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詩 기형도



이수동 - 그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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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1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mong 2006-01-1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쓸하네요...

플레져 2006-01-1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제가 저 마음과 너무 같아서 올려놓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요즘에 딱 어울리는 시라서 올렸어요. (왠 고백? ㅎㅎ)

검둥개 2006-01-13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좋아하는 시예요. 플레져님 잘 지내셨어요? ^^

Laika 2006-01-1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머플러 색이랑 비슷해요...^^

미설 2006-01-1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의 시군요...

반딧불,, 2006-01-1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플레져님 그림 가져오시는 것 정말 예술이여요.............

플레져 2006-01-1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잘 지내셨죠? 저두요 ^^ 어제 여기엔 겨울비가 많이 내렸어요. 오늘 새벽까지도...
멋스러운 라이카님~ ^^
미설님, 아가들 잘 지내지요? ^^ 기형도의 시, 오랜만에 읽어보니 참 좋아요.
반디님, 어쩌다보니..^^

stella.K 2006-01-1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거의 유일하게 알고 좋아하는 오직 한 사람 기형도. 그림도 좋구랴. 가져가야겠소. 대신 추천은 해 드리리다.^^
 

12월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은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詩 황지우



sam vokey - winter twi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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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2-23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639000

그로밋 2005-12-23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 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갔다하려면 시내버스비210원 곱하기4에데
더하기 직행버스비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마나 되나
손을 슬쩍 넣어 본다 동전테가 까끌까끌 한 게 많아야 하는데
손톱 끝이 미끌미끌하다 나는 갑자기 쓸쓸해져서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나 한 끼 떼울까 생각한다
또 그 다음날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대뜸 한다는 말이 뭐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유경이 피아노학원비도 오늘까지 내야 한다고 아내는
운다, 나는 슬퍼진다 나는 도대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제도 그랬다 길 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새끼들 데리고 요즘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근심스럽다는 듯이
나의 경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물었을 때
나는 그랬다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잘 먹고 잘 산다고
그게 지금은 후회된다 좀더 고통의 포즈를 취할 것을
이놈의 세상 팍 갈아 엎어버려야지, 하며 주먹이라도 쥐어볼 것을
아니면, 나는 한 달에 전교조에서 나오는 생계보조비를
31만 원이나 받는다 현직에 계신 선생님들이 봉급에서 쪼개 주신 거다
그래 자기 봉급에서 다달이 만 원을 쪼개 남에게 준다는 것
그것 받을 때마다 받는 사람 가슴이 더 쓰린 것
이것이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다 우리들의 사상이다
이렇게 자랑이라도 좀 떠벌리면서 그래서
입으로만 걱정하는 친구놈 뒤통수나 좀 긁어줄 것을
나의 경제야, 나는 내가 자꾸 무서워지는구나
사내가 주머니에 돈 떨어지면 좁쌀처럼 자잘해진다고
어떻게든 돈 벌 궁리나 좀 해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시지만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친구한테도 증오를 들이대려는
나 자신이 사실은 더 걱정이구나 이러다가는 정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마리 딱정벌레나 되지 않을지
나는 요즘 그게 제일 걱정이구나
<나의 경제> 안도현
생각할게 많은 12월 입니다.

울보 2005-12-23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539009

플레져 2005-12-2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아주 똑 떨어지는 숫자네요~ ^^

그로밋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집에 있는 건가요? 제게도 이 시집이 있는데 안도현시인의 전교조 생활이 잘 드러나는 시 중에 하나지요. 고운 시, 감사해요.

울보님, 구구~ 크러스타 같은 숫자입니다 ^^

mong 2005-12-24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은 누구나 그렇구나~끄덕끄덕

플레져 2005-12-2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12월이 간데요, 흑흑...
 

아버지

아이들은 투명하고 맑았다 깨지지 않도록
손을 잡고 큰 발 잔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었으나
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아이들은 금이 갔고
거기서 자주 울음이 새어나왔다
소를 쓰러뜨려 뻘건 고기를 만들던 큰 손으로
그는 아이들 눈물을 닦아주었다
뻣뻣한 털에 긁혀도 상처나는 흰 얼굴에서
조금씩 슬픈 표정들이 지워졌다 그의 목구멍으로
잠시 소울음 같은 바람이 자나갔으나
그는 표정 없이 웃었다 다만 머리카락과 콧구멍을
잡아당길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머리를 숙였고
짜증내고 투정하는 소리가 들어오도록 귀를 열었다
때로 깨끗하고 낭랑한 웃음 소리가 햇빛에 부서져
멀리 퍼져나가기도 했으나 곧 날씨가 흐려졌고
아이들은 잔물결이 되어 그의 가슴에 차올랐다
찰랑거리는 물결이 갑자기 파도처럼 소리내며
일어나지 않도록 그는 조심스럽게 숨을 쉬었다
물에 떠 있는 것처럼 기우뚱거리는 그의 걸음에
아이들은 찰싹찰싹 부딪혀왔다 떨어지곤 하였다
아이들은 손을 잡을 때마다 딱딱해지고 무거워지는 아버지
자꾸자꾸 커져서 벽이 되고 지붕이 되는아버지

詩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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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2-15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뒷모습을 찍어보고 싶어져요
저는 인물 사진에 약해서...;;;

플레져 2005-12-1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제가 마루타가 되드릴까요??? =3

2005-12-15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2-15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맑은 날의 얼굴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 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는 먼 길의 끝의 평화.
네 간절하고 가난한 믿음이 우리를 울린다.

오늘은 날씨가 밝고 따뜻하다.
하늘을 보니 네 얼굴이 넓게 떠 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몇 개로 보인다.
너같이 착하고 맑은 하늘에
네 얼굴 자꾸 넓게 번진다.
눈부신 천 개의 색깔, 네 얼굴에 번진다.

詩 마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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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2-1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부신 천 개의 색깔....상상해 보는 중
;;;

반딧불,, 2005-12-1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시도 너무 좋네요.

플레져 2005-12-1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상상화, 도면으로 그려주세요 =3
반디님, 그죠? 저두요...ㅎㅎ

2005-12-14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5-12-1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예쁘네요. 이걸로 서재 지붕 맹그러 주세요. 뻔뻔하죠? 흐흐

2005-12-14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12-1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오늘도 푹 주무셔요 ^^
스텔라님, 요거는 그림 폭이 넘 작아서... 재주가 메주인 내게는 어려움. 내가 맹그러준거...얼른 쓰기나 하쇼~! ㅎㅎ

stella.K 2005-12-1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나 플레져님께 삑사리 맞았당~~! 알았어요. 흐흑~
 

좀 쉬세요

쉬고 싶은 만큼 쉬다 가세요.
사는 게 힘들지요.
뭐 좀 해볼려고 해도 잘 되지 않고
자꾸 마음만 상하지요.
모든 일 다 미뤄두고 여기 와서 좀 쉬세요.
읽고 싶던 책도 맘껏 읽고.
듣고 싶던 음악도 맘껏 듣고.
어둑해지면 나랑 같이
술이나 한잔 해요.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고.
전화도 없고 텔레비젼도 없고.
여긴 없는게 많아서
그런대로 지낼만할 거예요.
아무 때나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 하나만 해도
쉬는 값은 하지 않겠어요.
좀 쉬세요, 그러다 고장나요.
한두 해 살다 그만둘 게 아니라면
이따금 세상에서 한발짝 물러나
숨을 좀 돌릴 필요가 있지요

백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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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2-13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아요
플레져님도 쉬세요 ^^

플레져 2005-12-13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쉬어요, 몽님...ㅎㅎ

2005-12-13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5-12-1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플레져 2005-12-1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쉬어요, 몽님, 만두님....ㅎㅎ

2005-12-1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5-12-13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 밥은 누가 주고...ㅠ.ㅠ

플레져 2005-12-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ㅋㅋㅋ 깍두기님, 소현이 해송이 다 컸어요. 해리포터 애들도 다 컸잖아요! 흐흐...
따우님, 제가 써드리고 싶지만 전공이 달라서...흑흑...=3

반딧불,, 2005-12-1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깍두기님하고 따우님 덕에 웃습니다.

플레져 2005-12-1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피할 수 없는 알라디너의 현실, 얼른 낙낙해지길 함께 기원해요 ^^

가시장미 2005-12-1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좀 쉴래요. 이제 자야겠어요. 갑자기 이 시를 보니 잠이 쏟아져서 좋네요. ^-^

야클 2005-12-1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쉬고 싶은데...ㅠ.ㅠ

미미달 2005-12-14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그만 쉬라고 하네요. 낼 모레 성적표 나오는날 ㅠ

2005-12-14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12-14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다 갑니다.

icaru 2005-12-14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데는 않되고, 꼭 저...해가 지는 창가서...쉴랍니다..

플레져 2005-12-1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 잘 쉬었누? ^^
야클님, 바쁘시죠? 토닥토닥...
미미달님, 기운 나는 성적표가 나올거에요!
속삭님, 추천 고마워요. 힘내시라고...토닥토닥...
잉크냄새님, 잘 쉬셨나요? 다행히 오늘은 어질러놓질 않아서 ^^;;;
이카루님, 그래요. 꼭 저기서 쉬고 계세요. 아주 따뜻한 차 한잔 갖고 갈게요.

잉크냄새 2005-12-1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창가는 말이죠~~~~
"노을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며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라는 노래 한소절 읊조리며 쉬어야 합니다요

플레져 2005-12-1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세 노래 한자락이 어울리죠.
은근히 이문세 음색도 청승이 스며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