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家의 사도세자 이맹희
이용우 지음 / 평민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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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할때 까지 삼성,현대,럭키,금성등의 국내 제벌에 대한 이미지는 만화가 박봉성 선생의 기업만화 영향인지 몰라도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고 물론 당시 부모세대나 알려진 정보에 의거한 속 좁은 판단으론 그랬던 것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 이들 제벌에 대한 진실을 하나 둘 씩 알아가면서 왠지 씁쓸한 뒷맛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들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매판자본의 대표적인 선구자였던 삼성에 대한 판단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삼성가의 사도세자 이맹희>라는 책은 서평을 올리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책으로 다가오네요. 물론 책을 읽어가는 내내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는 근래들어 가장 불편한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서평이라는 자체가 개인의 느낌이나 편견 혹은 기본적인 성향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가지게 마련이라는 점을 우선 밝혀 둡니다. 괜히 곡해의 소지가 있을수도 있으니까요 어디까지나 개인적 판단과 책을 읽고 느낀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뭐 이렇게 말한다고 어마어마한 느낌을 피력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우선 저자는 삼성가의 적장자인 이맹희씨와 현 오너인 이건희씨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삼성가의 권력승계과정의 내막을 밝혀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이맹희씨측의 진실과 세간의 오해를 풀어 가는 과정를 집중적으로 부각하여 집필하고 있습니다. 저자와 이맹희씨와의 개인적인 친분인지 아니면 그동안 이맹희씨가 받아왔던 세간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던지간에 그리고 이병철에서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권력승계 과정을 마치 조선조 영조시대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던지 사도세자 운운하면서 이맹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이맹희는 사도세자로 한동안 그룹경영에 이바지했고 현재 삼성의 틀을 잡은 장자를 내친 냉험한 아버지 이병철은 영조등으로 묘사함으로서 이맹희씨에 대한 자연스러운 안타까움을 끌어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도 뭐 다 좋고 그렇다고 생각합시다. 좀더 비약해서 사도세자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만큼이나 이맹희도 그렇다고 인정해 보더라도 삼성이 성장해오는 과정을 그리는 과정은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습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등 암울한 현대사에 터졌던 사건들을 마치 권력의 희생양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점은 어불성설로 밖에는 비쳐지지 않습니다. 마치 이는 정경유착의 피해자인양 비쳐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은 뒤부분에 이병철 즉 삼성가의 경영철학을 인의예지신중에서 信을 가장 중요시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권에 협조했지만 혼자 독박을 쓸만큼이나 新 新 新 을 강조한 경영철학의 진수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뭐 국보급문화재의 보유과정도 이와 흡사한 논리를 펼치고 있어 간송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고 이병철가를 시문과 성리학에 달통한 학자풍의 가문으로 묘사하는등 많은 점에서 한쪽면만을 바라보고 그렇게 끌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가관은 삼성가의 적서관계를 논하면서 한민족의 정신적인 틀인 단군을 서얼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재 환인의 서자 환웅에서 서자를 서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서자는 서얼이 아니라 장자가 아닌 아들이라는 점을 모르는것 같습니다. 민족의 첫 출발이 서얼의 태생이었다는 점 이거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뜩이나 노론계열의 식민사학자들과 한중록등에 의해서 사도세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인식이 팽배에 있는데 어디 사도세자에 비견할 생각을 가졌는지도 의문스럽구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도 자칫 잘못하면 삼성의 이미지를 상당히 곡해할 수 있는 요인들이 너무나 많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삼성에 대한 그 어떠한 악감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굳이 이러한 책으로 인해 그동안 삼성이 쌓아왔던 인재육성 글로벌 경영등 긍정적인 이미지에 흠을 입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책을 읽으면서 다시하번 느끼는 바이지만 재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직도 미비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물론 장점과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점을 전부다 무시할 수 는 없지만 이번 처럼 마치 시대와 권력에 희생양인 것 같은 표현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서평을 올리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책들로 인해 삼성을 포함한 대한민국 재벌들의 실상에 대해서 공론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에서 저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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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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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스릴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참자>는 그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래저래 꼬리표를 달았던 냉혹한 평론가들이나 수준 높다고 자평하는 독자들에게 작가의 필력을 제대로 발휘한 작품으로 인기 흥행위주의 매판자본주의에 편승한 작가(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이에 자유로운 작가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요)가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판단됩니다. 그만큼 이번 작품은 추리스릴러 계통의 작품이라 하기엔 왠지 다양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독자들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파스텔톤적인 배경처러로 문학성을 드높여주는 문학성 높은 작품(물론 이러한 문학성에 대한 제단 역시 독자 개개인의 판단과 비평가들의 자기 영역 지키기와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되기도 합니다)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작가를 비롯한 추리스릴러 작가들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뉘양스와는 사뭇다른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추리스릴러 매니아 독자들께서 이번 <신참자>를 읽게 되면 다소 실망아닌 실망을 금하지 않을리라 여겨지는 부분도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치밀한 범행계획과 더불어 범인을 행적을 추적해 나가는 해결사(탐정)의 카리스마나 상상력 뛰어넘는 범인의 대담성이나 치밀성과 양자 구도를 형성하여 내러티브 전반을 끌고 가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고 책속으로 유인하여 파묻히게 하면서 결론 부분에 상상치 못하는 극적인 반전을 끌어내므로써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통상의 추리스릴러 작품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기에 강력한 충격파를 원하는 독자층과는 거리감이 있는 작품입니다. 범행동기나 범행에 실행하기까지의 범인의 의지 그리고 수사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트릭, 그리고 추격자의 추격을 뿌리치는 부비트랩을 하나 하나 격파해 나가는 통쾌함이라던가 의외의 인물과 대반전등을 솔직히 기대하기 힘든 작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같은 스팩타클 긴장감과 스피트감이 내러티브 어느 곳을 엿보더라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밋밋한 느낌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참자>는 상당히 매력적이 면들이 보입니다. 우선 그동안 작가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가가 교이치로를 해결사로 등장시킴으로써 이번 작품이 단순한 사건 해결적인 결론 보다는 작가의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깔고 있고 이에 가가는 적극적으로 부응하게 됩니다. 사실 추리 스릴러 작품에서 사건의 단초인 하나의 살인사건이 이번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무시되는 경우는 없을정도로 작가는 시종일관 사건과는 무관한 쪽으로 가가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을 다소 당황스럽게 하지만 다른면에서 본다면 결론을 위한 일종의 장치적인 역활이기도 하겠지요. 도교도 내 중심지에서 발생한 의문의 살인사건이 미치는 일파만파의 영향이 닌교초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개인가정사와 맞물리면서 자연히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이러한 진행이 사건 해결로 다가가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형사가 하는 일이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자이고 그런 피해자를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이 또 다른 형사의 역활이다"라는 가가형사의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독자들은 절로 수긍하게 되고 왜 이런 내러티브로 이번 작품을 집필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은 복잡하고 각박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가장 근본적이고 해체되어서는 아니될 가정이라는 최후의 보루에 대해서 작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많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가장 가까우면서 달리 보면 한없이 멀어지는 가족관계와 그에 대한 화해를 찾아가는 방식등을 통해서 작가는 가족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이번 작품 전반에 걸친 메타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극적인 반전이나 치밀한 구성력은 떨어지지만 내러티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푸근함이 블럭버스터급의 화려함보다 훨씬 감동적이다는 것을 절로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표지 인물인 아베 히로시의 분위기가 가가형사를 대변하는 것 같아 보기가 참 좋아 보입니다 . 앞으로 가가형사의 다른 버전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가장 가가다운 역활을 충실하게 소화해낸 작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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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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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를 오가고 태양계를 벗어나 지구에서 더 먼 우주를 향해 우주선을 보내고(물론 이러한 일련의 혁명도 이제 다소 진부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분명하게 획기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원격교육, 원격진료가 가능해지면서 사실 휴대폰 하나로 삶의 컨트롤이 가능한 유비커터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러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단시간에 가장 혁명적인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씩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중 대표적으로 과학적 진보에 대한 종교의 간섭(내지는 월권행위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은 여러가지로 충돌과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진화론에 대한 종교계의 물타기 수법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힐 것입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왔던 사람들 역시 진화론과 창조론 혹은 창조론의 아류인 지적설계론에 대한 명확한 구분 내지는 정확한 실상에 대해선 구체적 못한 모호한 경계선상에 자리잡고 있고 이 빈틈을 과학이라는 묘한 장치로 둔갑한 지적설계론이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다지 거부반응이 없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는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수차례 확인 되어 왔고 종교는 서서히 중세의 화려한 영예를 되찾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하는가>  200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지방법원의 판결로 지적설계론이 과학이 아니며 따라서 학교 교육에서 지적설계론을 가르칠 수 없다는 판결을 바탕으로 지적설계론(창조론포함)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 16人의 구체적인 반론을 에세이형식으로 한데 모아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리처드 도킨스, 스티브 핑거등을 비롯한 각계 각층에서 권위있는 과학자들의 의견을 한데 모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번 책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옮긴이의 표현처럼 산해진미가 가득한 진수성찬을 받은 느낌처럼 우주,언어,교육,도덕,종교적 믿음등 그야말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설명가능한 모든 분야를 접할 수 있다는 자체가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의 부제인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창조론과 그 아류인 지적설계론에 대한 16인의 과학자들의 생각과 설득력있는 사실에 근거한 반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왠만한 진화론 서적을 보는 것 보다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돋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창조론과 지적설계론에 대한 과학적 반증이나 그 대상들의 허구성과 비과학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맞대응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앞으로 진화론의 인식과 교육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담론들에 대한 고찰이라는 측면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사실 이 책에 마지막에 수록된 펜실네이니아 중부 미국연방지방법원의 판결문 자체로 왠만한 독자들은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의 비과학적이고 허구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여지고요, 굳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뛰어난 과학들이 그것도 16인이나 나서서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는 자체가 난센스로 비쳐질만큼 판결문의 내용은 명확 그 자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면 종교계에서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으면 하는게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계속 진부하게 '신'을 운운하며 지적설계론을 밀어 붙인다면 공동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의미론적 존재가치가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형국이지 않을까요 

 

지적설계론(창조론)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지금 세상에서 왜 이런 사이비 이론들이 종교적 가면을 쓰고 등장하게 되고 왜 알면서도 이런한 이론에 마음이 혹하게 된는 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그 해결방안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너드 서스킨드나 스콧 D 샘슨의 에세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동안 과학과 과학자들이 반과학에 대처하는 자세부터 새로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 진화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부족은 전적으로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분획화(세분화)에 의한 이해부족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여 이해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는 자성의 목소리들 담고 있고 이에 대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계의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종교가 해야할 일이 따로 있고 과학은 과학이 해야할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굳이 과학이 원래 하기로 되어 있는 질문들을 할 권리 인정하지 않는가하는 것이 작금의 분쟁의 발단의 단초입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활을 제대로 수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과학 역시 그동안 자신들만의 성역을 쌓고 유지 하는 것보다 일반대중의 이해의 폭을 넓혀나갈 방안을 심각하게 모색하고 보다 쉽고 이해하기 편한 형태로 다가가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경계를 이번 처럼 법원의 판결 결과라는 수치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에서 부터 우주의 탄생과 확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일 수 밖에는 없는 진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자체가 비록 에세이 형태로 작은 책자에 불과하지만 의미있는 저서로 남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여기에 미래지향적인 과학의 나아갈 바를 과학자 스스로의 자성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부분 역시 향후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영역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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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와 논어를 논하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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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공자는 특히 동북아시아권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국가에서는 아주 유니크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2500여년전의 인물이 지금까지 현실생활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 경우는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별한 존재 그 자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예수나 석가의 경우는 인격체라는 개념을 초월해 버려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유독 공자는 인간의 지위를 영위하면서도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 할 정도로 파괴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자의 어록을 집대성한 논어는 성경이나 불경에 버금갈 정도의 필독서이자 인생의 지침서로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면 머리속에 지식꽤나 담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공자왈로 시작하는 짧은 문장은 인격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유교문화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공자와 논어는 삶의 방향타를 제시하면서 최소한 인간적인 도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세계화 기준에서 한참을 벗어났다고 자책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공자와 공자왈(논어)는 바로 이러한 메이저리그 진입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 내지는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 그야말로 고전의 지위만을 계승해왔고 일반 대중들에게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아니 잊어야 하는 그건 존재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추구했던 절대가치인 메이저리그(자본주의 시스템)는 알고 보니 정말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사랑방 한켠에서 켜켜이 먼지만 쌓여갔던 공자와 공자왈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개발과 경영전략, 수양등에서 새롭게 공자와 논어를 재조명하면서 수 많은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왠만한 독자들 서가에 논어한권은 필독서로 자립잡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전에 일가견이 있거나 왠만한 인문서적을 독파한 독자라고 해도 논어는 그리 녹녹한 서책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를 독파한 독자도 드물뿐더러 비반 논어를 읽더라고 정말 고전적, 死적인 문구로만 뇌리에 남기 마련이고 이러한 일련의 행태들이 그 잘나신 일부 고전학자들의 서지학적이고 문헌학적인 접근 방식에 기인하지 않나라는 걱정거리 마져 던저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논어 강의는 예외적이라고 느껴 지지만 강단학계에서 고전을 해석하는 방향는 역시 그들만의 리그에 집중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논어는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전문지식을 요하는 고전중에 고전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공자의 담론과 논어의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논어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국문학자나 한문학자 내지는 인문학자가 바라보는 공자와 논어에 대한 정형화된 시각을 탈피하여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공자와 논어의 배경이 되었던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과 이후 역사적으로 공자와 논어가 우리 역사 전반에 영향을 끼친 사례 내지는 접점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무엇보다 정적이고 사적이었던 공자의 담론을 담아내고 있었던 논어를 도덕적, 가치관적인 판단이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시대적인 소명과 역사적 판단기준등에서 바라보게 되어 논어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논어의 진정한 가치를 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저 서안속에 꽈리 틀고 자리잡은 도도한 가치관적인 논어보다 역사와 함께 숨쉬는 논어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 합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그동안 읽었던 공자와 논어관련 책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개인적인 성향이나 편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생각이 저만의 개인적인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특히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공자의 담론과 그 담론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게 미쳤던 영향들을 세세하게 부연설명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한결 흥미롭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독자들은 역사학자가 편낸 공자의 담론이니 전문학자들의 저술수준보다 못미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하게 될 것입니다만 단언컨대 그러한 기우는 가지실 필요는 없을거라 여겨집니다. 많이 않는 분량이지만 논어의 핵심적인 사안들은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고 무엇보다 이 한권으로 논어의 맥락을 잡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당연히 저자의 책으로 논어를 마스터했다는 생각은 금물이지만 적어도 논어를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시금석 역활은 한다고 보여집니다. 뭐 비역사학자인 서울대 모교수처럼 편협된 시각으로 역사를 판단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네요. 고전과 역사를 동시에 아우를수 있는 좋은 기회로 독자분들께 다가가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공자와 공자왈은 송나라 이후 사상계에 급물살을 타면서 조선중기이후론 교조화로 치달으면서 진정한 공자와 논어에 대한 담론은 사라지고 정치권력과 신분제유지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조선멸망과 일제감정기를 거쳐 타율화된 근대화로 접어들면서 그야말로 애물단지로 치부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자와 논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시겠지만 이번 저자의 논어 해석에서 논어와 우리 역사를 흐르는 테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과 가치관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 공자의 담론들은 어떻게 해석하면서 슬기롭게 상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작은 실마리를 던저주는 책이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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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2 밀리언셀러 클럽 125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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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때이른 더위를 잊게 해준 색다른 작품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이라는 작품을 처음 접할 때는 출판사의 기획물에서 받게 되는 선입관인 추리,스릴러,호러물계통의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시큰둥했고 그런 비슷한 류의 작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솔직히 개인적으론 그다지 관심을 갖고 읽어본 분야가 아니라 선뜻 판단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작품의 제목도 약간 특이하게 설정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멕시코를 비롯한 메소아메리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약과 그를 둘러싼 스토리가는 점에서 솔깃한 마음이 들었고 책을 들고 읽어 나가는 순간 정말 숨가쁘게 작가의 내러티브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흥행성을 담보로 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내제되어 있어 상당히 거대한 스케일과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가고 있는 점들이 내러티브를 강하게 끌어가고 있어 시선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은 故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을 가장 먼저 떠올리만큼 스팩타클하고 스피드한 속도감으로 정말 일요일에 이 책을 손에 잡게 된다면 다음 한주가 뒤엉켜 버릴 정도로 손에서 놓기 힘든 그런 작품으로 보입니다. 뭐 특별하게 문학작품의 레벨화를 굳이 따지는 문학성이나 작품성은 솔직하게 찾아볼 수 없지만(굳이 그런 레벨화를 원하시는 독자라면 추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그런 분류를 정형화한다는 것이 아이너리하다는 생각도 강하게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헐리우드 블럭버스트영화에 컬트적인 면이 혼합되어 작품의 가독성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스카페이스> 알 파치노의 냉혹하면서 인간적인 킬러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를 연상케 하는 다른 차원의 잔혹성 그리고 국가조직과 권력, 그리고 자금이 마약이라는 매게를 통해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거대한 음모론이 삼위일체을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소재들이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마약과 이를 둘러싼 마이아집단들의 실체, 멕시코 대지진등 역사적으로 팩트적인 배경과 적절하게 믹싱되어 있어 사실성을 극대화 하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나 요소들이 영화나 다른 작품에서 벤치마킹한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호 연결성들에서 작중 설정이나 내러티브의 강도를 배가 시킨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은 앞으로 문학작품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시금석 같은 역활을 부여하리라 믿어 집니다. 문학성과 작품성에 비중을 둘 것이냐 아니면 비단 이러한 하이클라스적(?)인 배경이나 설정보다는 일반 대중 독자들이 정말 읽어보고 싶어하는 팁을 제때에 제공할 것이냐는 점에선 성공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또 다른 차원의 문학작품을 원하시는 독자들에겐 흥미본연에 치중에서 막상 읽고 나면 남는게 없다는 표현도 하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소설이라는 작품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내러티브 자체가 재미가 있어야 손에 책을 잡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흥미를 기본으로 작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번 작품 <개의 힘>은 일반 독자들을 끌어들일수 있는 흡인력이 상당하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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