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詩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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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04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항상 그걸 늦게 알까요

mong 2006-05-04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가슴을 콕 찌르는거 같아요 ;;

2006-05-04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04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05-0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순간 또한 꽃봉오리군요.

플레져 2006-05-04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늦게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

몽님, 이리 오세요. 호~ 해드릴게요 ^^

속삭님, 저 보라색 꽃은 헬리오트로프 에요. 허브 종류구요,
지난해 여름 허브랜드에서 제가 찍은 거에요. 이쁘죠? ^^
재미나게 읽으셔요. 정말 속삭님이랑 필자랑 닮았어요 ㅎㅎ
즐거운 연휴 보내셔요! 저도! ^^

속삭님,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1단원에 실린 시라니...ㅎㅎ
저는 정현종 시인 좋아해요 ^^;

잉크냄새님, 네! 바로, 이, 순간!


2006-05-05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05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06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08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흑백다방

 

그 다방은 이전에도 다방이었고
지금도 다방이다.
정겨운 이름 다방,
티켓다방 말고 아직도 다방이라니.
오래 산 것이 자랑이 아니듯
다방이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오래된 것으로 치면
그 다방이 있는 건물이 더 오래되었다.
그 다방은 일본식 이층건물 일층에 있다.
그래도 자랑할 만한 것은
다방 양옆으로 지금은 인쇄소와 갈비집이 있는데
그 인쇄소와 갈비집이
우리가 오래된 사진을 꺼내볼 때
양옆으로 선 사람이 사진마다 다르듯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다방에서 만난 내 친구 중에는
둘이나 벌써 저 세상에 가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도 커피를 끓여 마시고
자판기에서도 커피를 빼 마신다.
그런 동안에도 여전히 그 다방은 커피를 끓여 내오고
오래된 음반으로 고전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 다방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는지
얼마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매일 아침
삐꺽거리는 관절의 목제 계단을 올라가
이층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던 화가 주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피아노를 치는 둘째딸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늙은 화가 주인이 떠난 뒤로 머리 위에서
무겁게 발 끄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목제 건물의 관절마다 박힌 못이 녹슬어
스러지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했고
그때마다 그 다방은 치통을 앓듯, 관절염을 앓듯 신음 소리를 내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골다공증을 앓고 있을
정겨운 이름 흑백다방

詩  김승강 - 시집 <흑백다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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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2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4-12 0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4-1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림다방 이야기죠?
김승강 시인이라, 처음 보는 이름이네요.

싸이런스 2006-04-1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할게 남아 있다는것 그나마 작은 위안이어요.

플레져 2006-04-1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얼마전에 신문에서 이 시집을 보았는데요, 이 시뿐만 아니라 다른 시들도 참 좋아요. 조금씩 읽고 있는데, 꼭 리뷰 쓸거에요. 학림다방인지는 잘 모르겠삼...

싸이런스님, 끄덕끄덕...
추억도 힘이니까요.

2006-04-12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탈 많은 나날, 청춘.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던 모퉁이, 청춘.
청춘에 관한 시 세 편이 오늘 일용할 양식이다.


....................



청춘

바바리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나야 할 그는 오지 않았다
타르 같은 애정을 내게 주던
여자는 지칠 줄 몰랐다

식물보다 식물을 닮은 단어를 더 사랑했고
요리법과 안전 지침은
아무리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대롱거리는 단추처럼
          달려있다가
          꾼 돈이 생각나
          졸면서 매달려 있다가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별들이 거기 있었다

詩 이성미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

청춘 1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청춘2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詩 진은영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청춘


지나간 날들 지나칠 정도로 모두 어디 가고
나뭇잎 흩어지는 저녁에 만났던 그대 역시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남겨진 하나의 얼굴
그것은 희미한 미움, 삶의 근원을 묻는 철천지원수의 고통

이해할 수 있을까, 꽃이 피면 어두워지는 마음
아련한 봄날 자살이 들끓고 11월 촛불 아래서의 짧은 행복
어머니는 나의 도망을 저주하며 빈방이 있는 집을 지었으나
내 청춘은 휘발유로 이루어진 항구였다

닻을 내린 정신, 그것은 한국이란 말처럼 욕되었다
기댈 수 있는 여자의 몸, 그것은 지겨움과 회한의 상징이었다
학교, 그것은 상상력의 종말을 뜻했다

도착할 곳 여의치 않던 시절 비는 나의 강의실이었고
바람은 가장 멀리서 오던 그대 머리칼, 진눈깨비는 머나먼 단절
그리고 이제 남에게 남겨진 하나의 미래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추억, 너에겐 없는 설원

바람에 흩어졌다 밞에 뭉치는 고립, 그것이 나의 인류였다
폭풍과 미풍이 교차하던 계곡, 당신이 쉬기에는 너무나 빠른 변덕
오후 4시면 죽고 싶고 오후 4시면 살고 싶던 감각,
그것이 나의 지구였다
나는 기후를 먹고 배불렀고 그대는 비바람을 질투하며 흩어졌다

눈 내리는 산장에 도착할 수 있을까, 꽃피면 현기증나는 연애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마음엔 푸른 우울이 숨쉬고
20세기가 끝나도 희망은 희망이고 절망은 절망이다
인간은 인간이고 식물은 식물이다

내가 마신 적막의 술이 달빛에 젖고 햇살은 찢어졌다
매연과 피로, 대양의 자본, 그리고 망각의 선신들
그토록 오랜 날들을 파도와 파탄 속을 헤맸으나
남은 건 비의 유적, 비의 막사, 비의 수용소, 비의 감옥, 비의 호텔......
청춘의 탄식이 오만 개의 세월을 남겼노라


詩 박용하 - 시집 "영혼의 북쪽" 중에서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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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4-0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배종옥의 독백이 떠오르네요 “젊어서 힘들겠다.”
아...그 한마디에 쓰러졌어요

플레져 2006-04-0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 한마디 잊어버릴뻔 했어요.
그표정도 생생히 떠올라요. 정말 힘들어보인다, 니들...하는 표정...

icaru 2006-04-06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 4시면 죽고 싶고 오후 4시면 살고 싶던 감각,
연구해보고픈 행...이네요~

물만두 2006-04-06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할 수 있을까, 꽃이 피면 어두워지는 마음

조선인 2006-04-0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 노래가 더 생각납니다. 저는.

잉크냄새 2006-04-06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을 돌려다옹!!!! 젊음을 다옹~~~
저도 이카루님처럼 저 행이 콱 박히더군요.

플레져 2006-04-0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박용하의 시가 조금만 더 짧았으면 하는 바람...

만두님, 꽃이피면 어두워지는 마음, 이라는 싯구에 저도 밑줄!

조선인님, 산울림의 청춘이요? 구슬퍼서 어릴땐 참 싫었는데...ㅎ

잉크냄새님, 주소를 말씀해주시면 보내드립니다, 청춘 ^^
두분 찌찌뽕 하세요~

새벽별님, 진은영의 시, 저도 올인이어요.

2006-04-07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4-07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노래에 포옥 빠졌더랬어요. 웃기지도 않은 거죠.

플레져 2006-04-0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그 노래가 나이 막론하고 심금을 울리니까 이해가 됩니다 ^^
 


담장과 담장 사이
넝쿨과 넝쿨 사이
그의 어깨와 그녀의 어깨 사이

뭐라 부를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비

고개를 뒤로 꺾고 보는 날
첨탑 옆에는 무엇이 떠다니는지
전깃줄은 어디로 달려가는지

발가락이 젖어 알게 되는 날
아스팔트 길 어디가 꺼져 있는지
진흙 땅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동안 잠자코 있었지
창문 밑엔 버려진 자동차
양철 지붕 위엔 미루나무

안 가본 데로
비의 손가락을 따라다니는 날

물웅덩이만 잠시 기억할 뿐
사라지는 세계



.............................


보슬비

내려오는 중일까 올라가는 중일까

땅에서 하늘까지
투명한 날실처럼
실뱀들이 꼿꼿이 서서

올라가는 중일까 내려오는 중일까


詩 이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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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4-0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치마 입고 가는 저 소녀 이뻐요~~
플레져님, 비는 내려오는 거에요? 올라가는 거에요? '_'

물만두 2006-04-0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하면 그냥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파란우산 노란우산 찢어진우산~~~~

플레져 2006-04-0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븐 몽님... 언넝 나가서 사진 찍어보세요. 정답은 밖에!!! ㅎㅎ
만순님이면서 만두님인 하트님...헥헥... 파란 우산 아니고 빨간 우산 아녀요? ^^

세실 2006-04-0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그림이 참 예쁩니다. 어디서 저런 예쁜 그림을~~~~
흐..실뱀이라....

Mephistopheles 2006-04-0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좀 많이 와야 할텐데 말이죠...가뜩이나 심난한 농민분들.....
단비라도 많이 내려야 할텐데 말이죠...

플레져 2006-04-0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세실님...그러고보니 저 그림은 모 포털 사이트에서 훔쳐온...ㅋㅋㅋ

플레져 2006-04-0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메피스토님의 넓고 넓은 맘씨에 감동했습니다...
저는 그저 제 생각만....... ㅠㅠ

stella.K 2006-04-0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와요. 기쁘죠?^^

플레져 2006-04-0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덕끄덕... 스텔라님 오늘 집에 있나보오? ^^
 

거인이 산에서 내려와
기둥만한 장화를 벗었다
그 속에
어린 토끼들이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그들을 깨우기 위해
수천 개 조그만 초록 종들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한다

먼지 앉은 덧문이 열리고
모두 귀를 기울인다
항아리에 담긴 찬물도
담장 아래 흰 흙도

살아 있는 것들은 분주히 줄을 선다
그 사이로
천천히
자전거를 밟고 가는 소년

구석에서 거인은 몸을 숨기고
무서운 눈을 감아준다
잠시뿐이다
축제는 곧 끝날 테니

詩 이성미

................................................





체감 온도 영하 10도 라느니, 꽃샘 추위라느니 화요일은 수요일을 무섭게 예고했다.
갑자기 드라이크리닝 한 겨울 옷들을 꺼낼 수도 없어서
따스한 조끼를 껴입고 스카프로 목을 감싸고 연분홍색 바바리를 걸쳤다.  

마음이 이미 그 말에 무장되 있던 탓일까.
별로 춥지 않아서 실망했다.
가을 날, 봄날처럼 따스한 하루를 인디언 섬머라고 하는데
봄에 겨울 같은 날은 겨우 꽃샘 추위라는 낡은 유행어로만 일관하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유행어가 필요하다.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세시간 동안 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무릎에 펼쳐있는 책을 들여다보다 결국 사람이 주는 생기가 좋아 책을 덮고 말았다.
어떤 책 보다 사람이 주는 다양한 언어들, 느낌들이 좋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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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03-2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예보에서 겨울옷을 다시 꺼내라기에 무지 쫄았었는데..
오늘 생각보다 따뜻했지요? ^^
저 그림 보니까 진짜 봄 같아요.....!

mong 2006-03-2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그렇고 플레져님 글도 그렇고
완연한 봄이에요 그렇죠?

Mephistopheles 2006-03-2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대로 가다간 봄하고 가을이 없어질 듯 합니다..^^
저도 오늘 두꺼운 옷 다시 꺼냈습니다..투덜투덜...체키럽!!

플레져 2006-03-2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너무 따뜻해요! 너무 따뜻해서... 일기 예보에 대한 불신만 커졌어요 ㅎㅎ

몽님, 네. 끄덕끄덕. 완연한 봄에 개나리색 우드스톡군이 빛납니다.

메피스토님, 봄과 가을이 길어야 사는 맛이 나는데...
여름엔 맥을 못 추는 터라... 아, 그래서 내가 요새 살맛이 좀 났었나? ㅎㅎㅎ

세실 2006-03-2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어쩜 이리도 봄에 대해 잘 표현해 놓았는지.....참 멋진 시입니다.
인디언 섬버도 예쁩니다. 꽃샘추위 말고 플라워윈터라고 하면 좋을까요?
생각보다 한 낮에는 포근했습니다.

Laika 2006-03-2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이 풀렸어요...어젯밤엔 무지하게 추웠는데요.

플레져 2006-03-2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플라워 윈터라고 하니깐 크리스마스 같아요~ ^^
포근한 한낮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라이카님, 그러게요. 어제 추웠어요. 오늘의 추위는 뭐 간지럽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