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는 순간, 아..참 감사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집안은 고요하다. 다시 다음 주 한 주를 일상에서 좀 벗어나 있게 되었다. 친구가 힘들 것 같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내심 내가 즐기는 일도 많다. 아이들이 좋고, 아침 산책길이 좋고, 비는 시간엔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
처음엔, 한 시간동안 전철 타고 다니면서, 책 좀 읽어야지 했다. 그런데 요즘 부쩍 전철 안에서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싫어서 계속 차를 가지고 다니고 있다. 혼자의 공간에서 음악의 듣는 맛. 운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리라. 체증도 싫어서 출근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해서 친구와 커피 마시고, 비는 시간엔 <잘 표현된 불행>의 '잘 표현 된 불행'을 베껴 썼다. 일주일 동안, 좋은 단락은 너댓번씩 계속 써가면서 천천히 옮겨 적었더니 5일만에 끝났다.
비평글 전체에 대해 내가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그 글 속에 언급된 시인들이나, 시집을 찾아 읽고 외워서 언제나 입에서 흘러나오게 하고 싶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몇 만난다면, 그런 일처럼 행복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다음 주엔 손으로 베껴 쓰면서 나를 좀 눌러 봐야지 싶은 생각도 들지만,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상황이라 체력이 감당해줄지 모르겠다.
요즘 아침 마다 산책을 하는 길은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의 산책길과 그 주변의 약수터이다. 그런데 그 주변이 워낙 산골?이었던 터라, 마냥 대단지 아파트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그래서 야외 활동을 통 안해서 못 보고 있던 풀꽃들을 실컷 보는데다, 산책길을 조성하면서 인공적으로 식재한 꽃과 나무들까지 볼 수 있어 만족감이 더한다. 아이들과 식물 수업을 할 수 있음 정말 좋을 텐데, 요원하다.
지지난 주 도서관에서 빌려 온 <식물노트 작성법>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책이다. 보태니컬 아트 그림이 크게 들어간 식물학책이다. 표지만 보면 보태니컬 아트에 대한 기법을 설명해주는 책처럼 보이지만, 사진과 그림으로 식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설명하고 있다. 보태니컬 아트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자세히 그리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만을 그리는 것처럼 보여도, 안보이는 부분의 구조나 안 보이는 솜털까지 알고 있어야 그것이 그림에 반영이 된다. 그런 식물학적인 지식을 알고 있어야 더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것이 보태니컬 아트의 생명이다.
지극히 학술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부분부분 이런 내용은 문화적인 코드라, 흥미로웠다.
꽃의 기독교 상징주의로 되돌아가, 시계꽃의 덧꽃부리의 수술대들은 면류관을 닮았다. 5개의 수술들은 예수의 5개의 상처 자국을, 3개의 암술머리는 3개의 못을 나타낸다. 초창기 미국정착민들이 산딸나무를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선교사들이 지역민들에게 갈보리 동산에 대해 가르칠 때 이 상징주의를 사용하였다. 68
오랫만에 서울숲에서 식물그림 모임 사람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다시 새로이 마음을 정리.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 책을 보고 싶은 마음 정도는 열렸다. 씻고 나서야지. 주말이 이렇게 시작된다.
(아침엔 문득, 침대에 누운 상태로 보고 싶은 영화 제목들을 떠올리곤, 이런 게 우울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위아영,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스틸 앨리스, 반짝이는 박수소리..이런 영화들이 보고 싶은데. 그냥 머릿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보고싶다'라고 생각만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 머리 속으로만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보고 싶'은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면서, 누군가, 몇 시에 어디로 나와 하면 나가서 볼 것은 같은데, 자주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는 상태. 우울증은 누군가 나오라고 해도 안나가는 상태가 우울증이겠지? 겉으로 보면 나는 분명히 무지 활기차 보이겠지. 그렇지만 내면이 너무 무겁다.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그랑부르'에서 한 없이 심연을 향해 내려 가는 그 느낌인데, 친구들아. 이 글을 읽고 있는 아무개야. 다음 주엔 적어도 2회이상 음주를 하자. 결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