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 <리틀 포레스트2>를 봤다. 이전에 <해피 해피 브레드>와 <카모메 식당>을 같이 봐줬던 남편은 자기는 근처 도서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혼자 보고 나오란다. 어떤 영화야? 농사지어 음식 해먹는 이야기야. 라는 대화가 오간 후이다. 그래서 10명 남짓이 앉아 있는 영화관에서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널럴하게 진짜 영화 보듯이 영화를 봤다. 행복해서 죽는 줄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눈발 하나 놓치기 아까운 영화였다. 2시간이 한 시간처럼 흘렀다. 올 해 2월에 개봉 된 여름 가을 편의 속편격에 해당하는 겨울 봄편은 눈 풍경으로 시작된다. 시장 봐다 먹기의 어려움과 눈 치우는 일이 고되겠구나 생각은 잠깐 눈 풍경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풍경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 해서 아주 마냥 좋기만 했다.

 

 

 

 

 

 

 

 

 

 

 

 

 

 

 

사람들은 대개 현실에서 못 벗어나거나, 벗어 나고픈 생각이 없을 때 환타지를 꿈꾼다. 스스로 환타지로 들어가거나,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런 환경을 만들지 영화정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귀농에 대한 환타지를 가지고만 있다. 게을러서 스스로 지어 먹고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게는 늘 꿈꿔 오는 바가 있었는데 그건 '집 앞에 무논'이다. 나는 늘 혼자 지어 먹을 만큼의 논에 쌀농사를 짓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속의 주인공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현실의 집 앞의 논이란 것이 여름이면 개구리 소리로 시끄러울 것이고 모기도 많고 기타 등등 이겠지만 일단은 그런 로망이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무를 자르던 도마가 무지 마음에 들었는데, 나도 그런 도마를 가지고 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보기엔 부족함이 없는 리틀 포레스트. 음식 하나 하나에 담긴 이야기들이 음식 재료 하나를 가꾸는 정성과 과정들이 더할 수 없이 잘 표현된 영화다. 단순히 먹고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식재료 하나에 담긴 개인의 추억이 어떻게 모여서 하나의 인간을 형성하는지, 외로움의 정서를 타인의 관계에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극복하는 방법이랄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과 자연과 인간이 주고 받으며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을 불러 오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사랑 도감>에서 봤던 쇠뜨기 나물을 하는 방법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소득이었다. 쇠뜨기로 어떻게 나물을 하지? 맛도 없을 것 같고 시간과 노력이 엄청 들 것 같았는데, 역시나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봄의 행사로 한 번 해볼 만한 생각은 들었다. 공선옥이 <행복한 만찬>에서 상찬한 머위도 한 섹션을 차지했는데, 화면 가득 둔덕에 여기저기 피어 난 머위꽃을 보는 맛이라니! 된장을 맛있게 지져 머위잎 쌈을 먹으면 당근 밥도둑이지만, 머위잎이 나기 전에 돋아나는 머위꽃을 따서 튀김을 해먹는다, 까지만 접수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 이외의 요리법을 알게 된 것 또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단풍취를 방풍나물로, 바람꽃을 아네모네로 번역한 것은 맞지 않는다. 방풍나물은 바닷가에 자라는 나물이고 화면에 나오는 식물과는 분명 모양이 다르다. 바람꽃은 학명에 아네모네가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히 아네모네라고 하는 꽃은 절화로 주로 판매되는 큰 꽃이다. 크레송은 우리 정서상 돌미나리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오갈피는 오가피와 같이 쓰인다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이득만을 취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또 하나의 자연인 나를 가꾸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다.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은 과거와 화해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

 

어제 도서관에서는 <무엇이 예술인가>를 읽고 발생 된 책들과, 커피샘이 추천해준 책, 요즘 꽃힌 자서전, 제목이 눈에 익숙한 책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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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7-27 09:25   좋아요 0 | URL
거창하게 논하는 환경이나 자연 따위가 아닌, 일상의 소박함이 묻어나는 글이에요.
자연 속에서 또 하나의 자연인 나를 가꾸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너무 멋져서 소름이 돋는걸여.
좋은 글 잘봤습니다, 꾸벅~(__)

2015-07-28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5-07-27 11:23   좋아요 0 | URL
저는 파란여우님의 서재에서 리틀 포레스트란 책과 영화가 있단걸 첨 알았어요 저도 약간 그러한?(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살겠다는) 로망이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책들이 갖고싶더라구요^^ 음식하는 것을 내가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데 남이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음식에 관한 이야기와 영상들이 좋으네요~~그리고 님의 삶의 단상들도 좋아요^^

2015-07-28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07-27 11:56   좋아요 0 | URL
저는 평소 도시의 삶을 살고있고 또 도시의 삶을 갈망하면서도 [리틀 포레스트]를 정말 좋게 봤습니다. 혼자서도 잘 해먹고 사는 여자주인공이 그렇게나 좋더라고요.
:)

2015-07-28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리가 편치 않아 누워서 딩굴딩굴
자세 바꿔가며 책을 읽는데 남편이 말삼아 말을 붙인다.

˝여보 이게 그 유명한 `호밀밭의 파수꾼`이야?˝
˝아냐 바보야 `하퍼리의 파수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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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미드나잇 인 파리>를 다시보기 하고, 뜬금 없이 이탈리아 풍광이 아름다웠던 어떤 영화가 떠올랐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에 가보지 않고도 파리를 더 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화다. 파리의 가장 이쁜 풍경을 색감을 덧 입힌듯 몽환적인 이미지로 감상할 수 있다. 그 도시에 숨쉬는 역사와 인물의 드라마까지. 주말에 한 번 더 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사실 난 파리보다 런던을 더 좋아하는데, <미드 나잇 인 파리>를 이번에 보고 파리가 미칠듯이 좋아졌다.

 

 <미드 나잇 인 파리> 덕분에 떠올려진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는 제목도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레몬농장의 노란 레몬들이 선명히 기억나는 영화였다.  그래서 레몬 농장 결혼식이란 키워드로 검색해서야 제목을 찾았는데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한 제목이었다.ㅜㅜ 이 두 영화는 심오한 인생의 의미 찾기를 하는 영화는 아니고 아름다움에 관한 소프트 터치. 정도의 분위기다. 나의 취향적인 감상으로는 인물보다 배경에 더 주목하였는 바 공간과 자연이 행복감을 주는 영화다. 이탈리아 풍광을 조연으로 삼은 영화는 더러 있지만 주로 여행영화라는 컨셉으로 지나가면서 풍광을 보여주는 식인데,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는 이탈리아 민가 체험 같은 컨셉으로 한 곳에 머물면서 그 곳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제주도 서귀포쪽에 가면 이탈리아 레몬 농장 같은 풍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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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와서 3주씩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읽지 않고 반납하는 책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 오늘은 바쁘게 발췌독이라도 해보자며 책을 펼쳤다. 밑줄 긋기를 하다보니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끝까지 다 옮겨 쓰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번역투의 문장들에 한숨이 나면서도, '삶의 경험들이 우리를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하고' 이런 문맥들에 위로 받는 오전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헤겔 텍스트의 일반적인 난해성뿐만 아니라 그의 미학 텍스트가 갖는 특유한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겪기 십상이다. 그 어려움이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해겔 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또는 적어도 헤겔의 논리학적 저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헤겔 미학을 읽고 이해한단느 것은 거의 불가능한 점이다.
이 책은 독자들이 이러한 장벽을 좀 더 수월하게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받침대의 구실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저술되었다. 일단 그 장벽을 넘어서면 그 이후에 펼쳐질 광대하고도 장려한 헤겔 미학의 세계를 독자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헤쳐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7

헤겔은 그가 철학자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베를린 대학 교수 시절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미학을 강의하였다. 대개 "미학 또는 예술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된 그의 미학 강의는 자신의 하이델베르크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베를린 시절의 강의를 거치면서 내용의 풍부함과 깊이가 더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헤겔의 미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 강의에 담긴 그의 미학적 사상을 뜻하는 것인데, 이 사상이 체계를 갖춘 텍스트로서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헤겔의 제자 호토의 공적이다. 호토는 헤겔 사후 강의 노트와 헤겔의 미학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필기 노트 및 자신의 노트를 모아 편집하여 모두 세 권으로 된 <미학강의>를 출판하기 이르른다. 18

그의 철학 체계 전체가 기술 되어 있는 <철학 대계>는 크게 보아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삼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신 철학에서 정신 역시 주관 정신, 객관 정신, 절대 정신으로 삼분되어 다루어진다. 주관 정신의 철학이 영혼이나 의식과 같은 정신의 주관적 측면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객관 정신의 철학은 대상화된 정신, 다시 말해서 정신이 객관화된 것으로서의 법, 사회제도, 국가 등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절대 정신의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예술, 종교, 철학이다. 예술이 절대 정신의 한 영역 내지는 형식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헤겔에게서 예술이 객관 정신에 해당하는 법, 윤리 또는 국가보다도 높은 차원에 속하는 것인 동시에, 종교 그리고 철학과 함께 가장 고차적인 진리 내용을 드러내는 영역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진리에 몰두 한다는 점에서...예술은 ...종교 및 철학과 더불어 그 내용에 있어 동일한 지반 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 및 철학과 동일한 소임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이러한 소임이란 곧 진리의 표현 또는 제시이다. 21

그래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예술이 종교 및 철학과 공통의 영역 속으로 자신을 위치시켜 오직 신적인 것, 인간의 가장 심오한 관심사, 정신의 가장 포괄적인 진리들을 의시케 하고 표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할 때, 이 때 비로소 예술은 자신의 최고의 과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드러내며, 또 이러한 방식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진리를 직접적이고 감각(감성)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며, 종교가 "표상하는 의식" 속에서 진리를 제시한다면, 철학은 이를 "자유로운 사유"라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21

그렇기에 더 나아가서 예술을 위한 내용은 도대체 어떤 것이며 어째서 그 내용이란 것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정신에 자리하는 모든 것을 우리의 감각, 느낌, 감동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 예술의 과제이자 목적이라는 흔히 알려진 견해가 우리의 의식에 떠오른다. "나는 인간적인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는 저 잘 알려진 명제를 예술은 우리 속에서 실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예술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즉 예술이 목적은 온갖 종류의 잠재해 있는 감정, 경향성 및 열정을 일깨워 활성화하고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 그리고 - 계발되었든 아직 계발되지 않았든 간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심정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지니고 경험하며 산출할 수 있는 모든 것, 인간 가슴의 심연과 그 다양한 가능성 및 측면들을 움직이고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절히 느끼도록 하는 데 있으며, 그 밖에 정신이 사유와 이념 속에 갖는 본질적이고 고차적인 것, 즉 고귀하고 영원하며 참된 것의 찬란함을 느끼고 직관하면서 향유하도록 하는 데 있다. 120

예술은 한편으로는 모든 면에 걸친 이러한 풍부한 내용을 포용하여 우리의 회적 현존재가 갖는 자연적 경험을 보완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열정 일반을 자극함으로써, 삶의 경험들이 우리를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하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현상들에 대한 수용력을 획득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극은 이 영역에서는 현실적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가상을 통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의 제작이란 것이 현실성을 기만적으로 대체한다는 점에 있다. 가상을 통한 예술의 이러한 기만 가능성은, 인간에게 있어 모든 현실은 직관과 표상이라는 매체를 거쳐야만 하며, 이러한 매체를 통해 비로소 심정과 의지 속으로 파고든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 직접적인 외적 현실성이 가상의 성격을 갖느냐 아니면 이것이 다른 방식을 통해, 즉 현실성의 내용을 내포하며 표현하는 이미지, 기호, 그리고 표상을 통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어찌됐든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인간은 현실적이지 않은 사물들을 마치 현실적인 양 표상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내용의 본질에 따라 슬퍼하고, 기뻐하며 감동하며 경악하며 또한 분노, 증오, 동정

불안, 공포, 사랑, 존경과 경탄, 영광과 명예의 감정과 열정을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처지나 관계 또 그 어떤 삶의 내용 일반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통로가 외적 현실이든 아니면 단지 그것의 가상이든 우리의 심정에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안의 모든 느낌들을 이렇듯 일깨우고 우리의 심정이 삶의 모든 내용을 통과하도록 이끌며 오직 기만적인 외적 현재성을 통해 이러한 모든 내적 움직임을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예술에서 특유한, 탁월한 힘이라 간주된다.122

예술의 감상과 수용의 관점에서 볼 때 헤겔의 입장은 진리와 구분 된 것으로서의 미를 예술의 목적으로 보는 견해보다도 예술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더 폭넓고도 다양한 측면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217

예술은 진리와 구분된 것으로서의 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예컨대 예술을 통해 얻는, 우리의 심정을 울리는 감동이나 예술이 주는 교훈과 통찰 같은 것은 예술이 그저 미에만 종사한다는 식의 규정을 통해서는 설명 될 수 없는 것이다. 217

예술이 지니는 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헤겔의 입장은 그러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정당화해주는 장점을 갖는다. 예술은 인간의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이 최고도로 발휘되는 활동으로서 인류가 이룩한 문화적 산물의 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하고도 깊이 있는 내면적 요소들이 고도로 구현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술은 그것이 직접적인 즐거움과 만족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도 단지 그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몰두하게 하며 탐구하고 성찰하도록 이끈다. 218

헤겔은 예술적 활동을 그 근본에 있어서는 미를 구현하는 활동이자 동시에 진리를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예술작품이 사소하거나 잉여적인, 그저 유희적인 제작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고찰의 대상임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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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이 책 반납일이란 문자를 받고 나서야 도서관 책들이 떠올랐다. 동생집에서 빌려 온 책들과 새로 구입한 책들을 방안에 펼쳐 놓고 이리 저리 뒤적이다 이번 주가 흘러가 버렸다. <다뉴브>는 두 번째 빌려와서도 결국 표지도 못 넘기고 돌려 줄 판이고 <헤겔 미학개요>는 헤겔의 <미학강의> 서론 해설인데 (서론만 해설했다는데 무려 355페이지)  강의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베이스로 빌려 온 책이다. 역시 이번 차수엔 고이 모셨다가 보내 드린다. 이번 도서관 책들 중에서 두께로 1위인 <조지프 앤턴>만 겨우 삼분이 일 가량 읽었다. 두꺼운 책들은 지레 읽지 않는 편인데,읽다보니 빠져 들었다. 뭔가 옮겨 적고 싶어서 진도가 안나갔는데, 나머지는 책을 사서 밑줄긋기를 하며 읽어야 겠다.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인데 소설처럼 읽힌다. 아, 그리고 엊그제 밤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멋진 날들>을 휘리릭 보았다. 영국 귀족 베네시아가 일본의 자연 속에서 살면서 보낸 사계절 이야기이다. 허브 정원을 가꾸며 사는 베네시아표 각종 허브 활용법과 요리법, 아름다운 사진들이 볼만 했다. 귀족으로 태어나 성안에 살면서 어쩌다 한 번 나가 본 마을에서 본 소박한 허브정원에 반해, 허브정원을 가꾸며 사는 소박한 삶이 꿈이 되었다는 베네시아. 직접 키운 카모마일로 만든 샴푸로 머리를 감고, 정원에서 따온 세이지 잎을 넣어 끓인 허브 티로 아침을 시작하는 그녀의 삶은 언젠가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의 세계이다.

루슈디의 공책에는 마물리씨라는 미완성 등장인물이 있었다. 마물리씨는 그냥 보통 사람인데 지긋지긋하리만큼 어리석었다. 문학에서는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코기토씨나 이탈로 칼비노의 팔로마씨와 비슷한 부류다. 성명은 아지브 마물리. 이름이 브래드퍼드 시의원의 성과 같은데, 이 말은 "괴상하다"는 뜼이다. 그런데 마물리는 반대로 "예사롭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는 `괴이한 보통`씨, `이상한 정상`씨, `야릇한 평범"씨였다. 이름부터 모순어법이고 자가당착이다. 아무튼 루슈디가 쓴 미완성 소설에서 마물리씨는 거꾸로 뒤집힌 거대한 피라미드를 머리에 이고 다녀야 했는데, 꼭짓점이 대머리를 콕콕 찔러 가려움증이 극심했다. 218

루슈디는 자기가 사랑하는 작가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름을 이것저것 조합해보았다. 블라디미르 조이스. 마르셀 베케트. 프란츠 스턴. 그런 식으로 짝을 지어 목록을 만들어보았는데 모두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스꽝스럽지 않은 조합을 발견했다. 나란히 적어 보았다. 콘래드와 체호프의 이름. 바로 그것이 앞으로 11년 동안 쓰게 될 이름이었다.
"조지프 앤턴"
219

지금은 부적절해진 제목이 붙은 <나르시스호의 검둥이>에서 주인공이자 선원인 제임스 웨이트는 긴 항해를 앞두고 결핵으로 앓아 눕는데, 몸이 안 좋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승선했냐고 묻는 동료 선원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겠소?" 그 책을 읽을 때도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이 상황에 비춰보니 이 힘찬 문장은 지상명령과 다름 없었다. 220

그는 블레이크에게 서평을 계속 써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부터 몇 주마다 한 번씩 800단어 안팎을 써 보냈다. 글은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 생니를 뽑는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비록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제 걸핏하면 사랑니가 아파 경호팀이 "해결책"을 궁리하는 중이었으므로 더욱더 실감이 났다-어설프나마 그것은 자신을 되찾는, 즉 루슈디를 떠나 살만으로 되돌아가는, 즉 작가 아닌 사람이 되겠다는 서글프고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다시 문학 쪽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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