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의 통찰을 더 읽고,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시대의 아픔이지 않을까, 싶다.
미국 남부 출신의 의학자인 새뮤얼 카트라이트는 노예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가 쓴 우생학 저서를 읽어보기만 해도 과학에서, 심지어 정치에서. 타자를 통제하기 위한 기록을 남기는 데 얼마나열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카트라이트는 〈흑인 - P26
종의 질병과 신체적 특이점에 대한 보고〉(1851)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불변의 생리적 법칙에 따라 흑인종은 드물게 예외가 있기는 해도, 대체로, 오직 백인의 강제적인 권위 아래 있을 때만이 도덕적 교양을 쌓거나 종교 및다른 교육의 덕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을일깨울 수 있다. .………… 게으른 천성 때문에 강요라는 자극을 통하지 않으면 대기를 빨아들일 페의 용량도 절반밖에 확장되지 않으며 운동 부족으로 인해 꾸벅꾸벅 졸면서 일생을 보내게 된다. ・・・・・흑인은 혈액이 뇌로 공급되면 정신은 무지, 미신, 야만에 얽매이게 되며문명, 도덕적 교양, 종교적 진실 등에는 문을 걸어 잠근다. - P27
지금은(현재 쓰고 있는 소설에서는) 인종차별주의의 학습에 대해 흥미로운 탐구를 하고 있다. 어찌하여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자궁으로부터 나와 인종을 차별하는 자궁으로 움직이는가? 즉, 사랑을 받거나 혐오를 당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인종의 영향 아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인종이란 (가상의 유전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그 경계가 밝혀지고 정의 내려지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행동을 요구하거나 부추기는가? - P42
인종은 특정한 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는 인류라는 종에 속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다 무엇인가? 적개심은 무엇이며, 사회적 인종차별은 무엇이고, 게다가 타자화란 대체 무엇인가? 타자화가 가진 매력, 그것이 주는 위안과 사회적·심리적·경제적 권력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소속감을 ‘나‘라는 개별적 자아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그래서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암묵적인 의미를 느끼는 데서 오는 짜릿함일까? 나는 일단 ‘이방인‘이라는 것에 그러니까 소외된 자아를 정의내리기 위해서 우선 타자에 대한 사회적·심리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군중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다). - P43
그들은 노예를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로 규정하려고 애를 쓰지만, 의미로 보자면 비인간적인 쪽은 바로 처벌을 내리는 쪽이다. 그들이 채찍질을 하다가 지쳐 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하는 처벌은 교정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엄연히 사디즘 행위다. 벌을 가하는사람이 도중에 휴식을 취하지 않고는 계속하지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채찍질을 한다면, 과연 매를 맞는 사람은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런극도의 고통은 순전히 채찍을 든 사람의 쾌감을위해 설계된 것 같아 보인다. - P62
언어와 이미지라는 작은 신들은 경험의 양분이되어 경험을 형성한다. 내가 기이하게 차려입고 낚시를 하던 여자를 즉각 포용했던 이유는, 내 눈에 비친 여자의 모습을 기반으로 하는 특정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나는 즉각 여자를 감상적으로 다루고 나만의 이미지로만 사용했다. 여자가 나만의 샤먼이라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여자를 소유했다. 아니 소유하기를 원했다 (여자도 그걸 눈치했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뿌리박힌 이미지와 세련된 언어가 가진 유혹하고 드러내고 통제하려는 힘을 잠시 잊고있었다. 또한 그 힘이 인간의 과제, 즉 인간성을 유지하고 타인의 비인간화와 소외를 막는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지나치게 단순히 나열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요소까지 끼어들기 때문 - P72
이다. 이미지와 언어가 친근함을 더해주고 지식도 넓혀주리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미디어에서 반복하여 보여주는 이미지와 언어는 인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그리고 실상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시각을 좁혀버린다. 미디어의 왜곡에 넘어가면 시야가 흐릿해질 수 있다. 저항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낚시하던 여자와의 만남에서 그런 영향에 명백하고도 적극적으로 저항하려 했다. 예술과 상상력뿐만 아니라 심지어 시장도 공식에서 형식을 분리하고, 인공에서 자연을 분리하고, 상품에서 인간성을 분리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시도하는 예술은, 어떤 고상한 영역에서는 경멸의 대상으로도 쳐주지 않는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도 변해버렸다. ‘진실‘이라는 말도 그것의 부재가 모호성이 존재보다 강렬해서 따옴표에 가두어야 할 정도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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