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보이 - 2018년 제14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형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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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할 때엔 사랑 노래가 전부 내 얘기 같고, 반대로 헤어지면 이별 노래가 모두 내 것이 된다. 이건 진짜 내 얘기다 싶은 노래들이 나도 몇 곡 있는데 그중 하나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다. 내가 처음 사귀었던 그녀는 나의 절친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갔다. 중간에 많은 비하인드가 있지만 생략하고- 나보다 훨씬 잘난 놈이라 도저히 게임이 안될 걸 알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뒤로 내가 얼마나 찌질한 놈인지를 확인하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증발해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길 원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군 입대를 했고 필사적으로 바깥 생활들을 잊어갔다.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상병쯤에는 꽤 상처가 회복이 되었다. 그렇게나 지워버리고 싶던 악몽들도 제법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만큼. 근데 지금은 그 시절의 경험과 감정과 시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의 나에게 만족하는 나님은, 과거의 일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음을 아주 잘 아니까. <스페이스 보이>를 읽다 보니 나의 옛날이 훅하고 떠올라서 먹먹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기억을 잊고 싶어 우주로 나간 남자의 넋두리를 들어보라.


우주공간에서 2주간의 생활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오는 프로젝트. 우주인 김신은 한 외계인을 만나 그쪽 세상에 잠시 머무른다. 그가 뭐 때문에 우주로 왔는지 잘 아는 외계인은 그의 뇌를 이리저리 거닐며 기억 삭제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변심한 김신은 과거뿐만 아니라 외계인과 함께한 기억도 남겨달라고 한다. 오히려 선명해진 기억들을 얻고서 지구로 복귀하고, 이후 국민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우주 대스타가 된 주인공. 그러나 마지못해 살아가는 건 여전했고, 그래서 갈수록 삐딱해져 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 결국 선 넘은 그에게 날아든 외계인의 경고장.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재미있군. 독백체라서 읽기도 쉽고 스토리도 단순하니 집중도 잘 된다. 초중반까지는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사실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내용이다. 솔직히 외계인과의 장면들은 주목할 게 많지 않다. 나중에 지구로 와서부터가 제법 탄력이 붙는데,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어 연예인 소속사도 얻고, 방송에 광고에 화보에 인터뷰에 스캔들까지 초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새 연예인들의 연예인이 돼버린 김신. 잔뜩 유명해진 그는 이제 헤어졌던 구여친을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구걸을 한다. 과거 내가 했었던 이 구질구질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네 그래. 아무튼 이런 찌질함을 받아줄 여자는 없듯이 구여친도 김신의 구걸을 딱 잘라 거절한다. 게다가 현남친과 결혼 날짜도 잡았댄다. 그렇게 확인사살을 당하고 너덜너덜해진 그는 본격적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다. 어째서 외계인에게 구여친과 다시 잘 되게 해달라거나, 과거로 가고 싶다는 소원을 빌지 않았는지 궁금하군.


사랑에 울고 웃는 남자들의 순애보와 유치함을 나름 잘 나타내주었다. 이별한 후에 사라지고 싶었던 것도, 기억을 미화해가며 붙잡고 싶었던 것도, 날 놓친 걸 후회하게 만들려고 성공에 집착했던 것도, 어쩌다 마주칠 그 순간을 위해 언제나 꾸미고 다니는 것도. 다 내가 했던 것들이라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다. 아 물론 내가 국민스타는 아니지만. 여튼 독백체 작품이라 철저히 주인공 시점과 감정대로만 흘러가는 스토리였다. 그래서 다른 곁가지들을 일부러 분석할 필요 없이 주인공한테 몰입하면 된다. 스트레이트한 플롯이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입장이 아니라면 크게 재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미필자가 군필자를 이해 못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한 줄 평. 남자는 좀 찌질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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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9 0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결국 물감님 지난 시절은
스페이스 보이

현재는

스토너

그리고 냥이 집사

.....ฅ^•ﻌ•^ฅ

물감 2021-12-09 00:33   좋아요 1 | URL
스캇님의 꾸준한 냥이 언급...ㅋㅋㅋ 3탄에 대한 압박인가요ㅋㅋㅋ

scott 2021-12-09 00:36   좋아요 1 | URL
네 .🖐 ^^

coolcat329 2021-12-09 0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ㅠ
솔직한 글이라 책 리뷰가 더 와닿고 재밌습니다.
요즘 읽으신 책들이 다 동병상련이라 연말에 마음 위로받고 새해 힘차게 출발하시면 되겠어요!

남자는 좀 찌질해질 필요가 있다. 저는 여자지만 왠지 맞는 말 같아요.😁

물감 2021-12-09 08:51   좋아요 1 | URL
이별 안 해본 사람이 있겠어요?ㅎㅎ 그리고 어떤 이별이든 쿨하거나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구차해지는 모습이 보기 흉하더래도 저는 그게 사랑에 대한 일종의 예의같기도 하고요 ^^ 저같이 찌질한 남자들은 이렇게 단련이 되어야 훗날에 정상인 구실을 한답니다 ㅋㅋㅋ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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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힘들 때마다 알약 하나로 배가 채워질 미래를 갈망하게 된다. 인생의 피곤함을 말로 다 할 수 없다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모든 종목을 뛰어야 하는 운동회를 날마다 참가하는 기분이랄까. 수십 차례의 경기를 치르면서 의욕과 정력은 고갈되고 육신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렇게 벚꽃 필 때 열렸던 운동회는 흰 서리가 내릴 즈음에 끝이 난다. 이제 주름진 가을나무는 싱그러움을 자랑하던 여름날을 그리워하고, 생기 잃은 겨울나무는 따사로움을 노래하던 가을날을 추억한다. 그리하여 공평하게 흐르는 인생의 사계에서는 뛴다고 좋은 게 아니었고, 느려서 기죽을 필요도 없었음을 겨우 깨닫는다. 결국엔 부지런한 개미도 후회하고 띵가띵가 베짱이도 후회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미련 없이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수많은 개미들에게 이번에 읽은 <스토너>를 추천해본다. 백날 유튜브로 동기부여 영상을 찾아보느니, 이 책으로 인생의 소소한 해답을 얻었으면 한다.


가난한 농부의 외동아들인 스토너는 부모 권유에 따라 농과대학을 들어갔으나, 적성을 찾고 문학도가 되어 교육자의 길을 간다.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나름 절친도 생기고 멘토 같은 교수도 만나고 원하는 이성과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부부생활은 원만하지 못했고 직장생활은 평탄치가 않았다. 무수한 압박에도 묵묵히 상황을 통제하며 죽는 날까지 제 본분을 다 하는 스토너. 인생은 정녕 버팀만이 전부였던가.


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직장 다니는 내용이 다인,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들을 덤덤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별사건도 없이 잔잔하기만 해서 소설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나 주인공의 일생이 나와 너무도 닮아있어 계속 지켜보게 된다. 대학생의 스토너는 참 목표 없이 성실했다. 장래도 생각지 않고 그저 문학 수업을 따라가는 게 좋았다. 맘에 드는 여자에게도 앞뒤 재지 않았다. 직진 밖에 몰랐던 그에게 있어 순수함은 결코 좋은 게 아니었지만 본인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도 예민한 아내의 성질을 다 받아주었고, 교수가 되고도 동료와 학생들의 조롱에 맞서지 않았다. 힘들면 힘든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어떤 시련과 불이익도 전부 감수하고 수용하는 보살 같은 태도의 스토너. 이렇게 융통성 없고 손해 보는 성격이지만 그에게는 후회나 뒤끝이 없었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이나 어떤 신념 때문이 아니고 겁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생존 철칙이었을 뿐.


직장에 후배들이 꽤 많아졌다. 지내보니 치열한 노력파와 무기력한 잉여파로 나뉘는데 불투명한 앞날 걱정은 피차일반이었다. 하긴 뭐 안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학생도 힘들고 취준생도 괴롭고 사회인도 죽어난다. 최소한의 루트만으로도 이렇게나 고생인데 여기에 뭔가를 더하려니 감당 못할 부담만 적립된다. 그 부담들을 줄이고 줄이다가 결국 N포세대가 되었다지. 이쯤 되면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나는 어떤 대단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거든. 어차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그럼에도 일생을 살아야 한다면 스토너처럼 초연함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이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생존을 따지다 보니 개인의 목표와 행복은 한참 뒷전이 돼버렸다. 남들이 다 하는 건 나도 좀 하고 싶은데 녹록지 못한 내 삶은 뭘 해도 욕심 같고, 자존감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이제는 개미처럼 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죽도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기회를 손쉽게 거머쥐는 누군가를 보며 결국 될 놈은 된다고 믿어버린다. 이 같은 사회에서 더 이상 개인의 불행은 불행이 아니게 되었다. 차라리 본래 내 그릇이 작은 거라 생각하고 마는 거지. 나도 그 마음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정 괴롭고 답답할 때면 우주를 떠올린다. 저 광활한 세계에서 먼지만도 못한 존재의 고민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생각해보면 비교적 회복이 빨라진다. 그러므로 삶에 일일이 의미 부여하지 말고,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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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5 2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설마 물감님이 21세기 스!토너!

현실은 오늘도 내일도 행복한 냥이 집사
ฅ^•ﻌ•^ฅ
   *゜

물감 2021-12-05 23:25   좋아요 3 | URL
완전 제 얘기였읍니다. 어쩌면 저자가 저와 같은 타입아닌가 싶을만큼요ㅎㅎ

새파랑 2021-12-05 23: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물감님도 스토너에는 별 다섯개를 주셨군요~! 저도 이 책 읽고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음에 안드는 사람도 만나고, 내 생각처럼 인생이 돌아가지도 않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 그나마 의미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전 개정판을 읽었는데, 이 표지가 더 멋진거 같아요. 책으로 쌓아 올려진 얼굴이라니~!!

물감 2021-12-06 07:29   좋아요 3 | URL
저도 이 표지가 더 좋아요😀

뭔가 원두커피 같은 작품이었어요. 단 맛도 들어있고 쓴 맛도 나는, 그러면서 따뜻한 맛. 새파랑님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의 의미도 멋지십니다!

coolcat329 2021-12-06 04: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통 책이 자기 인생을 바꿨다고 말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저는 그 말이 책의 장점을 너무 드라마틱하게 포장한거 같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스토너에겐 예외입니다.
다른 건 다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뎠지만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에선 굽히지 않았던 스토너.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고 아름답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감 2021-12-06 07:36   좋아요 2 | URL
저도 인생책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솔직히 낯간지러워요. 오히려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이 책이 사랑받는 건 별 거 없는 우리네 인생도 괜찮다고 대변해줘서가 아닐까요. 그냥 그대로 있어주면 된다는 식의 토닥임을 받았거든요. 묘한 울림이에요^^

2021-12-07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7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7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1-07 1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스토너와 함께 물감님의 멋진 리뷰가 당선되었군요. 축하합니다 ^^

물감 2022-01-07 20:03   좋아요 2 | URL
당선소식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ㅎㅎㅎ

이하라 2022-01-07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행복한 새해 기쁜 주말되세요^^

물감 2022-01-07 20:0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
주말 잘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1-07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물감님~~♡

물감 2022-01-07 20:0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
1월에도 좋은 리뷰 부탁드립니다~!

러블리땡 2022-01-08 0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물감 2022-01-08 09: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럽땡님ㅎㅎ
1월도 파이팅하세요🙂

은오 2023-02-04 0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읽고 물감님 리뷰가 궁금해서 보러 왔습니다. 역시 물감님 리뷰는 좋고요. 저는 스토너 읽고 더 슬퍼졌어요... 스토너처럼 초연하기도 어렵다 나는...... 주어진 삶을 온몸으로 방어하고 싶다......

2023-02-04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5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bjy69 2023-06-11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순간순간 홧팅입니다^^/
답은 없으므로ᆢ

물감 2023-06-11 16:5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매순간 화이링😀

wackes 2023-06-24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을계절에비유한시작글에서눈물쏟았어요..스토너를아직읽진않았지만요…오십을앞두고달라진저를느낍니다(그런제가당황스럽기도해요…ㅋ)삶을보는시각이달라지고있는것같아요..저의어머니말씀으론그게철드는거라고…ㅋㅋ이제철이좀들까요??드는김에스토너를읽으면더철이들것같다는생각이듭니다다른리뷰들을읽다가도물감님의글이생각나이렇게쓸데없는글을적어봅니다굿나잇하시옵소서

물감 2023-06-25 21:33   좋아요 0 | URL
제 글에 공감해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인생에 어떤 목적지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겨울지나 봄이 되는 사계처럼 느껴집니다. 말씀하신대로 살면서 관점이 바뀌는 시기가 몇번씩 오는 것 같아요. 그럴때면 허물을 벗고 또 성장했구나 싶고요^^ 기회되시면 이 책 읽어보시길 바랍니다ㅎㅎㅎ
 
옥토버리스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7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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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의 취미가 독서라면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권>이라는 도서 목록을 본 적 있을 거다(잘 모르면 검색해보시길). 아무튼 그것처럼 장르문학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자주 입에 오르는 필독도서 목록이 있다(이건 검색해도 안 나올걸). 이번에 읽은 것도 그중에 하나인데, 사실 제프리 디버야 워낙 유명하지만 이 책은 디버가 왜 본투비 넘사벽인지를 다시금 알게 해주었다. 마치 처음 달에 도착한 인류가 ‘제프리 디버 다녀감‘이라 적힌 팻말을 본 기분이랄까. 역시 아직까지는 나의 원픽은 디버옹이야.


딸을 납치한 괴한이 돈과 함께 옥토버리스트를 요구해온다. 그녀의 사장이 고객들의 돈을 들고 날랐단다. 경찰에 알리지 말라는 괴한의 협박과, 사장의 도주를 수사하는 경찰들 사이에서 피똥 싸는 그녀와 애인. 당장 거액의 돈을 어디서 구하며, 그놈의 옥토버리스트는 또 뭐란 말인가. 정신 못 차리는 그녀 앞으로 딸의 손가락 하나가 배달된다. 오, 하늘이시여...


줄거리만 보면 디버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평범 이하인데,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를 택한 이유가 따로 있다. 그것은 흐름이 역순으로 구성된 작품이기 때문. 36개의 짧은 챕터가 거꾸로 진행되다 보니 내용이 복잡하면 독자가 지나간 상황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시간을 거슬러가며 서서히 알게 되는 진실과 반전을 만끽할 수도 없다. 보통은 초반에 사건이 발생하고 후반에 범인을 밝혀내 사건이 종결되는 순서지만 이게 역순이 되니 시작부터 결말이라 맥이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역으로 가는 이야기에서 무슨 반전을 볼 수 있겠나 싶은 의심도 들 거다. 심지어 흔한 내용에다 가도 가도 딱히 뭐가 없어 보이는 느낌을 계속 주거든. 그러나 끝까지 인내한다면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므로 절대 의심치 말길. 역으로 읽는 게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지만 원한다면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어도 된다. 물론 비추한다.


나 역시 <메멘토>라는 영화 얘기를 안할 수가 없겠다. 단기 기억상실증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인데,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시점과,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시점이 교차되다가 중간에 합쳐지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따라가기도 벅차고 이해도 잘 안되고 반전에도 그냥 시큰둥했었는데, <옥토버리스트>는 하나의 시점으로 독자들과 호흡을 맞추었고, 한참 뒤에서 떡밥들을 회수하는데도 초중반의 장면들이 딱딱 떠오를 만큼 이해하기가 쉽다. 그래서 나는 <메멘토>보다 이 작품에 손을 들어준다. 반전에 반전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은 기승전결이 분명한 장르소설의 틀을 깨뜨린 것도 있지만, 늘상 악역과의 대결구도를 고집하던 디버의 스타일을 완전히 버렸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디버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말이 돌고서 내놓은 게 <옥토버리스트>라는데, 스타일도 전혀 다른 데다 줄거리마저 쏘쏘하니 그의 팬들은 더 당황했을거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면 역시는 역시나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주 무기를 내던지고도 절대 승리하는 전략이라니, 참으로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뇌섹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깐.


작가 왈, 이 작품은 자신이 쓴 것 중에 가장 짧지만 가장 공들였다고 한다. <옥토버리스트>에는 그의 타 작품들처럼 전문 직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항상 집필하기 전에 엄청난 사전조사와 연구를 하는 디버가 이처럼 단순한 내용에 무슨 투자를 했다는 걸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에서야 어떻게 공을 들인 건지를 알겠더라. 심플한 게 최고라는 뜻을 알고 싶다면, 또 나처럼 장르문학 매니아라면 꼭 사라. 정가는 13,8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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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1-28 1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 <메멘토> 굉장히 좋아했는데 메멘토 이상이라니 읽어보고 싶습니다!!

물감 2021-11-28 15:33   좋아요 1 | URL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라서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ㅋㅋ 그냥 비교하지 말고 읽으시면 좋습니다🙂

공쟝쟝 2021-12-02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난다. 공유에 이어서 이동욱. 규탄한다. (그러나 알라딘에서 가장친한 친구 프사는 안젤리나 졸리...)

다락방 2021-12-02 10:0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공유일 때 공유인 줄 몰랐습니다.....

공쟝쟝 2021-12-02 10:04   좋아요 1 | URL
물감 혼내고 싶은데 안젤리나 졸리땜에 참는다

물감 2021-12-02 10:06   좋아요 0 | URL
뭐여뭐여 뭣땀시 공님은 욱해있고 다님은 웃고있는거여 ㅋㅋㅋ

공쟝쟝 2021-12-02 10:09   좋아요 1 | URL
몰라서 묻는 것입니까!!! 공유동욱님아 ㅋㅋ 서울대 권장만한 물감 권장 장르문학 탑 10써주세요. 내 세권 정도 읽어드리겠음. (요즘 추리물 맛붙여가는 중)

물감 2021-12-02 11:01   좋아요 1 | URL
음음 일단 연말연초는 넘긴다음 준비해보겠읍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공쟝쟝 2021-12-02 12:24   좋아요 1 | URL
토닥토닥, 열심히 일해요... 그리고 살아남아서, 알라딘 서평계의 자린고비 이동욱의 너른 마음 장르 픽을 볼 날이 올 수 있기를... (안그래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올림)
 
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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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만 빼고 모든 게 재미있어지는. 평소에 안 하던 딴짓 거리에 계속 몸이 가고 또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 없더라는 경험들이 다 있을 텐데 이건 뭐 커서도 변함이 없는갑다. 어쩌다 휴일이 생기면 오늘은 온종일 책만 읽어야겠다거나 밀린 서평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중간중간에 이런저런 잡일들을 하곤 한다. 특히 글 쓰는 작업은 끊임없이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인데, 이 창의성은 두뇌가 휴식 중일 때에 회전이 더 잘 되는 법이라 종종 일부러 딴짓을 할 때도 많았지만 이번 독서는 진짜 집안일이 즐거워서 미치겠을 정도로 따분하고 괴로운 책이었다. 이번 글은 정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니 이쯤에서 뒤로 가기 버튼을 클릭하여 금 같은 시간을 아끼시길 권하겠다.


자살하려던 청년이 골동품 가게에서 신비한 나귀 가죽을 얻는다. 여기에 소원을 빌거나 욕망을 가지면 원대로 이루어지나 소유자의 수명이 줄어든다. 여튼 부귀영화를 얻게 된 그는 나귀 가죽이 줄어듦에 따라 자신의 생이 곧 끝날 거라는 노이로제에 빠져 허덕인다. 젊은 날에는 그렇게 죽고 싶어 하더니, 모든 걸 다 갖고 나니 죽기 싫어서 베개에 코 박고 찔찔 짜는 나날만 보내는 주인공.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으요.


하, 드디어 올게 왔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고전을 전혀 읽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가졌었던 선입견을 그대로 담고 있는 초강적의 작품이었다. 현재 나로서는 전혀 흡수가 불가한 책이라 이번 리뷰는 깔끔히 포기하고 그냥 하고 싶은 말만 주구장창 적겠다. 먼저 이 책은 특정 대상을 위함이 아닌 작가 자신을 위해 썼다는 인상을 받는다. 넘치는 방대한 지식과 번뇌와 통찰들을 기록하여 본인만의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 한 괴짜의 작품이랄까. 이 책이 재밌었다는 모든 분들을 내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름 불친절한 여러 책을 만나왔지만 이 책은 그중에 원탑이요, 어나더 레벨이었다. 내가 먼 훗날 온 세상을 통달하고 나면 다시 읽고서 누구든 쉽게 이해할만한 리뷰를 남겨보련다.


내 아직까지는 이 책보다 단어를 많이 사용한 책을 보지 못했다. 한 문장에 들어간 단어와 표현이 너무나도 많아서 소화가 안된다. 이 작품은 두세 줄 정도로 짧은 요약이 가능한 데에 비해 분량은 터무니없이 두껍고, 기승전결의 전개보다 주인공의 독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나 진짜 읽다가 정신착란에 빠질뻔했더랬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스킵 하면서 겨우겨우 읽었다. 독서모임만 아니었으면 초반에 덮었을, 나와는 전혀 상성이 안 맞는 넘사벽 책이다. 국어사전도 이보단 재밌겄으요.


자기 연민과 신세한탄으로 가득한 말들을 어쩜 그리 중복됨 없이 내뱉을 수 있는지 놀랍다면 놀라운 언변인데, 제발 엔간히 좀 하라는 친구의 조언에도 꿈쩍 않고 자신의 찌질함을 늘어놓는 주인공. 이제 겨우 이십 년 좀 넘게 살아놓고 뭐 그리 한이 많은지 무슨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팔십 대 노인처럼 굴어대는데, 그냥 궁시렁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공부하며 알게 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세상 참 부질없다를 읊조리고 있으니 보고 있노라면 피가 쭉쭉 마른다. 발자크도 지식의 저주에 갇힌 사람이었나? 도무지 적당히란 걸 모르는 사람이다. 3~4절만으로도 지겨운 노래를 99절까지 하시겠다? 이런 사람은 마취총이 답이다.


웬 서문이 처음부터 나와서 작품의 글로 저자의 인간성을 판단치 말라는 말을 어디 고대 문자처럼 영 못 알아먹을 말들로 장황하게 설명해서 돌아가실뻔했는데, 알고 보니 그 숨 막히게 답답하고 따분했던 서문이 차라리 작품보다 훨씬 읽을만했더라는 사실에 벽 잡고 공중제비를 돌 뻔했다. 그래 뭐 당시 배경과 분위기에 따라 사회의 이모저모를 비판하려는 것도 대강 알겠고, 작가가 생각하는 철학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것도 알겠으나 당최 파악이 안되는 중에 너무 많은 내용을 와르르 쏟아낸다는 생각이 안드심니꺼? 사백 페이지 넘게 이런 식이니 나 같은 쪼렙에 인내심 부족한 독자는 읽다 말고 자꾸 딴짓을 하게 되더란 말이다. 아니, 어느새 집안 대청소를 해부렀으요.


그나마 3부에 가서는 이야기라고 해줄 수는 있을 만큼의 전개가 나오지만 투 머치 토커의 루즈함은 여전했고, 무엇보다 한번 거부했던 내 머리는 끝까지 이 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가지자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지도 않았다. 인간관계에서도 한번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다시는 안 보는 나라서, 발자크도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위에서 말했듯이 내가 세상만사를 통달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지. 아오, 써도 써도 끝이 안 나네. 이만 쓰련다. 님도 여기까지 읽느라 고생했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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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1-21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집안 대청소를 하게 해준 고마운 책이네요 ㅋㅋㅋ 물감님 글이 재밌어요 ㅋㅋ 얼마나 힘드셨는지 팍 와닿네요. 발자크 책은 재미없기로 유명하다고 누가 쓰신 거 봤었는데.. 그말 그대로인가 봅니다. 다음 책은 재미난 걸로 고르세요~^^

물감 2021-11-21 22:24   좋아요 3 | URL
간만에 전투력 샘솟게 해준 책이었습니다ㅋㅋㅋ 아직도 할 말은 많은데 참기로 했어요ㅋㅋㅋ덕분에 집안 깨끗해지고 좋쿤요!!

미미 2021-11-21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ㅋㅋㅋㅋ읽지 않은 책인데 느낌이 팍팍옵니다. 저 최근 ‘새버스의 극장‘읽으며 그런 투머치에 숨넘어갈뻔 했거든요.
너덜너덜해져서 깔 힘도,용기도 없어 대충 쓰고 말았는데 덕분에 묘한 대리만족. 지금 내리는 비처럼 속이 후련하네요ㅋ👍

물감 2021-11-21 22:26   좋아요 2 | URL
ㅋㅋㅋ과연 우리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즐겁게 읽었으려나요? 고구마 소설은 진짜 한국인과 안맞아요ㅋㅋㅋ이토록 칼을 갈면서 독서하기도 처음이에요...

페넬로페 2021-11-21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점 적게 줄때의 최고의 리뷰는 물감님이 쓰신 글입니다. 재미 있으면서도 이해가 쏙쏙 갑니다. 안그래도 읽을 책이 많은데 걸러야 할 책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물감 2021-11-21 22:33   좋아요 2 | URL
아무런 도움이 안될 거라고 적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게 되었네요ㅋㅋㅋ여튼 올해의 워스트는 이 책입니다. 하하핳

새파랑 2021-11-21 2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 단편집을 읽고나서 고리오 영감이랑 이 책을 읽어봐야지 했는데 좀 질질 늘어지는 느낌의 책인가 보네요 😅 그래도 완독하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물감 2021-11-21 23:10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은 그어떤 책도 냠냠 맛있게 읽으실 거 같아요ㅋㅋㅋ이 책도 꼭 읽어봐주세요😁

coolcat329 2021-11-23 22:42   좋아요 2 | URL
네~세 권 중 나귀가 제일 재미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 책 좋네요. 그 특유의 넘쳐남을 미워할 수 없어서요 ㅎ

물감 2021-11-24 07:16   좋아요 1 | URL
쿨캣님, 보니까 이 책을 비평한건 또 저뿐이더라고요. 고로 이 책은 좋은 책이 맞습니다ㅎㅎ 제가 아직 레벨이 낮아서 그래요ㅜㅜ

scott 2021-11-22 00: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세기의 천재 발자크도
물감님에게 💥한개만 받음!ㅎㅎ

물감 2021-11-22 07:04   좋아요 2 | URL
이것이 바로 편협한 독서의 정석 아니겠습니까ㅎㅎㅎ

공쟝쟝 2021-11-23 18:4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는 별점 자린고비 ㅋㅋㅋㅋ

물감 2023-01-31 17:23   좋아요 1 | URL
아 그럼그럼요 다 덤벼랏ㅋㅋㅋ

coolcat329 2021-11-23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글이 너무 재밌어요. ㅋㅋ웃었네요.
저도 이 책 1부는 좀 고생했는데 2부부터는 재밌었거든요. 물감님 아주 제대로 걸리셨군요. 😂
사실 발자크가 정말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긴 해요.
귀족숭배병에 어린애같은 명예욕에 하여튼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자크는 적대감을 갖기엔 너무나 위대하다고 츠바이크가 말했으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물감 2021-11-24 07:27   좋아요 1 | URL
호평은 널렸으니 비평 한 개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ㅋㅋㅋ서문이 왜 있었는지 갑자기 알겠네요.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달라 이거군요. 여튼 이런 작가도 있구나,하고 넘기겠습니다🙂

나비종 2021-11-24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안일이 즐거워서 미치겠을 정도는 아니었지만ㅎㅎ 읽다 에너지 조금 충전하고 읽어야했던 책이었습니다. 읽기-분노-충전-다시 읽기-한숨-충전-다다시 읽기-체념-충전-읽기-주욱 읽기-가까스로 디엔드. 3주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분노가 사그라들었나 그나마 별점을 후하게 줄 정도로 마음이 드넓어지더군요.

그러게요. 그렇게 죽고 싶어하더니 죽기 싫어 전정긍긍하는 변덕은 또 뭐래요.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ㅋㅋㅋ

‘드디어 올 게 왔다, 그중에 원탑, 어나더 레벨, 온 세상을 통달하고 나면, 정신착란에 빠질 뻔, 국어사전도 이보단 재밌겄으, 피가 죽죽 마른다, 지식의 저주에 갇힌, 마취총이 답, 고대 문자처럼 영 못 알아먹을 말들로, 서문이 차라리 작품보다, 벽 잡고 공중제비, 투 머치 토커의 루즈함‘ ㅋㅋㅋ 물감님 글의 매력이 불을 뿜다 못해 폭발하는 표현들입니다. 참담했던 심정이 다이렉트로 전달이 되는 걸 보니~^^ 고구마를 먹으면서 목이 막혔는데 물이 없어 꾸역꾸역 더 커다란 덩어리로 밀어넣으셨던 상황 같아서요.ㅎㅎ
번역자가 구사하는 어휘 자체가 어려워서 저도 수시로 낱말 뜻 찾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저도 인간관계에서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대체로 다시 안보는 편인데 물감님도 그러시군요. 다시 찾고 싶은 작가가 아니긴 하지만 인생은 또 모르니까요.^^
수고하셨습니다. 오히려 리뷰 한 방으로 마음도 깔끔하게 청소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 카타르시스를ㅋㅋㅋ 별 점 한 개를 극복하신 의지력으로 이제 천하무적이되셨겠군요. 드럽게 재미없는 책들도 몽땅 독파할 수 있다!!! 오기만 해! 하지만 웬만하면 그냥 가던 길 가버려~ㅋ
내년에도 유쾌한 리뷰로 뵙겠습니다~^^*

물감 2021-11-24 20:46   좋아요 1 | URL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는 공감대만으로도 족합니다ㅎㅎ 아직은 제가 작품보는 눈이 없나봐요. 내년에는 좀더 내공을 쌓을 예정입니다. 슬슬 분권으로 된 작품들도 선정할까해요^^

저도 이렇게 신랄한 비평을 쓴건 처음이에요ㅋㅋㅋ별 한 개짜리도 완전 오랜만이고요. 덕분에 거침없고 신나게 쓸 수 있었습니다ㅋㅋㅋ저에겐 세상만사를 거부하고픈 욕망이 있다요!!ㅋㅋㅋ

올해의 마지막 모임이 끝났네요. 시간 참 빨라요. 역시 같이 읽으면 즐거워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나봐요ㅋㅋ아오 연말이라 그런지 점점 바빠져서 곧 과로사 하겄어요ㅜㅜ 각자 건강 잘 챙기고 내년에 또 인사나누겠습니다^^

꼬마요정 2021-12-02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앗 그렇군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전 아직도 앞에서 헤매다가 다른 책으로 갈아타고 늘 마음에 저거 읽어야 하는데… 이런 맘입니다. 한동안 그런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겠네요 ㅎㅎㅎ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동욱 참 멋져요 ㅎㅎㅎ

물감 2021-12-02 11:02   좋아요 1 | URL
어우 동지만나 기쁘네요 ㅎㅎㅎ 숨막혀 돌아가실뻔 했어요 ^^
안맞는 책 억지로 잡을 필요 없어요... 쏟아져 나오는게 책인데요 뭐 하하핳
이동욱 괜찮나요? ㅋㅋㅋㅋㅋ공유는 이제 보내줬답니다.
 
면식범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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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은 터닝포인트를 가지기 마련인데 어떤 이는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는 반면, 누군가는 실패와 몰락의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뭔가를 후회할 때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고, 돌아간다면 이전 같은 선택은 절대 하지 않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은 증발해서 구름이 되어버린 지금 이 무슨 쓸데없는 원맨쇼란 말인가. 해도 후회고 안 해도 후회라면 차라리 하고 후회하는게 낫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나고보니 안 하고 하는 후회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타인의 삶을 무너뜨렸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나 역시도 남에게 씻기 힘든 피해를 주거나 받아본 입장으로써 후회와 탄식 속에 빠져사는 기분을 아주 잘 안다. 아마 과거에 갇혀사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을 텐데, 바로잡을 수 있으면 이제라도 노력해서 후회를 벗어나야 하고, 돌이킬 수 없다면 과거를 거울삼아서 현재의 후회를 줄여가야만 한다. 이번 소설은 후회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당한 상처투성이의 두 남자 이야기이다. 사람이 절망에 삼켜지고 복수에 눈이 멀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따끈따끈한 케이스릴러 신작이외다.


범죄심리학자 도경수는 부친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후 감금되었던 산중 건물에서 탈출한 그는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지만 또다시 붙잡히고 만다. 놀랍게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운전자. 자신의 얼굴을 훔친 이 엑스맨은 도경수의 가족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문득 여러 명의 후보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그를 향한 저마다의 원한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리고... 설마가 맞았다.


일단 스릴 면에서는 합격. 이 작품은 범인을 초반부터 공개하는 대결구도의 방식이다. 스릴러의 거장인 제프리 디버가 자주 쓰는 이 플롯은 범인 찾기보다 범행 동기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있어서,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결 구도가 보여주는 액션 스릴감이 작품의 템포를 끌어올려 준다. 몇 년 전, 지적장애를 가진 도경수의 아들이 아파트 지하에서 여자아이를 살해했다. 그의 가족은 다른 범죄자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우고 사건을 묻은 채로 살아왔다. 피해자 부모인 성형외과의 부부는 긴긴 수사 끝에 도경수를 의심하고 행적을 추적하여 복수를 실행하게 된 것. 면식범은 도경수의 얼굴로 성형까지 감행하고 그의 가족에게서 진실의 조각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한다. 이미 피해자 부모는 업계에서도 밀려났고 가정도 파괴되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도경수에게 복수하려는 면식범도 이해가 되고, 가족들을 지키려는 주인공도 이해가 되지만 정녕 이렇게 진흙탕 싸움으로 가야만 하나 싶어서 안타깝더라.


도경수의 얼굴을 하고 있는 면식범을 만난 주인공의 아내와 큰딸은 무방비로 당해버린다. 면식범에게 납치와 감금을 당하고 약물 주사를 맞게 되고, 딸의 남친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러나 도경수만이 목적이었던 면식범은 그의 가족들까지 죽일 마음은 없었다. 단지 진실을 알기 위해서 이렇게 가족까지 건들어야 하는 스스로가 불쾌하기만 했다. 반대로 도경수는 면식범을 쫓아다니는 내내 아들의 사건을 은폐해왔던 지난날들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범죄심리학자면서 범죄자들의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고, 그러면서 여태껏 태연하게 방송이나 강연을 나가는 등 이 파렴치한 인생에 드디어 벌을 받나 보다 싶었다. 자신의 가족과 피해자 가족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만 같아서, 면식범에게 당하는데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어했다. 자신이 얼마나 싫었으면 이렇게까지 큰 계획을 세워서 복수를 해오겠나 싶은 게지.


복수를 마치면 피해자 부모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고, 가족을 구하고 나면 주인공은 경찰에 실토할 생각이다. 나중에 가서 진짜 진실을 마주한 면식범은 도경수 가족에게 몹쓸 짓을 했음을 깨닫고 크게 절규한다. 알고 보니 도경수 가족도 자신처럼 봉변을 당한 거였고, 자신은 그들에게 의미 없는 공포를 심어준 꼴이었다. 한편 도경수는 사태를 이지경으로 만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 여겨 진범을 찾아가 결판을 지으며 비참한 엔딩을 맞는다. 거참 되게 찝찝하고 뒤숭숭한 감정을 남겨준 작품이었다. 피해자였던 면식범은 돌연 가해자가 되었고, 가해자였던 주인공은 졸지에 피해자가 된 이 막장 인생들을 어쩌면 좋으랴. 이렇게 출구 없는 미로의 작품은 참 오랜만이다. 처음 본 작가인데 꽤 재미있게 읽었고, 국내의 스릴러 문학 수준이 많이 올라간 게 느껴진다. 더더욱 흥하여라. 흥.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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