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때 클래식을 들었었다. 어릴때부터 라고 말 하지 않고 들었었다 라고 말 하는 것은 자라고 난 이후 거의라고 할 만큼 클래식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이 들고부터 나는 무한궤도를 들었으며 공일오비를 들었고 유희열이나 김동률을 들었었다. 클래식은 고루했다. 뭔가 잰척 하는것 같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아무튼 나와는 맞지 않는 음악이라 생각했었다.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다섯살때 부터 피아노를 배웠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까지 배웠으니 꽤 오래 피아노를 친 셈이다. 엄마는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는 마음 같은건 없었던것 같지만 내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기를 바랬던 것 만큼은 분명한것 같다. 그러나 내가 지금 피아노 뚜껑을 열고 칠 수 있는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 정도. 사실 그것도 얼마나 칠지는 모르겠다. 피아노를 쳐 보지 않은지 십 몇년이 넘었으니까. 이후 장난 삼아라도 나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며칠 전 친구의 연주회에 갔었다. 아...클래식. 이걸 어떻게 몇 시간동안 들어내지? 하는 고민이 앞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순간 너무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기억마저 떠올랐다. 그래, 우리 아빠가 그랬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음을 어려워하는 내게 '차에서 코푼 새끼' 로 기억하라며. 맞다. 나도 그랬었다. 허비 행콕과 펫 메쓰니를 친구들과 함께 허병국, 팽만식 으로 불렀었다.  

아빠는 오리지널 테이프를 갖고 계셨다. 당시만 해도 연주를 CD로 녹음하는 방식이 아니여서 오리지널 테이프라는게 있는데, 보통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 만든 테이프에는 겉의 플라스틱을 조립하기 위해 나사가 박혀 있는데 이 오리지널 테이프에는 나사가 없다. 즉 녹음을 위해 아예 공테이프 하나를 나사 없이 만들어놓은 테이프인 것이다. 아빠는 이 테이프를 출장 갈때마다 끝도 없이 사왔다. 나사가 박힌 테이프들보다 훨씬 비싸고 귀했지만 아빠는 거기에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레코드를 들었다면 아빠가 좀 더 멋있었겠지만. 우리 아빤 테이프파였다.  

생각해보면 부모님들을 좋아한 순간보다 미워한 순간들이 많았다. 왜 나에게 이렇게 하는 걸까? 왜 내게 이걸 해 주지 않는 걸까. 등등. 그런데 자꾸 나이가 드니까 알겠다. 그 분들이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를 말이다. 십수년간 클래식이라곤 듣지 않았던 나에게, 그러나 문득 들었을때 그 음악을 즐기게 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맨 앞에 앉아서 귀에다 손을 마치 확성기처럼 대고 들을 정도로 열심히 들었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모든 소리들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느끼라고, 즐기라고. 넌 그랬었다고.  

차이코프스키,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아빠가 좋아한 음악가들이다. 나는 바흐와 모짜르트를 좋아했지만 아빤 바흐는 너무 장식적이고 종교적이라 싫어하셨고, 모짜르트는 천재적이긴 하지만 뭔가 묵직한 맛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 나도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 라흐마니노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난 요즘 연애 칼럼을 쓰면서 클래식한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클래식. 고전적이고 약간은 보수적이면서도 풍부한 그것. 사람들이 쿨하게 혹은 엣지 있게 또는 요즘 대세인 캐주얼한 사랑이 아닌 클래식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편지를 주고 받고, 오래 오래 서로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그러다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가서 닿게 되는.. 

나도 언젠가는 클래식하게 늙어가고 싶다. 아빠처럼, 혹은 엄마처럼.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나이 든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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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도 모차르트의 천성적인 밝음이 좋다는...ㅎ 요즘은 광폭해서 질주할 것 같은 베토벤과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쇼팽과 오빠 부대 리스트, 악마같은 파가니니요. 죽은 사람들 음악만 들어요 요즘은.

플라시보 2010-02-20 16:35   좋아요 0 | URL
음...전 나이가 들수록 힘있는 음악들이 좋아지더라구요. 젊을땐(?) 좀 잔잔한게 좋더니만. 아마 파워풀한 뭔가가 그리운가봐요. 그 에너지와 열정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찍은 사진. 

내일이 5주년이라 파티를 한다고 한다. (아니다 날 지났으니 오늘이구나) 

이제 와인 코르크는 더 담을 곳도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렇게 많이 마신 와인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얘기들은 

지금도 우주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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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2-20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당하게 님의 사진을 올리시는게 부럽다는 생각을 이밤에 하며 댓글 답니다~.ㅎㅎㅎ

플라시보 2010-02-20 13:02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뭐 당당하게 라기 보다는...흐흐.
 


오래전 TTL 광고에서 눈이 왕방울만한 소녀 임은경은 빨간 토마토를 맞으면서 말했다. ‘스무 살’ 다른 어떤 말도 아닌 스무 살. 그때는 몰랐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말 하고 있는지, 또 어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저 그 광고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라고는 아무리 토마토라지만 저렇게 맞으면 좀 아프지 않을까? 눈에라도 들어가면 따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임은경이 ‘살’ 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동그랗게 말리던 혀만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스무 살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지를.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내가 이미 지나온 스무 살 시절이 그토록 소중했다는 것을. 왜 사람은 항상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알게 될까? 왜 그 순간에 나는 지금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 지금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내 서른 살이 나중에 마흔이 되고 쉰이 되면 역시 그때는 지금보다 행복 했었어 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스무 살의 나는 갓 대학생이 되었고 내 인생 최초의 독립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원룸은 주민들 사이에서 독신자 아파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우리는 독신자 라고 말 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어쨌건 그렇게 불렀다. 누가? 왜? 같은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원룸촌은 독신자 아파트였다. 내 원룸 안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건축법상 바닥의 4분의 1되는 크기의 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정말 충실하게 지킨 창이었다. 그 창 바로 옆에 나는 오디오를 설치하고 어디선가 흔들의자를 구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비가 오면 무너저내릴 것 같은 마음으로 그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내리는 빗소리는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내리는 비를 볼 수 있고 그 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었다. 오아시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그 원룸 창밖으로 내리는 비는 나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을 정말 제대로 들었었던 것 같다. 일단 새로운 CD를 사고 나면 최대한 편한 옷을 입고,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그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베이스 소리만 듣다가 다음 번에는 기타, 그 다음에는 피아노나 신서사이저, 그 외에 효과음들, 코러스, 보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시 이 음악을 들었다 라고 말을 하려면 저렇게 다 쪼개어서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렇게 말 했었다. 스쳐지나가듯 들은 음악들은 내게 아는 음악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매 순간을 참 성의있게 살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함께 알바를 하던 친한 알바생들과 우루루 몰려가서 생맥주에 마른 오징어를 먹곤 했다. 그때 우리가 가던 술집은 너무나 허름해서 이거 마시다가 무너지면 시신도 못 찾는거 아니야? 하는 농담을 주고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맥주는 너무 차고 맛있었고 가격은 우리의 얇은 주머니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쌌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있었지만 누가 누굴 좋아하고 어쩌고 하는 썸씽은 없었다. 그저 우린 그렇게 그냥 우루루 하고 가서는 와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게 좋을 뿐이었다. 각자 일을 시작한 날들이 달라서 알바비가 나오는 날은 제각각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혹은 두 번은 누군가가 알바비를 받는 날이므로 우린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했었다. 단 한번도 누군가가 이번에는 쏘기 힘들것 같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늘, 그리고 항상 알바비를 쓰는 가장 첫 번째는 그 생맥주집이었다.


내 후배 중 한명은 유진박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공연을 나와 함께 보러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없는 돈을 쪼개어 겨우 표를 사고 그녀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사실 그 공연을 보기 전 까지 나는 유진박이 누군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거기서 감동을 받고 말았다. 마지막에 긴 줄을 서서 싸인을 받을 정도로. 그때 유진박이 어설픈 한국어로 말했다. ‘로맨틱하게 생겼어. 당신 로맨틱하게 생겼어. 봐봐 로맨틱하지 않아?’ (다른 스텝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으나 그들은 뚱했다.) 그 후로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스스로 로맨틱하게 생겼다고 굳게 믿어버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말 했으므로 무조건 믿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알던 세션하는 오빠들이 있었는데 이 오빠들은 지방에 공연이 있을 때 마다 나에게 공짜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었다. 신해철부터 이승환까지 그 오빠들이 하는 공연은 참으로 다양했었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제일 앞자리에 서서 정말 미친듯이 열광하며 공연을 즐겼었다. 나이트에 가도 이보다 더 뛸 수는 없겠다 싶을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 뛰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고도 우리는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다시 노래방을 찾아가서 그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다시 불렀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들만의 콘서트였다. 관객은 없지만 부르는 가수들이 미쳐 날뛰는.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당시 나는 나이트클럽을 꽤나 좋아했었다. 강남 일대에는 우리가 갈 만한 나이트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죽순이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지만 간혹 몸이 찌뿌둥해서 한번 흔들어야 하는거 아냐? 하는 날이면 멤버들을 모았다. 그때 우리의 복장은 예쁜 옷, 혹은 조명빨 잘 받는 옷이 아니었다.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흰 남방에 검은 선글라스. 우리가 찾아낸 춤추기 가장 좋은 복장이었다. 우리는 그 수많은 여자 아이들 속에서 결코 예쁘지는 않았지만 정말 작정하고 춤추러 온, 미친듯이 춤을 춰대는 애들이었다. 부킹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우린 남자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오직 춤을 추기 위해서 갔으니까.


매일 밤이면 나는 꼬박꼬박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이야 내가 하는 방송의 모니터 조차도 하지 않지만 그때는 라디오가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를 비롯해서 김현철이나 공일오비의 장호일이 하던 라디오는 무조건 들었었다. 라디오라는 것이 TV와 달라서 대중을 상대한다기 보다는 오직 나에게만 얘기를 해 주는 것 같은 친밀함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과 1:1로 마주앉아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날엔가는 김현철이 진행하는 라디오쇼에 사연을 보냈고, 그 사연이 채택이 되어서 On & On 이라는 여성복 브랜드의 십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나에게 그 상품권을 준다며 김현철이 말 하는 순간 내 친구와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방방 뛰었었다. 그리고 상품권이 도착하기 무섭게 매장으로 달려가서 어떤 옷을 살지 고민했다. 그러다 평소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던 내게 친구는 ‘여성스러운 옷을 사봐. 맨날 바지만 입지 말고’ 라고 권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옷은 살구색 원피스였다. 스판 제질이라 몸에 딱 붙는데다 치마 길이가 약간 짧았기 때문에 많이 망설였지만 친구도 점원도 모두 어울린다는 얘기에 그냥 그걸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자 친구는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줬고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커피 전문점이 아닌 그냥 커피숍만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커피 맛 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다. 세상에 커피는 아메리카노와 자판기 커피 딱 두 종류만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자주 커피메이커에 물인지 커핀지 구분도 안 갈 만큼 연하게 커피를 내려서 냉동실에 넣어 차가워진 말보로 미디움을 피우며 커피를 마셨었다. 지금은 더 비싼 커피를 사 마시거나 더 좋은 원두를 쓸 수 있지만 그때의 커피 맛은 좀처럼 잊혀지지가 않는다. 담배도 마찬가지. 얼마 전 문득 떠올라 냉동실에 넣었다가 피워봤는데 약간 차갑다라는 느낌 뿐이었다. 그땐 그 느낌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KTX가 없던 시절. 참 용감하기도 하지. 나와 내 친구는 부산까지 무궁화호 입석을 끊어서 내려갔다. 용케 자리가 비면 잠깐 앉았다가 누군가가 표를 들고 오면 다시 일어나서 서 있기를 얼마나 오래 반복했는지. 그래도 우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직 밤 바다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오랜 기차 시간을 버텼다. 그 와중에 기차 여행에는 역시 달걀과 사이다라며 삶은 달걀을 서로의 머리에 쳐서 깨먹고 사이다도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부산의 밤 바다는 너무 근사했었다. 지금은 노보텔 자리인 그 곳을 우리는 우리만의 해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얘기 아니지만 그땐 바다보다 깊고 세상 모든 것 만큼이나 진지했었다.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했고,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았던 시절, 가진게 없어도 불안하지 않던 시절, 통장 잔고에 예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시절, 내 미래는 내가 원하는대로 펼쳐지리라 믿었던 시절, 컴컴한 골목길을 겁도 없이 돌아다니던 시절, 겨울이면 패딩 코트 하나로 버텨도 옷이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 단 하나뿐인 가방을 메고 학교도 놀러도 여행도 다니던 시절, 좋아하는 음악을 집에서 CD에서 다시 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던 시절, 한 권의 책을 사면 그 한 권을 정말 아껴서 열심히 읽던 시절. 그래서 그 책이 책꽂이에 꽂히면 딱 그 부피만큼 행복했던 시절.


지금의 나는 훨씬 더 좋은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때에 비해 가진것도 엄청나게 늘었고 정년퇴직이 따로 없는 밥벌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때처럼 내 스스로 모든 것에 감동을 느끼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뭘 해도 약간은 시큰둥하고 조금만 앉아 있으면 그냥 집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매일 밤 늦게 자고 약속이 없는 한 늦게 일어나며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저마다 손가락이 부러졌냐 왜 전화를 안하고 심지어 캐치콜이 떠도 리턴콜을 하지 않느냐고 원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대를 하고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짖눌려 살고 순간순간이 소중하다기 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시간에 내가 옷자락이 끼여서 딸려가는 느낌이다.


정말 그럴까? 이제는 내가 스무 살이 아니기 때문에 내 삶이 그리고 내 하루가 이렇게 시시해져 버린 걸까?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시 그때처럼 살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면서 늘어난 건 의심과 추억과 게으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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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류. 이렇게 시킨 사람도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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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장을 보러 가서 하이네켄 잔을 준다는 말에 원래 병맥주 밖에는 잘 안마시지만 사은품에 혹해서 하이네켄 캔을 샀다. 아무래도 잔은 두 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두 박스를 샀다. 그리고 이걸 언제 먹나 하다가 드디어 오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잔 걸쳐주셔야 할 것 같아서 하이네켄을 땄다. 한 박스 (6개들이)를 다 마시고 두 박스째를 뜯을 무렵 오른쪽 엄지 발가락이 살살 아픈 것이었다. 원래 나는 집에서 늘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발을 다칠 일이 없는데 이상하다 싶어 왼쪽 엄지발가락을 살펴봤다. 그랬더니 끝 부분에 뭔가 예리한것에 도려져 나갔는지 살이 덜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냥 그 살을 그대로 덮고 대일밴드를 발라야 옳았겠지만 이미 얼큰해진 나는 '이거 뭐야?' 하면서 그 살을 북 하고 뜯어냈다. 그랬더니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대충 식염수에 피를 씻어내고 소독을 한 다음 후시딘을 바르고 일본에서 사온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반창고를 붙였다. (진짜 절대 안떨어진다. 떼어낼때도 그만큼 고생이지만 안떨어지는 것 만큼은 동급 최강이다.) 그런데 술이 조금씩 깨고, 그들이 사는 세상이 조금씩 더 디테일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엄지 발가락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엄지 발가락 같은건. 폭이 좁은 구두를 신지 않을때는 대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런 존재였다. 그냥 거기에 발가락이 있으니 있으려니 할 뿐이었지. 특별히 엄지 발가락을 주의해서 볼 일은 발톱을 깎을때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아프기 시작하니 슬리퍼에 조금 닿아도 아프고 다른 슬리퍼를 신어도 아프고 양말을 신어도 아팠다. 비로소 나는 내게 엄지 발가락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몸의 일부인데도, 다치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부위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부위들이 다 그렇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을때는 그냥 내 몸을 형성하는 것의 일부분일 뿐. 그들이 소리를 내어 '나 여깄어요' 라고 말 하는 경우는 없다. 간혹 손가락을 베이거나 할때면 정말 그 손가락이 많은 일을 했구나, 샤워를 하거나 세수를 할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엄지 발가락은 욱신욱신 쑤신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물에 닿지 않아야 할 정도의 주의는 기울여야 하는, 그리고 슬리퍼를 신을 때 마다, 신발을 신을 때 마다 자각을 할 정도로는 아프다. 한동안 앞코가 뾰족한 구두들은 안녕이다. 그저 어그 부츠나 신을 밖에.. 

사람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곁에 있을때는 그 존재의 의미랄지, 그 존재가 가지는 무게 같은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익숙해져 있다가 떠나고 나면 비로소 그 존재를 느끼게 된다. 아,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구나, 혹은 내가 그 존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떠나고 나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가 있다. 마치 손가락에 난 손 거스르미처럼 오히려 사라진게 후련하고 속 시원할때도 있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은 대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다치고 나서야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는 엄지 발가락 같은 인간일까? 아니면 세수를 하거나 스킨 로션을 바를때 어쩔 수 없이 매일 보게 되는 얼굴 처럼 수시로 내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사람일까? 아니면 손 거스르미처럼 없어지면 깔끔하게 느껴지는 존재일까? 

사람들은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 몇인지를 헤아려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일단은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막말로 내가 범법 행위를 저질러서 쫒기고 있다면 무조건 나를 숨겨주고 그 다음 일을 생각해보는 사람. 그런 친구들이 나는 몇명이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얼핏 몇 몇 얼굴이 떠오르긴 하지만 글쎄다. 그들에게 내가 손거스르미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나란 존재가 필요한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들의 인생에 있어, 혹은 일상에 있어 나는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엄지 발가락 하나를 다치고 나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밤이다. 일 할게 아니라면 이제 그만 책을 좀 읽다가 자야겠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나는 정말 정이현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그간 그녀의 책들은 꽤나 가벼웠는데 이번 책은 그렇지 않다. 열심히 정독을 하며 읽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근사한 글을 쓸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또 하나 바래도 된다면 적어도 손거스르미처럼 사라지면 시원한 인간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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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9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