악하고 위로한다.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 간혹 고객의 외로움에 전염되는 살해자가 있기는 해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 살해자'를 '카사노바' 혹은 '애인 대행' 서비스라고 힐난하기도 하지만, 고객들은 그들을 필요로 한다. 고객에게 그들은 썩은 동아줄이라 해도, 마지막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이자, 고객에겐 구원인 '외로움 살해자'의 세계. 소설은 '우수 외살자'와 반송된 (한번 서비스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의뢰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외로움의 본질에 관해 추적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느끼는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어떤 경험에서, 어떤 경로로 그에게 찾아왔을까. 외로움은 '외로움 살해'라는 시스템으로 정말 소멸할 수 있을까. 손쓸 수 없는 외로움이란 존재할까. 건드리지 않아야 할 외로움도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수많은 질문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 자체가 외로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벼운 외로움일지라도, 그것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거라며.

 

 

 찝찝하고 끈적이는 외로움을 책 속에서 온몸으로 겪고 나니, 조금은 피로하고 힘이 들었다. 그러나 외로움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낸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인 바람은 지독한 외로움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소한 것들 - 조금씩 모이면 '외로움'이라는 것을 짓누를 수 있는 - 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171쪽,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지금을 버티기도 힘드니까. 끝을 떠올린 순간 연애나 사랑, 삶의 모든 의미는 허무하게 퇴색돼버려요. 그래서 저는 매일같이 생각을 지워서 현실을 살아갔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나의 존재마저 지워버릴 걸 알면서도."
미는 잠깐 말을 멈췄다. 필은 앞자리의 대리기사가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안경 낀 눈이 룸미러에 비치는 중이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요. 사랑의 유한성만큼 가혹한 게 또 있을까 하는. 그건 하루를 살기 위해 일 년 치 독약을 삼키는 짓이에요."
필은 외로움살해자로서 답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는 생물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 위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외로움은 영원해요. 죽음이란 완성에 이르기 전에는."



221쪽,
"보통은 1개월에서 2개월, 많게는 3개월, 서비스를 연장한다면 반년가량. 그 기간이 끝나면 우린 사라집니다. 고객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두세 달에 불과해요. 우리가 필사적으로 고객을 파악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외로움을 없애려드는 이유도 그겁니다. 그들이 전화를 걸어 온 순간부터 모래시계는 흘러내리기 때문에."



265쪽,
그는 주의 깊게 유도신문을 시도했다.
"죽는다는 뜻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데요."
"말 그대로예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 남겨질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심는 것."
미는 거기서 말을 잠시 멈췄다. 검은 동공은 허공에 멎었다. 그녀는 필을 보면서 필 뒤의 어떤 것을 함께 보는 중이었다.
"우리는 왜, 살아남지 않으면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290쪽
"그럼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지금이 2116년이고, 외로움살해자들이 최첨단 주사액과 미래형 권총으로 고독을 제거하는 줄 알았나요? 그런 것은 현실에 없습니다. 외로움 제거는 우물 청소나 다름없어요. 더 깊고 오래된 때일수록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오직 수작업으로만 이끼를 닦아내야 하는, 고여 있는 유독가스에 중독되지 않길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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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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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한, 눈에 띄게 자그마한 아이는 힘도 없고 억세 보이지도 않았다. 통통한 볼살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는 가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흙 밟고 여기저기 노다니기보다는 집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만약 밖에 나간다 하더라도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하는 적이 많았다. 성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뛰어다니고, 흙을 묻히며 선머슴처럼 노는 법을 몰랐다. 기본적으로 겁이 많았다. 나이가 먹고, 기적적으로 키와 몸이 커지면서 모든 것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 하나 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달리기'였다. 기록을 재고, 여럿이서 달리는 '체육대회'의 50미터 달리기 종목은 고역이었다. 키가 크고, 살이 붙어도, 스피드와 힘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는데, 손등에는 도장하나 찍힐 날이 없었다. 순백색의 띠를 허리에 감는 멋진 광경은 한참 앞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부끄럽지만 나의 이야기다. 이러한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기와 관련된 책을 고르게 된 일은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고르지 않았을 것이고, 여느 때와 같이 느낌에 따라 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가장 적절할 듯한, 그리고 즉흥적인 기분으로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달리기를 매우 기피한다. 아, 어쩔 수 없이 달리거나, 잠깐 기분이 좋아 달리는 것, 가끔 반려견과 조깅 정도 하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기록을 재거나, 기록을 재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목표' 같은 것이 설정되는 레이스는 굳이 도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책을 읽으니 묘한 궁금증이 든다. 끝까지 달리고 난 뒤의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22쪽)" 이 궁금하다. 이를 악물고 달려도 가질 수 없던 손등의 도장을, 한 번쯤 찍혀보기 위해서 매일 저녁 달리기 연습을 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는지도 궁금하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만큼 책에는 풍성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 기록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 몸의 성장과 마음의 변화까지, '달리기'라는 테마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와이, 뉴욕, 도쿄, 케임브리지, 홋카이도를 넘어, 아테네에 가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계절을 보내고 체감한다. 너무나 멋진 일이다. 걸을 때는 볼 수 없는, 걸을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모든 생각들이 머리속을 메울 것이다.

 

 그러나, '달리기'라는 단어 하나로 이 책을 설명해야 한다면 조금 아쉬울 수 있는데, 역자 후기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하루키 최초의, 어쩌면 최후의 (라고 썼지만 최근 출간된 책으로 이 말은 취소되었다) 회고록" 이라서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달리기라는 취미와 가장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음악'도 이 책에선 빠질 수 없다. 찰스 강변에서 함께 달리는 포니테일을 한 대학생들의 빛나는 모습을 보는 작가는 자신의 청춘을 회상하기도 한다.

 

 의외의,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감동이 밀려온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259쪽)"라는 묘비명을 쓰고 싶다는 작가는 한때 취미였던 '달리기'를 인생 전체로 밀어 넣는다. 그의 사회성은 '달리기'로 인해 길러졌다. 집중력과 지속력은 근육의 발달과 함께 몸에 배어 들었다."나라는 작은 존재 의의(171쪽)"는 '달리기'로 인한 통증이 되새겨주었다. 더 왈가왈부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달리기'는 '작가 하루키'라는 이름과도 같고, 실명 '무라카미 하루키'와도 같다. 그러니 진심 어린 이 책에, 달리기를 싫어하던 사람까지도 매료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36쪽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122쪽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145쪽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171쪽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말을 머릿속에서 만트라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 - 그것만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아니 아니지, 나라고 하는 기계의 작은 존재 의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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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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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화였습니다. 타이거(TIGER)라는 로고가 쓰인, 270mm 사이즈의 흰색 운동화였습니다. 공장에서 수십 켤레, 아니 수백 켤레가 넘게 만들어진 내 쌍둥이 운동화들은 많은 이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비슷한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내가 왜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냐고요. 세상에 수많은 흰색 타이거 운동화는 그 성질이 변해갔습니다. 시간과 상황과, 신는 사람에 따라서 말이지요. L의 발에서 20여 년 인생을 함께하면서 나는 진정으로 'L의 운동화'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1987년,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쓰러진 내 주인의 발에서 벗겨져 한 짝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운동화가 증언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허황된 상상이지만 그리 허황되기만 한 상상은 아니다. 실제로 L의 운동화는 살아남았고 존재로서 증언을 대신하였다. 슬프지만, L이 살았던 생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끝끝내 부서질 때쯤 한 복원가의 손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화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이한열 열사 28주기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100여 조각으로 부서진 우레탄 밑창, 열화(劣化)가 일어나 끈적이고 깎이고 해진 운동화를 어떻게 복원해내느냐에 대한 어려운 결정이 복원가에게 맡겨졌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21쪽)

 

 

『L의 운동화』는 그 과정을 소설로 담았다. 우리는 복원된 미술품이나 물품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복원되기까지의 다난한 과정을 생각하며 그저 짧게나마 감탄할 뿐이다. 선 하나, 조각 하나하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정도까지의 생각에 미치질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복원되었다는 사실조차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복원의 시점, 복원의 상태, 복원의 의미, 그 모든 것들을 함께 고민한다. 소설은 '마크 퀸'이라는 작가가 5년 동안 자신의 피를 뽑아 냉동고에서 형태를 유지하게 만든 「셀프(Self)」라는 자화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김숨' 작가는 'L의 운동화'에 관해 쓰면서 이 작품을 생각했을까. 청소부가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아 버려 훼손되었다가 다시 응고된 (그 흔적을 지니게 된) 이 작품은, 'L의 운동화'라는 특별한 사물을 복원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고민할 '복원의 의미와 가치'를 시사한다.

 

소설 속에서 복원가는 정체불명의 냄새를 맡는다. 화학약품 냄새도 아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어떤 냄새"를 작업실에서 똑똑히 느낀다. 마치 "사체가 썩고 부패하는 냄새"에 가깝다고 그는 표현한다. 죽어가는 운동화를 살려내는 순간, 냄새는 사라진다. 기성품이자 개인의 '사적인 물건'이었던 운동화는 비로소 '시대의 상징이자 유물'이 된다. 잘 벗겨지지 않기 위해 L만의 방식으로 꽁꽁 묶었던 운동화가, 최루탄 가스와 먼지를 머금은 운동화가, 증언이자 기록이 된다. 그리고 이는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기억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223쪽)",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이 책의 인세 일부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부된다고 합니다.

 

 

 

 

 

 

80쪽,
L은 걸을 때 왼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오른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쫓기듯 재게 걸었을까? 보폭을 크게 해 성큼성큼 걸었을까? 걸을 때 발가락에 더 힘이 실렸을까, 뒤꿈치에 더 힘이 실렸을까? 어릴 때 어머니는 연년생인 형과 내게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사주고는 했다. 한날 한시에 똑같은 옷을 사 주는데도 형의 옷이 번번이 먼저 해지는 것을 나는 의아해했고,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개인의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걸.

100쪽,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28년이라는 시간을 바꾸어 말하면 고색(古色)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을 복원할 때 고색을 살리는 것은 특히나 중요하다. 조형물에서 시각적으로 감지되는 세월의 흐름, 시간의 흔적이 고색이다. 인간이 고색을 선호하는 것은 영원성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황색의 바니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무한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110쪽,
L의 운동화를 그대로 두는 것이, 운동화를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의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보관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194쪽,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L의 운동화 끈을 풀 것인지, 맑 것인지. L의 운동화를 내 작업대로 가져온 지 두 주가 지나도록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L의 운동화 끈은 독특한 방식으로 묶여 있다. L의 운동화를 예술 작품이라고 가정할 경우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끈이다.
나는 끈을 풀 자신은 있지만, 묶을 자신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L이 묶은 방식 그대로 묶을 자신이.

254쪽,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을 나는 구태여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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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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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남다른 친화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다. 그래도 저 사람에게도 스트레스가 있겠지, 하는 볼멘소리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이건 부러운 마음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목소리가 작거나 어떤 상황에도 소심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 외향적인 사람과 달리 '에너지'를 빠른 속도로 뺏긴다고 했던가. 그런 점에서 나는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라서,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자리에선 되레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 내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양귀자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왔다. 그의 대표작인 『원미동 사람들』도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라는 소재는 그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듯하다. 그러나 이 '인물 소설'이라는 것은 여타 소설과는 특이하게 다른데, 하나의 인간과 그의 인생을 그리는 것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에 모두 모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단행본 한 권의 네다섯 페이지 될만한 짧은 글들이 한 아름 묶여 있는 이 책에는 남녀노소 가지각색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득하다. '모든 대화를 군사적으로 변용시키는 박영국 씨', '버릇처럼 신도림역에서 폴짝 뛰어내려 버린 양민호 씨', 그리고 이름을 거론하진 않지만, 무척 특이하고 무척 재미난 이들, 택시 운전사, 시인, 동네 예술가, 어머니, 아버지 ……. 그들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은 아주 따뜻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재미있는 건 이 사람들에 대한 글들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서 무척 자유롭다는 점이다. '인물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분명 상상이 가미되었거나, 온통 허구이거나 할 테지만, 어쩌면 이 책은 소설의 탈을 억지로 입힌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에세이'라는 느낌이 진하게 나기도 한다. 어쩌면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짧은 글들에서 언뜻언뜻 드러내는 화자의 신상에 주목한다면, '에세이'와 '소설'에서 줄타기하는 소설의 참 재미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사실은 물어보고 싶다. "양귀자 선생님, 이 사람들 실제로 있는 것 아니에요? 진짜 경험한 이야기 아니에요?" 그러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작가는 실제로 길을 걸으면서, 세상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힘이 되는 무엇을 얻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관찰하는 눈이 아주 깊다는 사실도.

​ "언제,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일까, 그 붉은 목단꽃 이불 밑에서 하룻밤 짧은 꿈을 만지다가 다시 환한 세상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95쪽, 아슬아슬했던 시절,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

 책의 문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니, 또 작가의 글에 폭 잠겨 들게 된다. '붉은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과 삶에 대한 질김을, 시인의 주파수를, 이야기가 스르르 들어와 소설이 되는 순간을 말하는 그 문장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가능하면 모두 다 적어 자랑하고 싶지만, 책의 문장들은 이상한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내가 만약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된다면, 정말이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88쪽, 아슬아슬했던 시절,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
아마도,더듬어 보자면, 푸른 비단에 구름처럼 풍성한 붉은 목단꽃이 수놓아진 이불이었을 것이다. 이불깃은 빳빳하게 풀 먹인 광목이었으며, 바늘이 누비고 간 실뜸의 간격은 자로 잰 듯이 정확했었다. 붉은 목단꽃 이불의 그 홑청은 유난히도 자주, 장대로 곧추 세워놓은 빨랫줄에 널려 깃발처럼 펄럭이곤 했었다. 풀 먹인 그것을 자근자근 밟아대는 심부름도 참 많이 했었다. 잘 개킨 홑청 위에 옥양목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서서 나는 책을 읽었다. 책에 빠져 있다가 문득 내려다보면 밟아야 할 풀 먹인 홑청은 저만치 있고, 내 작은 발은 맨 방바닥만 헤매고 있었는데.

105쪽,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내가 보호해드려야 할 지경으로 늙어버린 어머니의 장탄식을 듣고 나면 나는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기운이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괜히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말하고 싶거나 어깨가 빠지는 듯이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까지 불끈 솟아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 사십을 앞두고 철이 없어도 유분수지 노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철이 좀 든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조그만 효도를 하기는 한다.
"엄마, 인절미 구워 먹을까요? 엄마가 구워주면 더 맛있더라."
그러면 허리 굽은 내 어머니는 당장에 얼굴이 환해지면서 부엌으로 달려가시는 것이었다.

116쪽, 책 사는 사람들
예전과는 달리 현대의 빛나는 과학문명은 고리타분한 독서 말고도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며 비디오 또는 컴퓨터게임 등, 독서가 줄 수 있는 은은한 향기에 비하면 현대의 오락들은 너무나 강렬해서 한 권의 책이 그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선택되어지는 것은 차라리 경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런 까닭에 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늘 전전긍긍이다.


152쪽, 그 여자의 고정관념
긴 밤을 지새우고 났을 때, 동쪽 창에 발갛게 번져오는 햇살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문득 동아줄 같은 삶의 질김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이란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잘도 찾아오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망연히 누워 있는데 이윽고 부지런한 이웃의 비질 소리, 아침잠 없는 갓난아이의 칭얼거림, 또한 근심 없는 사람들의 청명한 말소리들이 간단없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살아있음은 뭐랄까, 지루한 반복 외 그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래도 밝음은 동시에 희망 같은 것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186쪽, 꽃 지는 누이 - 들어가면서
제아무리 이야기 가닥이 많고 기둥 줄거리가 탄탄한 소설이라 해도 그것의 시작은 미미한 징후, 한 순간의 분위기에서부터 일구어진다. 현실의 그 미미한 징후와 찰나의 느낌은 마음속으로 들어와 오래도록 기척을 내며 꿈틀거린다.
나는 가만히 기다린다. 마음속에 터를 잡은 그것들이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반죽이 되고 이스트 넣은 밀가루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그리하여 나를 충동질하기를. 여기 모인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미미한 징후에서 하나의 소설로 가는 중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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