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세트 - 전5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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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장 발장' 으로 더 알려진 <레 미제라블> 은 고전 중에 고전으로 다양한 버전(책 제목도 다양하거니와 번안본 다이제스트본등 출판 형식도 다양합니다)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더랬죠. 제 기억에도 학창시절에 축소 요약된 문고판 혹은 시험용으로 전체 줄거리만 써머리된 페이퍼 형식으로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네요. 그러다 보니 사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아니 <장 발장> 에 대한 감흥은 그리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아주 판에 박힌 권선징악적인 결말과 교훈적인 울림은 <백설공주> 와 같은 우화 비슷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원작이 이렇게 방대한 내용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하긴 그 동안 클래식을 접하면서 다소 놀라는 부분들이 바로 이런 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알고 있다고 혹은 읽어 봤다고 생각했던 유명작들을 막상 대면할때 느끼는 부분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처음 출발은 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로 시작하지만 작품속에 들어가게 되니 정말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게 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속으로 빠져들면서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들고 '아하' 라는 감타사를 연발하게 만드네요.

 

  자 그럼 <레 미제라블> 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보죠. 주의할 점은 내용이 방대하다 보니 주절주절 서평도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구요. 이 점은 나름 빅토르 위고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 표명이라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음 도저히 간단하게 줄여서 리뷰를 올릴 자신이 없더라구요. 아마도 저의 무지와 능력의 부재이지 않을까라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런 말투도 위고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참 깜박했는데 전제가 있네요. 지금까지 레 미제라블을 장 발장이라는 문고판 내지는 축소 번안판으로 읽은 독자들 그러니까 완역 작품을 대하지 못했던 독자들 이라면 더 공감되지 않을까 싶네요.

 

▣ 첫 도입부는 정말(물론 저한테 해당됩니다) 지루하고 약간의 짜증을 동반합니다. 아~ 고전이라는 이런 것 인가 하는 생각 예전에 그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런 생각들(저한테는 솔직히 이게 뭐야라는 느낌이 더 강했고 5권을 읽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로 시작됩니다. 그래도 일단 고전이니까 참아가면서 읽어 나가다 보면 그 이름도 익숙한 우리의 주인공인 장 발장이 등장하면서 내러티브의 속도와 긴장감이 급상승 하기 시작하네요. 뭐 대부분의 유럽 소설들이 그렇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인물에 대한 설명이 마치 엑스레이로 투과하듯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세세하게 설명되고 있어 정말 독자들로 하여금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작품 전반에 걸쳐 투영되어 있어 등장 인물들의 숨소리를 듣는 듯한 사실감을 증폭시켜 준다는 점에서 위고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다소 반복되고 있어 약간은 지루한 맛도 있지만요. 워낙 인물 묘사에 대가인 점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내러티브(여기까지는 예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가 갑자기 샹 마티외 재판을 계기로 돌변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유명한 장 발장이라고 까발리는 마들렌 시장의 고백은 재판장과 판,검사 그리고 배심원과 방청객을 당황케 하는 만큼 독자들도 상당히 당황하게 한다는 것이죠(음 대충 작품의 분량을 미루어 짐작해 봐도 아니 왜 이렇게 초장에서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뭐 이런거 있지 않습니까. 어디선가 대충은 본 듯한 현상이 데자뷰되는 듯 한데 왠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들. 물론 그 동안 알아왔던 레 미제라블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모른체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도입부를 건너가면서 기대감이 높아지게 되죠.

   

   그런데 2부에 들어서면 또 다시 한번 더 작품의 분위기가 확 돌변합니다(이거 왜 항상 초입부에 이런 설정을 해 놨는지 도통 모르겠지만요). 약간 생뚱 맞다고 할까요(물론 전 작품의 분량에 비해선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요) 막상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눈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하죠. 갑자기 등장하는 워털루 전투와 다시 권력을 잡는 부르봉 왕가등 당시 프랑스, 유럽의 역사가 서사되면서 우리의 장 발장은 귀퉁으로 밀려납니다. 특히 워털루 전투의 발발과 전개 그리고 결말에 이르는 서사는 카이사르의 내전기 이후 가장 전쟁을 제대로 묘사한 부분으로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책을 읽는 내내 화약냄새와 포성과 병사들의 함성을 느낄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가 1부 도입부에서 주교에 대한 묘사에서 눈치는 챈 독자라면 아 이 양반의 주전공임을 알아채게 합니다. 이러한 스트럭쳐는 3, 4, 5부로 가면 갈수록 독자들이 넘어서야할 무거운 담론과 서사의 시초라는 점, 그리고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문학작품인지 정치,역사 혹은 시대 평설인지 아리까리 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생각외로 진도가 팍팍 나가질 않습니다. 근데 이런 구조가 은근히 시선을 붙들어 매고 있다는 점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 작품 전체적인 내러티브 진행중에 군데 군데-아마도 어떤 독자들은 짜증낼 만큼 장 발장에 빠져들려면 등장하고 불쑥 머리를 들이대는 위고의 너스레라고 할까요. 생뚱 맞는듯한 또 다른 부연 설명들 마치 굳이 그렇게 친절하게 서사를 하지 않더라도 전체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읽어나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듯 한데 -예를 들어 워털루전투의 상세묘사, 베르나르 수도원, 파리시내의 하수도의 구조도와 연혁, 공화제와 왕정의 비교 검토, 내란과 외란의 차이점(특히 4부는 분량도 가장 많은데다 정치적인 담론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더 진도 빼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이런 카메오 같은 서사들이 내러티브 전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등장들이 작품의 진정한 맛과 이해와 더불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장소, 그 시대에 있는 듯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장 발장을 위주로한 소설부분만 도려내더라도 제법 훌륭한 평설을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빅토로 위고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장치적인 구조가 상호 보완 역활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배가 시킨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네요.

 

▣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가장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담론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전중에 고전작품이기에 그럴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되지만 만약에 이러한 담론들이 일률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사되고 있다면 어디 문학작품이겠습니까 그저 바이블 같은 느낌의 수양록이 되겠죠. 하지만 빅토르 위고는 당시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아노미 상태에 빠져있는 시대상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담론들을 내러티브에 녹여 놓았다는 자체가 독자들에게 정형화되거나 진부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기에 자신의 전공인 인물과 장소, 지리, 사물(심지어 깨진 그릇에 이르기까지요 정말 엄청납니다)에 이르는 세밀한 묘사는 문학적인 작품성을 높이고 등장인물들과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정과 효과는 이 작품 자체를 읽는 것 만으로도 마치 눈 앞에 펼쳐지는 스크린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고전작품과는 사뭇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별도의 각색없이 그 대로 원작을 차용하더라도 훌륭한 영상과 뮤지컬이 탄생할 수 있을 만큼 빅토르 위고섬세하고 치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틴 베르가의 분원인 베르나르 교단의 수녀원의 건물 모습을 묘사하는 과정을 보게 되면 정말 문손잡이, 벽지의 문양과 색깔, 창틀의 구조, 마루바닥의 흠집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세세한 묘사를 하고, 파리 전역의 거리, 그 거리에 있는 상점과 건물들 그리고 그 거리를 활보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옷차림(특히 위고는 이러한 인물들의 겉모습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심리상태까지 연상케 한다는 점은 가히 압권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건물들의 배치와  등등 이러한 면을 통해서도 가히 완벽한 영화의 시나리오와 뮤지컬의 극본에 걸맞는 무대효과를 설치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 위고는 작품 전반을 통해서 제목에 걸맞는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 즉 당시 대다수의 프랑스 민중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혁명과 제정 그리고 왕정의 복고와 다시 맞은 혁명등 프랑스의 정치 사회는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좌와 우, 위와 아래를 번갈아 왔다갔다 했지만 정작 민중들에게는 특히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겐 그저 무의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쪽의 서사(역사 평설)는 당시 정치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다른 한 쪽의 서사(소설작품)는 그저 그와는 별개의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민중들의 비참한 이야기의 근원이 바로 정치였다는 점을 은근히 비꼬는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도 한 몫 거들고 있고요.

 

  정말 엄청난 大作을 만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대작일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고요. 그저 몇 마디 말로만 표현하는 그런 대작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대작이자 명작입니다. 소설가 백영옥은 "고전이 재밌다 라는 말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건 마치 뜨거운 욕탕에 들어앉아 '어! 시원하다' 라는 아버지의 거짓말과 일맥상통한다." 고 했습니다. 이런 고전의 정형이 바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요? 그 동안 한 쪽의 서사만을 다룬 간략한 번안이나 다이제스트본으로 접해왔던 <레 미제라블> 은 잊어야 할 것 같네요. <장 발장> 이 아닌 <레 미제라블> 의 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왠지 이 엄청난 명작을 읽고도 초라한 서평으로 댓가를 갈음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Tip 1.) 분명하게 문학작품임에 틀림없어 보이지만 정말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 보면 역사평설과 문학소설이 혼합되어 있는 유니크한 스트럭쳐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문학적인 측면만 놓고 봐도 압권이지만 평설적인 부분 역시 빼어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마지막 왕 루이 필리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아마도 자신이 2월 혁명을 계기로 왕당파에서 공화파로 전향하면서 "혁명은 바로 반항의 반대이다, 혁명은 훼손되더라도 지속되고 피투성이 되더라도 살아남는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 라는 서사가 자신의 공화파 전향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마리우스라는 청년을 내세워 자신의 사유를 보여주지만 질노르망 영감의 역활 역시 상당히 위고의 사유가 잔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번 작품은 필히 프랑스의 근대사를 한번 확인하고(2월, 7월 혁명등 뭔놈의 혁명이 많습니다) 읽어나간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Tip 2.) 4부 7번째 챕터의 '결말' 이라는 장에서 위고는 당시 민중들 즉 레 미제라블이 사용하는 비어, 속어에 대한 별도의 장을 마련하여 곁말의 어원과 형식 그리고 사용처 등 상당히 고급스러운 언어학자다운 고찰을 보여주는데요. 이 갑작스러운 등장은 독자들을 다시 하번 당혹하게 하지만, 앞 뒤 면밀히 생각해보면 작품과 연계해서 더 부각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듯 <레 미제라블> 속에는 예상치 못한 서사들이 카메오 출연 같이 상당히 많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들이 장 발장을 비롯한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삶을 보충하는 역활을 하고 있고요. 이런 점 같이 음미하면서 읽는다면 한층 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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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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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은 오르한 파묵의 세번째 작품이면서 전작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고요한 집> 과는 사뭇 다른 스트럭쳐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파묵은 두 작품을 통해서 신생 터키공화국의 성립과정과 그 과정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질곡의 근현대사를 가족사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작품 <하얀 성> 역시 그렇지만 차이점이라면 기존의 작품들은 터키(동양)의 관점에서 서구(서양)의 이데올로기나 담론이 충돌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하얀 성> 은 서구의 시각에서 터키(동양)의 모습이 어떻게 비쳐지는가에 대해서 촛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스트럭쳐면에서도 액자구조 형식을 취해서 파묵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배제한 듯한 뉘양스를 주어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양측의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입니다(물론 강한 부정이기도 하지만요)

 

<고요한 집> 에 등장했던 파룩- 파묵 자신을 지칭하죠-이 게브제군 기록보관서에서 발견한 17세기의 고문서를 책으로 출간하는 형식을 빌려 시작되는 단순하게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그 내면은 개인의 정체성 발견을 넘어서 동서양간의 담론의 수용과 이해 그리고 발전에 관한 문화간의 충돌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은 앞의 두 작품에 비해서 상당히 난해하고 심오한 담론을 다루고 있는 다소 무겁고 어려운 작품입니다. 솔직히 작품의 분량에 비해서 진도도 그리 팍팍 나가지 않고 뭔가 곱씹어 보게 하는 작품으로 '나는 왜 나인가' 라는 극히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정체성의 문제와 동서양 이데올로기이라는 거대한 담론까지 같이 결부되어 고뇌의 폭을 사정없이 확 넓혀 버리기 때문에 만만하게 접근했다가 다시 리셋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 할 정도로 심오함 그 자체를 보여주네요. 음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움직일 수 없는 수렁속으로 자꾸 자꾸 빠져든다고 할까 마치 주위에 빛나는 불빛이란 불빛는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블랙홀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게 합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나(서양을 대변하는) 와 그('호자' 동양을 대변)- 이 두 사람은 서로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상대방)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못하기도 합니다- 의 관계성 및 호칭등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왔다갔다하고 있고 동서양의 담론들과 개인적인 정체성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독자들의 눈을 혼란케 하네요. 상당한 인내심과 집중력을 가지지 않고 대한다면 대체 뭔 내용인지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이지 않을까 싶네요. 특히 파묵의 전작인 두 작품을 대하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더욱 더 파묵의 서사가 상당히 낯설고 난해하게 다가가지 않을까 우려도 되고요. 

 

개인적으로 왜 오르한 파묵이 노벨상을 수상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게 하는 작품이 바로 <하얀 성> 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물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해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을 통해서 동서간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노예와 주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단순한 지식을 공유하는 협력자의 관계로 그리고 나아가 인생의 동반자와도 같은 형제애 나, 너의 경계가 없이 내가 너이고 너가 나인 동심체로서의 이해, 반복적인 표현이지만 '나'(서양)의 관점에서 그리고 위주로(혹은 주연으로) '호자'(동양)를 바라보지만 결국 서양과 동양이 서로 다른 '나' 와 '너' 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같은 모습의 '나' 와 '너' 라는 인식 '나는 왜 나인가' 라는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담론 역시 위와 비슷한 구조를 띄고 있음을 서사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인식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더욱 더 혼란스럽고 어렵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결국 이 두 가지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죠.  

 

다 아시다시피 터키 그 중에서도 이스탄불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충돌점이자 접점의 위치에 놓여 있죠. 그리고 종교를 포함한 문화의 충돌이자 접점으로 동서양이 혼재에 있는 세계유일의 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파묵이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영향을 받은점도 있겠지만 파묵처럼 양대문명과 문화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고민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서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런면에서 이번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크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동서양 담론과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묵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에서는 방대한 시간과 공간속(거시적인 시각에서)를 다루었다면 <고요한 집> 은 상당히 협소한 범위 속으로 담론을 끌어들였고 <하얀 성> 와서 앞의 두 작품을 바탕으로 동서양과 개인들의 정체성이 완결되고 이해해될 수 있는 최종판을 선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이 세 작품은 향후 파묵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기반이 될 것이고 기본 뿌리로서 작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비쳐보네요.  

 

전반적으로 <하얀 성> 은 파묵의 기존 두 작품과 비교해 볼때 스트럭쳐면에서나 내러티브면에서 색다른 요소가 가미된 작품입니다.-그래서 살짝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게 되기도 하죠- 물론 두 작품의 기본적인 베이스처럼 내러티브 근저에는 동서양 패러다임이라는 거대한 담론과 개인의 정체성을 담고 있지만 앞의 두 작품이 동양적인 관점에서 그 해결방안을 제시했다면 이번 작품은 양측의 시각을 다 담은 보다 객관적이고 현실성 있는 주제를 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분량은 가볍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심오하고 어렵게 다가 오네요. 그래서 그런지 한번만으로는 제대로된 맛을 느끼기게 저 개인적인 역량이 뒷받침 하지 못한다는 점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이런 점 물론 독자들 마다 편차는 있겠지만요- 그래도 이런 다루기 힘들고 해답을 구하기 만만치 않는 주제를 가지고 풀어가는 파묵의 필력에 절로 감탄사가 나올 뿐입니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이 방대한 시간과 공간속를 다루었다면 <고요한 집> 은 상당히 협소한 범위 속으로 담론을 끌어 들였고 <하얀 성> 앞의 두 작품을 바탕으로 동서양과 개인들의 정체성이 완결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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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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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은 누구나 한번쯤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꿈꾸었던 로망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유년시절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자신의 미래와 미래상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상상에 몰두하게 되었지만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잘못된 부분들을 수정하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잘못된 부분들이 극히 개인적인 소사이건 거국적인 대사이건간에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숨가쁜 환상을 꿈꾸게 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의 <11/22/63> 이 바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고 그래서 눈에 확 들어 오네요. 

 

앨의 식품창고 -과거로의 통로(언제나 항상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에 시작되는 과거)- 를 통해서 54전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설정과 미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암살사건중 하나인 1963년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사건을 막을 수 있다면 미국 그리고 전세계의 역사가 상당히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더 나은 장미빛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이번 여행은, 작중 앨이 말한 "한심한 떠돌이를 한 명 없애면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어" 라는 말처럼 과거를 수정할 수 있다면 특히 잘못된 부분을 돌리수 있다면 더 나은 현재가 펼쳐질 수 있지않을까라는 생각에 착안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자체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요. 

 

하지만 어디 모든 일이 만만하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겠죠. 시간 여행자인 제이크의 선임자인 앨이 시간 여행을 했고 자신도 겪어 봤지만 과거는 지금 현재의 생각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작중에 그런 멘트가 있죠 "과거는 바뀌길 원치 않는다는 것, 과거는 고집이 세다는 것"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과거가 변화에 저항하는 강도는 어떤 행위에 따라 미래가 얼마나 달라지는가에 정비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안그렇겠습니까? 하물며 존 에프 케니디의 생명의 다시 살리는 것이고 누구나 인지하듯이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예측하기 힘드니까요. 바로 이러한 또 하나의 복선은 이번 작품의 스릴을 배가시키고 뭔가 엄청난 반전을 미리 포석하는 뜻으로 다가 옵니다. 스티브 킹은 "과거로의 여행" 을 위한 이번 작품을 위해서 많은 사전준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1958-1963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역사적 배경, 당시 유행이었던 패션과 말투 그리고 가치관 및 자동차를 비롯한 생활필수품등 겪어야 하는 모든것에 대한 자료들)와 역사성있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 및 신문기사등등(요게 약간의 신빙성을 더하는 효과를 독자들에게 느끼게해 주면서 향수와 더불어 마치 과거속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오는 역활을 합니다) 그야말로 과거로의 여행 그 자체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막상 현실이 힘들어 과거의 행복한 시절로 가고 싶다는 막연한 매러리즘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기도 합니다. 흑인전용 버스자석과 호텔 심지어 화장실까지 버젓이 존재했던 인종차별의 시대는 이런 반증의 하나이기도 하고요. 참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전작인 <언더 더 돔> 과 같은 메인주가 배경이라는 점에서 약간은 반갑기도 하구요.

 

이번 스티븐 킹의 신작 <11/22/63> -아직 1권만으로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요- 는 여하튼 전반적으로 스티븐 킹이 왜 세계적인 이야기꾼인가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뭐 누구나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관한 작품을 쓸 수도 있고 출간도 되었지만 스트브 킹만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1958년인지 2011년인지 오락가락하게 할 만한 작품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탄탄한 내러티브와 마치 과거에 살고 있다는 착각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설정과 그 설정들을 뒷받침 하는 실감나는 배경등에서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 같네요. 과거는 신선한고 애잔하고 인정이 넘치고 사람맛이 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과 정반대의 가치관이 존재했던 다소 암울한 곳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해서 마냥 향수 짙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을 경고하는 듯 하고요"만취행 급행열차를 타고 제정신의 도시를 떠난 상태" 라는 표현처럼 최종 결말이 무엇보다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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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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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은 오르한 파묵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처녀작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을 통해서 파묵은 터키의 근현대사를 일개 개인사와 절묘하게 오버랩하여 터키의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는 터키인이던 아니던 간에 터키를 이해할 수 있는 첫발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두번째 작품은 <고요한 집> 과연 첫번째 작품에 비해서 어떠한 스타일로 집필되었을까 궁금해지죠.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파묵 스타일' 다운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럼 '파묵 스타일' 이 뭘까?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 그리스도문명(서양문명)과 이슬람문명(동양문명)이 상존해온 역사적 운명만큼이나 터키의 근현대사는 다양한 이념과 메카니즘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런 혼재된 다양성들이 오히려 파묵의 작품이 획일성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했다고 사료됩니다.  파묵은 자신이 살아왔던 치열했던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담론들을 작품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개개인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혼합함으로써 그 존재론적 가치를 부각 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이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이던, 혁명을 꿈꾸는 공산주의자던 혹은 아메리카 드림에 목말라 있는 현대자본주의 지향주의자든간에 그들 개인이 한번쯤은 생각하고 갖고 있을 법한 삶을 내러티브속에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또한 그들의 삶의 지향점이 사랑이던, 혁명이던, 이상이던, 허영이던간에 그들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 그 자체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면서 마치 신문 기사를 아무런 감흥 없이 읽어나가는 것 처럼 대하게 하는 것 역시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요. 바로 이러한 점들이 파묵의 작품에 빠지게 하는 유니크한 점이기도 한 것이죠. 그냥 거대한 파도에 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저항하는 돗단배같은 느낌들(작중 메틴의 암산능력을 가늠케 하는 두자리수의 곱하기 암산문제에서 맞는 답도 있고 틀린 답도 있지만 그 누구하나 그 정답의 正誤에 대해서 확인하려 들지 않는 다는 점)과 커다란 패러다임속에서 자신들만의 소소하지만 소중한 가치관들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밀알같은 개인들의 삶이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파묵 스타일이지 않을까 싶네요.""

 

<고요한 집> 은 한 가족의 가정사에 얽혀 있는 비밀을 아흔의 노파와 그의 손자들 그리고 또 다른 핏줄의 시각에서 각각 다르게 바라보는 저 마다의 이야기들를 다층적이면서 1인칭화자 시점으로 구성하여 마치 각각의 장에 해당하는 내러티브들이 별개의 이야기로 들리는 듯하면서도 결국 할아버지-아들-손자로 이어지면서 끊을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처럼 이들 다섯명 화자의 내러티브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묘한 스트럭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이 6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대하역사 드라마라면 <고요한 집> 은 이런 세월들을 단숨에 압축한듯안 1주일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의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미니시리즈라고 볼수 있죠. 약간 갸웃뚱 할 수 도 있지만 전작을 읽어 본 독자라면 이러한 제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거라 생각 드는군요.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은 제목처럼 참으로 고요하기 그지 없습니다.(뭐 이 양반 작품이 거의 다 고요한 편이지만요^^) 마지막 결말에서 공산주의자 닐귄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외에는 그 어떠한 서스팬스나 파토스 없이 진행되고 있어 약간은 지루한 진행에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구요(근데 이런한 파토스 없는 서사 방식이 바로 '파묵 스타일' 중 하나이기도 하죠^^). 사실 이러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후엔 발표된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흐름의 강도이기도 하지만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적 배경에 비하면 유독 더디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더딘 진행속도가 왠지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혹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아슬아슬함 처럼 다가오는 것 역시 파묵의 교묘한 설정들 속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삼대에 걸친 역사적 흐름의 키를 가지고 있는 파르마(왠지 전작인 제브데트씨의 부인인 니갼을 연상케하죠)와 터키 굴곡의 역사를 연구하는 파룩(파묵 자신을 보는 것 같구요), 급진주의자인 닐귄(파묵의 여동생 같습니다)과 하산, 아메리카 드림을 꿈구는 메틴 그리고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난쟁이 레젭 이들 각각의 영역들이 별개의 스토리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지만 전체적인 내러티브상에서 서로 얽히고 얽혀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저 마다의 이야기들을 다층적이면서 1인칭 화자 시점으로 구성하여 마치 각각의 장에 해당하는 내러티브들이 별개의 이야기로 들리는 듯하면서도 결국 할아버지-아들-손자로 이어지면서 끊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처럼 이들 다섯명 화자의 내러티브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묘한 스트럭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스트럭쳐가 파묵만의 고유한 구도는 절대 아니지만 왠지 파묵의 작품이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어울리는 작품의 구도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는 거죠.(이는 비록 형식은 다인칭적인 화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크게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보는 듯한 착각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들이 거대한 시대적 담론과 그 속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필수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사유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한결 정갈한 맛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매번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대하면서 익싸이팅하거나 반전을 기대하는 입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어떻게 보면 상당히 정적인 작품들을 대면하게 되지만 오히려 이러한 파묵의 작품세계가 리얼타임으로 꼭 무엇인가 눈앞에서 해결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의 사유구조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아서 한결 마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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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막상 책을 덥고 인터넷 포탈싸이트에서 검색해 보니 정말 엄청난 작품이더라구요. 물론 책을 접하면서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정도로 유명한 작품인지 몰랐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문학작품에 대한 저의 무지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전쟁을 모티브로 한 수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캐치-22> 만큼 그 속내를 적나라하게 서사한 작품은 없으리라 여겨질 정도로 조지프 헬러는 '전쟁' 에 관한 모든 것을 솔직담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아마도 너무 솔직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기도 하지만요). 전쟁과 국가 그리고 사실상 전쟁과 가장 관련성이 깊은 개인(직접 참여자인 군인인 개인과 간접 참여자인 민간인을 망라하여)들이 느끼는 전쟁의 본질과 그들의 심리상태를 유머러스하게(실상은 상당히 슬픕니다) 표현한 블랙 코메디처럼 가볍게 다가오는것 같지만 실상 이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담론은 정말 많은 점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담론보다 오래되었고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듯이 인류와 전쟁은 같은 행보를 해왔습니다. 규모면에서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지금도 세계는 각종 전쟁속에서 살아가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각 문명권의 신화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은 문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기도 하고 몰락의 길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하죠. 이렇듯 전쟁은 인류가 표방할 수 있는 가장 공식적이고 면피적인 면를 가지고 있는 동종몰살 프로그램으로 우리 인류은 지구생태계 타종이 개발하지 못한 잔학성(지구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그 어떠한 종들도 동종끼리 몰살하는 프로그램은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 우리 인류는 독보적인 존재(흔히들 거룩하신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고 하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잔혹한 종이기도 합니다)을 대의명분이라는 그럴듯한 정당성으로 포장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의명분이라는 대 가치관속에서 모든것이 희생되어지고 혹은 동일시(면제되는) 되는 전쟁의 역사는 그야말로 우리 인류의 치부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구원이기도 한것이죠. 

 

<캐치-22> 는 제2차 세계대전을 무대로 이탈리아의 피아노사라는 섬의 미 공군부대 기지를 무대로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서사하고 있습니다(참 여기서 피아노사섬은 작품의 무대와는 정반대로 아주 작은 섬에 지나지 않지만 독자들에게는 아주 거대한 섬으로 인지됩니다. 아마도 작가는 전쟁이란 바로 이런 착각 즉 의도된 착각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은 의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갖게 하구요). 전쟁의 모든 것이 장군승진이라는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장병들을 사지로 내모는 캐스카드 대령, 전쟁을 통해 부를 획득하고자 하는 마일로, 민간인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살해하는 알피, 대인기피증에 걸리수 밖에 없는 메이저 메이저 그리고 미칠수 밖에 없는 요사리안, 몸을 팔아야만 생을 이어갈수 밖에 없는 창녀들 이렇듯 <캐치-22> 는 전쟁이라는 매게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인간군상들의 면모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작품의 스트럭쳐 역시 내러티브만큼이나 특이한데요 각각의 쳅터 마다 대표인물을 명시해 놓고 있지만 막상 서술되는 내용들은 대표인물과는 거리가 먼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요 등장인물들의 대사 역시 축약형 버전으로 처리해서 꼼꼼히 읽어봐야 그 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 19금을 방불케하는 속어, 정사 묘사등 상당히 유니크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찾을래야 찾을수 없을 만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비정상적이지만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묘하게 상호 연결하여 스토리를 꾸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은 미치지 않고는 정상적인 형태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력한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열병식에 완전히 맛이 간 세이코프 처럼 인간들을 일렬종대로 길게 세워놓고 그렇게 세워 놓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단하나 쉬지 않고 서술해 나가는 구조가 다소 의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전쟁이라는 자체가 인간군상들을 배제하고는 말할 수 없듯이 작가는 이러한 인간들 이야기속에 전쟁과 국가, 경제, 사회, 인간이라는 패러다임을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누구도 전쟁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듯이요

 

'국가의 명예와 인간 개인의 존엄성' 이라는 담론 사이에서 과연 전쟁은 누구를 위한 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담겨있는 작품으로 비록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흘러간 과거의 전쟁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 그리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전쟁에 대한 서사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일로 대변되는 '국가관' 는 향후 전개될 국가관과 상당히 일맥상통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얼마전 접했던 오르한 파묵의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나오는 국가관과도 사뭇 다른 형태(물론 동서양의 차이점이고 하지만요)를 띄고 있어 극상의 자본주의시스템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네요(그리고 실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요).

 

굉장히 무거운 담론들을 가장 유치하게(아마도 작가의 의도인 듯 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엄청나게 크고 공식적인 명분들이 실상 속내를 들여다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딱 합당한 서사들 역시 유치할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가장 치부적인 면을 가장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더이상 특별한 의미의 서사로 풀어간다면 작가가 주장하고자 하는 담론 그 자체가 힘을 잃어버릴것 만 같은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표현들, 인물들의 심리상태등이 전쟁의 비참함을 그대로 전달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 절로 들게 합니다. 사족이지만 오래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지중해> 라는 영화가 연상(물론 미군도 아니고 이탈리라군대가 주인공이지만 전쟁의 실상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습니다)되어지고요 특히 <포트리스> 는 이번 작품과 계속해서 오버랩되더라구요. 이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화 되었다고 하는데 국내엔 소개가 되지 않았은것 같아 아쉬움을 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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