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11월

아버지, 양팔을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 졸고 계신다
창고와 대장간 사이 쓸모 없는 폐품들 구석에서
살을 봉하고 못을 치셨구나
문 밖에서는 자꾸만 알루미늄 샷시 틀을 긁적거리는
집터를 도는 바람소리 조금씩 깊고 어둡다
나는 지하실 돌계단을 내려간다
보일러 불구멍을 조금 열어놓는다
아버지, 이젠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제발 몸 좀 펴고 주무세요.
벽시계는 어제도 오늘도 4시 50분이다
나는 덧창을 닫는다
드르륵 소리 저편에서 바람의 어느 한켠을 무너뜨리며
또 날이 저물고 있는 걸까.

詩 이연주 시집 -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tamar' s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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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0-3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마른 가지들. 바스락바스락. 11월.

2005-10-31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g 2005-10-31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월의 쓸쓸함이 그대로....
나무님 저것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 사이드웨이?
반갑네요 ^^

가시장미 2005-10-31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이글에 분위기 있는 음악 한 곡 딱! 올리고 싶은데. 이상하게. 음악이...
올리기만 하면 끊기네요. ㅠ_ㅠ

2005-11-01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11-0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달아주신 님들... 11월이에요.
원래 쓸쓸한 달이니까, 조금은 신나게 보내도록 노력하자구요 ^^

마태우스 2005-11-0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시집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딱 한권을 제외하고는요. 하지만 님 덕분에 시의 묘미를 알아 가는 것 같군요. 감사.

stella.K 2005-11-0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빼빼로 사 줘요!

플레져 2005-11-0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가을엔 시 없으면 못살아요.
스텔라님, 알았어요! 벌써 준비하는거에요? 빼빼로 데이? ㅎㅎ

2005-11-02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사랑

이사랑,
이토록 격렬하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하는 이사랑

대낮처럼 아름답고
나쁜 날씨에는 날씨처럼 나쁜
이토록 진실한 이사랑
이토록 아름다운 이사랑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어둠 속의 어린애처럼 무서움에 떨 때엔
이토록 보잘것없고
한밤에도 침착한 어른처럼
이토록 자신 있는 이 사랑

다른 이들을 두렵게 하고
다른 이들을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

우리가 그네들을 숨어 보았기에
염탐당한 이사랑은
우리가 그를 쫓고 상처 입히고 짓밟고 죽이고
부정하고 잊어버렷기 때문에
쫓기고 상처 받고 짓밟히고 살해되고
부정되고 잊혀진

송두리째 이 사랑은
아직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빛나니
이것은 너의 사랑
이것은 나의 사랑

언제나 새로웠고
한번도 변함 없던 그것은
한 포기 풀처럼 진실하고
한마리 새처럼 가녀리고
여름처럼 뜨겁고 생명에  차

우린 둘이 서로
오고 갈 수 있고
우린 잊을 수 있고
우린 또 잠들 수 있고
우린 잠에서 깨어 고통을 겪으며 늙을 수 있고

우린 다시 잠들어
죽음을 꿈꾸고
우린 눈을 떠 미소짓고 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젊어질 수 있지만

우리들 사랑은 거기 그대로
욕망처럼 피어 오르며
기억처럼 잔인하게
회한처럼 어리석게
대리석처럼 싸늘하게
대낮처럼 아름답게
미소지으며 우리를 본다

아무 말없이도 우리에게 말한다
난 몸을 떨며 귀를 기울인다.
난 외친다.
너를 위해 외친다.
나를 위해 외친다.

난 네게 애원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서로  사랑했던 모든 이를 위해
그래 난 외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다른 모든 이를 위해
거기에 있어다오

네가 있는 거기에
옛날에 있던 바로 거기에
거기에 있어다오
움직이지 말아다오
떠나지 말아다오

사랑받은 우린 너를 잊었지만
넌 우리를 잊지 말아다오
우리에겐 세상에 오직 너뿐
우리를 싸늘히 식도록 내버리지 말아다오

아주 먼 곳에서라도 언제나
또 어느 곳에서든
우리에게 생명의 신호를 보내다오

아주 오랜 훗날 어느 숲 모퉁이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문득 솟아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원해다오

詩 자크 프레베르



Kharlamov Sergey - Circu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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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0-28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랜 훗날 어느 숲 모퉁이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문득 솟아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원해다오

자꾸만 반복해서 읽게되는 시입니다


플레져 2005-10-2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이 반복하여 읽었다 하여 저도 따라 반복, 반복하여 읽습니다.

2005-10-28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ika 2005-10-29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3497
3관왕..
참으로 시 밑에다가 이런거 달기는 좀 미안한데.....

poptrash 2005-10-2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이 좋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시집에서는 이사랑은, 이라고 시작했는데.

가시장미 2005-10-29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잘지내셨어요? ^-^;;;; 으흐흐흐

2005-10-29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10-3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라이카님 ^^
poptrash님, 제가 갖고 있는 시집은 90년대 중반쯤에 나온 건데, 이사랑, 이라고 씌여 있어요 ^^
장미~ !
 

티셔츠 입은 여자

 

탱탱한 피부처럼 살에 착 달라붙은 흰 티셔츠를

힘차게 밀고 나온 브래지어 때문에

그녀는 가슴에 알 두 개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간혹 팔짱을 끼고 있으면

흰 팔을 가진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처럼 은은한 빛이

그녀의 가슴 주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일으켰다는 고주몽이나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사는 이 나라에서는

복잡한 거리에서 대낮에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다.

길을 가다 멈춘 남자들은 갑자기 동그래진 눈으로

집요하고 탐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만졌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그 눈빛들을 햇볕처럼 쬐었다.

타조알처럼 두껍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겁 많고 부드러운 알들은 그녀의 숨소리를 엿들으며

마음껏 두군거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알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는

그녀의 허리가 너무 가늘어 보였지만

곧바로 넓은 엉덩이가 허리를 넉넉하게 떠받쳤다.

산적처럼 우람한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기를 안고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詩 김기택

 



Hal Eastman - Natural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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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차게 밀고 나온 브래지어 때문에 그녀는 가슴에 알 두 개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 대단한 표현력입니다. -_-^
가슴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알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는 그녀의 허리가 너무 가늘어
보였지만 곧바로 넓은 엉덩이가 허리를 넉넉하게 떠받쳤다
->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
흠..... 이런 시도 있었군요. 정말 표현이 적나라합니다. 으흐흐흐

2005-10-0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등생 



그는 머리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가 사랑하는 것에게는 그렇다고 말하고
선생에게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일어서서
질문을 받는다
온갖 질문들이 다 나온다
갑자기 그는 폭소를 터뜨리며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숫자들과 단어들
날짜들과 이름들
문장들과 함정들
그리고는 선생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들의 야유를 받으며
색색의 분필로
불행의 흑판 위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詩 : 자크 프레베르



Janusz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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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그 최후의 가을에...

나는 기억한다 그 최후의 가을에 네가 어땠는지.
너는 회색 베레모였고 존재 전체가 평온했다.
네 눈에서는 저녁 어스름의 열기가 싸우고 있었고,
나뭇잎은 네 영혼의 물 속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팔꽃처럼 내 팔 안에 들 때,
네 슬프고 느린 목소리를 나뭇잎이 집어 올렸다.
내 갈증이 타고 있는 경악의 모닥불.
내 영혼 위로 굽이치는 히아신스의 부드러운 청색.

나는 느낀다 네 눈이 옮겨가고 가을은 사방 아득한 것을 :
회색 베레모, 새의 목소리, 그리고 내 깊은
욕망이 移住하는 집과도 같고
내 진한 키스가 뜨거운 석탄처럼 떨어지고 있었던 가슴.

배에서 바라보는 하늘. 언덕에서 바라보는 평원 :
너를 생각하면 기억나느니 빛과 연기와 고요한 연못!
네 눈 너머로 저녁 어스름은 싸우고 있었고,
가을 마른잎은 네 영혼 속에 맴돌고 있었다.

詩 파블로 네루다



kuba kami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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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30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9-3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블로 네루다. 중남미 시인중에 좋아하는 시인이예요. ^-^ 어려운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쉽게 읽혀지는 시도 있군요. 오늘 비도오고, 우울한 소식도 많고, 참.....
싸늘한 밤이네요. ^-^;;

2005-09-30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 시집 읽고, 아니 꽂혀 있어요^^ 자판만 누르면 거짓말이 튀어 나오려고 하네요..ㅎㅎ

2005-09-30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