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늘 쑥밭이었다. 향그러운 쑥이 다북하게 돋아난 봄밭이 아니라, 흔히 쑥밭하면 떠올리는 헐크러진 뒤숭숭한 정신 없는 쑥대밭. 오늘도 마음은 여전했고, 증세가 좀 더 심한 날이었다. 일단 계속 먹었고, 잠을 잤고,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도 또 잠이 오는 것이 약간의 몸살기운도 있었나 보다고 하루가 다 지난 지금에야 알아진다.
<칼과 황홀>을 뒤적이며 좀 웃다보니, 그 옆에 있던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에도 손이 갔다. 서문만 읽고 두었는데, 읽자마자 마음에 들었으므로 조금 천천히 오래 가만히 읽을 요량으로 밀어 둔 책이었다.
와인 행사에서 한 패밀리의 와인을 샀다. 시칠리아의 대형 와이너리인 "플라네타"의 시라와 플룸바고와 알라스트로, 플룸바고는 커피와 초콜릿을 함께 넣은 듯한 레드와인이고, 알라스트로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바람 부는 저녁에 딱 맞는 청량한 화이트와인이다. 시칠리아 와인의 별답게 누가 마셔도 맛있는 화이트와인이다.
플라네타를 마시며 생각한다. 시칠리아를 여행할 때 플라네타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야생화 플룸바고, 야생초 알라스트로처럼 더 씩씩하고 내내 맑았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쉬웠다.
2004년 시칠리아에 갔다. 광고 인텔 센트리노의 '타오르미나 원형극장' 영화 <그랑블루>의 무대가 되었던 '타오르미나의 도메니코 팔레스' 영화 <대부>의 먹먹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바람이 불던 '팔레르모'가 있던 시칠리아는 늘 꿈꾸던 여행지 중의 하나였다. p49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와인 라벨지에 있는 꽃그림을 보고 눈길을 멈추었다. 얼마전 완도 수목원 온실에서 본 애니시타, 지금도 길가 화원의 화분에 흔히 심겨져 있는 노란 콩꽃을 닮은 꽃이다.
셰익스피어 <템페스트>의 배경이 된 섬에 피어 있는 가시금작화, 동화 <백조왕자>에서 공주가 오빠들의 옷을 짜던 그 가시덩쿨과 같은 식물이다. 이탈리아어로 '알라스트로' 라고 하는 구나..발견이다. 지역에 따라 가시 금작화, 금작화, 애니시타, 알라스트로로 불리는 이 꽃은 봄부터 여름까지 지중해 연안의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그런데 작가가 말한다. 알라스트로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바람 부는 저녁에 딱 맞는 청량한 화이트와인'이라고. 시칠리아 와인의 별이라고. 누가 마셔도 맛있는 화이트 와인이라고.
알라스트로를 구해서 마실 기회가 온다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베토벤 심포니 <템페스트>를 연주하는 빌헬름 켐프의 눈빛과 어릴 적 마르고 닳도록 보았던 하늘을 날던 백조왕자와 완도수목원과 지중해 연안의 들판과 <그랑블루>를 다 이야기할 것 같다. 누군가 같이 마시는 사람들이 싫증나도록 떠들어 댈 것 같다. 미리 자중하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