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지음 / 첫눈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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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바쁘고 팍팍한 일상이라도 주변을 서서히 둘러볼 수 있는 순간은 온다. 길거리에서 잠시 시간이 남아 머무를 때,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릴 때, 카페에서 잠시 딴생각을 할 때. 티 나지 않게 사람들의 모습을 살짝씩 들여다본다. 약속시간에 늦은 듯 헐레벌떡 뛰고 있는 사람,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친구를 배웅하는 사람,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사람, 무거운 배낭과 딱딱한 안경을 쓰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평범하지만 자못 특이하게도 보인다. 북적한 도시의 공간 속에서 서로의 긴 숨 ― 일상의 내음 ―이 섞여 알아차리기 힘들 뿐.

모자를 좋아하고, 모자라서 그렇다는 짧은 소개 이외에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필명 모자 작가의 글도 비슷한 모습이다. 뭐든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 특이하기도 하다 (표지도 그렇다. 그냥 제목만 떡하니 쓰여있는데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편집이라서). 작가는 <숨>이라는 책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품은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혹은 그녀라고만 불리지만, 이야기는 어찌나 풍부한지. 어떤 사람은 이별을 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고, 어떤 사람은 시큰거리는 배를 안고 추위 속에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기억하며 ‘인연’을 생각한다.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 때문에 이들의 모습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숨’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뚜렷이 나타나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역할과 직업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나는 ‘각자의 일상, 혹은 일생’의 은유적 표현일 거라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읽다 보니 이전에 만났던 ‘양귀자’ 작가의 인물 소설이 떠올랐는데, <숨>의 정보를 보니 에세이 분류에 속해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너무나 소설 같지만, 에세이 같기도 한 독특한 책. 게다가 잠깐씩 시로 쓰인 이야기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와 그녀,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확실히 알 순 없으나, 작가의 눈은 꽤 깊고 따뜻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와는 다른 상황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여느 때보다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 혹독한 추위, 그리고 삶이 온통 겨울이었던 사람들도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기를


17쪽, <초콜릿 장식>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짝을 버린 신발 한 짝이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여기구나. 버려지는 것도 버리고 떠난 것도 결국에는 마찬가지겠구나. 얼룩지고 찢기고 외로워지는구나. 한 켤레의 신발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를 닮았겠구나.

69쪽,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
마음을 지키려고 경비 일을 한다니 말이 안 되지. 상처받는 일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딱해진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경비원이 되고 싶었던가. 하긴, 예전에 다니던 회사도 그냥 다녀야 하니까 다녔지. 그땐 다들 그랬으니까. 그래도 예전에는 사는 게 그럭저럭 재밌을 때도 많았던 것 같은데.

87쪽,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유모차에 담긴 어떤 이의 삶은, 그믐에 기대어 종이를 그러모으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그녀는 흩어지는 삶을 대신할 용도로 폐지를 주웠는가. 진정 담고자 했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폐품이 대신 차지해버린 삶의 자리를 언제고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유모차는, 그녀에게 휴식인가 족쇄인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자의 단막은 심오하였고 나는 어느 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129쪽, <결국 그녀는 네버랜드로 떠났다>
그녀는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었다. 볼이 빨개질 정도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종이 치고 나서야 교실로 돌아왔다. 친구 몇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바람에 괜찮아진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괜찮지 않아졌다. 아직도 엄마의 이름이 얼굴에 남아서 친구들이 물어보는 걸 테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친구들이 엄마의 이름을 잊어버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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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하며 영어한다 - 기초 필수 회화패턴 100
강다흔 지음 / 키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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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영어 회화를 유창하게 하진 못했었지만, 관련 없는 일을 하고 나이도 들어가면서 영어를 쓰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은 더 커지고, 어쩌다 외국인을 만나면 목소리는 수그러들기 일쑤였는데, 영어권으로 여행을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당황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아주 유창하게는 아니지만 자신 있게 영어를 말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배우고 하나라도 더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어르신을 보니 영어는 자신감, 그리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화사한 표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나는 여행하며 영어한다>는 저자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실제로 외국인과 한 대화를 모아 ‘필수 회화패턴’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그가 깨달은 것은 진짜 여행 상황에서 필요한 영어는 그동안 여행영어 책에서 본 정석, 영어회화가 아니라, “저 중국인 아닌데요” 뭐 이런 말, 아니면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려서 경찰서에서 진술해야 하고, 외국과는 한국인의 나이 계산법을 설명하는” ‘실전 여행영어’였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쓰일 수 있는 영어를 다 습득하고 외울 수 없으니, 패턴으로 설명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 여행하는 자유 여행가였기 때문에. 가이드를 따라가도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듣다가 영어를 배운다. 남들하고 말하다가 영어를 배운다. 그저 닥치는 대로 말하다가 배운 영어패턴에 단어만 바꿔가며 쓴다.” (11쪽)

 

 

 

100가지의 패턴을, 저자가 직접 영어를 사용했던 상황 속 대화와 응용할 수 있는 문장들을 통해 배운다. 직접 읽어보니 정말 의외의 상황들이면서도, 진짜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 만약 벌어진다면 결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상황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저자는 여행지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문화재 혹은 기념비를 왜 밟으면 안 되는지’, ‘홈스테이를 바꿔줄 수 있는지’, ‘분실물을 찾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추천하는 여행지가 있는지’ 와 같은 실전 영어 회화를 사용했다. 패턴의 난이도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페이지마다 단어의 설명과 tip이 꼼꼼하게 설명되어 있어 영어 왕초보도 무난하게 학습할 수 있을 듯하다.

 

 

 

100개의 패턴이 완료된 책 뒤쪽 부록에는 해외에 나가는 10가지 방법을 설명한 페이지와, 상황별 여행영어 100 (이건 여행영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패턴과 유사하다), 외국인 친구들과 우정 쌓는 5가지 방법도 소개되어 있다. 이 책만 천천히 연습하면 정말로 요리조리 잘 써먹을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영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mp3 파일도 책 앞쪽에 인쇄된 qr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원어민 발음을 통해 실전 상황에서 듣고 말하는 연습을 해볼 수 있다. 또한 스토리마다 저자가 직접 연주한 피아노 (무려 자작곡!) 배경음악 또한 수록되어 있어서 함께 즐겁게 공부할 수 있다. 상황별 패턴이나 부록, 피아노 파일 등을 보니 서문에서 언급했던 ‘말문이 막히는 여행자를 도와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세심한 마음이 다시금 느껴진다. 가볍지만 들어갈 것 쏙쏙 다 들어가 있는 영어책으로 올해는 자신감 있게 영어하며 여행할 수 있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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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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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일들이 모두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그러나 뭉뚱그려 생각해보면 나는 속 썩이는 딸은 아니었어도, 매사에 무관심한 딸이었던 것 같다. 고마움은 알았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미안함을 말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부모님의 표정과 말을 읽어내지 못했고, 만약 읽어낸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한테만 일어났던 일은 아닐 것이다. 청소년기, 정도와 상황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는 누구나 이런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족’이란 존재가 참을 수 없이 어렵고 혼란해지는 시절.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억울하게 늙기만 하는 건가, 정말 좋은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걸까. 다행히 있긴 있더라고. 그게 뭐냐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정을 이해하려고 연습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라는 제목의 소설 속에서 이런 성장의 시간들을 재미있게 표현하는데, 바로 이 구절이다. 이제 어른이 되었고 그런 시절이 완벽하게 끝나버린 것 같진 않지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생각하는 일은 꽤 늘었다. ‘감정을 이해하려고 연습하는 시간’. 아마도 그 연습의 시간들은, 내가 지금의 부모님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을까.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로만 쓴 소설이다. 2016년에 사는 은유라는 소녀가 아빠의 제안으로 1년 뒤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이 편지는 우연히 1982년에 사는 (동명의) 은유라는 소녀에게 닿게 된다는 이야기. 두 소녀 모두 이 믿기 힘든 시간여행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장차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시간보다 과거의 시간이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 현재의 ‘은유’가 편지를 쓰고 부치는 동안, 과거의 ‘은유’의 시간은 부리나케 흘러간다. 어느새 과거의 ‘은유’는 현재의 ‘은유’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산 ‘언니’가 되어 있다.

 

현재를 사는 은유는, 아빠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엄마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과거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현재의 시간이 천천히 머물러 있다면,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엄마라는 존재를 찾는데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둘은 약간의 힌트를 나누고, 점점 엄마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도 점점 가까워진다. 시간이 맞닿는 지점에서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될까.

 

마냥 귀여운 시간여행 소설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몇 페이지를 들추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목은,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시간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가족이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서 버둥거리는, 가장 예민한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동시에, 부모님의 마음 또한 놓치지 않는다. 누구나 겪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침착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 꾸밈없고 순수한 소설이 주는 감동은 의외로 어마어마하다.

 

 

101쪽,
막상 언니에게 아빠에 대해 말해 주려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아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지 놀랄 정도야. 아빠만 나한테 노관심인 줄 알았더니 나도 만만치 않았나 봐. 서로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없는데 우린 어쩌자고 아빠와 딸이 된걸까.

146쪽,
하여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족이라고 해서 네가 원하는 모습대로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란 뜻이야. 어쩌면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167쪽,
사실 언니 편지를 보고 나니까 혼란스럽긴 해. 만약 언니가 찾은 엄마가 내가 그리워하고 궁금해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면 어쩌지? 내가 원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어서 실망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어.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 거야. 나는 엄마가 꿈꾸던 딸의 모습일까…….

219쪽,
있잖아 언니, 아빠랑 나랑 같은 일직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양끝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내가 달리기를 멈춰 버린 거야, 그리곤 투덜거리는 거지. 아빠는 왜 더 빨리 달려오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나는 투덜대기만 하고 달리기를 멈춰 버렸어. 아빠는 내가 달리지 않는 만큼 더 많이 달려와야 했어. 길이 그렇게 멀어졌는데 한 번도 투덜대지 않고 나만 보면서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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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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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소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의심에, 또 다른 의심이 붙어 크게 불어나 드디어 '확신'이라는 것을 할 때까지 의심을 하는 자는 심각한 불안에 시달린다. 이 불안의 정체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온다. 그런데 의심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의심을 받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가 겪는 상황과 경험들이 이상한 것일까? "이것은 자연스러운가? 그러한가?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강화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다가 기어코 비밀의 장막을 걷어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호수 바닥의 기다란 물건을 손으로 더듬거나 ( 「호수―다른 사람」), 참을 수 없는 악취의 그 방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

 

그러나 확인된 실체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1인칭 화자의 서술을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긴장감을 머금은 채 숨 쉴 틈 없이 그의 발자취를 따른다. 주인공은 의심하는 것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 작가는 '왜', '어째서'에 집중하게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주인공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다. 이러한 장치는 표제작인  「괜찮은 사람」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운 좋게 그런 남자를 만났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주인공은 참 괜찮아 보이는 남자에게 새로운 면을 자꾸만 발견한다. 연이은 의심, 혹은 착각. "하필이면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가 있었"고, 하필이면 차를 세운 곳이 피에 젖은 도축장이고, 하필이면 말다툼이 벌어질 때 실수로 그는 핸들을 꺾었다. '하필'이라는 말 건너엔 무엇이 있었길래.

 

 '하필'이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여성폭력의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떠한 이유도 없이 "상대방이 원했기 때문에" 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보복이 두려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하필 그곳에 있어서, 하필 누구와 닮아서, 하필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와 있어서, 하필 짧은 옷을 입어서……. 소설집 『괜찮은 사람』 속에 다뤄진 다양한 여성 폭력의 사례들은 여성들의 이유 모를 불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숨겨진 것도, 지나치게 드러낸 것도 아닌 작가의 쓰기 방식은 능수능란하다.

 

그 밖에도, 정당함이 무시되는 사회와 그것을 알면서도 온몸을 부딪히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 「당신을 닮은 노래」는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마지막에 배치된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이라는 소설은 폭력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멀어지는 두 연인을 그린다. 마치 절정에 올랐다가 사르르 사그라진다. "끔찍한 일이죠. 사랑했던 사람이 불행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는 건.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행동한다는 것도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선명한 의도로 그려낸 소설들은 '강화길'의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게 한다.

 

 

 

 

 

호수에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강간을 당했다. 두들겨맞았다. 왜냐하면 상대가 원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원하지 않은 일을 당했다. (…) 그러나 자잘한 돌멩이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냈던 그 소리에 대해서만, 오직 그 이야기만 사람들의 입에 끈질기게 오르내렸다.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그랬어야지. 그래. 그랬어야지. 그러게 호수에 왜 갔느냐고? 왜 왔느냐고? (‘호수-다른사람‘中)

이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종의 제자리 걷기였다. 누구도 이 걷기가 끝나리라고 쉽게 낙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는 걸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가장 힘들게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모두 힘들고, 그래서 모두의 마음은 함께 가난했다. 단지 나만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불안이었다. (‘괜찮은 사람‘中)

"정말로 가능성이 있는 사람 말이에요, 선생님."
엄마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의 말이 잘못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는 약간 억울했다. 그래서 더욱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을 닮은 노래‘中)

괜찮아 기채야.
지금도 가끔, 은영이 글자를 읽는 척했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무언가 느껴진다.
그걸로 충분하다. (‘눈사람‘中)

나는 잘못 기억하고 있었어요. 왜인 줄 아십니까? 그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네. 아니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요, 분노, 분노입니까? 그것이 다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었습니다. 파업했지요. 체포되었습니다. 단지 화가 나 있던 것뿐인데 당신들은 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더군요. 혹시 분노와 용기는 같은 말입니까?
또 하나 못 알아든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 없는 것과, 대신할 것이 있는 것.
둘 다 같은 겁니까?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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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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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 땅에 지하 철도는 존재했다. 그것은 노예 탈출 비밀 조직이었다. 그러나 소설과 달랐던 점은 이 지하철도가 비유적 표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장', '기관사'로 칭했고, 도망 노예들을 '승객', 그들을 숨겨주는 이들의 집을 '역'으로 부르는 등 실제 철도 용어를 은어로 쓰면서 1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로 이끌었다 (346쪽)"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수많은 노예들이 지하철도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희망의 길을 통해 그 지긋지긋한 '남부'를 빠져나왔다.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숨겨진 철도가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에 착안해 쓰였다.

 

그러나 상상은 단지 소설의 흡인력을 높여주는 장치일 뿐이며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현실'이었을 끔찍한 광경들이다. 19세기 미국의 인종 문제를 다룬 문학들과 마찬가지로, 책은 문자 바깥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 참상들을 드러낸다. 사소한 이유와 주인들의 변덕으로 흑인들은 온갖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모욕을 당해야 했다. 가격이 매겨지고, 팔려간 곳에서 죽을 때까지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유를 찾아 떠났다가 잡혀온 이들의 끔찍한 죽음을 두 눈으로 본 그들에게는 탈출은 곧 죽음이었다. 혹시나 탈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거대한 감옥이자 지옥이었던 그곳에선 사시사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주인공 '코라'라는 한 흑인 소녀의 탈출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코라의 시점만이 아닌 그 땅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죽을 때까지 농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목화밭에서 피 흘리며 죽었던 코라의 할머니 '아자리', 딸을 버리고 탈출했지만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코라의 엄마 '메이블', 코라와 함께 새로운 삶을 갈망했던 '시저', 그리고 노예사냥꾼 '리지웨이'까지. 그들의 목소리는 온 평생 자유를 생각했던, 혹은 자유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당시 흑인들의 삶을 재현해낸다. 그나마 큰 용기와 희망을 품었던 소설 속 '코라'의 탈출도 예상한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한고비를 넘어 새롭게 밟은 '역'에선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게 하는 장애물들이 펼쳐진다. 끔찍한 것은 그들을 속이는 가혹한 현실들이다. 평화로운 곳으로 여겨졌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자유의 숲'은 사실 훼손된 시체들이 끊임없이 걸려 있는 죽음의 길인 것처럼.

 

그러나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을 무릅쓰고 누군가의 자유를 위해 힘써주는 '지하철도' ― 여기선 비유적 표현 ― 의 정의가 존재하고, 어두운 과거를 인식하고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남겨준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자유를 침범하진 않았는가. 그때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는 자유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박진감 넘치는 소설 속의 소중한 메시지가 가슴에 담긴다.


 

82쪽,
여기서 먼 곳, 그렇게 밖에 말해줄 수 없구나. 그 많은 노선이 바뀌는 걸 바로바로 알기는 힘들다. 완행열차, 급행열차, 닫히는 역도 있고, 행선지가 늘어나기도 하고. 문제는 어떤 종착역이 다른 종착역보다 더 마음에 들 수도 있다는 거야. 역이 발각되기도 하고, 노선이 끊기기도 한다. 기차에서 내릴 때까지는 저 위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절대 알 수가 없어.

136쪽,
훔친 땅에서 일하는 훔친 몸들, 그것은 피로 가는 보일러, 멈추지 않는 엔진이었다. 스티븐스가 설명한 수술로 백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훔치기 시작했다고 코라는 생각했다. 당신의 배를 갈라서 피를 뚝뚝 흘리는 미래를 들어내는 것. 누군가의 아기를 뺏어 간다는 건 바로 그런 것 ― 미래를 훔쳐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고, 훗날 그들의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살리라는 희망마저 앗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203쪽,
자유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바뀌는 것이었다. 숲을 가까이서 보면 나무들로 빽빽하게만 바깥에서, 텅 빈 초원에서 보면 그 진짜 윤곽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자유가 된다는 것은 사슬과는 혹은 얼마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298쪽,
그 전날 밤 테네시에서, 리지웨이는 코라와 엄마를 미국의 계획의 결함이라고 했다. 그 두 여자가 결함이라면 이 집단은 무엇이란 말인가?

319쪽,
한 가지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예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팔려 가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여동생이 우두머리나 주인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쇠사슬 없이, 멍에 없이, 새로운 가족과 함께 오늘 여기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이 자유는 속임수라고 말했습니다 ― 하지만 여러분은 여기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달립니다. 저 밝은 보름달 빛을 따라 안식처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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