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인문학 - 흔들리는 직장인을 위한
이호건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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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인문학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중 '존재의 모호성'을 뜬구름이라고 가정한다면, 세상 모든 뜬구름 속에 숨은 다채로운 이야기의 무지개를 찾아내는 힘. 그것이 인문학의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이 점에 공감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고달픕니다. 직장에 출근하는 아침이 놀이동산을 가듯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서 퇴근 무렵이면 다크 서클이 생겨서 다른 얼굴로 변모되어 집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자기 존재 감각'이라고 풀이됩니다. 자존감이 사라진다는 말은 나의 존재가 비누방울 터지듯 사라져 버린다고도 표현 할 수 있겠지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직장인들의 기(氣)를 살려주고 싶어합니다.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길 원합니다. 그 처방은 증상에 맞는 인문학입니다. 따라서 인문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각에 깊이를, 행동에 확신을, 말에 설득력을 더하는 인문학의 힘!".


인문학을 만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직장인들이여 좀 덜 흔들리고 싶으면 책을 읽으시오! 라고 했다면 그 누가 관심이나 갖겠습니까? 저자는 각 챕터마다 직장인들이 흔히 접하는 상황을 펼쳐놓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을 갖게 될 꼭지글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는 동,서양의 고전들을 소개합니다. 이럴 때 이 책을 읽으면 뭔가 길을 찾게 될 겁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저자를 만나보시오.  이 책을 읽어보시오. 하고 권유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도 삶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삶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남이 만들어 놓은 규칙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데도 삶은 늘 힘겹고,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다는 이야깁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스스로 삶의 규칙을 만들어서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결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말은 쉬운 듯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지요. '내 삶의 규칙'이라, '내 삶의 주인'이라 '내 문제의 답'이라. 어디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인문학이라는 것이지요.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학문, 인간의 삶에 대한 학문입니다. 따라서 삶을 성찰하고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통찰력을 길러줍니다. 


반대 의견도 있겠지만, 직장생활에서 휘둘리는 것도 휘둘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휘둘리고, 흔들릴 만하기 때문에 흔들린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의 힘이 키워져 있지 않으면 쉽게 흔들리고 쉽게 깨지고 아주 쉽게 열을 받습니다. 급기야는 집어 던집니다. 사표를 집어던지든 물건을 집어 던지든 나 자신을 내동댕이치든 아뭏든 집어 던지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요.


책 내용 중에서 한 꼭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제목은 '과거에 실패했던 기억이 마음에 걸린다면'입니다. 사실 저도 이 타이틀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 들에 기억 중 '그 때 왜 그랬지? 바보같이..' 하는 마음이 꼭 샤워 할 때마다 떠올라서 혼자 궁시렁거리게 만듭니다. 이런 경우 저자의 의견은? 

"플라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서양 철학에서는 기억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진리라는 말의 뜻을 풀어봐도 알 수 있다. 진리를 나타내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부정어인 'a'와 망각의 강을 뜻하는 'lethe'가 결합된 단어다. 진리란 망각의 강을 거슬러 가는 운동, 즉 기억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 능력을 중시했던 서양과는 달리 동양의 철학에서는 망각의 능력을 중시했다. 나가르주나의 '공'개념이나 장자의 '허(虛)'나 '망(忘)'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의 '망'을 살펴보면 동양 철학에서는 기억보다는 오히려 망각이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처방전에 '니체'의 [도덕의 계보]라 적습니다. 니체가 사유의 두 가지 상반된 능력, 즉 기억과 망각의 능력 중에서 망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서양 철학자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망각에 대한 니체의 사유가 동양의 불교나 장자의 사유와 공명하고 있는 점입니다. 니체는 창조적인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과거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망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망각의 능력이지요. 우리가 가진 의식의 구속 상태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망각이 모든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요. 또 그렇게 쉽게 잊을 것 같으면, 저처럼 샤워할 때마다 기억의 서랍 이곳 저곳에서 튀어 나올 일이 없겠지요. 그렇다고 니체는 무조건 다 잊으라는 이야기는 안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이 현재를 향유하고 긍정하도록 돕는 데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선택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하면, 과거의 기억은 제거 되어야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다시 어찌 해 볼 수 없는 좋지 않았던 선택이나 실수는 깨끗이 잊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무 뒤를 안 돌아보고 사는 것도 위험하지만, 너무 자주 뒤를 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상황별 처방을 주고 있지만, 캡슐 형식의 단방입니다. 공정 과정을 거친 인삼 캡슐을 먹는 것 보다는 인삼 한 뿌리를 통째로 먹는 것이 내 몸에 더욱 피가 되고 살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책을 사던, 빌리던 간에 읽어봐야겠습니다. 인문약(人文藥)을 통해 내면의 힘이 커지고 마음의 근육이 키워지면,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문제 덩어리의 크기는 줄어들 것입니다. 나를 좀 덜 힘들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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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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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키워드는 둘 입니다.

제목에 나와 있는 그대로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데모크라시(Democracy)입니다.

 

Downsizing은 주로 두 영역에서 많이 쓰입니다. 경영에선 기업이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비대해진 조직을 소규모의 팀 형태로 개편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경영혁명을 말합니다. 인원감축이나 구조조정의 어두운 일면도 있습니다. 한편 정보기술의 영역에서 보면 컴퓨터 어플리케이션의 전부 혹은 일부를 더 작은 컴퓨터 시스템이나 데스크 탑의 네트워크로 이동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Democracy,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의사결정시 시민권이 있는 대다수나 모두에게 열린 선거나 국민 정책투표를 이용하여 전체에 걸친 구성원의 의사를 반영하고 실현하는 사상이나 정치사회 체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합해진 책 제목은 그리 밝지 못한 내용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부제는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입니다. 미국이 그럴진대 한국 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독일의 실천적 사회학자 페터 슈피겔은 그의 저서 [휴머노믹스](Humanomics, Human + Economics)에서 글로벌화 되어가고 있는 현시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리 미래의 성공요소는 다름 아닌 인간이라고 제안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인간을 성공요소로 인식할 수 있는지, 이러한 인식을 경제와 학술교류 시스템에 얼마만큼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정치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인간과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질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국가의 성장을 위해 거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뿐 아니라 개개인을 깨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에 실린 내용을 보느라면 깨우긴 깨우는데 겨우 잠든 사람 깨워서 수면제 먹을 시간이라고 알려주고 있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아울러 이 책에서 자주 눈에 띄는 용어 중 '정치 동원'(political mobilization)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저자들(2인)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입니다. 정치 동원은, 정당과 정치 엘리트가 다수를 얻고 정부를 운영하기 위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입법과 정책과 예산의 보상을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다양한 정치 활동에 참여를 '이끌어 내는' 정치 행위입니다. 동원과 참여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저자들은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이 평범한 시민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의 절정기가 가능했으며, 동원이 줄어들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다운사이징'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정치 동원이 없으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고 참여도 불가능했던 평범한 시민들은 점차 정치의 세계에서 사라져 갑니다.

 

미국에서는 일반 시민이 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60년 이상 투표율이 하락합니다. 건국 초기 예외적일 만큼 인상적이었던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정치 엘리트들은 유권자 대중을 주변화했고, 점차 법원과 관료들에 의존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런 경향을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구분해서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라고 부릅니다.


투표자없는 선거
미국에서 국가 안보, 공공 재정, 정부 행정이 시민의 협력과 능동적 지지에 의존하는 한, 정치의 권위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투표에서 이기는 것은 대중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만이 아니었지요. 선거는 통치 능력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1890년대로 가보면 투표가 가능한 유권자들의 80퍼센트 정도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21세기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조차 유권자의 절반 정도만이 간신히 투표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경쟁하는 엘리트들은 유권자 속에서 해결책을 구하기보다, 정책을 경쟁자의 손이 미치지 않는 장으로 옮겨 버리는 장치들인 소송이나 행정절차, 민영화나 바우처, 관료적 조정을 이용해 상대를 이기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때 자기편이 되어 달라며 도움을 요청받았던 수많은 시민들은 이제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게 됩니다. 어제의 주연배우들이 오늘은 관중이 되었으며, 시민이 아니라 구경꾼과 소비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개인민주주의의 많은 특성들은 데자뷰를 느낄 정도로 한국 정치에서도 발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옮긴이 서복경의 표현을 빌리면, '벨트웨이 안 이익 옹호 행위의 폭발과 벨트웨이 저편 침묵 간의 기묘한 결합'은 '여의도 안 이익 옹호 행위 폭발과 여의도 밖 침묵 간 결합'을, 시민의 정치 동원은 부재한 채 '워싱턴 안의 정당 갈등만 양극화 되는 현상'은 '여의도 안의 정당 갈등만 양국화 되는 현상'을 연상시킨다고 합니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민주주의가 다운사이징 되고, 관(官)이 비대해지는 기현상은 단순히 현상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민주주의도 더 이상 기묘한 형태로 변질되지 않도록 함께 공부하고 고민해야겠습니다.


다운사이징된 데모크라시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김기림 시인의 "데모크라시(democracy)에 부치는 노래"를 붙입니다. 1930년대에 쓴 시입니다. 그러나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詩처럼 다가옵니다.


나라를 판 것은 언제고 백성이 아니라
벼슬아치와 세도댁이었다

 

사천년 오랜 세월을 두고
이겨본 일이 없는 백성이다
떳떳이 말해본 적이 없어
참고 견디기에 소처럼 목만 부었다

 

지금 백성은 무엔가 말하고 싶다
백성의 입을 막아서는 아니된다
백성의 소리는 구수하고 진심이 들어 좋다

 

그들의 머리 우에서 한울과 태양을 가리지 말어라
三韓 신라적부터 남의 것 아닌
본시 아니라 백성의 별이요 한울이 아니냐

 

인제사 그들의 역사가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번은 백성들이 이겨야 하겠다
백성을 이기게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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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
달라이 라마 지음, 이현 옮김 / 김영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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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이런 말을 통해 종교인들을 긴장시키고 있군요. "이제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스스로의 종교에 대해 심사숙고해서 종교가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자신들의 생각이 옳은가를 검증해야 합니다."  덧붙여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현상에 속하는데도 인간은 부끄러울 정도로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사실 종교를 설명하는 것은 종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종교가 참으로 많습니다. 종교의 본질이 종교인들에게 제대로 심어지지 않고 있는 탓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렇기에 종교인들은 대니얼 데닛의 말대로 종교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증을 해야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과연 개개인의 삶속에서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선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달라이 라마 - 몽골어로 '달라이'는 바다를 뜻합니다.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말로 '구주'에 해당하여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 됩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합니다. 인도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지도자가 된 것은 1959년입니다. 그 후 지금까지 불교의 자비를 내세운 세계평화를 주창하여 왔기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자비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노벨 평화상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상이 주어졌지만, 달라이 라마는 그러한 상들에 연연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또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는 차기의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요. 그러나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는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아직까지 천명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망명 정부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달라이 라마는 종교 지도자로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며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합니다.  이 책에선 그런 달라이 라마의 생각이 차분하면서도 힘있게 독자의 잠든 의식을 일깨워줍니다. "여기에 쓴 내용이 좀 더 자비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진심 어린 소망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방식일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룻밤 새 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변화는 늘어나는 자각을 통해 서서히 다가올 것이고, 자각은 교육을 통해서 올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여기 쓰인 내용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보상받은 것입니다.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한 독자라면 이 책을 다른 데로 치워놓는 것을 불편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노 종교지도자의 진심과 겸손이 담긴 글 입니다.


저자는 지난 수십 년을 되돌아보니 기뻐할 이유가 많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치명적인 병들을 치료하는 길이 열렸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구제되어 현대교육과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권문제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여전히 인류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생존의 위협, 인권 사각지대, 테러, 전쟁에 대한 불안, 불평등, 부정부패, 불공정 등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협은 더 큰 두려움을 만들지요.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 고독감 등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해도 안 떨어지는 찰거머리 같은 존재들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삶의 외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에는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도덕 윤리나 내적 가치는 무시한다는 점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도움을 어디서 받아야 할까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해온 것처럼 각기의 종교에서 내적 가치를 찾아야 할까요? 


종교는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살아감에 어떻게든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지침과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그 모든 혜택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세속적인 세상에서 종교 하나만으로는 도덕의 토대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의 종교를 기반으로 한 도덕은 일부에게만 다가 갈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진 않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그 자체로 이기심의 한 가지 형태입니다. 우리가 도덕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당연히 세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만 합니다. 이것이 전 지구적 책임감의 원리이며, 현세적 도덕에 접근하는 내 가르침의 핵심 부분입니다."


저자는 '현세적 도덕'이라는 표현이 종교나 종교인을 향한 적대감이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에 대한 깊은 존경과 관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한 종교가 없는 사람을 아우르는 포용적이고 차별 없는 태도를 뜻하기도 한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를 주된 주제로 삼은 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존경하도록 만들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내어 종교와 도덕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세적 도덕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위해선 두 가지의 기본 원리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우리의 공통성'과 '상호의존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살아가며 필요한 덕목 중에 분별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분별력은 개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자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성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애 도달하는 방식이며, 이해는 자각의 토대입니다. 저자는 도덕적 자각,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마법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사용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도덕적 자각에 대한 교육은 다른 종류의 교육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깁니다.


"파괴적인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내면 계발을 위해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파괴적 잠재력의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긍정적 특성을 키우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보통 우리가 종교적 논리에 휘말려서 대화의 중심을 잃게 될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그러나 이 노 종교인은 우리의 삶을 평화롭게 공유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선 "종교를 넘어서.." 라는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종교가 있던 아니던 간에 도덕적 삶을 통해 남도 살고 나도 사는 평안의 일상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서로 살아가면서 낙심과 좌절의 시간이 줄어 들겠지요. 


8세기 인도 사상가 산티데바의 글로 리뷰를 마무리 합니다.



해답이 있다면 

낙담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해답이 없다면 

낙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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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천국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지음, 최진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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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미로는 마치 이 세상과 모든 세상사가 오류와 혼동, 불안정과 곤경, 거짓과 속임, 걱정과 비참함,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혐오스러움과 절망만이 지배하고 있거나 이와 비슷한 것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천국은 마치 자기 마음속의 집에 거하며 그 안에 오직 하나님만을 모시는 자가 영혼의 참되고 충만한 평화와 기쁨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책에는 이 세상에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며 돌아다니는 두 명의 동행자가 등장합니다.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지며 주제넘게 참견하는 '호기심'('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는 자'라고도 부름)이라는 동행자와 이 세상의 속임수를 진리인 양 말하는 '선입견'('현혹자'라고도 부름)이라는 동행자입니다.

 

저자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순례자)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성적 분별력을 지니기 시작할 무렵, 깊이 생각한 끝에 가능한 한 아주 안락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직업]생활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앞에 나타납니다. '호기심'이라는 자입니다. 저자 코메니우스가 이 '호기심'이라는 동행자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당시(근세 초기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만물박사'는 순례자에게 세상은 미로와 같기 때문에 혼자서 [세상 속으로]들어가지 말라고 꼬드깁니다. 한술 더떠 자기를 믿고 따라오면 혼자서는 결코 갈 수 없는 많은 비밀 장소로 안내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 또 누군가가 한 사람 나타나서 참견을 하는군요. 바로 '현혹'이라 불리우는 자입니다. 그는 '호기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것이 자네의 임무라면, 그들이 봐야 할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은 내 임무라는 것을 모르는가?" 졸지에 순례자는 두 사람의 동행자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만물박사는 순례자에게 안경을 씌워주는군요. 그 안경은 '선입견'이라는 유리알과 '습관'이라는 테두리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두 동행자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도시를 바라봅니다. 멀리서 볼 때 도시는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는 세상속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미로입니다. 여섯 개의 분주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개의 거리는 17세기 당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 삶의 주요 영역(결혼 제도와 생활, 상인 계층, 학자 계층, 정치가 계층, 종교인 계층, 군인 계층)을 의미합니다. 순례자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호기심'과 '선입견'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요. 그러나 순례자는 '선입견'이라는 유리알과 '습관'이라는 테두리로 만들어진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 속 군상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부분들입니다. 언젠가는 변화가 되어 본 모습을 보게 되길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부분중에서 특히 시선이 '도서관'을 묘사한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스위스의 시골마을 장크트 갈렌에는 수도원 도서관이 있는데, 이 도서관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도서관 현관에는 그리스어 팻말이 붙어 있는데 ‘영혼의 요양소'(또는‘영혼을 위한 약방)’이라고 되어 있다합니다. 책을 통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름답습니다.

 

이 책의 순례자도 도서관으로 안내됩니다. 그 방(도서관)은 상당히 넓어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긴 벽에는 나무 상자와 선반으로 된 수많은 서가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책들은 수십만 개의 수레로도 다 실어 나르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서가마다 제목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곳이 뭐하는 곳이죠? 약국인가요?" 순례자가 묻습니다. 동행자가 답합니다.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약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약국이라 할 수 있지, 즉, 이곳은 도서관이라네. 보게나, 무한한 지혜의 보물이 여기에 잔뜩 쌓여 있다네!". 학자들이 들어와서 책을 뽑아 질겅질겅 씹기 시작하는군요. 놀라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순례자가 책을 씹어 먹고 있는 학자에게 묻습니다. "맛있습니까?"  "씹고 있는 동안은 쓰고 신맛이 나지만, 조금 있으면 단맛으로 변한답니다." "(이렇게 씹어 먹는) 이유가 뭐죠?" "더 확실하고 더 쉽게 저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효력이 내 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순례자는 그를 좀 더 자세히 쳐다봅니다. 정말 그는 튼튼하고 적당하게 살이 쪘으며, 건강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고, 눈은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말씨는 신중했고, 생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모습이 전부입니다. 내가 책을 읽는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렇게 자기 만족으로 그쳐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외에 순례자가 본 세상의 모습은 대부분이 너무 답답하다 못해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입니다. 광야로 가서 은둔의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세상을 등지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동행자들이 놓아주질 않는군요. "저는 불의, 속임, 유혹, 거짓, 잔인한 일들을 경험하며, 그렇게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수천번이라도 죽는게 낫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살기보다는 죽고 싶어요, 이제 저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운명을 살펴볼 거예요."

 

2부는 크리스쳔들이 믿음을 재점검해보는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을 느낍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죽은 자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순례자에게 한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나온 본향으로 돌아가라, 네 마음의 골방 속으로 들어가 네 뒤로 문을 닫아라!" 말씀대로 따르자 갑자기 한 줄기 밝은 빛이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그 빛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순례자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 참 된 평안을 느낍니다.  황폐해진 마음이 회복되어 결국 마음의 천국을 발견하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고전으로서,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기법으로 서술된 점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도 종종 비교됩니다. 지은이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1592~1670) 는 현대 교육학의 체계를 놓은 교육학의 대가이자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로 서양 교육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17세기 당시 교육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개신교 목사요, 신학자요, 언어학자요, 평화 운동가 및 정치 사상가로서 인간성 회복과 세상을 개선하는 일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봉건 질서제도의 붕괴, 교회와 신앙의 권위 약화, 이성 중심의 학문방법론 및 과학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간 삶의 많은 영역에서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30년 종교전쟁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개인적으로 결코 순탄치 못했던 그의 삶의 여정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약 200여편의 글들을 남겼습니다. 1670년 11월 15일 소천해서 암스테르담 근교 나르던(Naarden)에 묻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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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살았을까 - 나를 찾아 떠나는 3일간의 가치 여행
정진호 지음 / 아이지엠세계경영연구원(IGMbooks)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오늘은 '어른아이'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른같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같은 어른 이야깁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한숨 쉬듯이 토해낸다면, 뭐라고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러게, 왜 그렇게 살았니!"하고 핀잔하고 마시렵니까? 내 이야기는 아닐까요? 저는 이러한 상황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걸어온 인생의 길이 짧지 않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얼마전에 읽은 책 [나에 대하여]도 3일간의 여정이더니만, 이 책도 '나를 찾아 떠나는 3일간의 가치 여행'이란 부제가 붙어 있군요. 3일이면 충분한가 봅니다. 아니 최소한 3일 정도는 집중적으로 생각을 해보자는 이야기겠지요. 아님, 작심삼일의 연속이던가..
 
"진짜 어른은 자신이 누구이고, 살아가는 존재 이유를 알고, 살아갈 방향을 스스로 세우고 있는 이를 뜻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가짜 어른들이 많습니다. 가짜 어른이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핵심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 책보다 앞서 출간된 [일개미의 반란]에 소개된 이솝 우화를 제외한 수천 가지의 신화와 우화들 중 우리의 삶에 잔잔한 파고를 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속에 우리의 삶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핵심가치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직장과 사회, 가족과 사랑, 미래와 꿈, 자기가치경영 그리고 책에서 느낀 점을 실제로 적용해보는 시간인 '자기가치경영 워크숍' 등입니다. 이 '자기가치경영 워크숍'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적어보는 기회를 갖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적는 시간이 3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소지하고 다니도록 권유합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금욕을 실천하는 수도원에 욕망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울에 올라선 뒤 눈금이 요동치는 수도사들은 각자 독방에 들어가 긴 시간 동안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수도사들은 한 명씩 저울에 올라갔습니다. 눈금은 늘 그랬듯 요동치며 수도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수도사가 올라서자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산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래전에 죽은 수도사의 영혼이었다고 합니다."

 

죽어야 욕망도 같이 죽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욕망의 힘은 사그러질줄 모릅니다. 그저 달래고 어르며 누르고 있을 뿐이지요. 두더지잡기 식으로 힘겹게 머리를 들여보내고 있을 뿐이지요. 욕망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요. 나를 상하게 하고, 남을 힘들게 하는 욕망이 문제입니다. '선한 욕망'은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책에는 동서고금의 많은 예화들과 저자의 일상 주변에서 만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 생각에만 몰두하느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을 느끼는 시간도 갖습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시골에 무명의 여류 피아니스트의 연주 광고가 붙었습니다. 이 여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신을 홍보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작은 마을에 진짜 리스트가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 여류 피아니스트는 리스트의 제자이기는 커녕,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명의 여류 피아니스트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지요. 그러나 한참 고민을 하던 이 피아니스트가 리스트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기로 합니다. 이 대목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점수를 많이 주고 싶습니다. 리스트를 찾아간 이 피아니스트는 리스트에게 용서를 빌며 자신이 형편상 제대로 된 스승에게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며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리스트는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피아노를 쳐보라고 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고 잘하는 부분을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이제 내 앞에서 연주를 하고 내가 고쳐주었으니 당신은 내 제자가 맞다. 자신감을 가지고 연주를 하고, 연주 마지막에는 나의 스승 리스트가 직접 연주를 하겠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감동적인 이야깁니다. 나의 배려는 한 사람을 크게 살릴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책에 실린 여러 예화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무언가 결정을 못 내리고 좌충우돌 할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일상의 언어로 독자들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또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자극 주고 있습니다. 나는 현역에서 무엇을 이루었으며 어떤 찬사를 듣고 있는가?  나의 꿈, 가슴 설레는 미래의 모습, 나의 비전은 무엇인가?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떠한 타협도 없이 지킬 원칙과 기준은 무엇인가?  조직원으로서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들을 진작 내 안의 나에게 물어봤으면 아마도 나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외에도 깊이 있는 질문을 나에게 물어가며 가치 있는 내면여행을 떠나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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