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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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만일 어떤 여성이 바로 롤랑Roland 부인이나 드 스탈 부인 또는 조르주 상드George Sand를 끌여들여, 그것으로 인해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ㅡ 악취미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고라도 ㅡ 이는 본능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위에 언명된 사람들은 세 명의 우스꽝스러운 여성 자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해방과 여성의 자기 예찬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최상의 반증이 될 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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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진보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학문성과 자기 폭로의 이러한 서툰 시도가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함이 많이 숨어 있다. ㅡ 여성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를 살펴보라! ㅡ 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잘 억제되고 제어되어왔다. 만일 '여성에게서의 영원히 권태로운 것이 ㅡ 여성에게 이것은 풍부하게 있다! ㅡ 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일 여성이 우아하고 장난스럽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하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현명함과 기교를, 만일 여성이 유쾌한 욕구를 처리하는 섬세한 솜씨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지금은 이미 경악하게 하는 여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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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

 

배운다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생리학자가 알고 있듯이, 온갖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저에는, 훨씬 '그 밑바닥에는' 물론 가르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며 정신적 숙명의 화강암이 있고 미리 결정되고 선별된 물음에 대한 미리 결정된 결단과 대답의 화강암이 있다. 중요한 문제가 대두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불변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 문제에 대해 사상가는 배워서 고칠 수 없고, 단지 끝까지 다 배울 수 있을 뿐이다. ㅡ 단지 이러한 남녀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확실한 것'을 마지막으로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바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아마 우리는 그것을 앞으로 자신의 '신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후에 ㅡ 우리는 그 신념 안에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발자취를, 우리 자신이기도 한 문제에 이르는 이정표를 보게 될 뿐이며 ㅡ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커다란 어리석음에 이르는, 우리의 정신적인 숙명에 이르는, 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ㅡ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행했던 이러한 대단히 점잖은 태도를 감안해서 아마 내가 '여성 자체'에 대해 몇 가지 진리를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이미 허락해주었으리라 믿는다 : 더욱이 그것이 단지 ㅡ 나의 진리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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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인간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

 

성실성, 진리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인식을 위한 희생, 진실한 인간의 영웅주의 같은 아름답고 반짝거리고 소리 나는 축제의 언어가 있다. ㅡ 여기에는 한 사람의 마음을 자부심에 부풀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은자(隱者)이며 실험용 동물인 우리,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은자의 양심에 걸맞는 극도의 비밀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즉 이와 같이 위엄 있고 호사스러운 말도 무의식적인 인간의 허영심에서 나온 해묵은 거짓 장식과 잡동사니, 거짓 금가루에 속하는 것뿐이며, 그렇게 아첨하는 색깔과 덧칠 아래에서도 자연적 인간homo natura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는 다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즉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 번역하는 것, 지금까지 자연적 인간이라는 저 영원한 근본 텍스트 위에 서툴게 써넣고 그려놓은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부차적인 의미를 극복하는 것, 오늘날 인간이 이미 학문의 훈련으로 엄격하게 단련되어 두려움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눈과 막힌 오디세우스의 귀를 가지고 오랫동안 "너는 그 이상의 것이다! 너는 더 높은 존재다! 너는 다른 혈통을 지녔다!"고 인간에게 피리로 속삭였던 낡은 형이상학적 새잡이의 유혹의 방식에 귀를 막고 다른 자연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후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앞에 서 있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생소하고 미친 과제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는 하나의 과제인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과제를 선택했단 말인가? 또는 달리 묻는다면 "도대체 왜 인식이 있다는 말인가?" ㅡ 누구나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몰려도, 백 번이고 스스로에게 이미 그렇게 물어보았던 우리는 더 이상 좋은 대답을 찾지 못했고, 찾지 못하고 있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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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정신의 힘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순화시키거나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강한 경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이질적인 것이거나 '외부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에서 특정한 특징이나 윤곽선을 제멋대로 더 강하게 강조하거나 드러내거나 자기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고 새로운 사물들을 낡은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ㅡ 즉 성장시키는 데 있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성장의 느낌, 힘이 커졌다는 느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듯한 정신의 충동이 이러한 동일한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알고자 하지 않거나 임의로 단절하고자 하는 갑작스럽게 솟구쳐오는 결정을 하고 스스로의 창문을 닫아버리며 이러저러한 사물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알 수 있을 만한 많은 것에 대해 일종의 방어 상태에 들어가고 어둠과 폐쇄된 지평에 대해 만족하며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한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그 정신의 동화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ㅡ 실로 '정신'은 위(胃)와 가장 비슷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때때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정신의 의지가 속해 있으며, 아마 이 의지는 사정이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이러하다고 여겨질 뿐이라는 경솔한 추측을 하면서 온갖 불확실성과 애매성을 즐거워하고 일부러 한쪽 구석의 비좁은 은밀함을,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 것을, 표면적인 것을,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위치가 바뀐 것이나 미화된 것을 기뻐하며 스스로 즐거워하고, 이러한 모든 힘을 자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한다. 다른 정신을 기만하고 스스로를 다른 정신 앞에서 위장하려는 정신이 문제가 없지 않지만 기꺼이 응하는 것, 창조하고 형성하고 변형할 수 있는 힘의 저 끊임없는 압력과 충동이 마침내 여기에 속한다 : 정신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면의 다양성과 교활함을 즐기며, 여기에서 안정감을 즐긴다. ㅡ 바로 자신의 프로테우스적 기술로 정신은 가장 잘 방어하고 은폐한다! ㅡ 가장에의, 단순화에의, 가면에의, 외투에의, 간단히 말해 표면에의 ㅡ 왜냐하면 모든 표면은 외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에 대항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다양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인식하는 사람의 저 숭고한 경향은 맞서 나간다 : 이것이야말로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인데, 용감한 사상가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충분히 단련시켜 예리하게 했고, 엄격한 훈련과 엄격한 말에도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그는 "내 정신의 성향에는 어떤 잔인한 것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 ㅡ 덕이 있는 사람들이나 친절한 사람들이 그가 그러한 말을 하지 못하게 말리면 좋았을 것인데! 만일 잔인함 대신 '지나친 성실성'이라는 말을 뒤에서 떠들어대고 소문이 나고 평판이 있다면, 실로 이것은 우리에게는 - 우리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ㅡ 좀더 점잖은 평가로 들릴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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