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삭줍기 환상문학 1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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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 1년간 방대한 업무량과 저질체력 사이에서 어떻게든 독서생활을 유지해본 결과 이러다 진짜 과로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여 올해는 철저하게 양보단 질의 독서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 묵혀두었던 화제작 또는 유명작 위주로 읽을 계획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른 이번 책은 디즈니 동화 같은 고전문학으로 재미와 주제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그건 마치 달달한 케이크와 마일드한 커피의 환상 조합이었다. 워낙 퀄리티가 좋아서인지 분량이 짠데도 불만이 전혀 안 든다. 샤미소는 이번에 처음 본 작가인데 이 분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까지 있다나.  


주인공은 X맨에게 그림자를 팔고 마법의 자루를 얻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어 대략 난감해진다. 마법 자루에서 나온 황금으로 남들의 환심을 살 수는 있었지만 마음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도 떠나보내고, 하인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 정체를 들킬 때마다 온 동네에 조롱거리가 되어 유리방황하게 된다. 다시 등장한 X맨은 전보다 더한 파격 제안을 건네오고, 이에 울컥한 주인공은 불꽃 싸다구를 날린다. 


악마와의 거래 후 타락의 길을 걷는 이 흔한 이야기가 뭐 이리 재미있다냐. 해설대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결합된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맨 먼저 주인공은 그림자를 잃자마자 나라 잃었듯이 절규한다. 또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사람이 그림자 없는 주인공을 비난한다. 사실 그림자가 없어서 물리적인 리스크나 핸디캡이 생긴 건 아니었다. 가량 햇빛을 받아선 안된다던가, 수명이 줄어든다던가 하는 문제가 전혀 없는데도 다들 주인공을 무슨 외계인처럼 쳐다보고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없었는데 읽다 보니 그림자는 인간과 떼놓을 수 없는 것,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추고 지녀야 하는 것으로 대강 이해된다. 그런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건 곧 인간이길 포기한 거라는 말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그러다 보니 남들을 피해 다니며 점점 은둔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데 그림자를 잃은 슬픔보다, 자유로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보다, 그림자를 잃게 된 경위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가장 곤욕이었다. 


악마에 대해서는 깊게 해석할 필요는 없겠다. 인간을 갉아먹는 유혹의 아이콘 정도로 해두자. 보통 인간이 죄를 범하면 자책과 회개 속에 지내다가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되면 당당해지곤 한다. 그것처럼 주인공은 악마와 재회했을 때 당연한 권리처럼 제 그림자를 요구한다. 그림자의 가치를 깨달은 건 좋은데, 황금을 쓸 만큼 쓰고서 할 말은 좀 아니었지. 그는 마법 자루를 원했던 때와 똑같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고, 그게 괘씸했던지 악마는 그림자와 영혼의 교환을 원했다. 일전에 얻은 교훈으로 거래는 무산되고, 그토록 악마와의 재회를 꿈꾸던 주인공은 이제 악마를 피하게 되고, 반대로 악마가 그를 따라다니는 코믹한 장면이 연출된다. 참 볼만하다.


해설 중에는 작가가 자본주의에 삼켜진 당시 사회를 비난했다고도 한다. 돈과 정체성을 교환한 것부터 해서 황금 때문에 주인공을 떠받든 수많은 사람들까지,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게 그런 이유기도 하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론 돈을 탐내다 혼쭐나는 내용 중에서 자본주의를 지적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왜 그렇게까지 해석이 나왔을까. 아마도 그림자의 존재가 단순하지 않고 자아, 정체성, 영혼, 인간다움 등등의 철학적인 접근을 요하기 때문일 테다. 아무튼 의미를 곱씹으면서 봐도 좋고, 생각 없이 그냥 읽어도 재미가 있다. 


내가 왜 이 책에 끌렸는고 하니 이것도 결국 이방인에 대한 내용이어서다. 샤미소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독일인으로 살았고, 다행히 잘 적응해 자리도 잡았지만 두 국가 사이에서 말 못 할 방황 중에 살았다고 한다. 작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한 방황 덕에 이 같은 예술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역시 예술은 영혼이 굶주려야만 하는가 싶다. 암튼 이렇게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작품들은 전부다 명작이다. 각기 다른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문학의 세계는 넓어지고 독서의 의미는 깊어지게 된다. 다 좋았는데 마무리가 아쉬워서 별 하나 뺀다. 끝에 등장한 마법 장화도 정황상 악마가 심어놓은 걸 텐데 이에 대한 설명이나 출처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도 그렇고, 잘 끌고 가던 사실주의에서 갑자기 웬 환상문학으로 바뀐 것도 쪼까 별로였다. 이거 빼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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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05 07: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은 작품이 쓰이기 위해서는 작가의 어려웠던 삶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거 같아요 ㅋ 저는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물감님 리뷰를 보니 유명하신 분인가 봅니다. 연구기관도 있다니 ㅋ 업무에 힘드시더라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물감 2022-01-05 12:30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근데 저도 심령이 공허하고 방황할 때 글이 잘 써지기는 해요. 신기하게도요 ㅎㅎ
새파랑님도 건강 잘 챙기셔요. 전 올해는 굵직한 이야기만 팔거라 리뷰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coolcat329 2022-01-05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유명한거 같아요. 제가 아는 걸 보니 ㅎㅎ
청소년 책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모두에게 다 재밌는 책인가보네요.

물감 2022-01-05 12:54   좋아요 2 | URL
역시 그랬군요. 읽으면서 디즈니의 알라딘이 계속 생각나던데 청소년 도서가 맞나봐요ㅋㅋ

공쟝쟝 2022-01-07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나시면 <사람, 장소, 환대>읽어보세요 ㅋㅋ 아 물감님은 소설파지만 ㅋㅋ 이 소설을 중심으로 엮은 좋은 인문서입니다! 새해복 많이받으시고, 부디 올해는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길!!

물감 2022-01-08 09:45   좋아요 2 | URL
와 공쟝님 별별정보를 다아시는분! 이건 회사서 책 신청해 읽어볼게요ㅋㅋㅋ새해 복마니 받으세요🙂🙂🙂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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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소외감이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다가도 꼭 한 번씩 내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뭐 같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반복되자 소외받기 싫어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살았고, 관계 맺음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상처받지 않게 미리 차단했다. 이로써 남들과 어울리는 기쁨은 줄었지만 날 집어삼키는 늪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나처럼 자의로 고립을 택한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방인처럼 살다 보면 생각이 많아져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 나의 경우는 타인의 감정을 관찰하고 반응을 캐치하는 육감이 발달했는데, 이게 나와 안 맞는 사람들을 가려내다 보니 오히려 적만 늘어나서 힘들어 죽겠더군. 나도 눈치 안 보고 대충 살고 싶은데 센서가 제멋대로 반응하니 이번 생은 글렀다. 이번에 읽은 책에서 나와 닮은 주인공을 보며 예민한 눈치 백단의 삶이란 얼마나 피곤한지를 절절히 느끼고 말았다. 작품의 서사보다 인물의 소외감에 꽂힌 걸 보면 나는 독서마저도 이방인처럼 하는가 봐.


이것은 인간의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복제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해일셤 기숙학교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기증자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학교를 다닌다. 비록 클론이지만 인간의 교육과 대우를 받았던 캐시와 친구들은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에 대해 수차례 질문하였다. 인간을 위한 의료 도구에 불과하나 다들 지극히 정상적인 생명체로만 보이는데, 작가는 계속해서 이 아이들이 언젠가 닳아없어질 소모품처럼 그려낸다. 그러니 아이들의 고충이나 마찰, 방황 같은 매우 인간적인 장면에서조차 막 그렇게 안타까움이 들지는 않는다. 이것은 클론에 대한 독자의 감정을 배제시키고자 한 작가의 의도적인 방해로 보인다. 그렇담 별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이렸다.


그나저나 읽는 내내 애매한 불편함이 감돌았다. 어차피 기증자가 되어 목숨을 잃는다면 이들에게 일반 교육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고, 창의성을 기르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솔직히 해일셤의 학생들은 사육장의 가축이나 마찬가지였다. 둘 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입장이고, 쓰임을 받으면 그걸로 끝일 텐데 여기서 개개인의 숭고함이 어디 있고 존중이 웬 말인가. 그저 복제인간도 윤리적인 차원에서 불쌍하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차별 수업을 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어떤 반감조차 갖지 않았다. 그제서야 확신이 들었다. 이 작품은 연민과 동정을 겨냥한 게 아니란걸. 독자가 어떤 입장으로 책을 읽든 간에 학생들은 평화로운 스쿨 라이프에 평범한 사춘기를 보내는 중이다. 캐시는 철부지들 사이에서 중재자도 되었다가 투명인간도 되었다가 샌드백 역할도 해주면서 성숙한 자아와 인격이 형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보노라면 인간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건만 다들 하나같이 자신의 뿌리를 상기하며 독자의 괜한 걱정을 차단시킨다. 머쓱하게시리.


대부분의 평들이 인간의 복제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회의를 갖고 지적하던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아무리 봐도 작가가 그런 점을 비판하라고 이 책을 쓴 것 같지가 않거든. 주인공들은 제 운명으로 절망하거나 한탄에 빠져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외부와 단절된 해일셤의 생활이 유토피아나 다름없었기에, 학교가 기증자라는 그릇된 자부심 따위를 세뇌시켰다 한들 그게 그렇게까지 사회적 논란으로 번질만한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제에서 존엄성이나 경외심을 떼어놓는 건 불가하지만, 독자의 감정이입이 격해지려 할 때마다 작가가 브레이크를 걸어줘서 조금은 차분하고 또 냉정하게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클론의 불행이나 인간의 욕심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기증자가 되려는 결단과 영광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촛불 같은 생애였다 해도 이들이 품었던 영광의 빛을 가리켜 허탄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어야 한다. 작가의 수많은 방해에도 꿋꿋이 연민과 동정을 고집했다면, 그것은 이 책을 읽었으되 읽지 못한 것이리라.


클론도 인간처럼 생활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클론을 필요로 하면서 그들이 인간을 뛰어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여 다 같이 잘 지낼 수 있음에도 클론들은 폐쇄된 곳에서 양육되었고, 멀쩡한 사고와 감정을 가졌음에도 세상에게 외면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작가는 작품마다 인물의 소외감을 선명히도 드러내는데, 이 책에서는 그 소외감을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대시켰다. 그동안 자신들이 소외당해왔다는 진실을 알고 난 후의 충격이 어떤 건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그러나 고립의 육감이 초발달한 나님은 무릎을 치고야 말았지. 어쩌면 나는 그 소외감에 공감 받고 싶어서 이시구로의 작품을 계속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방인의 행보는 새해에도 계속된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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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10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 저도 이시구로 책 중 이 책 제일 좋아해요 ㅎㅎ 당선됨을 축하드립니다 ~~

물감 2022-02-10 19:48   좋아요 2 | URL
엇, 오늘이 그날이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미니님도 축하드려요 ^^

새파랑 2022-02-10 1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축하드려요. 저도 이 책이 가장 좋더라구요 ^^

물감 2022-02-10 19:4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도 축해해요 ^^
이시구로 작품도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ㅎㅎ

이하라 2022-02-10 19: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2-02-10 19:5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
요즘 정신없어서 알라딘을 잘 못들어오고 있는데 이런 댓글 하나하나가 되게 뭉클해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2-02-10 1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축하드려요~~

물감 2022-02-10 19:5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도 당선 축하해요!!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ㅎㅎ

서니데이 2022-02-10 2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물감 2022-02-11 07: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좋은 하루되세요🙂

독서괭 2022-02-10 2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축하드립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물감 2022-02-11 07:24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ㅎㅎ 이 작품도 유명하니까 읽어보셔요!

러블리땡 2022-02-11 0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축하드려요 나를 보내지 마도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

물감 2022-02-11 07:25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클라라보다 좋았어요, 읽어보세요ㅎㅎ축하 고맙습니다!

thkang1001 2022-02-11 0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2-02-11 07: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ㅎㅎ

thkang1001 2022-02-11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2-11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 축하해요^^

물감 2022-02-11 17:24   좋아요 1 | URL
강나루 님도 당선 축하드립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ㅎㅎ

stella.K 2022-02-11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시를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저도 예외는 아닌 것 같고.
이 작품이던가? 전 영화로 봤는데 그렇군요. 소외.
그땐 뭔지도 모르고 그냥 꾸역꾸역 봤던 것 같아요.
나중에 읽게되면 소외감은 안 느꼈으면 좋겠네요.ㅋ

물감 2022-02-12 21:40   좋아요 1 | URL
영화는 안봐서 잘 모르지만 책은 좋았어요🙂 작가가 서양에서 동양인으로 살아서 그런지 소외감이 어떤건지를 진짜 잘 아는것 같아요. 호불호 있는 작가인듯 한데 저는 좋습니다ㅎㅎ
 
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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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소설은 찌질한 사람들이나 읽는 거라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소설만 빼고 읽는다거나 아예 책을 읽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내가 말한 찌질함은 표면적인 게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는 어떤 응어리를 말함인데,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갈증해소와 현실도피의 이유로 소설을 찾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독자는 자신의 찌질함을 건드는 이야기를 만날 때라야 공감이 우러나오고, 간접적인 경험과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서 치유를 받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 못처럼 박힌 응어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야기야말로 위대한 작품이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힘이고 소설다움이다. 그런 작품을 쓰는 소설가의 반열에는 항상 김호연 작가가 있었다. 인생을 실전으로 배웠던 그는 힘들게 얻은 내공을 작품 안에 얇게 펴 발라 독자의 찌질함을 살살 어루만져 준다. 설령 의도한 바가 아니래도 그만큼 독자에 대한 배려가 깊다는 뜻일 테다.


납골당의 한 유골함을 들고 튄 황당한 두 남자 이야기. 유골은 이들이 사랑한 여인의 것이었고, 그녀가 좋아했던 여행 장소에 가서 뿌려주자는 충동적인 계획을 실행한다. 그리하여 연적이지만 뜻을 위해 임시 동맹을 맺었는데, 어째 하는 일마다 펑크가 나서 티격태격한다. 틀어진 계획을 다시 짜기 위해 두 사람은 그녀와의 추억들을 하나씩 공유하였고,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들로 더욱 착잡해진 동행이 돼버린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직장이 걱정되는 주인공과, 그녀보다 회사가 더 중요하냐며 자존심을 긁어대는 파트너. 그렇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국 제주도까지 날아간 이들의 충동 여행은 얼마나 더 가야 끝이 나려나.


재미는 있지만 겨우 브로맨스 얘기라면 좀 곤란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다. 일단 인물 소개 먼저 하자면 고인이 된 그녀는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출판사와 계약한 소설가였고, 주인공은 그 출판사의 팀장이며, 그의 연적은 최근에 사업을 말아먹은 헬스장 대표이다. 너무도 다른 두 캐릭터의 아슬아슬한 케미가 기본 베이스인데, 이들의 계획이 꼬일수록 짠하기는커녕 웃음만 나오는 게 아이러니이다. 나름대로 애도 중인 둘의 감정에 독자들도 맞춰줘야 하거늘, 시트콤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실례인 줄 알면서도 참지 못할 웃음이 곧 킬링 포인트인 셈. 확실히 김호연 작가는 연속 단타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게 주특기이다. 적당한 템포와 선을 지키면서 필요할 때만 텐션을 끌어올리는 것도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진정 독자와의 호흡만큼은 김호연을 따라올 작가가 없다고 본다.


이 작품은 <망원동 브라더스>, <고스트라이터즈>와 함께 ‘작가 3부작‘으로 불린다. 세 권 다 주요인물의 직업이 작가이고, 작가의 쓰라린 현실을 조명하는데 <연적>은 그 비참함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다. 작중에선 죽은 그녀에 대한 회상 신을 통해 무명작가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는지, 권위 앞에서 어떻게 휘둘리고 착취 당하는지, 출판시장이 얼마나 넘사벽인지를 자세히도 말해준다. 그렇게 맑고 화창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지독한 장마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무단결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가족 간에 불화가 커졌으며, 부모 집에서 반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시나리오를 작품화하여 스타가 된 영화감독의 소식을 듣는다. 마침내 퓨즈가 끊어지자 유골함을 훔칠 때의 돌발행동을 하는 주인공과 파트너. 통쾌한 한 방, 아니 두 방을 먹여 복수하고 나니 어느새 장마는 물러가있었다. 


김호연 작가의 위로 방식은 독특하다. 모두가 잘못된 길이라 하지만 나는 그저 멀리 돌아가고 있을 뿐,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자신도 한 명의 루저로써 그 길을 걸었기에, 모든 루저들이 멈추지 말고 가던 길을 갔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작품마다 루저가 꼭 있는데, 작가는 이들의 찌질함을 반드시 극복시키고 자기혐오에서 구해낸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흔한 말보다 이런 은은한 위로가 더 고맙고 힘이 된다. 여하튼 이것으로 김호연 작품의 도장 깨기가 끝났다. 또 어떤 작품으로 돌아올지, 그의 귀환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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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21-12-20 2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어요.
이 책 읽고 김호연 작가 더 관심 생겼거든요.
저는 이제 망원동 브라더스만 완독하면 됩니다. ^^
이런 작품 자주 만나고 싶어요.

물감 2021-12-20 23:53   좋아요 3 | URL
ㅎㅎㅎ정말 최고에요. 구단씨님도 거의 다 읽으셨군요! 저도 이런 작품, 이런 작가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

미미 2021-12-20 23: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 김호연작가의 책을 외면할수 있을까요? 호불호가 분명하셔서 더 신뢰가 가요!😉 (우유부단 미미)

물감 2021-12-21 00:01   좋아요 3 | URL
리뷰 성공했나요?ㅋㅋ알라딘 마을 홍보요정 미미님만 끌어들이면 제 역할은 다한 겁니다ㅋㅋㅋ

scott 2021-12-21 0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웬쥐 이 리뷰 담달 🥇느낌이 사알 짝 ^ㅅ^

물감 2021-12-21 07:14   좋아요 3 | URL
그런가요! 예언가 스캇님을 믿어봅니다ㅎㅎ

책읽는나무 2021-12-21 0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니깐 김호연 작가의 책을 읽으면 물감님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거로군요??^^
믿고 읽어볼 책이로군요!!!
소설은 찌질한 사람들이 읽는, 응어리를 끄집어 내어 치유하는 글이 좋은 소설...👍고개 끄덕끄덕하고 갑니다!!!ㅋㅋㅋ

물감 2021-12-21 07:17   좋아요 3 | URL
제 취향은 진짜 단순한 1차원인데 아무튼 맞습니다ㅎㅎ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공쟝쟝 2021-12-21 07: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제게 올해의 찌질은 닉혼비의 <하이피델리티>였는데요, 내년의 지질로 김호연 작가님 담아둬볼게요! 뚜둥!

물감 2021-12-21 08:55   좋아요 3 | URL
제가 어지간해선 책 추천은 안하는데 김호연 작가의 책들은 그래도 추천해봅니다 ㅋㅋ 대신 별로라도 저 뭐라하시면 안돼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1-12-21 11:31   좋아요 2 | URL
제가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뭐라고 안할 사람인가 ㅋㅋㅋㅋㅋ님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눈깜짝할 사람이신가ㅋㅋㅋㅋ 물감님 닉혼비 읽어보셨어요? 아주 찌질한데요. 뭐랄까 너드남의 문학 버전인데요... 그 영화 <연애사용설명서>에 오정세 같았어요. 그래서 잤냐? 잤냐고? 잤어? 잤냐고?의 원본을 봐버림. 근데 오정세가 너무 웃기고 찌질해서 밉지가 않잖아요. 그거를 구축해버리심. 왜 이렇게 길게 댓글 달고 있냐면.... 물감님 글에서 비슷한 냄새 나요. 킁킁 ㅋㅋ (욕인가.)

물감 2021-12-21 13:21   좋아요 1 | URL
오호 저 너드남 좋아하는데 닉 혼비의 책이 그렇단거죠? 일단 접수하겠음요 ㅋㅋ 원래 루저가 루저를 알아보는 법이라 누구보다 루저답게 읽고 쓰는 것입니다(뭐라는건지). 암튼 땡큐요. ㅋㅋㅋ

coolcat329 2021-12-21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호연 작가 책 <파우스터>만 읽어봤는데 망원동부터 3부작 다 읽어봐야겠어요.

물감 2021-12-21 13:30   좋아요 2 | URL
쿨캣님의 파우스터 리뷰 읽었던 기억이 나요. 다른 책들도 리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Conan 2021-12-21 1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망원동 브라더스‘랑 ‘불편한 편의점‘ 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연적‘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읽었었는데요 물감님 리뷰를 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감 2021-12-21 17:40   좋아요 2 | URL
사실은 저도 같은 이유로 손이 안가 마지막에 이책을 읽었더랬습니다ㅎㅎ 알맹이와 다르게 제목이 좀 아쉽긴 해요😅 여튼 후회없을 독서가 되리라 장담할게요ㅎㅎ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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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상을 받은 작품에 누구보다도 의심과 불신이 많은 사람이다. 기대감을 안고 읽는 타 독자들과 달리 나는 레이더망을 켜고 매의 눈으로 읽게 된다.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는데 수상작에 하도 실망해서 그게 그렇게 됐다. 이번에 읽은 퓰리처 수상작인 <올리브 키터리지>도 읽기는 잘 읽었지만 수상에 납득까지는 어려웠다. 퓰리처상은 해외 기준이니까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지만.


사전 정보도 없이 입소문만 듣고 책을 고르는 건 역시 고쳐야 할 습관이다. 당연히 장편인 줄 알았는데 내가 싫어하는 단편집이었고 그중 절반은 주인공인 올리브의, 절반은 지역주민들의 에피소드였다. 전반적으로 연민과 동정을 갖게 하는 내용들이고, 올리브가 나오든 안 나오든 분위기는 다 비슷비슷하다. 올리브가 다정다감하고 정 많은 캐릭터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활화산 불도저 같은 여인이어서 살짝 충격받았다. 단지 예상을 깨서 충격인 게 아니라, 차분하고 감성적인 공간과 성깔 있는 인물의 조합이 영 와닿지가 않아서다. 마치 스타벅스 매장에서 조용히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큰소리로 떠드는 빌런을 본 기분이랄까.


인생의 어디쯤엔가 다다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다. 더는 힘든 상황을 노력으로 이겨낼 수 없고, 세월을 악으로 거스를 수가 없을 때. 또 그것을 원치 않아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걸 인식하게 될 때에 인간은 한차례 허물을 벗고 성숙해진다. 그래서 배움에는 끝이 없고, 성장은 멈추는 법이 없는 건가 보다. 전해지지 않은 마음은 서로를 멀게 하고, 일방적인 헌신은 한쪽을 지치게 하고, 갑작스러운 부재는 남은 평생을 공허하게 한다.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아픔으로 적막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픔과 감정들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또는 언젠가 겪게 될 것들이어서 보는 내가 힘들다기보다 결국 삶이 다 그런 거겠지라는 심정을 갖게 한다. 이렇게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감정이 스며들 때마다 인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있다고 믿게 된다.


독자들, 특히 여성분들이 올리브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지 알겠다.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걸크러쉬 마인드인 올리브는 겉바속촉의 워너비 아이콘에 가깝다. 서양 버전의 욕쟁이 할머니 같은 올리브의 진짜 매력은 노인이 되고부터다. 원래도 그런 성격이었지마는 나이가 들면 더더욱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올리브는 보란 듯이 마이웨이를 외친다. 그러나 자신의 모난 성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것이 삶에 이런저런 불균형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기에 남모를 속앓이를 하게 되고, 그 같은 장면들에서 독자들은 이 철면피 여사에게 인간미를 느끼는 것이다. 내가 분석한 바로는 그러한데 뭐 아님 말고.


이 작품이 미국인들의 심금을 어떻게 울렸을지 대강 느낌이 오지만 그래도 수상 타이틀은 잘 모르겠다. 그보다 각 에피소드가 전부 올리브의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퓰리처상 말고도 이것저것 수상한 작가라고 하니 좀 더 알아봐야겠다. 어쩐지 치킨 땡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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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2-17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다시,올리브> 읽으려고 요즘 이 책 다시 읽고 있는데 2년전 읽었을 때는 안울었거든요. 근데 이번엔 조금 울었습니다.

올리브 정말 현실에서 제 주변에 있다면 싫어했을 아니 피했을 여자인데요.
소설이 좋은 점이 이런 비호감인 사람들 이해하게 해준다는 거에요.
물감님 말씀대로 제가 여자라 -나이 먹어가는 중년여자라 😭-더 공감이 가는거 같아요.
겉은 무뚝뚝하고 입만벌리면 독설을 내뿜지만 그래도 마음은 따뜻하다? 이래서 공감을 하는게 아니라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냥 저렇게 태어나서 자신이 겪는 모든 외로움이 자업자득인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할까요? 올리브 보면서 뭐랄까 저 자신의 모습도 보이고 못된 인간의 가여움도 느끼게 되더라구요.

물감 2021-12-17 10:25   좋아요 2 | URL
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을 볼 때마다 대 자연을 생각해요. 다양한 동물들이 섞여있어야 생태계가 잘 돌아가듯이 인간사회도 그렇지 않나 하거든요. 저도 올리브 같은 타입은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지만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봐요 ㅎㅎ 표현에 서툴러서 오해를 달고 사는 사람들을 자주 봐와 그런지, 올리브가 막 밉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나봐요. 근데 제가 아들 크리스토퍼 였으면 또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저도 <다시, 올리브>를 읽고 싶어서 이 책 먼저 읽었어요. 속편이 그렇게 좋담서요? 조금은 성정이 누그러진 올리브가 궁금해지네요^^

coolcat329 2021-12-17 10:17   좋아요 2 | URL
네 속편이 더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얼른 구입했죠 ㅎㅎ
HBO드라마도 네 편으로 있으니 추천합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 연기가 참 훌륭하더라구요.

물감 2021-12-17 10:20   좋아요 2 | URL
ㅎㅎㅎ 기회되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21-12-17 0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여자들이 훨씬 좋아할 책 맞는거 같아요~☺

물감 2021-12-17 10:16   좋아요 2 | URL
본인이 올리브랑 닮아서 공감 가거나, 아님 올리브처럼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요 ㅋㅋ

다락방 2021-12-21 07: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리브가 다정다감하고 정 많은 캐릭터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활화산 불도저 같은 여인이어서 살짝 충격받았다.‘ 에서 완전 빵터졌네요. 활화산 불도저같은..

그렇지만 이 책을 좋아하는 게 올리브랑 닮아서 공감 가거나, 올리브처럼 되고 싶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쿨캣님도 말씀하셨고 다른 분들도 오히려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피하고 싶다, 안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보다는 이런 인물이 소설 속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볼 수 있어서 그 지점에 끌리는 것 같아요. 그 외에 올리브를 둘러싼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삶까지도요.

물감 님 이 소설 읽겠다 하셨을 때 제가 분명 물감님은 안좋아하실 것 같다고 했었습니다... 하하.

물감 2021-12-21 09:3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이 미리 그렇게 말해주셔서 오히려 잘 읽었어요, 별점과는 별개로요 ㅎㅎ 저도 가끔은 이렇게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감수성이 당기곤 해요!

저도 외골수에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어서 사람들과 관계맺는 게 썩 쉽지않거든요. 그래서 올리브가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그렇게 다르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처럼 올리브도 상처받지 않으려 미리 차단하는구나, 늘 곁에 있는 외로움과 싸우고 있구나 싶어서 전 그게 가장 인상깊었네요~ 그래서 속편도 읽을거에요 ㅎㅎ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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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쉽게 이해되고 충분히 즐길 수가 있는 반면, 어떤 작품은 책 밖의 정보가 필수로 요구되기도 한다. 반대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후자의 책을 읽으면 즐거워야 할 독서시간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 감히 소신 발언을 하자면, 소위 지식인들만이 알아듣고 이해할 문학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 문학이 대중에게 연구 대상이 되었던가. 뭔가의 고발이나 풍자 목적의 작품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엔터테인먼트의 유무를 떠나서 어렵고 복잡하게 쓸 필요가 없다. 설령 작품의 성격상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저자 본인의 방대한 지식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작품성과 상관없이 비호감으로밖에 안 느껴진다. 이렇게 말하면 꼭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다. 지가 멍청한 건 생각 못하고 남 탓만 한다는 말. 내가 멍청한 건 부인 안 하지만 그런 말하는 사람치고 본인의 멍청함을 아는 사람도 없더라. 아무튼 처음 읽은 작가의 스타일이 영 아니어서 김이 팍 샜지만 읽었으니 뭐라도 적어본다.


편집장은 2류 기자들을 모아 발간되지 않을 창간호를 만들기로 한다. 그것은 유명인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협박용 신문으로... 이하 생략.


이때까지 읽은 저널리스트 소설 중에 제일 별로였다. 실패한 글쟁이들이 한 팀이 되어 신문 기사를 쓴다는 설정은 ok. 이들은 가짜뉴스를 다루었고, 그래서 어떻게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자극을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팀원들은 위에서 시킨 대로 대중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야 했고, 사실을 왜곡해서 독자들의 분쟁을 일으켜야 했고, 별거 아닌 일도 확대해서 스캔들을 터뜨려야 했다. 이 책의 화두는 미디어 정보의 신뢰성인데, 적나라한 언론 부패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것은 이야기에 매가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팀원들의 창간 활동 위에는 주인공과 편집장의 계획이 있었고, 이 목적을 토대로 쭉 진행되나 했더니 갈수록 작가의 저널리즘 철학 이야기로 변해간다. 기사란 무엇이며 독자의 니즈는 무엇이고 정보란 무엇인가를 디테일하게 쏟아낸다. 정작 풀어야 할 문제는 풀지 않고 흘러가는 이야기의 헐렁한 구조가 킬링 포인트였다.


작품의 방향이 모호해지던 중에 팀원 하나가 무솔리니의 생존설을 깊이 파고들면서 더욱 모호한 방향으로 틀어진다. 자신이 접수한 정보들을 버무린 빅 픽쳐를 주인공에게 신나서 설명하는데 아 글쎄, 주인공 귀에서 피가 흘러나도 꿈적 않는 그의 태도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 기자가 하는 말들이 어려워서 나는 따라가질 못했는데, 평소 에코가 이처럼 피곤한 캐릭터이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저자 후기에서 말하길, 이 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학식이 절제된 거란다. 그럼 이게 제일 무난하다는 말? 우웩. 다시 작품 얘기로 돌아와서, 그놈의 무솔리니 이야기만 줄기차게 하느라 그전까지의 저널리즘 썰전도 쏙 들어가고, 간간이 나오던 주인공의 직장 로맨스도 붕 떠버리고, 편집장과의 계획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작가는 후반에 가서 거대한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데, 그전까지의 어수선한 상황을 정돈하지도 않고 결말을 내려고만 하니 이 매가리 없는 전개에 영 납득이 안 가는 것이다. 아아, 소대장은 에코에게 매우 실망했다.


유일하게 주목했던 장면은, 팀원 중 홍일점인 주인공의 애인이 얘기한 상투적인 표현의 글은 피하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 들어간 글을 손사래치는 사람이다. 그건 주로 글감각 없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 건데, 그것만큼 문장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도 없다. 솔직히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을 흉내 내서 무슨 기쁨과 유익함이 있을까. 책이든 기사든 서평이든 뭐든 간에 남들과 겹치지 않는 글을 쓰려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노력들이 쌓여서 오리지널이 되는 거지, 그런 수고가 없이는 맨날 써봤자 감각 있는 글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글쓰기가 취미라면 상투적 표현을 걸러내는 안목을 기르시길. 그것만 주의해도 최소한 읽기 싫은 글이 되지는 않을 거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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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2-13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소설 중간에 난데없는 지식 자랑! 저도 좀 싫을 것 같은데요^^; 전 에코는 그 유명한 장미의이름도 안 읽고 산문집만 하나 읽은 사람이라..

물감 2021-12-13 23:51   좋아요 2 | URL
에코의 글은 어렵기로 유명하더라고요ㅋㅋ전 한번 경험한 걸로 만족하렵니다...

coolcat329 2021-12-14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네요. 에코 책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나 손이 안가긴 했어요. 어렵다고 해서요.
그래도 끝까지 읽으셨군요! 저라면 포기했을거같아요.

물감 2021-12-14 10:38   좋아요 1 | URL
저번에 제가 혹평한 발자크의 나귀가죽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긴 합니다만, 에코도 쉬운 분은 아니더라고요ㅋㅋ하도 유명해서 그냥 읽어보고는 싶었어요...

페크pek0501 2021-12-19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점수를 박하게 주셨네요.
저는 뭐 때문에 이 책을 샀을까요? 아직 읽지 못했어요. ㅋㅋ

물감 2021-12-19 18:01   좋아요 1 | URL
한 때 화제여서 덩달아 구매하지 않으셨을까요 ㅎㅎ 저랑은 안맞았지만 다른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셨다니까 페크님도 그럴거라고 생각됩니다~ 페크님은 어떤 평을 내리실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