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개들의 언덕 - 들개, 유기견, 떠돌이 개... 2년간의 관찰 기록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6
류커샹 지음, 남혜선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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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도시에선 들개를 보기 힘들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들개들은 보통 교외나 산 근처, 재개발 지역과 길거리를 떠돈다. 그들이 원래부터 자연에서 오랫동안 생존하여 개체 수를 늘려간 것일까? 아니다. 아마도 일부(시골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개들을 포함한)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의 반려견이었던 개들이 버려지고, 버려진 개들이 새끼를 낳아 늘어났을 것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공공 유기견 보호소가 다수 생기고, 민간단체에서도 솔선수범하여 들개 혹은 유기견들을 재입양시키려 애쓰지만, 다수는 안락사 되고야 만다. 게다가 운이 좋지 않다면 개장수에게 팔려가 식용견이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20년 전 대만에서는 대규모 들개 포획 정책이 이루어졌다. '유기견 추격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몽둥이와 그물망 등을 동원하여 수많은 들개를 포획했다. 도시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을까. 춥고 배고프고 잘 곳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들개들은 힘없이 사람들에게 잡혀 나갔다. 도시에는 누군가의 반려견들만 남았다. 내가 지금 사는 이곳처럼.

 

 저자인 '류커샹'은 2년여간 타이베이에서 사는 들개들을 관찰했고, 그들이 도시 정책으로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다. 날 때부터 이름도 없었던 개들은 저자에 의해 '동아, 감자, 삼겹이…' 등의 이름을 얻었다. 누군가가 키우다 버린 개들도 있었다. '단백질'과 '반쪽이'는 표정과 행동 자체에서 좌절이 느껴질 정도로 처절하게 버려진 것 같았다. 저자가 관찰한 12마리의 개들은 각자 나름대로 무리를 짓고 규칙을 지키며 위험한 길거리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짝짓기하여 새끼들도 낳지만, 번번이 잃고 만다. 이미 닳고 닳은 길거리 생활로 가까스로 생존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길거리는 위험한 것 천지이기 때문이다. 최고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사람들의 학대, 추위와 배고픔, 영양실조 등으로 인한 개들의 죽음, 그것을 목격하고 생존한 개들은 눈물을 흘린다. 때론 새끼의 피를 핥으며 슬퍼하는 어미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잠시 지은 뒤, 살아남기 위해 자리를 뜬다.


 이 책의 끝은 예상하다시피, 슬프다. 이미 사라진 개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2마리의 개 중 한 마리는 끝이 너무 처참하여 예외적으로 좋은 결말을 지어주었다는 저자의 말만 봐도, 들개들에게 처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고 끔찍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20년도 더 된, 다른 나라의 이야기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개발되고 변화되는 우리나라에서 지향해야 할 점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원시시대, 그러니까 인간과 개가 아직 이렇게 밀접한 관게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야생의 수캐가 먹이를 먹는 암캐를 지켜봤을까? 아니면 수캐가 먹이를 입에 물고 돌아가 암캐에게 주었을까? 잡화점 문 앞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은 이미 암캐가 안에서 뭔가 먹을 걸 얻어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을, 게다가 그 먹이가 어떤 사람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미 '문명화'된 행위이며, 도시라는 공간에 사는 시민의 행위이다. 들개는 도시의 시민이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인간이 아닌 동물을 도시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개들은 도시의 시민일까? 개 뿐만 아니라 세상에 살아가는 동물을 도시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전 기가 막힌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등산객들이 산에 있는 도토리를 하도 주워가서 야생동물의 소중한 먹거리가 줄어들고 있단다. 먹이가 부족해진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산 아래로 내려오고, 동물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그들을 포획할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자연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땅을 점령하고, 마음대로 바꾼 우리는 이제 동물 문제를 생각하고, 그들과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61쪽,

들개 중 흔히 말하는 `떠돌이 개`는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정한 거주지 없이 사는 그런 `떠돌이 개` 말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대부분 어떤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 아마도 버려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살 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는 개일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집에 찾아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또 어쩌면 환경파괴로 더는 원래 살던 곳에서 살 수 없게 된 개일 수도 있다.



76쪽,

자신의 상태를 알기라도 했던 건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전 흙구덩이 밖으로 나와 구덩이 옆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몸을 가로뉘었다. 유동나무 잎이 아래로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동물에게는 가족에게 폐 끼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본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100쪽,

무화과와 청어는 아마도 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악의적으로 쫓겨난 것 같지도 않고. 심리적으로도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악랄한 방식으로 버려진 개들, 이를테면 차 안에 있다가 주인에게 떠밀려 버려졌다거나 심하게 욕을 먹고 쫓겨났다거나 차 타고 멀리 가서 버려지는 바람에 기력이 다 빠질 때까지 떠나는 주인의 차를 죽어라 뒤쫓아 간 끝에 결국 버려진 개들은 심각할 정도의 좌절을 겪게 되고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람에게, 심지어 앞으로의 삶 전체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 버려진 뒤 아예 넋이 나가 버린 반쪽이와 단백질이 바로 이런 예이다.


126쪽,

들개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자. 그들은 절대 야생에서 오지 않았다. 인류가 사는 세상은 사실 그들의 세상이기도 하다. 야생의 형태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에서 사람에게 버림받아 어쩔 수 없이 막다른 길에 이른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동물의 도시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들을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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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8.5 승효상 - 승효상 편 - 짓다
승효상.스리체어스 편집부 지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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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 이번호를 기점으로 개편되었다. 판형은 작아졌고 띠지에 있었던 인물의 얼굴은 작아진 표지로 옮겨갔다. 종이의 재질, 그에 담긴 내용과 구성도 조금씩 달라졌다. 여덟 권의 매거진을 출간한 뒤, 독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여러 불편한 점들을 개선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아진 판형은 아쉽고 (매거진을 읽는 색다른 느낌이 사라졌다), 단출하나 깔끔한 표지는 마음에 들고, 어디있는지 찾을 수 없었던 이 책의 부제가 책 뒷면에 새겨진 것은 좋았다. 그런데 이번호는 주인공의 요구사항 때문에 구성과 내용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편집과 인터뷰어의 개입을 최대한 제한하였고, 디자인과 구성은 최소화했다. 출판사 측에서도 아쉬운 면이 많아 출간을 주저하다 8.5라는 숫자를 붙여 세상에 내보냈다고 한다.


 매거진을 다 읽을 때쯤 승효상 건축가의 저서인 『빈자의 미학』이 20주년 기념판으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의 이름과 '빈자의 미학'은 동의어와 같다고 한다. 삶과 철학을 온전히 담은 저서가 재출간될 줄 알았다면, 매거진의 구성은 조금 달라졌을까? 조금 다른 각도로, 톡톡 튀는 형식으로 그의 삶을 바라보고 평할 수 있었다면 더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무시할 순 없었다. 한 인물의 삶과 메시지를 아주 충실하게 담아냈고, 조금 더 가벼워진 형식 속에서 한 인물의 역사를 꼼꼼히 다뤘다. 그의 저서 『지문』과 『빈자의 미학』 일부가 책에 실려있기도 했는데 이는 짧은 구절이지만 건축가가 지닌 고집과 철학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게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건축가의 욕망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걸을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그 속을 채울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저는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건축가는 사회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에요. 삶에 관한 사람들의 요구에 대응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땅에 따라 건축이 바뀔 수밖에 없죠. 그 땅의 조건에 맞춰서 하는 게 건축이에요. (…) 공간을 설계하는 일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설계하는 일과 마찬가지예요. 건축가는 남의 집을 짓는 이들이니 타인의 삶을 그만큼 잘 알아야 하죠. 그래야 남의 삶을 조직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건축을 잘하려면 남이 어떻게 사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119-120쪽)

 

 

 

 

 건축가 승효상을 필두로 (이로재에서) 지어진 건축물들의 수는 상당했다. 이전에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으니, 길을 걸으면서 스쳐간 건축물들도 여럿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건축 설계와 도시 계획은 다르지 않다는 일념 하에, 도시의 장소를 잇고 공간을 구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파주 출판단지도 그가 구성하고 만들었단다. 현재는 퇴임하였지만 서울 총괄 건축가로도 일했다. 그는 "좋은 도시는 도시의 어느 곳에 떨어져도 일부만으로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도시"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며 바른 건축과 바른 도시에 대해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서울의 건축적 지향점은 '메타시티'라 한다. "내적인 질의 함양을 위한 도시, 연대하는 도시, 공존하는 도시" (148쪽)를 추구한다.

 

 


​ 뒷페이지에 실려 있는 『빈자의 미학』을 읽으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빈곤하지만 아름다운 무대장치, 처절한 고독이 만들어낸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 가난하지만 삶을 나누고 공존하는 서울의 달동네와 같은 영감이 모여 확고한 철학을 만들어냈다. 『빈자의 미학』에선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건축과 삶, 승효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그의 책을 접하기 전 기본이 되는 지식들을 접할 수 있다.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매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늘 그랬듯이.

 


 "침묵의 벽. 비록 소박하고 하찮은 재료로 보잘 것 없이 서 있지만, 그 벽은 적어도, 본질의 문제를 안으며 중심을 상실하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건축가들이 쌓은 벽이며 결단코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191쪽, 『빈자의 미학』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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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가게
너대니얼 호손 외 지음, 최주언 옮김 / 몽실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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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엔 (내 기준에서) 꽤나 심각한 독서 슬럼프를 겪었다. 책을 잡고 있어도 제대로 읽히지 않고 글자만 그대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중단한 책도 여러 권이었다. 소파 팔걸이와 테이블에는 중간만 보고 놓아버린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취미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을 갖고 있는 독서 활동이라, 이대로 꾸역꾸역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중단해버려야 하는지 혼자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결국엔 9월은 '조금 느렸던 달'로 남겨두고 다음 달의 첫날, 활기차게 독서를 시작하기로 했다. 10월의 첫 책은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다. 조건은 이랬다. 첫 번째, 재밌어서 끝까지 읽어내릴 수 있는 책. 두 번째,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은 책. 산뜻하게 읽힌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는 것. 이에 눈에 딱 들어온 책은 『마술가게』였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샛노란 표지의 이 책에는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굵직한 SF 작품을 남긴 '허버트 조지 웰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등 이름과 저서를 연결해 들으면 "아-" 하고 무릎을 칠만한 익숙한 작가들이다. 그러나 작품들은 아주 생소하다. 보통 유명한 고전 동화를 읽으면 어릴 때 자투리 글을 읽어본 것 같은, 아니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본 이야기여서 설레는 마음이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판타지 동화의 느낌이었다. 새롭고 신선하며, 알듯 모를듯한 기분이 좋았다. 책 속에 펼쳐진 예쁜 일러스트가 아니더라도 글 속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눈앞에 그려낼 수도 있었다. 온갖 신기한 것들의 천국인 '마술가게',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쩔 수 없이 손잡이를 당길 것만 같은 '초록문', 딱하디 딱한 '페더탑', 그리고 옥색 바다와 목소리 섬의 진기한 풍경……. 동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감성을 자극하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한 느낌이면 아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은 미스터리하고 약간은 오싹한 기분까지 선사한다. 마지막까지 맘을 졸이게 하고, 그 마지막을 접했을 땐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게도 하는 스릴있는 이야기들이랄까. 특히나 재밌게 읽었던 <눈먼자들의 나라>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발목을 잡을 '고정관념'에 대하여,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전해주기도 한다. <초록문>은 어린 시절과 환상에 대한 진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의 작품들이지만 비슷한 분위기로 묶여, 바쁜 일상 속에 동심과 환상의 세계에 푹 빠지게 해주는 책 『마술가게』. 그저 그렇고 뻔한 이야기거나 권선징악의 교훈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상상과 여운을 맛볼 수 있었다. 특이하고 진한 여운을 주는 매력적인 동화들이었다.

 

 

 


65쪽, 마술가게

마술 점원이 "얏!"이라고 말하니 녀석도 "얏!"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기묘한지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여기는 기묘함으로 점철된 곳이었다. 설치물에도, 천장에도, 바닥에도,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도 약간 기묘함이 묻어 있었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 때면 삐딱하게 움직이면서 내 등 뒤로 조용히 자리뺏기놀이를 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천장돌림띠는 가면을 쓴 뱀 모양이었는데, 가면은 순전히 석고로 만들어졌다기에는 너무 표정이 생생했다.

79쪽, 초록문

어릴 적 기억이 계속 재생됐다. 월리스는 그 문을 보자마자 첫눈에 특이한 감정을, 이끌림을,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이끌림에 굴복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처사라는 확신이 분명히 들었다. 월리스는 기억이 요상한 마술을 부린 게 아닌 이상, 저 문이 닫혀 있지 않으며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참으로 신기하다고 주장했다.

149쪽, 눈먼 자들의 나라

그녀는 시각이 가장 시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했고, 누녜스가 별과 산, 백색광을 켜 놓은 듯한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설명해 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탐닉하며 들었다. 이 말들을 믿지도 않고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묘하게 기쁨을 느꼈고, 이런 모습을 보고 누녜스는 그녀가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183쪽,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바치네.

신은 무엇이든 들으시리.

키잡이가 기도하고, 고요가 흘렀다. 선원들은 잠을 청하려고 몸을 뉘였다. 고요함은 짙어졌다가 얀 강이 가볍게 뱃머리에 와 닿을 때만 살짝 깨졌다. 강에 사는 짐승이 이따금 기침을 할 때도 있었다. 고요함의 물결, 물결과 고요함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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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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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 작가는 『L의 운동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잊지 못할, 너무도 오싹했던 '한 명'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잔혹한 역사를 '르포' 형식이 아닌 '소설'로 담는 것은 꽤 민감한 일이다. 소설이라는 틀 너머에 그보다 더 끔찍하고 적나라한 현실이 있고, 건드려야 할 것이 있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소설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알고 있는 진실을 허구의 바탕 속에 적당히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상상에는 한계선이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일은 그 한계선까지의 거리가 매우 짧다. 경험해본 사람을 통해 보고 들은 것만을 상상하고, 더불어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위안부'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영상에서 본, 문신으로 가득한 할머니의 배를 떠올렸다. 너무도 아팠고, 끔찍했고, 죽여버리고, 죽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 뒤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12살 어린 소녀를 보고 하는 생각들을, 신발을 신을 때마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를, 끝끝내 살아 돌아왔어도 자신이 어딜 다녀왔는지 말할 수 없던 상황들을 말이다. 『한 명』이라는 소설은 내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설명한다.

 "죽을 수가 없어. 내가 죽으면 말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237쪽)

 세월이 흘러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를 그리는 '소설의 현재'에는 '그녀'가 살고 있다. 위안소에서 한시도 제 몸뚱이가 아니었던 몸을 끌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참혹한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다. 제 몸뚱이가 아니었던 몸이, 이제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녀는 TV에서 (공식적인) '한 명'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녀는 증언을 어떻게 하는지도, 하고 싶지도 않으며, 그저 행복하게만 살고 싶어 조용히 삶을 지켜왔다. 그러나 "순덕, 향숙, 명숙 언니, 군자, 복자 언니, 탄실, 장실 언니, 영순, 미옥 언니……."와도 같은 '한 명'의 존재를 이제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때 불현듯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던 열세살 소녀의 이름을…….

 


 굳게 다물어졌던 입을 열고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지금 살아계신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으리라."(151쪽)라고 말하면서도,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죄다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현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본 정부와의 '불통'과 우리 정부의 괘씸한 처사에도 꿋꿋이 뜻을 표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눈물이 났다.

 이 책의 문장에는 수없이 많은 숫자가 붙어 있다. 이는 뒷페이지의 참고자료와 이어진다. 참고자료에는 작가가 참고한 책들과, 증언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것이 정말 현실이냐며, 치를 떨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숫자들이다. 이 숫자와, 기록과 기억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이 읽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8쪽,
검푸른 곰팡이가 만발한 담벼락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그녀는 한순간 발작적으로 숨을 토한다. 마흔일곱 명이라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한 명밖에 안 남았을까 싶다.
꽃잎이 방사형으로 퍼진 꽃을 그리듯, 두 발을 번갈아가면서 조금씩 옆으로 옮긴다.
그녀가 발을 뗄 때마다 장판지가 슬쩍 들뜬다. 밀크캐러멜 색깔의 장판지는 뾰족한 것에 찍힌 자국, 뜨거운 것에 덴 자국, 밀려 주름진 자국, 날카로운 것에 긁힌 자국 등으로 지저분하다.
한 생을 등지듯, 그녀는 그렇게 창문에서 천천히 돌아선다.

88쪽,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

90쪽,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다 하면서도,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132쪽,

"저기, 젊은 양반…… 20만 명 중에 2만 명이면…… 10분의 1이 맞지요?"
"20만 명 중에 2만 명이요?"
"20만 명 중에 2만 명이면……"
"20만 명은 뭐고, 2만 명은 뭐래요?
전기검침원이 대답은 않고 도리어 그렇게 물어서 그녀는 당황한다. 그녀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2만 명 뽑는데 20만명이 몰리기라도 했대요? 20만 명이면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하고 맞먹는 숫잔데……."
그녀는 괜히 물었다 싶어 입을 다문다.
"주먹은 왜 그렇게 꼭 쥐고 계세요?"
"다슬기들이 달아날가봐……."

​236쪽,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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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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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는 이상야릇한 힘이 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콸콸 들이붓지만 않는다면야, 술은 적당한 이용가치가 있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노래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평소에 하지 못할 일들을 기꺼이 하게 만들기도,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부끄러움 없이 꺼내놓게도 한다.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술자리에서는 세상사 많은 희로애락이 펼쳐진다. 취기는 불안을 잠재우고,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게도 한다. 오직 술이 있어야만 허용될 것 같은 진실한 이야기가 바로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 『안녕 주정뱅이』는 실제로 쓰디쓴 술을 삼키고 삼키면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다. 첫 잔이 가장 독하고, 마지막 잔까지 비릿하다.

 소설은 예상치 못한 순간들과 비밀,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들을 담는다. ​목적지가 다른 두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달리다 같은 휴게소에서 잠깐 들렀다 간 정도('층')의 우연들이 반복된다. 번갯불의 찰나 ('삼인행')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쌓여, 어떤 결과를 불러오고, 그 결과로 이들은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불안을 잊기 위해 사랑에 취하고, 여행길에 취하고, 분노에 기대기도 하며, 오히려 그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인생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봄밤」의 수환과 영경은 얼마나 처절하고 아름다운가. 「이모」는 살아온 날들의 증오를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앓았을까. 이 격렬하고 치열한 이야기는 가슴을 세차게 흔든다. 나머지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카메라」와 「실내화 한 켤레」의 소설은 아무렇지 않은 날들을 그리는 것 같지만, 온통 불안으로 가득하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불안과 위험을 한 번에 터뜨려버린다. 당최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지 않냐고. 뭘 더 바라겠냐고 ('봄밤')"

​ 그래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히' 살아있으려고 애쓴다. 비틀비틀 걸음을 온전히 하려 애를 쓰는 주정뱅이처럼 보일지언정, 어떻게든 자신의 일상을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그들에게 연민 어린 시선이 간다.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술자리처럼,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 이들의 이야기에 관한 기억이 또렷하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소설을 썼을까.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어보았길래…….

 


 



25쪽, <봄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수환이 말했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할 때가 있어."
영경이 씩 웃었다.
"그래? 너무 간헐적이라 탈이지.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1이 될까?"

93쪽, <이모>

언제였을까. 그의 자취방에서 과도로 참외를 깎아 쪽을 내고 참외씨를 미세하게 바르며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았던 그 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 같던 그 봄날의 오후는, 그리고 …… 그녀는 현관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장갑 낀 양손을 번갈아 쥐었다 놓았다. 당장이라도 과도를 움켜쥐고 무엇을 찌를 듯이, 장갑 속의 언 손가락들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이 붉고 어두컴컴한 증오는 무엇인가. 그걸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었다 놓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쥐었다 놓았다.

134쪽, <카메라>

"내가 무능해서 그런지 몰라도,"

관희가 고개를 옆으로 늘어뜨렸다.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참 힘이 드는 일이에요, 문정씨."

76쪽, <실내화 한켤레>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239쪽, <층>

그는 아파트 정면 베란다에 서서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L자를 그리는 차도 너머에 있는 도서관 진입로와 어두운 나무들에 가려진 건물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초추의 양광, 돈데 보이 같은 것 말고, 안톤 슈나크나 띠시 이노오사 같은 것 말고, 이 밤 도서관에서, 까페에서, 연구실에서, 오래전 당신이 살던 이곳보다 훨씬 더 넓은 아파트 거실에서,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낯선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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