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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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숨을 쉬고 있는 우리

 

독일어 문체가 얼마나 음향이나 귀와 별로 관계가 없는지는 바로 우리의 훌륭한 음악가들이 서투른 문장을 쓴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독일인은 소리 내어 읽지 않고 귀에 들리게 읽지 않고 다만 눈으로 읽을 뿐이다 : 그는 글을 읽을 때 자신의 귀를 서랍 속에 처박아둔다. 고대인은 읽을 때 ㅡ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ㅡ 자기 자신에게 실로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어떤 사람이 나지막한 소리로 읽으면 의아해하며 은밀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 큰 소리로 읽는다는 것은 음성의 모든 팽창, 굴절, 전환과 템포의 변화를 가지고 읽는다는 것을 말하며, 고대의 공적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즐거워했다. 그 당시에 문장체의 법칙은 구어체의 법칙과 똑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어느 부분에서는 귀와 후두(喉頭)가 놀라울 정도로 훈련되고 세련되게 요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고, 다른 부분에서는 고대인의 폐부의 강함, 지속과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대인이 말하는 의미의 완전한 문장이란 단숨에 축약되는 한, 무엇보다도 하나의 생리적 전체이다. 그러한 완전한 문장이란 데모스테네스Demostenes나 키케로Cicero에게서 나타나듯이, 두 번 오르는 억양과 두 번 내리는 음조를 포함하면서, 모든 것이 한 호흡 속에 있다 : 이것은 고대 인간들에게는 즐거움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에 대한 미덕을, 즉 그러한 완전한 문장으로 연설할 때의 비범함과 어려움을 스스로 훈련함으로써 평가할 줄 알았다 : ㅡ 어떤 의미에서 짧게 숨을 쉬고 있는 우리, 우리 현대인에게는 위대한 완전문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고대인들은 모두 대화를 할 때는 학문 애호가이기도 하며 따라서 전문가이며 비평가였다. ㅡ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의 연설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 그것은 마치 이전 세기에서 이탈리아의 남녀 모두 노래부를 줄 알았고, 그들에게서 성악의 대가적 재능이 (그와 더불어 또한 선율의 기법이 ㅡ ) 절정에 이르렀던 것과 같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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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들을 만한 귀가 없다"

 

제3의 귀를 가진 사람에게 독일어로 씌어진 책들은 얼마나 고문인가! 그는 얼마나 불쾌한 마음으로 독일인들이 '책'이라 부르는 소리 없는 음향의, 춤 없는 리듬의 느리게 굽이치는 늪 언저리에 서 있게 될 것인가! 게다가 책을 읽는 독일인이란 어떤가! 그는 얼마나 굼뜨게 얼마나 마지못해 얼마나 서투르게 읽고 있는가! 좋은 문장에는 모두 기교 ㅡ 문장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한, 미루어 헤아리기를 바라는 기교 ㅡ 가 숨어 있음을 얼마나 많은 독일인이 알고 있으며 또 스스로 알려고 할까! 예를 들어 문장의 템포에 대해 오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문장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음률로 볼 때 중요한 음절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너무 엄격한 대칭의 파기를 원하고 매력으로 느끼는 것, 온갖 스타카토(staccato, 짧게 끊어)나 루바토(rubato, 자유로운 속도로)에 섬세하고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이는 것, 모음이나 복모음의 배열 속에서 의미를 헤아리고 그 모음들이 계속되는 동안 얼마나 부드럽고 풍부하게 채색되고 변색될 수 있는지 헤아리는 것 : 책을 읽는 독일인들 가운데 그와 같은 의무와 요구를 인정하고, 언어에 숨어 있는 그렇게 많은 기교와 의도에 귀 기울일 만큼 충분히 호의적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들을 만한 귀가 없다" : 따라서 문체의 가장 강한 대조는 들리지 않게 되고, 가장 정교한 예술가적 기질도 마치 귀머거리에게 들려주듯 낭비된다. ㅡ 이것들은 산문 예술의 두 거장이 얼마나 졸렬하고 무지하게 서로 뒤바뀌는가를 알아차렸을 때 내가 생각한 것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의 경우에는 축축한 동굴의 천장에서처럼 말이 주춤대며 차갑게 뚝뚝 떨어지고 있다. ㅡ 그는 그 둔중한 음향과 반향을 고려하고 있다. ㅡ 그리고 또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휘어지는 검처럼 다루면서 찌르고 쉿 소리를 내며 자르려는 너무 예리하게 진동하는 칼날의 위험한 행복을 팔에서 발끝까지 느끼고 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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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무명의 행복과 슬픔에 탐닉했던 고상한 응석받이

 

저 평온한 대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은 달랐다. 그는 좀더 경쾌하고 순수하고 행복한 영혼 덕분에 일찌감치 존경받았고, 이와 마찬가지로 독일 음악의 아름다운 우발적인 사건으로 잊혀지게 되는 것도 빨랐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처음부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슈만Robert Schumann의 경우 ㅡ 그는 하나의 유파를 세운 마지막 인물이었는데 ㅡ, 바로 이러한 슈만의 낭만주의가 극복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행운, 안도, 해방이 아닌가? 영혼이 '작지쉐 슈바이츠'로 도피해, 반쯤은 베르테르적인, 반쯤은 장 파울적인 천성을 가진 슈만은 확실히 베토벤적이지는 않았다! 확실히 바이런적이지도 않았다! ㅡ 그의 만프레트적 음악은 부당할 정도로 실패이며 오해이다. ㅡ 슈만은 근본적으로 작은 취향(즉 고요한 서정과 감정 도취에 이르고자 하는 위험한, 독일인에게는 이중으로 위험한 경향)을 가지고 언제나 옆에 물러서거나 수줍어 머뭇거리거나 움츠리고 있었으며, 오직 무명의 행복과 슬픔에 탐닉했던 고상한 응석받이였으며 일종의 소녀였고 처음부터 내게 손대지 말라는 식이었다 : 이러한 슈만은 이미 음악에서의 독일적인 사건일 뿐이지, 베토벤이 그랬듯이, 더 폭넓은 규모로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더 이상 유럽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ㅡ 그와 더불어 독일 음악은 유럽 영혼을 위한 목소리를 상실하고 단순한 조국애로 전락하는 최대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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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류의 음악

 

오늘날 우리에게 베버Weber의 <마탄의 사수Freischutz>나 <오베른Oberon>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르슈너Marschner의 <한스 하일링Hans Heiling>이나 <흡혈귀Vampyr>란 무엇이란 말인가! 또는 바그너의 <탄호이저Tannhauser>마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아직까지는 잊혀진 음악은 아닐지라도 사라져가는 음악이다. 이러한 낭만주의 음악 전체는 게다가 충분히 고상하지도 않고 음악답지도 못했기 때문에 극장 안에서나 대중 앞에서가 아니면 그 어떤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 이 음악은 처음부터 진정한 음악가 사이에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던 이류의 음악이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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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베토벤, 루소, 실러, 셸리, 바이런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은 모차르트에 의해 다 노래로 불리었다 : ㅡ 그의 로코코풍은 아직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의 '훌륭한 사교'와 그의 부드러운 열광이, 중국적인 것이나 당초무늬 장식에 대한 그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중함이, 우아한 것, 사랑스러운 것, 춤추는 것, 눈물 어릴 정도의 황홀한 것을 향한 그의 갈망이, 남국적인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무엇에 아직은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아, 언젠가는 이러한 것도 사라지게 되리라! ㅡ 그러나 베토벤에 대한 이해와 감상이 더 빨리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실로 양식의 변화와 양식 파손의 여운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처럼 수세기에 걸친 위대한 유럽적 취미의 여운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끊임없이 부서지는 흐늘흐늘해진 옛 영혼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미래의 너무 젊은 영혼 사이의 중간 사건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영원히 상실해가는 것과 영원히 무절제한 희망 사이의 희미한 빛이 비추고 있다. ㅡ 루소와 더불어 꿈꾸고 혁명이라는 자유의 나무 주위에서 춤추고 마침내 나폴레옹을 거의 떠받들다시피 되었을 때, 유럽을 흠뻑 적셨던 빛이 이와 똑같았다. 그러나 이제 바로 이러한 감정은 얼마나 빨리 퇴색되어가고, 오늘날 이러한 감정에 대해 아는 것마저 이미 얼마나 어렵게 되었는가, ㅡ 저 루소, 실러F.Schiller, 셸리Shelley, 바이런Byron의 언어가 우리의 귀에는 얼마나 생소하게 들리는가, 베토벤에게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유럽의 똑같은 운명이 이들 모두에게서 함께 언어의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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