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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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을 읽을 때는 첫 문장에 주목한다. 너무 길면 재미가 없다. 짧으면서도 그 다음을 읽어보게 만드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점수를 줄 만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전직 여배우 아야미는 손에 방명록을 든 채 오디오 공연장의 두번째 계단에 앉아 있었다."


오디오 공연장이라? 낯설다. 우선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야미는 음향 기기 사이 어딘가에서 간헐적으로 라디오가 작동되며 나오는 음악소리를 듣는다. 우선 이 대목에서 군복무 중 겪었던 일이 오버랩된다. 70년대 중반. 휴가를 나가서 모아놨던 돈으로 카세트 레코더를 하나 샀다. 워크맨이 나오기 전이었다. 거의 노트북 크기의 그 기기는 오직 녹음 테입만 작동시켜 주는 기능만 있었다. 영어회화 테입을 한 질 사서 귀대후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어느 날 밤. 카세트 테입이 들어있는 줄 알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이던가?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조곤조곤 들려왔다. 웬일인가 싶어서 열어봤더니 아무 것도 없었다. 플레이 릴축이 돌아가면서 떠돌아 다니던 방송 주파수를 불러 들인 것이다. 그후 영어회화는 뒷전이고 테입없이 플레이만 누르고 라디오를 들었다. 나의 소중한 비밀이기도 했다. 


아야미가 라디오 소리를 들은 것은 아마도 환청이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뒤얽힌 음향기가 어드메쯤에서 그때 나에게처럼 떠돌이 주파수가 잡혔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극장장은 아유미가 라디오 소리를 듣는다고 하자.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혹시 뒤에 남게 된 소리의 그림자가 아닐까요?"  아유미가 있는 곳은 오디오 공연장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소리의 그림자.'


독순술(讀脣術). 아유미에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독순술이다. 독순술은 원래 청각전선에 이상이 생긴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키워지는 능력이다. 청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예민해지는 부분이다. 아유미의 청력엔 이상이 없어보인다. 그래도 뛰어난 독순술을 발휘한다. 덕분에 멀리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니 볼 수 있다. 


아야미는 우연한 계기에 한국 여인에게 독일어 교습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아야미의 이름을 부르기 싫다며, 독일어 교재 속에 등장하는 이름인 '눈먼 부엉이'라고 불러준다. 아야미는 '보이지 않는 식당'에서 직장 상사인 극장장을 만난다. 극장장이 만났다는 '김철썩'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작가가 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철썩'이라는 시인이 '철썩'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동기는 "자신이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그 대답으로 세상은 흙을 한 삽 떠서 그의 무덤에 퍼붓더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철썩, 철썩 흙이 그를 묻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아야미를 짝사랑하는 '부하'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소설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분히 몽환적이다. 하나같이 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부하는 아야미를 '시인 여자'라고 부른다. 소설에는 이란 작가인 서덱 헤더야트의 [눈먼 부엉이(The Blind Owl)]이야기가 등장한다.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마치 이 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작가인 배수아가 함축적으로 소개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모티브도 [눈먼 부엉이]에서 잡아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길을 잃었다. 누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문득 길을 잃지 않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잘 못 된 생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봐야겠다. 배수아의 이 소설은 심미적이다. 그냥 꿈꾸듯이 읽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문장은 책 말미에 해설을 붙인 김사과의 글이다. 


"왜냐하면 고독은 실패이기 때문이죠, 아야미."

 

그럴까? 고독이 실패일까? 그럼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고독은 고독 자체로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 이 땅에 살면서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독하니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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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라일락 꿈꾸는돌 7
캐럴린 마이어 지음, 곽명단 옮김 / 돌베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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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생활권을 의식주(衣食住)로 표현합니다. 물론 이 단어가 그 중요도 순서로 붙인 것은 아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순서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식의(住食衣).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방 막힌 공간이 없는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아니 생활 자체가 힘든 상황이지요)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땐 몰랐다. 우리가 쫒겨나 삶이 송두리째 뽑히고, 정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줄은, 그때 프리덤 타운에 살았을 적, 우리 외할아버지 짐 윌리엄스는 일분 일초라도 짬만 나면 아름다운 꽃밭을 손질했다. 할아버지는 그 꽃밭을 좋아했고,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좋았다. 할아버지네 꽃밭은 내가 가장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화자 역할을 하는 주인공은 '로즈 리'라고 불리우는 흑인 소녀입니다. 로즈 리에겐 할아버지네 꽃밭이 에덴 동산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쫒겨난 것은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치고, 로즈 리와 마을 사람들이 그 터전에서 쫒겨나는 것은 매우 상황이 다릅니다. 그 에덴 동산에서 할아버지가 특히 아끼는 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얀 라일락'입니다. 


"이건 아주 귀한 나무야. 자줏빛 라일락은 흔해도 이렇게 하얀 라일락은 평생 가야 한번 볼까 말까 하거든."  


로즈 리는 정원사인 할아버지의 일터이기도 한 백인 가정 벨씨네 집에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느닷없이 식사시중을 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백인 여인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안 들었어야 하는 말이지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여사님. 프리덤타운을 어떻게든 해야 해요. 그러면 해결된다니까요."


프리덤 타운은 그 지역의 흑인 집단 거주지역입니다. 전혀 프리덤하지 못한 프리덤타운.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시티 오브 조이'가 오버랩 됩니다. '환희의 도시'라 불리는 지옥 같은 곳, 캘커타가 생각납니다. 


여인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딱한 검둥이들이야 프리덤타운을 뜰 기회라고 좋아하지 않겠어요? 큰비만 내렸다 하면 샛강이 넘쳐 진창이 되니 지긋지긋할 만도 하잖아요! 우린 그저 거기보다 살기 편한 데로 옮겨 살게 해주는 것뿐이죠. 하긴 검둥이가 워낙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코흘리개 같으니, 이주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고 구슬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먹고 살만한 백인들은 흑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공원, 도서관 등을 세울 꿈에 부풀어있군요. 

그 동안 프리덤타운을 밀어버리겠다는 소문과 분위기가 있었지만, 로즈 리가 백인 가정에서 들은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했고, 로즈 리는 아빠의 일터에 모인 흑인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줘야 하는 중책을 맡습니다. 들은대로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전하자 흑인들은 흥분하면서 대책 회의에 들어갑니다. 


백인들은 백인들대로 시장을 등에 업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심한 말도 내뱉는군요. "딜런에서 삭막한 것을 제거하고 너저분한 것을 싹 없애자." 


자, 그렇다면 프리덤타운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죽어도 여기 남겠다는 그룹,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저항하겠다는 그룹, 또 다른 도시, 아예 먼 곳으로 이주하겠다는 마음들이 스몰스몰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잠시 고향에 들른 로즈 리의 고모 수재나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가 쓴 시 중에서 한 귀절을 읽어줍니다.


겁먹은 성도들이여 새로이 마음을 다지라

그대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저 구름은 

자비를 잔뜩 머금었으니  언젠가는 흩어져

그대들 머리에 축복을 뿌릴지니


이 와중에 KKK단(큐 클렉스 클랜) 수백 명이 프리덤타운을 행진하며 교회 앞에서 십자가를 불에 태우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잘 아시는바와 같이 kkk단은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반 로마 가톨릭교회, 기독교 근본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표방하는 살벌한 미국의 극우 비밀 결사 단체이지요. 사태는 점점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로즈 리에게 할 일이 생겼습니다. 흑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강압적으로 몰고가는 분위기에 역행하는 백인 여성 퍼스 선생이 로즈 리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주면서 프리덤타운의 구석구석을 모두 그림으로 남기라고 지시합니다. 로즈 리가 그림을 곧 잘 그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권력과 결탁한 무리가 그 뜻을 행하는 방법. 화재가 일어납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짐작할 수있는 방화로 추정되는 화마가 학교 건물을 덮칩니다. 한편 로즈 리는 스케치북을 들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군요. 아직 어린 아이이건만 본인이 안하면 안 되는 크나큰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구석 저 구석 열심히 그리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로즈 리가 그린 그림을 보고 누구네 집인지 단박에 알 수 있도록 충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의 시선과 마음과 손을 통해 그 참담한 상황을 그리게 만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의 눈을 통해서 본 상황이기 때문에 그나마 세심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요. 어른들의 시선은 좌아니면 우로 치우치게 되지요. 감성보다 감정이 앞서지요. 흑인 해방 운동을 주제로 한  "어느 뜨거웠던 날들"(리타 윌리엄스-가르시아 / 돌베개)에서도 세 자매가 아이들의 얼굴에 잘 새겨지지 않은 채로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나섰지요. 그 엄마는 흑인 인권 운동 단체인 '흑표범당' 당원이었지요. 


결국 프리덤타운은 지도상에서 사라집니다. 거주하고 있던 흑인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맙니다. 흑인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던 1920년대 상황입니다. 


이 책의 저자 캐럴린 마이어 이야기를 해볼까요? 1935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아마추어 배우 아버지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답니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여덟살 때 처음으로 소설을 썼답니다. 지금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내놓았다는군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소설로 명성을 얻었고,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1991년 2월 28일, 텍사스 주 덴턴 도시공원에서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을 때 초대받아 간 후, 기념비에 새겨진 글을 보며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 그 마을 이름은 '퀘이커타운'이었고, 책에선 '프리덤타운'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당시 기록과 자료를 열심히 뒤져서 나온 작품입니다. 1992년도에 이 책을 첫 출간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군요.


"이 책에 실린 등장인물들이 겪은 숱한 비극도 프리덤타운과 딜런에 얽힌 이야기도 70년 전 텍사스 주 넨턴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혀둔다."


흑인 대통령이 연임하는 미국이란 나라지만, 흑인들의 인권은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부분이 더 크지요.  빈부의 격차와 더욱 공교해지는 공권력 앞에 무력감만 느끼고 살아야 하는 우리네 서민들 역시 같은 입장인 듯 합니다. 새로운 도시 건설과 계획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려야하는 민중들의 인권은 어디서 찾아내야 할런지요. 이 땅에도 여전히 부와 권력만이 지배하는 '폭력사회'가 만연해있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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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세상의 끝 지만지 희곡선집
장뤼크 라가르스 지음, 임혜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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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인 장뤼크 라가르스의 희곡. 10년 만에 집을 떠났다 집으로 온 그 집의 장남 루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서른 넷도 채 안 된 지금 이 나이에 난 죽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써 보지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결코 없기에, 두렵기만 하다.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모처럼 큰 맘 먹고 집으로 왔지만, 더욱이나 그의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이야기하려는 비장한 마음은 식구들이 그에게 쏟아붓는 말들 속에 묻혀버린다. 오히려 그는 말하는 입장이 아니라 듣는 처지가 된다. 그 동안 그(루이)가 집을 떠난 후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 대화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그는 극중에서 독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쉬잔(루이의 여동생) : 큰 오빠가 떠났을 때 오빠가 그렇게 오래 떠나 있을 줄 몰랐어, 신경 안 썼어.(.....) 오빤, 가끔씩 우리한테 편지를 보냈지, 가끔씩 우리한테 편지를 보내는데, 편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쪽지 글, 단지 쪽지 글, 문장 한 두 줄, 그 외에는 아무것도, 그걸 뭐라고 하더라?  생략어법. "난 잘 있어 그리고 다들 그렇기를 바라" 라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은 어수선하다. 루이의 복잡한 마음을 함께 느낀다. 어쩔수 없이 루이의 독백을 주목하게 된다. 루이는 이젠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집으로 오기 약 열흘전 쯤 불쑥 결정하게 된다. 그저 식구들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만 챙겼다. 그리고 갈등의 며칠을 보내면서 스스로 집으로 안 가도 된다는 이유들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집으로 가서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바꿨다.

 

루이는 어느 날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비록 스스로 집을 떠나 가족들을 잊고 살다시피 했지만,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때문에 그랬을까? 가족들에게 잊혀져 가는 존재, 포기한 사람, 이젠 모두가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잊혀져 가는 사람. 헤어진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잊혀진 사람이라던가? 김춘수 시인은 이를 詩語로 표현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루이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아침. "지금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불평했던 그 사랑의 결핍이 언제나 날 비겁하게 만든 유일한 이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의 결핍은 언제나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상처받게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마디 할 수도 없고 나한테 한 마디 할 의무도 없는 죽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나를 그들은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상하고도 절망적인 그리고 계속 사라지지 않는 생각으로 난 잠에서 깨어았던 것이다." 그 중 독백자가 한 사람 더 등장한다. 주인공 루이의 남동생 앙투안은 집을 떠나 소식이 없던 형에 대한 원망과 연민이 섞인 독백 같은 대사를 통해 그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무도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런 걱정, 이런 걱정이 이젠 내 불행이 되었어, 마치 언제나 어린 동생들이 형을 따라하거나 걱정하는 것 같이, 이제 나도 불행해, 그런데도 계속 죄의식이 들어, 내가 별로 불행하지 않는 것에 죄의식이 들고, 억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조용히 죄의식을 가질 정도로..."

 

작가는 이 희곡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관객들은 이 연극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가족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무엇 책임감이나 연대감?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라는 존재는 가족이란 울타리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어려부터 같이 한 지붕 밑에서 한 솥밥을 먹고 생활한 가족들은 나를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완전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할 자신이 없다.


이 책을 옮긴이 임혜경 교수에 의하면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이 보내는 어느 일요일 하루 나절 이야기에서 시골 가정의 현실, 흔한 가족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적인 면. 그리고,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부분이 섞여 있다고 한다. 특히 주인공 루이의 의식 세계는 단순히 그날 하루라는 현실 시간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간다.

 
결국 루이는 가족들 앞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그의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 말)을 못하고 다시
집을 떠난다. "그 다음에, 내가 한 건,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몇 달 후 죽는다. 1년 안에...밤에, 산에서 길을 잃었다. 철길을 따라 걷는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밤, 홀로 걷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건 크고 멋진 소리, 계곡에 울려 퍼지도록 환희에 찬 긴 함성을 질러야겠다고, 나한테 선사해도 될 그런 행복, 힘껏 한 번 소리쳐 보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  그건 망각이다, 후회하게 될, 내가 지르지 않은 함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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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경 - 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자오촨둥 지음, 노만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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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논변(論辯). 책의 서두에는 이 단어가 나온다. 논변((論辯). 사물의 이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밝혀 말함 또는 어떤 의견을 옳고 그름을 따져 자세히 말함이라는 뜻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서인 [상서(尙書)]는 논변에 관한 기록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로 접어든 뒤 논변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 그 기세가 자못 왕성한 형세로 바뀐다. 혀는 검과 같고 입술은 창과 같은 논변가들이 예리한 언사로 상대 논객과 날카롭게 맞서는 논변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격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른바 말솜씨로 천하를 주름잡는 유세객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공자의 논변은 말은 쉽되 뜻은 심원하고 태도는 점잖고 우아했다. 맹자의 논변은 장쾌하고 기세가 높았지만 반드시 예리하지는 않았다. 장자의 논변은 과장하여 묘사하고 지나치게 장식하고 자세히 진술했지만 그 기세가 웅장하고 호방하여 구애됨이 없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소진과 장의는 각 제후국에서 합종연횡의 유세를 펼쳐 전국 시대의 국제 정치 판도를 좌지우지했다. 괴통은 죽음을 무릅쓰고 허심탄회하게 논변했다. 해서는 바르고 곧은 절개로 논변하며 감히 황제의 역린(逆鱗, 임금의 노여움을 이르는 말.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고 함. ≪한비자≫의 <세난편(說難編)>에서 유래)까지 건드렸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좌오촨동은 중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중국 감남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논리학 관련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여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다. 이 외에도 저자의 저서는 [논변에서 이기는 기술], [중국고대심리건강사상개론], [웅변절초 101], [과학자로의 길을 향해 : 과학 기술 창조 사례]등이 있다.


책은 총 4부로 편집되어 있다. 1부는 책사들이 천하를 종횡하고 논변의 백가쟁명이 일어난 춘추 전국 시대를, 2부는 백가쟁명이 끝나고 궁정 논변이 펼쳐지는 양한, 위진 남북조 시대를, 3부는 쟁신을 육성하여 궁정 논변의 황금기를 구가한  당나라, 송나라 시대를, 4부는 소수 민족 정권과 함께 논변의 격변기를 맞는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를 담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에선 '노자'를 만나본다. 노자(老子)가 살던 시기는 노예제가 봉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로 사회가 극심하게 동요하는 불안한 시대였다. 지배 계급 내부에서도 분화가 발생하여 신구 세력 간의 투쟁이 격렬했다. 투쟁 수단은 흔히 찬탈, 반란, 부친 살해, 임금 시해 등이었다.  여러 해 동안 사관을 지냈던 노자는 약탈 전쟁의 잔혹함과 장기간에 걸친 백성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목도하며 '인위 없이 자연의 순리에 맡기자.'라는 무위(無爲)를 주장했다. 마땅히 그는 모든 싸움을 버리고 '절성(絶聖, 성스러운 체하는 것을 그만두기)'과 '기지(棄智, 아는 체하는 것을 버리기)'와 '절학(絶學, 배우기를 그만두기)'을 하자고 부르짖었다.


절성, 기지, 무위, 망아를 주장한 노자는 자연스럽게 논변도 찬성하지 않고 '지변(止辯, 논변 중지)'을 요구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則不知)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善者不辯 辯自不善)  

- '도덕경'



비록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선양하고 남과 논변을 펼칠 때에는 조리가 있었지만, 논변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방했던 셈이다. 


양한, 위진 남북조 시대에선 '장석지'를 주목한다. 황제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한 그의 기개를 들여다본다. 장석지는 집안이 부유해 재물로 기랑(騎郞), 즉 황제가 외출 할 때 호위를 하는 기병이 되었으나 승진도 되지 않고 알아주는 이도 없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중랑장(환제 근위병을 통솔) 원앙이 황제의 측근에서 문서와 상소문을 받고 전달하는 벼슬아치인 알자(謁者)로 추천을 했다. 


장석지는 태자와 태자의 동생을 불경죄로 탄핵한다던가, 황제가 자신이 죽은 후 그의 묘를 진기한 보석과 구슬을 넣어 호화롭게 꾸미겠다는 생각을 하자 '탐나는 물건이 없으면 황제의 무덤도 온전할 것'이라고 직언한다. 그 외에도 공평무사한 법 집행만이 백성들의 믿음을 얻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과 그 가족들의 엄청난 비리가 드러날 때 마다 그들을 비호하기에 급급한 작금의 국내 상황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다.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선 '손석'을 만나본다.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와 싸움을 벌이다 화의를 했는데, 송나라 입장에선 불평등한 조약이자 치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진종은 이 일 때문에 모욕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러던 차에 간신 왕흠약이 천서(天瑞,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운 조짐)사건을 벌인다. 이 때 강직한 사람 손석이 이를 진종에게 직언한다.  "어리석은 신이 들은 바로는 하늘이 말을 하지도 못하는데 어찌 글을 쓰겠습니까!"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며 제사를 지내는데만 몰두하는 진종에게 "백성은 신령의 주재자이니 밝은 군주는 먼저 백성을 안정시킨다"고 목숨을 걸고 상소한다.

뒤이어 "나라가 흥하려면 민의를 따르고, 멸망하려면 귀신의 분부를 따른다"고 직언한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선 '과감한 개혁 정치로 난세를 구한 '장거정'을 만나본다. 장거정은 강릉(江陵,지금의 호북성)사람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해서 일곱 살에 육경의 큰 뜻에 통달했으며, 열두 살에 수재에 합격했다. 승승 장구해서 마흔 다섯 나이에 내각의 최고 수장인 수보의 자리에 오른다. 용모도 출중했지만, 심지가 굳고 담력이 크고 지모가 풍부했다. 상소문을 통해 '행정 개혁 여섯 가지'를 올린다. 그 내용은 '공론을 줄인다.', '기강을 바로 잡는다.', 조령을 중시한다.' '드러난 명성과 실제의 공이 명실상부하도록 한다.'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한다.', '군비를 바로 갖춘다.' 등 그 당시로선 획기적인 행정 개혁안이었다. 그 후 개혁 정치는 순풍에 돛을 달고, 전국적으로 토지를 측량해 탈세자가 없게 한다던가 모든 조세와 부역을 통일하는 일조편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책을 옮긴이 노만수는 이 [쟁경]을 동양의 논변을 총망라한 '동양 논술 대백과 사전'이라고 칭한다. 그 표현이 지당하다. 다섯 수레에 실어도 다 못 실을 만큼의 방대한 분량의 동양 고전 목록에서 논변에 관한 액기스만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싸워서 이긴다는 뜻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또한 깊이 생각해본다.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나의 마음에는 정도(正道)가 있는가. 그저 남과 싸우기 위한 마음의 칼날만 갈고 있지는 않은가. 남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나의 뜻을 상대방의 마음 속에 넣어서 굴복하게 하는 일인데, 과연 나는 바로 서 있는가. 남과 싸우기 전에 나 자신과 먼저 그 싸움을 해야하지 않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통해 남을 살피기 전에 나부터 잘 살피고, 나부터 바로 서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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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찬가 -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는 이 책을 사회의 정글화에 대한 비판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 책의 제목에 보노보(bonobo)라는 생소한 동물이름을 사용한 것은,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개인적 관심 외에도 보노보의 행동양식이 정글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 여러 시사를 던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민주, 인권, 공정, 평등, 연대, 복지 등 진보의 가치를 보노보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파니스쿠스'라는 종명(種名)을 가진 보노보는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지대에서 새로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트로글로디테스'라는 종명을 가진 침팬지와 구별되는 영장류 동물입니다.  저자는 그의 전공이 아니지만, 보노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러 침팬지 연구를 참고 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수직적 서열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폭력을 수반하는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 다른 침팬지 집단과의 잔혹한 전쟁, 성인 수컷에 의한 유아살해 등의 행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 권력투쟁, 전쟁, 학살, 남성지배 등의 생물학적 기원을 바로 인간의 '사촌'인 침팬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보노보라는 종(種)은 좀 다릅니다. 침팬지와 달리 암컷끼리의 연대가 매우 강합니다. 수컷이 암컷을 지배하지 못하며, 공동체내에서 부자보다 모자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보노보 무리는 암컷 중심의 사회입니다. 아울러 엄격한 수직적 서열을 만들지 않으며 상당히 평등한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노보의 행태와 문화는 전 세계 영장류학계는 물론, 인류학계, 사회학계, 여성학계에 크나큰 충격파를 던졌다고 합니다. 인류가 '자연법칙'으로 수용하는 침팬지식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보노보식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은이는 대한민국이라는 '정글'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침팬지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 점 깊이 공감합니다. 제일 심한 곳이 '정치판'입니다. 논란 많은 '여성부'란 곳이 있기도 하지만, 직장에서 성차별은 꿋꿋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하기도 합니다. 



-  '정글자본주의'의 시대, 진보의 길 찾기

지은이는 자본 앞에서 초라해진 '법 앞의 평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시장권력 또는 경제권력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정치권력에 비해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미 이러한 사례는 뉴스를 통해서 보고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벌 총수가 경제, 폭력등의 사유로 검찰을 들락거리게 되면, 휠체어와 마스크가 법정 복장으로 통일됩니다. 모 판사는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수천억 원을 횡령한 재벌 회장은 도주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김 한 장을 훔친 노숙자는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고, 한국의 피해자는 돈만 있으면 90퍼센트 정도가 합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형은 피고인의 재력에 달려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형벌권의 과잉과 남용은 안 된다.

매년 수많은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범죄인의 기본권이 제한, 박탈되는 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지만, 문제는 감금 이후입니다. 지은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교정시설과 방법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굳이 '신시내티 선언'이 아니더라도 '수형자에 대한 행형규율의 최고목적은 보복적 고통을 과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개선이어야 한다.'는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교도소가 '학교'로 바뀌었겠습니까? 교도소 동기생들이 한 판 벌리면, 크게 한 판입니다. 지은이는 이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도소는 수인들에게 고립과 고통과 무의미한한 노역의 기간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생활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할 대 재범률은 줄어들고 다수자의 안전도는 놓아질 것이다."

 

- 이 땅의 소수자를 위하여

다문화사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질 정도로 주변에 외국인과 외국인이 결합된 가정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본인들에게 서양인들에게 받은 차별의 역사가 깊습니다. 현재도 재일교포가 받는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멸시까지 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안의 인종차별주의는 난민인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리는 중국정부에 대하여 탈북자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한국을 '약속의 땅'으로 믿고 목숨 걸고 찾아 온 난민들을 냉대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생각하다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인간이 보노보나 침팬지를 스터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연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듭니다. 보노보가 속으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은 어찌 저렇게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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