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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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더위에, 바깥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니 가만히 책을 읽기도 힘든 여름이다. 더운 날들엔 기분 좋고 상쾌하거나, 때로는 서늘하고 오싹한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은 나와 관계없는 줄 알았는데 정도가 심해지니 너무 우울한 책은 몸과 머리로 피해지는 듯하다.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오묘한 제목이었다. 서유미 작가의 깔끔한 문체를 기억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고르기도 했지만, 쓸쓸한 기분과 괜찮다는 위안을 동시에 주는 이중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어보고 싶어진 이유도 있었다. 여름이니까, 유난히 힘든 여름이니까, 쓸쓸한 기분보다는 ‘괜찮다는 위안’을 붙잡아두고 책을 읽었다. 퍼즐처럼 꼭 알맞게 비슷한 분위기로 맞춰진 단편들이 나왔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지만 비슷한 상실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했다. 청춘이라 불리는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부터, 이제는 엄마가 되어버린 딸의 이야기까지, 소설과 소설을 거쳐 시간은 흐르고 각자가 삶을 버텨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상실을 버텨낼 수 있는 것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을 테지만 그중 별것 아닌 것이 소소한 행복이나 희망을 주기도 할 것이다. 꽤 유명한 로고가 박힌 달콤한 케이크 상자 (‘에트르’), 뜻밖의 인연이 진심으로 쓴 편지 (‘개의 나날’),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늘 함께 하던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무심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 (‘휴가’), 이제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어렴풋한 미소 (‘변해가네’)와 같은 것들이. 이런 것들을 보며 우울한 이야기를 견뎠던 나처럼, 소설 속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은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세월이 흘러 엄마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는 <변해가네>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24시간 사우나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후의 삶>이었다. 후반부에 나온 두 작품이었다. 초반부터 등장한 단편들이 우울하고 막막하며 때로는 허탈한 감정까지 드는 와중에, 우울함과 비릿함을 넘나드는 단편에서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는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서유미 작가의 장점은 깔끔하고 담백하면서도 감정을 품은 문장과, 장황하지 않고 편안하게 쓰여지는 데 있는 듯하다. 돌직구도 아닌 화려하게 커브를 돌며 들어오는 공도 아닌, 받는 사람의 자세에 맞추어 적당한 속도와 거리로 날아오는 공처럼 말이다. 그의 장편을 흡족하게 읽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어 기대감 때문인지 이번 소설집은 일부 단편이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눈에 밟히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다.

 

 

 

● 20쪽, <에트르>
집에 대한 고민은 새해맞이 케이크로 어떤 걸 고를까,처럼 간단하거나 달콤하지 않았다. 그대로 살겠다는 건 돈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고 이사를 가겠다는 건 서울 밖으로 밀려나거나 큰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이 딸린, 두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했다. 휴식시간이 줄어들거나 휴식의 공간이 좁아지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울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 58쪽, <개의 나날>
나는 이제 기억조차 희미한 초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을 떠올려봤다. 교실과 운동장에 흩어져 사진을 찍던 사람들 사이에서 몰래 셔터를 누르고 사라졌을 장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를 보러 왔으면서 나에게 오지 않은 장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또한 버거웠다. 사진 뒤의 흰 봉투에는 졸업과 입학 축하,라고 쓰여 있었고 5만원이 들어 있었다. 중학생 이후의 사진은 서너장뿐이었다. 머리를 바짝 올려 깎고 여드름이 난 나는 표정이 침울하고 더 뚱뚱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였다.

● 85쪽, <휴가>
부탄가스와 라면과 번개탄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면서도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평일 오후에 등산복을 입은 사내가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은 사물이고 비닐에 싸인 상태고 어떤 가능성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비닐봉투 안에 든 것들이 대머리 사내와 함께 멀어져간다는 게 불길했다. 은호는 누구라도 이런 장면을 보면 서늘한 기분에 휩싸이는 건지 자신이 특별히 예민한 건지 생각해봤다. 오늘이 이상한 건지 원래 삶 속에 이런 장면이 늘 섞여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 171쪽, <변해가네>
"엄마는 어떻게 애를 둘이나 낳았어? 이렇게 힘든데."
나 역시 엄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애 셋을 데리고 혼자 어떻게 살았을까. 이제 엄마는 지난 일의 고단함을 다 잊었을까. 아니면 현재가 희미해지니 과거의 장면들이 더 또렷이 떠오를까.
환갑쯤 되고 보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그저 그때 힘들었지, 라는 전체적인 인상만 남아 있을 뿐 세세한 내용은 흐릿해졌다. 이 일과 저 일의 경중, 아픔과 후회가 뒤섞여 구별이 어려워졌고 몇개의 장면, 몇마디의 말, 표정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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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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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썅년이 될까봐 속으로 삼키고 삼켰던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으로 세련되고 통쾌란 한방을 날릴 수 있는 여자가 되길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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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세월호 추모관까지
김명식 지음 / 뜨인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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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공간에 스며든다. 어떠한 과학적 이유를 댈 것 없이, 기억은 선연히 공간 속에 남거나, 공간을 통해 기억을 추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건축물이나 문화재를 방문하고 직접 발로 걸을 땐 온몸으로 기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기온은 적당한데 소름이 돋는 것 같고, 반대로 울컥해 열이 올라올 때도 있다. 건축은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 작용하고 있을까.

 

 건축은 잘 모르지만 제목에 쓰여 있는 ‘건축’이라는 단어보다 ‘아픔’이라는 단어에 조금 무게를 실어 미리 겁먹지 않고 읽어보기로 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쉽고 세심하게 건축을 가르쳐주려는 저자의 노력이 초반부터 돋보인다.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공간, 건물과 건축물의 차이, 예술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짚고 넘어간다. “건축은 건축물의 내부성과 도시의 공간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성을 지닌 형태를 만들어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삶의 장치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쪽).” 건축은 예술성과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내부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과, 외부에서 비치는 모습을 동시에 고려한다. 때로는 도시의 상징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고통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건축물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주제에서 거의 빠질 수 없는 공간은 군사정권 대표 건축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김수근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1980년대 후반, 그때 그 시절을 영상으로 재현한 매체들을 볼 때 가장 잔인하게 생각했던 내용들이 담겨 있다. 고문을 받는 자가 뛰어내릴 수 없게 완전히 축소한 창문, 몇 층이나 올라가는지 알 수 없게 하는 계단참이 없는 나선형 계단, 소리를 흡수함과 동시에 벽면 너머로 전달되게 하는 타공판으로 만든 벽…… 그리고 어느 하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것이 없는 ‘의도에 걸맞은’ 완벽한 건축 형태.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을 만든 건축가의 또 다른 건축물인 ‘경동교회’를 걷는 저자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건축가의 아이러니한 행보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뒤이어 그는 평화의 소녀상 옆을 걷는다. 평화의 소녀상이야말로 “타자의 비극이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어 만들어진 가장 명료하고 시각적인 조형물 (97쪽).” 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외진 곳에 숨어 있듯 지어져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방문한다. 소녀상보다 대사관을 더 보호하는 듯 보이는 국가권력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박물관의 위치와 기능에 관해 의아함을 내비친다. 저자의 세심한 관찰력은 다음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복원된 여옥사가 국내 유일의 여성 독립기념관으로 개관된 것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아픔의 기억을 다루고 응시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월호 추모관도 마찬가지다.

 

“도열해 있는 지상의 묘비를 보면서 일종의 부러움이 생깁니다.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 인류 역사에 있어 이보다 더 잔인한 적이 없었던 독일의 역사를 수도 베를린 한가운데에 ‘명료한 시각적 상징’으로 현실화시키고, 가해자인 자신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전 세계에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의무를 다짐하는 명쾌한 이 선언이 어찌 부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209쪽,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 독일 베를린)

 

역사의 아픔을 다양한 형태와 상징으로 재현한 건축물들을 꼼꼼하게 설명하여 전해주는 글 뒤편에는 실제로 저자가 강의를 통해 시민들과 토론하고 의문점을 나눈 내용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책 자체가 일방적이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여정으로 느껴졌던 것은. 고통의 기억을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그곳을 걸으며 공감하고

 

 

● 94쪽,
이 소녀상보다 더 강력한 상징과 의미 전달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술의 형태로 등장하는 비극과 고통의 구체적인 형상 앞에서, 돌아오지 못한 소녀의 빈자리에 누구든 앉아 함께 하자는 소녀상의 소리 없는 외침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은 힘겨운 투쟁과도 같습니다. 비정상이 종종 정상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는 이곳의 풍경 또한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님을 직접 방문해보면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 119쪽,
발 아래 밟고 있는 얼굴들이 내는 소리는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입니다. 대번에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니까요.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들리는 울음소리는 벽을 타고 솟구쳐 끔찍한 비명으로 바뀝니다. 함께 걷는 이가 있다면 소리가 겹치면서 더욱 증폭되어 절규와 아비규환의 공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닥에 깔려 절규하는 얼굴은 어느덧 기차나 수용소 혹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세상은 악마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살기에 위험한 곳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대문에 위험한 곳이라고 했던 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전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이웃이 가고 다음에는 친구가 가고 이윽고 내 가족의 차례가 찾아오는 순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위로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226쪽,
고통을 기억하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기억의 형태화는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그 새로운 부재에 대한 아픔을 딛고 만들어진 추모 공간 혹은 기념비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찬양이고 기억입니다. 예술의 한 분야로 형태화된 고통의 공간을 통하여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려는 것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249쪽,
옆 동료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자 "지겹다, 그만하자. 그만하면 많이 했다"라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내몰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고, 직원들에게 비타민을 챙겨주며 "약 드실 시간입니다"라고 농담을 건네 웃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세월호를 향한 그의 태도는, ‘악의 평범함’ 같은 거창한 말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방심하여 생각의 시간을 늦추면 내게도 당도할 일상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저라는 인간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경비원 감축 표결에 대한 안내문을 읽으며 왜 머릿속에 계산기를 눌러보지 않았겠어요. 방금 현관에서 그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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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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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결혼에 대해 생각할 때, 도저히 오래 견디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드는 것 중에 하나는 어쭙잖은 공동체 생활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을 제외하고, 친족 관계를 위해서나 가족 혹은 아이를 위해서 의무감을 우선으로 선택하고 견뎌야 하는 무수한 행동들이 상상되었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울며 겨자 먹기로 무언가에 소속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어떻게 참고 버틴다 해도 속에서 곪고 있을 스트레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 속에서 어떤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지만, 세상이 완벽하고 밝게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가는 단편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 공동체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바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냉정하리만큼 차가운 무관심만큼이나, 친밀을 가장한 과한 관심 또한 굉장히 무서운 것이었다. 전작에 비해 더 넓어진 그의 장편 <네 이웃의 식탁> 또한 비슷한 의도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는 작은 마을인 시골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네 이웃의 식탁>은 조금 특수한 경로로 모이게 된 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갈수록 떨어지는 출산율, 치솟는 집값의 대안으로 만들어진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세 아이를 낳는 것을 조건으로 도시 외곽 산속에 지어진 열두 세대 규모의 아파트다. 서류와 면접, 추천으로 뽑힌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고, 거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공간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서로 돕고 의지하자는 처음의 의도는 그들의 거리가 차츰 가까워지면서 변질되기 시작한다. 공동육아, 동반 출근, 부부싸움의 공론화, 과도한 관심과 간섭, 가족과 가족 사이에 얇아도 너무 얇은 벽은 점점 공동체의 허울을 드러낸다.

 

 공동주택에 모인 사람들의 다양한 성향만큼이나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제각기 다르게 비춰지는데, 여성을 주체로 쓰인 소설의 특성상 소설 속 여자들의 모습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공동체로 인해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누구는 어떤 이는 한 가족을 챙기기도 벅차 애초부터 공동생활에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떤 이는 공동체를 통해 힘을 얻으며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어떤 이는 이상한 점을 살피면서도 자신 때문에 일이 틀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들은 현실에도 다 있는 사람들이라 누구 하나 '비정상'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이들의 모습일 뿐이어서, 이쪽에 공감을 했다가 이쪽이 이해가 되었다가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의 긴장감 또한 어마어마하지만, 구병모 작가의 숨도 쉴 수 없이 파고드는 집요한 문체는 소설을 더욱 스릴 넘치게 한다. 촘촘하고 날카로우며, 허점을 잡을 틈 없이 몰아치는 느낌이다. 주택 뒷마당에 을씨년스럽게 놓인 큼지막한 식탁의 이미지는 왠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식탁에 앉아 웃음짓고 있는 가족들은 각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출산율과 주거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실마리로 여겨졌던 정부의 '꿈미래실험공동주택'. 무엇도 준비되지 않고, 어떠한 기반도 다져지지 않은 땅 위에서 이 실험은 어쩌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 46쪽,
무엇보다도 며칠 밤을 도려내 가며 몰아친 작업으로 노그라진 몸과 마음 또한 진짜였다. 그림 작업을 하면서는 이 세상 어딘가에 젖병이나, 간 소고기랑 불린 쌀을 넣고 끓인 이유식이나, 그것을 숭고한 과업이라고 주입시키는 목소리들과, 플라스틱 폐기물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회의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장소가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의 작업에 일단 마침표를 부실하게나마 찍고 나면, 세상 그 어떤 소음과 음식물 찌꺼기 위에 드러누워서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50쪽,
자기가 좀 도와줘요. 여보, 가다가 기름 채워 줘야 해? 그 자리에서 생뚱맞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면 요진 혼자 비협조적이고 정 없는 이가 될 판이었고, 요진은 자신이 휩쓸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 그러죠 그래요 아니 천만에요 기름은 무슨, 엊저녁에 가득 채웠는걸요, 했다. 차라리 요진 자신이 먼저 합승을 제안했더라면 그리 꺼림한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을지도……를 생각하자, 객관적으로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도 요진은 자신이 고작 선의를 드러내고 보장받기 위한 선후 관계에 집착하는 예민함의 결정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82쪽,
아이를 낳아 봐야 진짜 어른이 돼. 그전에는 결혼하고 둘이 잘 살아 봤자 소꿉장난이고. 처음 요진은 그 말들이 저마다 스스로를 향한 격려인 줄 알았다. 출산과 함께 인생의 궤도가 틀어졌고 개성이나 욕망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 두는 데 익숙해졌지만 적어도 세상에 값진 생명을 내놓은 생산적인 인간이라는 성취감을 느끼고자 이를 악무는 위안의 제스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 그 말들은 자기 변호에 가까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 모르지 않는다면 그것을 엉성한 뚜껑으로 덮어두거나 나일론사로 봉합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이었다.



● 128쪽,
데면데면하다 그냥저냥. 정말 그런 걸까. 이 상황이 뭐 좋은 금붙이나 된다고 그렇게 묻고 지나가 버린 다음, 훗날 기회가 닿았을 때 다시 캐내어 더 큰 구멍을 만들고. 그러려고 사는 것 맞나, 부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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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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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여자는 없었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억에서 사라져, 얼굴과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전방을 누비며 함께 싸우고 수많은 병사들을 구해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건 모욕의 말뿐이었다. 승리와 패배, 잔혹한 아픔으로 점철된 전쟁의 역사는 단지 남자들의 것이었다. ‘전쟁’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대개 아이 손을 잡고 피난을 가는 여자들의 모습이나, 끔찍한 고통과 피해를 입거나 죽음 앞에 선 모습들뿐이었다. 이전엔 왜 이상하다 생각지 않았을까. 왜 군복을 입고 싸우던 여군들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에 대항했던 여자들의 모습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물론 그 ‘수’와 ‘비율’에 있어서 남자에 비해 지극히 일부라는 이유를 들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의문은 따로 있다. 왜 우리가 여자 병사들을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그들은 언급되지도 않으며, 역사 속에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여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논픽션이다. 작가 스스로 ‘소설 - 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 ‘목소리 소설’이라 불리는 형식을 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텍스트는 풍부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작가가 말하기를,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떠한 의도도 없이 감정으로 인해 변해왔을 ‘그때’의 진짜 진실을 읽어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작가의 노력 덕분에 인터뷰이의 목소리에 함께 딸려오는 떨림과 어조까지 읽힌다. 울음을 머금고, 때로는 추억을 회상하듯 미소를 짓고,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수십 년을 견뎌왔고,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이름과 전쟁에 참여했던 청춘의 얼굴을 남겼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백만 명이 넘었던 소녀 병사, 그리고 책에서 목소리를 전하는 200명의 소녀였던 병사들이 전해주는 전쟁 이야기는 지금껏 들어왔던 것들과 확연히 다르다. 적의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총탄을 뚫고 기어가 육중한 몸의 부상병을 수없이 많이 구해내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그날의 경험을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다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전장에서 터진 첫 생리의 기억, 포로를 연민했던 기억, 바닥에 깔린 시체를 바라보던 기억, 적의 포로가 되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기억, 어떤 여자가 임신한 몸으로 팔에 지뢰를 안고 달려가던 기억……. 너무도 적나라하게 재현된 전쟁의 민낯으로 이 책이 여러 번 검열을 당했다고 하니, 승리와 공훈을 우선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꽤나 불쾌한 기록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검열은, 전쟁이 끝난 후 여자들이 당해야만 했던 냉대와 무관심, 모욕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용서하는게 쉬웠을거라 생각해? 당연히 그들의 눈물을 보고 싶었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기까지 나는 수십년이 걸렸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아군과 적군, 남자들이 뒤엉켜 홀린 듯이 서로를 죽이던 날. 포로가 된 독일 소년에게 빵을 건네주던 날. 생식기가 훼손된 독일 여자들을 발견했던 날. 적에 대한 혐오로 불타오르는 마음과, 생명을 가치있게 여기는 마음이 충돌했던 그날. 여자들은 그렇게 두 개의 본성과 싸우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담담히 넘어가야 하는 전장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쟁은 사람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든다.

 

얼마 전 우연히 한국전쟁 여성 의용군과 관련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군 입대를 자원한 여자들이 가히 삼천 명에 육박했고, 우여곡절 끝에 500명의 여성 의용군이 탄생했다는 사실이었다. 큼지막한 군복을 접어 입고 남자들과 함께 가혹한 훈련을 받고 전장을 누비던 여성들. 여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색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은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결혼과 취업을 위해 오히려 여군 경력을 숨겨야 했다. 그들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여성 의용군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가 듣지 못한 ‘목소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 목소리를 들을 날이 올까.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나는 우리의 감정들로 사원을 세운다…… 우리의 염원과 환멸로. 동경들로. 존재했지만 언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들로.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 일이 워낙 그렇다. 그렇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갔어.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었는데. 얼마나 어렸으면 전쟁중에 키가 다 자랐을까.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 햇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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