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뱃사공

                           2학년 14반 플라나리아

허연 공기를 안은 구슬픈 안개속을
오늘마저도 무심히 보낼 수 없어
굽은 허리 바래진 기력으로
나루터 언덕에 섰네.
닳아버린 돛대를 보면
앓고 앓으며 지내온 옛일 아련히 떠올라
사람없는 넋두리에 잠긴다.

삐이걱 삐이걱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었던만
새파랗던 내 시절부터 살며
요란스레 굴던 소리인데......
변치 않을건가 보다.

뒤돌아보면 멀어져가는 풍경인데
한숨은 더욱 더 다가섰고
꿰매고 다듬어도
맺히지 않던 그물살이
낙이라곤
해 지길 기다리는
허기진 맘뿐.



고등학교 2학년때 쓴 자작시.
체육시간 조차 공부를 시키던 우리 학교는 아마도 백일장 대회가, 형식상 필요했던지
갑자기 CA 시간을 취소하고 뜬금없는 백일장 대회를 치뤘다.
주어진 시간 50분.
나는 중학교 2학년때 부터 내 머릿 속에서, 가슴 속에서 느릿느릿 자라던
늙은 뱃사공의 모습을 써봐야 겠다고 결심, 30분만에 완성, 장원을 했다.
국어선생님께 불려가 정말 니가 쓴 시냐며... 꼭 글을 쓰라고 하셨는데...
교장선생님이 주신 국어사전은 아직도 새것 같다. 

시를 쓰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던 늦은 사춘기였다.
말을 하지 않았고, 말 하는 게 싫었고, 한번도 어깨를 펴지 않고 걸었다.
틈만 나면 벽에 대고 발길질을 하고, 날카로운 물건들을 쥐락펴락했다.
형광등 불빛이 싫어 형광등 불빛은 한번도 켜지 않은 구석진 내 책상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나는 수학 정석을 밀어놓고 시를 쓰고, 일기를 쓰고,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무엇이 된다는 건 어쩐지 두려운 일이다.

늙은 뱃사공 시처럼,
금방이라도 반죽하면 부풀 베이킹 파우더 같은 신념이 있는가, 내게 묻는다.
아랫목에 묻어두고 서서히 부풀어질 그 무엇이 내게, 있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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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9-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전 중고등때 썼던 몇 안되는 작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가끔 아쉬워요.
엄청 칭찬받은 것도 하나 있었는데. ㅎㅎ

플레져 2005-09-2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지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교지를 시집 올 때 잘 챙겨왔기 때문에 갖고 있어요.
저두 그때 끄적였던 것들을 이것 외에는 갖고 있지 않아서 아쉬워요.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세요, 블루님...

Laika 2005-09-27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무엇이 된다는건 두려운것 같아요..그래도 다시 무엇이 되어야하는...되라고 말하는 ...

플레져 2005-09-2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말이죠...시는 언제나 쉽게 씌어지는 듯해요 (윤동주님 시를 인용하였음)

2005-09-2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감수성입니다..

2005-09-28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8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09-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플레져님 광팬인 거 아시죠? 역시 플레져님은 사춘기 시절 백일장을 휩쓰셨군요. 전 한번도 그런 데서 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분들 보면 주눅이 듭니다. 제가 유머로 글의 방향을 튼 건 어차피 해도 안된다, 너무 뒤쳐졌다는 판단 때문이구요, 그 결과 제가 이렇게 플레져님과 댓글로 얘기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님의 시, 참 훌륭합니다. 그당시 어떻게 늙은 뱃사공을 생각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그저 존경스럽기만 하네요.

비로그인 2005-09-28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이걱, 삐이걱..
예삿소리가 아니구만요. 요즘 워낙 관절이 덜거덕거려서..흠냐..
멋진 십니다.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지은 시는 또 판넬에 그림과 함께 담아 한 쪽 귀퉁이에 잘 보관하고 대대손손 내려가는 게 불문율..
고등어 때 난 뭐했나.. 도시락 까먹는 게 유일한 낙 ㅡ_ㅡ;;

플레져 2005-09-2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늙은뱃사공에 대한 이미지는요, 중2때 어느 잡지에 실린 또래의 학생이 쓴 시 제목과 같아요. 그 시를 읽고 감탄하였고 아...나도 쓰고 싶다는 깊은 열망을 품었지요. 그러다 3년간 갈고 닦은 마음으로 써내려 간건데...(물론 그 시와는 한 줄도, 느낌도 똑같지 않아요 ^^ ) 그리 되었네요...과찬이십니다.
복돌님, 판넬이 없어서...아니 종이가 없어서 그저 교지 한 권 간직하고 있어요. 고딩때 도시락 없으면 우리 생활이 피폐해졌을 걸요? ㅎㅎ

수퍼겜보이 2005-09-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고등학교때 50분 만에 쓰셨다니요.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로드무비 2005-09-2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일장 관련 글 하나 올릴까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한 열흘 무지 바빠요. 일이 밀려서...
졸음 쫓으려고 들어왔답니다.^^
(플레져님은 시도 가능하시군요. 존경, 찬탄!)

플레져 2005-09-2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돌님, 그게요... 딱 한 번 그랬다는 게 중요한겁니다. 위인에게는 빈번하지 않습니까? ^^ 참, 안녕하세요. 처음 뵈어요.
로드무비님, 아~~ 기대할게요. 저도 무지 바쁜데...이러구 있어요 ㅋ

2005-09-29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9-2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속삭님........ㅎㅎㅎ 알았어요! 조심조심!! ^^

잉크냄새 2005-09-2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부터 문학적 소양이 다분했군요. 문학소년, 소녀의 꿈은 한번쯤 꾸어보는 꿈인가 봐요. 아, 근데 학창시절 별명이 플라나리아 였나요? ^^

파란여우 2005-09-2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플라나리아...저랑 같은 ㅍ씨였군요^^

플레져 2005-09-29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그 꿈이 제일 만만했습니다 ^^;; 플라나리아는........ 웃으시라고 적은건데...안 웃겼어요? 홍~
여우님, 이제 아신거에요? 전 진즉부터 님이랑 저랑 같은 성씨란 걸 알고 있었다구요~
 

불우한 악기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詩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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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밤에 최승자 시와 허수경 시를 읽으니 정말 한 잔이 하고 싶네요. 사진 속의 신발 제가 좋아하는 스탈~~!! 에고..자러 갑니다.=3=3

2005-09-24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9-2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굿모닝? ^^
 

환상통(幻相痛)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긋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本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창 밖,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 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이 통증이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詩 김신용



Hal Eastman - Natural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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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1 16: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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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9-2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께 직행 하기 전에 먼저 님 서재에 다녀왔어요. 보시면 알아요 ㅎ

2005-09-21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1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1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1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22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ika 2005-09-22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3226569
허걱...

2005-09-22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5-09-2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게꾼의 시라
 

누가 울고 간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새

와서 운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귀에서

그소릴 꺼내려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詩 문태준 (2005 미당문학상 수상작)



Gaylen 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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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9-2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멋진 시에 그림까지 플레져 그대는...!

물만두 2005-09-2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퍼가요^^

2005-09-21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9-2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그대도~!
물만두님, 네네 ^^
속삭님, 님이 그렇게 읽으셨다면 그런거지요 ㅎ

잉크냄새 2005-09-2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시집을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플레져 2005-09-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실망하지 않으실 듯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러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詩 김경미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jack vettrisano - beach umbrel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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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09-1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마신 다음날은
그렇게 말떼들은 머리속을 질주하고
흩어진 기억의 파편을 주워 모으며
끝내 찾지 못하는 편린들에 괴로워 몸부림 친다.
ㅋㅋ

플레져 2005-09-1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리얼하십니다, 강쥐님 ㅎㅎ

마냐 2005-09-1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으...강쥐님...방가.

icaru 2005-09-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좋아했던 시인 지망생 회사 언니가 있었어요~ 근데 함께 술을 마시던 어느 날... 술이 많이 취한 이 언니가 저 더러..."너도 속물이야!"
어렸던 저는, 그때 쇼크 먹었었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언니는 술을 마시면...상대에게 당신은 속물이야! 라고 하는게 주사더라고요...

플레져 2005-09-1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도 방가 ^^ (강쥐님 대신 에드립~)
이카루님, 저두 그런 버릇들 때문에 상처 많이 받았었는뎅...알고보니 정말 그 사람의 버릇들. 기억 못하는 버릇들. 억울하죠, 진짜... 전 술 마시면, 한 잔만 더! 라고 외쳐요 ㅎㅎ 안심하시길 ^^

코마개 2005-09-1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방가.
저 어으...는 코를 타고 올라오는 소주냄새와 그 뒷날의 참담함을 현실처럼 느껴서 나오는 감탄사 라고 이해!
마냐님이 마냥 부러운 강쥐

Phantomlady 2005-09-1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과 글이 너무 잘 어울려요............... 술이 마시고파요.......................

클리오 2005-09-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말 술땡기는 날씨군요. ^^ 저는 몇 번 썼지만, 사람들을 집에 못가게 붙잡는게 주된 술버릇이구요, 애정행위나 폭력행위도 있지요. 그리고 술을 조금만 먹어도 그 다음날까지 몸과 머리가 다 뻗어있어요... ^^

잉크냄새 2005-09-1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식성이 독특한 시인입니다.
전 술 마신 다음날은 라면이 먹고 싶어라~~~

플레져 2005-09-1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술 야그 하지 말아주십셔. 코끝에서...읍...
스노드롭님, 아...님 마저!!
클리오님, 아...또 님 마저!! 사람들을 집에 못가게 하는 건 친목을 위함이요, 애정행위와 폭력행위는 상대가 더 굳세어지게 하는 훈늉한 방법 아니던가요...아으~
잉크냄새님, 저랑 식성이 같은 시인입니다. 라면도 좋지요~

2005-09-14 0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09-1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하루가 '술 마신 다음날'이라서요...호홋

플레져 2005-09-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외워두시죠...ㅎ

2005-09-14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9-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헉. 님의 이름을 떡 하니 써버렸다가 급히 지웠음 ㅋ)
그러시군요. 그런 분이 또 있으시던데...ㅎㅎ
콩나물 만한 해장국이 없는 것 같아요. 저두 황태랑 콩나물 넣고 팍팍 잘 끓여 먹습니다. 왕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