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보네이션 - 시민X안희정, 경험한 적 없는 나라
안희정 지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장을 열고, 이 책을 다 읽은 지는 좀 되었는데 이제야 글을 남긴다. 어려운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 이야기를 이렇게 편안하고 쉽게 받아들인 건 오랜만일 정도였다. 또한, 안희정 지사에 대한 호감도 있었기 때문에 술술 읽어내렸는데, 왠지 모르게 우물쭈물한 감이 있었다. 어지러운 시국이 계속되었고, 민주주의는 추락했으며, 국민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커졌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안희정 지사가 꿈꾸는 민주주의는 분명 좋은 민주주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너무 멀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올해 상반기에 읽었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ISSUE 8』에서 안희정 지사의 삶과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콜라보네이션』에서는 보다 더 집중적으로 그의 정치 목표와 기록들을 전한다. 그가 운동권 학생, 국회의원 비서, 노무현 대통령의 파트너, 지금의 충남 도지사까지의 어려운 시간을 거쳐오면서 확립한 '더 좋은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상세히 이야기한다. 그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제목인  '콜라보네이션 Collabonation'이다. 콜라보네이션은 협력과 국가의 합성어로 국민이 참여해 이끄는 더 좋은 민주주의 사회를 의미하는데, 이 당연한 이야기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느껴질 때쯤, 지금의 현실을 깨닫는다. 국민은 국가의 원동력이고, 헌법에까지 국민주권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안희정 지사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17쪽)"


 시민과 국가, 정부와 관료, 복지, 환경, 외교에 대한 안희정의 생각들을 아울러 다루는 이 책은,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그의 '대선 출사표'와도 같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를 비판하고, 자신만의 소신으로 해결책을 말하는 안희정의 모습은 자신감 있고 확고하다. 그러나 단지 그 해결책들이 신뢰 가능할지라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은 세상을 크게 변혁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이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그때마다 나는 답한다. 똑똑한 지도자 혼자서 끌고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국민과 시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 국민과 함께라면 못할 것이 없다." (350쪽)


 이 책의 표지에는 안희정의 이름만 쓰여있는 것이 아니다. 지은이 이름이 와야 할 곳에는 시민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여 있다. (시민 X 안희정)

 또한 책 속에는 그가 틈틈이 남긴 (『콜라보네이션』 의 내용과 맞물리는) 메모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다. 결코, 허투루 나온 이야기들이 아닌, 직접 생각하고 구상한 내용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주기에 이 책에 나온 그의 계획들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시민에 대한 애정과 그가 꿈꾸는 세상을 일단은 믿어보고 싶다.


 

50쪽,
제도와 지도자의 능력이 정치 수준을 결정한다. 이 믿음으로 올라와야 한다. 어떤 경우든 대중의 의식과 민도를 탓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자로서 어떻게 제도를 설계할 것이냐, 하는 관점에 서 있어야 한다. 나는 지방 자치야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넘어야 할 다음 단계임을 믿는다.

73쪽,
많은 정치인이 선거 때마다 ‘내가 해 줄게‘라고 얘기하고, 공약과 표가 교환되면서 정부 조직에 부담을 주고 있다. 다리 놔 줄게, 복지 정책 해 줄게, 그 ‘해 줄게‘라는 말은 국가와 주권자를 주인과 손님으로 나누는 단어다. 정부가 내 것이라면 마치 선물을 받듯 공약을 받을 일이 아니다. 재원이 어디인지 따져 묻고 국가 재정의 효율적 지출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는 민의 것이다‘라는 생각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노력이 정부 혁신을 향한 나의 첫 번째 출발점이다.

118쪽,
우리 사회가 나라는 존재와 이 경이로운 세상에 지적 호기심을 가지도록 자극해 본 적이 있을까. 모든 자극을 봉쇄하고 ‘무조건 외워서 풀어‘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까.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은 열등감과 상처 입은 자존심 외에 나답게 내 인생을 살아야지, 하는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준 일이 있을까. 이런 상태로는 활력이 생기지 않는다.

295쪽,
국가 지도자는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국가 정책이 가져올 고통과 희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정책 목표가 거룩하고 고상하기 때문에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짓밟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실상 반민주적인 리더십이다.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국민을 동원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지지 기반의 정치 성향에 기초해서 5천만 국민의 실질적 이익이 무엇이냐는 토론을 방해하고 있다. 더 나은 길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고 있다.

298쪽,
정치 지도자의 유일한 목표는 5천만 국민의 안녕과 시민이 땀 흘려 일구어 놓은 소중한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첩첩이 다가오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부터 세계적인 경제 위기,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민주주의의 위기까지 어느 하나 만만한 문제가 없다.
독립을 쟁취했던 선열처럼,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던 앞선 세대처럼 우리도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진보나 보수의 어떤 이데올로기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목표보다 중요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그냥 문장 한 줄이었다. 한 시사 주간지에 L이 고백했다고 쓰인. 그것이 그녀를 브뤼쎌로 이끌었다.

  "브뤼쎌에 갈지도 모르겠어요. (…) 거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13쪽)."  확고한 결심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 간다는 어투도 아닌,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말로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단지 마음속에서만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결심했다.

 

 이니셜 L, 무국적자, 난민, 불법체류자, 탈북자, 이방인 혹은 외톨이…… 그것이 '로기완'이라는 사내에게 붙은 이름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북한 국경을 넘고, 어머니까지 잃어 그 목숨값을 들고 벨기에라는 생소한 나라에 밀입국했다. 자신의 존재도, 길거리의 풍경들도 확연히 다른 그곳을 거닐었다. 떠돌고 떠돌다가 어디론가 흘러갔다.

 정체 모를 연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자에겐 과하도록 진한 감정이었다. 그녀에게 특히나 연민이란 별것 아닌 감정이었기에 이상했다. 그녀는 형편이 안 좋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글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고, 연민은 습관처럼 흘러가는 감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로기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에서 만나 남다른 인연을 맺은 '윤주'라는 소녀를 생각하며, 옛 연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로기완의 흔적을 밟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L이 걷던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L을 기억했다. 브뤼쎌에 와서 첫 끼를 먹던, 자신이 살고 있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시선들을 보던, 몸살을 앓고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저항하던, 울음 짓던,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던 L을. 그를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타인의 인생 반경은 똑같을 수가 없기에, 그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힘내"라는 말은 때로는 공감한다는 말보다 '너의 말을 잘 들었지만 해줄 말이 없어 미안해'라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아파하는 타인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니 쉽사리 연민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의 인생으로 들어가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연민하고자 하는 노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로기완을 만났다』 라는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추적하는 일일지도, 누군가가 남긴 일을 이어가는 일일지도, 아니면 그냥 깊은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모습으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위태롭고 유약하며 비틀거리는  『로기완을 만났다』 속의 사람들을 보고 연민을 느끼고, 어느새 주인공이 로기완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따라 하고 있는 내 모습도 아마도 그런 일의 연장선이 아닐까. 타인의 생生을 파고들기로 결심하는 것과 수많은 삶을 담은 문학을 읽는 것은 그 성격이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한 정을 품고 있기에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13쪽,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은 그의 피로하고 괴로운 듯한 얼굴을 벗어나 조금은 어두침침한 편집실 전체로 나아갔고, 이내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우리의 친밀했던 숨소리와 목소리까지 담아냈다. 순간, 모든 것을 화면처럼 남게 하는 인간의 기억 구조가 싫어졌다. 그래서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잊고 싶은 것과 함께 드러날 수밖에 없는, 볼륨을 줄여놓아도 고스란히 소리까지 재생되고 마는 그 체계적인 기억의 구조가.

57쪽,

박이 빌려준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슈트케이스를 현관 앞에 세워두고는 그대로 거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는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

91쪽,

로는 조금 걷다가 멈춰섰고 다시 걷다가 주저앉았다. 수없이 불운을 짐작해온 자의 어깨는 끊임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그 슬픔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가상의 슬픔이었기에 마음의 밑바닥까지 닿지는 않았었다. 그 짐작이 현실이 되었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뒷모습은 어느새 구체적인 슬픔으로 바뀌어 내 가슴에 얹어진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로가 다급하게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다.







113쪽,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끝날 때까지 상상 속 로의 눈물은 닿을 듯 닿지 않는다.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사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자주 나를 괴롭혔지만 가끔은 위안도 되었다. 나의 한계에 대해서 적어도 나만은 침묵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년 전,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모습으로 온몸을 떨며 오열했을 로의 모습을 상상의 영역에 남겨둔 채, 나는 끝내 젖지 않은 내 메마른 얼굴을 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린다.

166쪽,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에게 미래는 선택할 수 있는 패가 아니다.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선택되어버린 길을 가야 한다는 단순한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매순간 불안해하면서, 사소한 기쁨은 포기하기도 하면서, 절대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으나 절대적으로 위험한 길보다는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가고, 걷고, 결국엔 살아남아야 한다는 빈약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의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82년생 김지영도 아닌, 그보다 더 나은(게 맞는지 줄곧 의심하지만) 시대에 태어난 '여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어갔던 일들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일들을 회상했다.


 ​우리 엄마는 기가 막히는 시집살이를 했다.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이 기가 막힌 시집살이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분가를 하고, 늦둥이 아들을 낳자 놀랍게도 완화되었다. 가부장적인 제도에 익숙했던 우리 가족의 남자들은 엄마의 일들을 방관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여자아이들의 목을 조르는 장난을 하는 남자아이가 있었고, 어떤 수업 시간에는 50대 남자 선생님이 얇은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학생들의 가슴 속으로 집어넣곤 했다. 그것을 넣어서 마음을 알아본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였다.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도 몰랐던 아이들은 그를 학교에 찌르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술 취한 할아버지가 며칠에 걸쳐 계산대에 와서 말을 걸어 경찰에 신고했더니, 찾아온 경찰은 "그냥 이야기를 받아주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했다. 손을 덜덜 떨며 전화를 걸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민망해졌다.

 그 밖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한마디로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겪고, 보았다"고.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 사회의 여성 차별로 인해 미쳐버린 여자의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기까지의 결혼 생활까지, '김지영'이라는 여자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순서대로 해나간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 여자들이 느낄 수 있는 차별이 모두 모였다. 믿을 수 없고, 소름 끼치고, 화나고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어서, 진짜 이 모든 것들을 겪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으며 내가 모르고 당했던 차별의 장면들을 기억해내면서, 이 책의 목적은 우리나라의 여자들 모두가 '김지영' 씨 같은 우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김지영 씨가 겪었던 수많은 차별의 일부, 혹은 단 한 가지라도 겪어보거나 목격한 사람들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을 인지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산아 제한정책이 펼쳐지고 여아 낙태가 빈번했던 시대. 소설 속 주인공의 일부이고 전체였던 '김지영 씨들'은 많이도 울었을 것이고, 그나마 페미니즘이란 것이 조금씩 대두하기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울고 있을 것이다. 소설의 끝, 화자이자 남자인 정신과 전문의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그러나 뒤이어 그는 자신의 병원에 있는 여직원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내뱉는다. 결국,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은연중에 폭력적인 시선을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 빠르고, 법과 제도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가치관은 느린 걸음이다. 소설 속에서와, 현실에서, 이 차별을 인지하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것에만 희망을 걸기에는 이 사회가 많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여성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들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기를 바란다.

 


 


25쪽,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68쪽,

어머니가 여자에게 연락해 택시비라도, 작은 선물이라도, 안 된다면 커피 한잔과 귤 한 봉지라도 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여자는 끝까지 거절했다. 김지영 씨가 직접 인사해야겠다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 여자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32쪽,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도 많이 생기겠지."

김지영 씨의 말에 정대현 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아니요‘ 칸에 표시를 하는 김지영 씨의 마음이 왠지 헛헛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165쪽,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년 전 우연히 그의 강연회를 참석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승우 작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그때는 고작 그의 책 한 권만 읽은 게 다였고, 그의 신작 장편 소설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 나는 대학생 기자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 때문에 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경험했다. 작가의 이름을 건 강연회에 모인 독자들은 광적일 정도로 '이승우' 문학에 취한 것 같았다. 그의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나열하고, 작품에 나온 일부 문장을 읊는 독자들에겐 극진한 존경과 사랑이 느껴졌다. 아주 열띤 광경이었다. 그 시기에 갔던 강연회 중에서 독자들이 동질감과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 제일 돋보였다.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런 마니아층에 끼고 싶었다. 나도 그의 문학에 빠져 보고 싶었다.

 ​그때의 내 생각은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전에 사랑하게 될 거라고 선포하는 어처구니없는 말과도 같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만족감이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의 문학은 '당연히', 그리고 '무조건'이라는 단어가 언제든 붙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결국, 소설가에게 소설이란 '다른 방식으로 쓰는' 일기장과도 같다고 표현한 것인데 이승우의 소설들은 더 비밀스럽게 들어가는 느낌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밝히고 싶지 않은, 가장 숨기고 싶은 내밀한 마음들, 이를테면 마음의 짐, 부끄러움, 죄책감, 죄의식과 같은 것들을 아주 샅샅이 긁어내는 것이다. 『오래된 일기』라는 책은 이러한 작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들을 담았다. 그래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오래전에 땅속에 깊이 파묻어두었던(33쪽)" 죄의식 같은 것들이 어떤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분출되고 마는 상황들을 그렸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쉽사리 꺼낼 수는 없었던 그런 일들을 일기장 속에 풀어놓은 듯이 말이다. 이는 <오래된 일기>와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실종사례>와 같은 작품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눈여겨볼 점은 작가 죄의식의 정체가 조금 특이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타인도 의도하지 않은 죄의식이 마음 깊은 곳에 깃든다. "끼어든 것들이 삶을 이룬다. 아니, 애초에 삶이란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18쪽)"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뜨거운 기운을 감지할 때, 그것에 대응하는 방식들이 이 소설에 아주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정남진행>이라는 제목의 연작소설 두 편은 작가가 중요한 소재로 내세우는 '죄의식'과 같은 것들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용서하는지에 대하여 풀어내기도 했다.


 좋은 문장을 음미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야기적인 재미 (놀라움에 기반을 둔)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이승우 소설의 특징은 『오래된 일기』 속에도 여전했다. 또한,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이야기 중간중간 '쓰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드러나 있는 ('오래된 일기', '전기수 이야기', '방') 부분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작가에게 애정이 깊은 독자로서 다락방 깊은 곳에 숨겨놓은 일기장을 꺼내보는 느낌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독서였다.

 


 

29쪽, 오래된 일기

그는 언제나 내 문장의 첫번째 독자였다. 그 독자는 대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의 변화가 또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온 신경을 다 기울여야 했다. 나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마침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어떤 문장은 지우고 어떤 문장은 비틀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한 것은, 사실은 그였다. 내 문장은 자주 그가 원하는 대로 씌어졌다. 독자는 사실상의 작가였다.

​72쪽, 타인의 집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는데, 그 순간 자기가 걸치고 있는, ‘보석싸우나‘라는 글자가 박힌, 목둘레가 늘어나고 색깔이 누렇게 바랜 티셔츠에 눈길이 갔고, 울컥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의 감정상태가 상당히 정확하게 전화기 너머의 그녀에게 전달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57쪽, 실종 사례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심지어 악수를 할 때도 그랬다. 그나 나나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그가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서두르지도 않고 걸어갈 때 나는 잠깐 내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봉투를 떠올렸다. 그의 운동화가 저벅저벅 소리를 냈다. 아니, 그것은 빗물이 내는 소리였던가. 흠뻑 젖은 옷이 달라붙어 드러난 그의 몸은 앙상하고 왜소했다. 나는 쏟아지는 비가 그의 몸을 흐릿하게 지워 없앨 때까지 막연히 서서 바라보았다. 의외로 감정이 평평했다. 무대를 가리는 막처럼 검은 비가 세상을 닫았다. 비로소 그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8쪽, 방

나는 비로소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놓고 전원을 켰다. 이제 글을 쓴다! 글을 이제 쓴다! 선언문을 벽에 붙이는 기분으로 그 말을 몇번이나 했다.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나의 주문이었다. 나는 이제 링에 올라가라고 종을 치고 있었다. 종소리는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데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링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역겹거나 친근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역겨우면서 친근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방향제를 뿌리지 않은 까닭이다.


​203쪽, 정남진행(行)

아무리 훌륭한 산 사람도 훌륭하지 않은 죽은 사람에게 떳떳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그냥 흐느껴야 하고, 나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내가 그의 넋두리 상대가 된 것은 공교로운 일이고, 그것조차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록 시시하고 늘 삐걱거리는 연애였다 하더라도 그녀와의 1년 남짓한 인연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친구
앙꼬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왜 이 책을 순간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읽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온통 어두컴컴하고 썩 이쁘지 않은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단순한 제목에 끌렸을 수도 있다. 뭐 이유는 언제나 그랬듯이 여러 가지다. 그러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아, 괜히 덤벼들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갑자기 푹 주저앉았다.

 상상치 못한 리얼함을 마주할 땐, 온몸에 주눅이 든다. 책 속 현실에 압도당한다. 상상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만화'는 정도가 더 심하다.

 

앙꼬 작가는 자신이 "사회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왔다고 전작에서 밝혀왔고, 그의 다른 책 『삼십 살』과 『열아홉』에서도 자전적 이야기를 솔직하고 위트있게 담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앙꼬의 열여섯'을 회상했으리라 짐작하는 『나쁜 친구』는 방금 언급한 두 권의 책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만화는 주인공 '진주'가 경험했던 청소년 시기의 비행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단순한 재미, 부모님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된 그의 일탈은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가출을 해서 단란주점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시도하기도 했다. '진주'는 뭐든지 능수능란한 친구 '정애'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게 신기하고, 스릴있고, 뭐든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가 어딘지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은 들었다. 친구 '정애'의 집에는 매일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문신을 하고, 술을 마시고 화장을 했다. 이혼한 아빠는 폭력이 일상이었다. '진주'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화목함과 부유함이 부끄러웠다." 나의 행동에 죽일듯 달려드는 아빠가 있었지만, 기도하고 매달리며 기다리는 언니와 엄마가 있었다. 따뜻한 집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그땐 부끄러웠는데, 한줄기 희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만화가가 되어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게 된 '진주'가 우연히 어른이 된 '정애'를 마주치고 난 뒤, 그는 이 모든 경험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잡아준 사람이 있어서 잔인한 세계를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그리고 실제로 상상을 하기도 한다. 단란주점의 언니가, 내가 아닌 '정애'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고.

 

 "난 더이상 그곳에 속해있지 않으니… 재미있던 일은 모두 이야깃거리로 남았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고 난 즐거웠다고,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고 만족했다. 그래서 그날 내가 너를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코 만만찮은 스토리와 자전적 요소를 고려할 때, 작가는 이 만화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꽉꽉 녹여낸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자신이었을) 그들을 질책하거나 힐난하지 않고, 드러내놓고 반성하지 않고, 주저하며 핑계대지도 않으며, 그냥 그대로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만화 한 컷에 담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와, 그가 '서른 살'이 되어 '앙꼬'라는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의 어려운 시간들을 담담하게 끌어나갔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좋아, 어두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집중하며 읽어내릴 수 있었다. 앙꼬 작가의 『열아홉』, ​『삼십 살』의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