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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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농담을 한낱의 조소나 우스개 소리 정도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고 세인들에게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네는 별의미 없는 소일거리의 일종으로 받아 들여지는게 보통이죠. 그래서 농담이 가지는 질량적 위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가벼움으로 남기에 어디에서 누구와 부담없이 발설할 수 있는 가벼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농담>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일반 보편적인 뉘양스와는 사뭇 다른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엄청난 차이를 주는 또 다른 농담을 접하게 됩니다. 오히려 '농밀하다', '걸쭉하다' 라는 표현이 가져다 주는 의미에 더 가까울 정도의 질량적 무게감을 한 없이 극대화 시키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왜 밀란 쿤데라는 이러한 작품에 <농담> 이라는 현판을 걸었을까? 이번 작품을 읽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점이 바로 이 점이고 작품을 다 읽고 머리속으로 한번 정리하면서 <농담> 이라는 현판의 제의미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농담> 은 체코사회주의 시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파토스이자 분신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강해게 전해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별로 접해보질 못해서 그의 작품세계나 사유 그리고 서사적인 부분에 대한 왈가불가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이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보다 더 뇌리속을 파고드는 질량적 부담감을 주는 작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하네요.

 

   잘나가던 한 남성이 어느날 갑자기 연인에게 던진 농담같은 지극히 가벼운 멘트하나로 인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고 끝내 보장된 인생에서 강제적으로 일탈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복수와 증오를 다룬 치정극 정도로 마감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체코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일련의 사유들을 덮어놓으므로서 새로운 스토리극으로 탈바꿈시켜 버립니다. 극히 질량적으로 가벼운 스토리를 끝없이 무거운 스토리로 돌변해버리는 것이죠. 붙임이 많았던 체코의 역사와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작가의 견해 그리고 이로 인해 구속되고 연결될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부가하면서 내러티브 자체를 걸쭉하게 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이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점은 밀란 쿤데라가 극히 개인적인 문제(사랑,애정,증오,복수)와 체코사회주의등을 비롯한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상당히 고급스러운 장치적 설정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측면을 서사하면서 단순한 연대기식이나 사건중심적 서사방법이 아닌 체코 전통음악이나 '왕들의 기마행렬', '전통 결혼식' 등 상당히 부드럽고 가벼운 소재를 통해서 체코의 역사를 현대(사회주의 공화국체제)에 이르기까지 서사하면서 질량적 가벼움의 형식으로 무거움을 멋지게 소화해내는 설정이 가히 압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각부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화자들을 통해서 전자와 정반대의 기법으로 개인들의 삶을 서사하는 방식이 서로 대립되면서 또한 융합되어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농담처럼 가볍게 하고 동시에 걸쭉하게 끌어간다는 점에서 밀란 쿤데라가 아니면 어느 누가 창작할 수 있을까라는 감타사가 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서사적 기법자체가 독자들에게 <농담> 이라는 제목을 이해하는데 일견 도움이 될 뿐더러 작품 전반에 대한 애착을 같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읽어던 몇몇 작품에서도 그 특유의 섬세한 서사들을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한번 엿 보게 합니다. 옷걸이, 책상, 탁자, 침대,의자등 거의 무시해도 될법한 소품들에 대한 표현들이 엄청나다는 것이죠. 그냥 지나가도 될법한데도 밀란 쿤데라는 이들 소품에 상당히 깊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눈과 머리가 아플정도로 꼼꼼하게 챙기게 합니다. 물론 결국 이러한 소품들에 대한 서사가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절묘하게 화합하면서 작품 전체를 더 감칠맛나게 하는 역활을 수행하는 것이죠. 또한 성애의 묘사부분 역시 노골적인 표현이 일반화된 요즘같이는 않더라도 독자들 머리속을 파고드는 야릇한 애로시티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재된 노출수위가 가져오는 패티시즘적인 성애적 표현이 많이 인상에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루드비크,헬레나,야로슬라프,코스트카 라는 화자을 통해서 당시 자신이 처해있던 체코사회주의 국가의 이율배반적인 국가정치체제, 그 체제속에서 갈등하는 지식인들의 삶 그리고 사랑과 애정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이르는 전반적인 문제들을 열거하고 상당히 위험한 수위의 사유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화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자전적 사유를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죠.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와 정치적 갈등이 아마 이번 작품속에 그대로 예견되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구요. 하지만 달리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독자들은 작품속을 관통하는 큰틀을 체코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로 파악할수 있으나(작품속에서도 작가를 대변하는 등장인물들이 바라보는 시각도 얼핏 그렇게 비쳐지구요), 이러한 비판적 사유속에 은근히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담고 있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야로슬라프라는 인물을 통해서 작가는 붙임심한 체코역사에서 나름의 자부심을 되찾고자 했으며 코스트카를 통해서 종교와 사회주의라는 양립할 수 없는 구도를 재정립하는등 상당부분에 걸쳐 체코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줍니다. 이 역시 앞선 서사기법과 매칭되면서 언뜻 들어나지 않는 사유로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이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도 들게 하구요. 마치 철저하게 작정하고 기획되고 설정되고 연출되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가벼운 스탠딩 농담을 보는 듯 하다가도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장중한 대서사시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게 하죠. 

 

   참 그리고 헬레라의 등장이라는 묘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수없는 문제이죠. 다소 헤퍼보이면서 열정적이고 메조히스트적인 성향의 극단의 성격 소유자(농담으로 대변되는 가벼움과 그 이면의 또 다른 무거움)로 묘사되고 있는 부분 즉 뭐랄까 작가는 헬레라라는 인물들 통해서 이번 작품에 서사되고 있는 상반된 개념들을 한데로 모아 표출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제목의 농담처럼 그 끝맺음이 딱 어울리게 보이는 묘사들 변비약을 한통 다 먹고 변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 엉거주츰한 걸음걸이 등등  작가는 헬레라의 죽음 일보 직전의 과정을 통해서 뭔가 커다란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혁명)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한다."

   아마도 이 두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작품 전반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적인 의미의 공간과 공적인 의미의 공간 모두 다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 강하게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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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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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시다 슈이치는 이번 <원숭이와 게의 전쟁> 을 출간하면서 "지금 보이는 게 아니라, 지금 보고 싶은 것을 썼습니다" 라는 말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평을 했습니다. 아주 짧막한 멘트이지만 이번 작품을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정말 가슴에 와닿는 표현이다라는 생각 절로 들게 하는 정제화된 멘트로 여겨 지네요. 사실 이번 작품을 대하기 전까지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를 알지 못해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적절한 평을 할 수 는 없지만 이번 작품만으로도 왠지 '희망의 메신저' 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는것 같습니다. 대게 소설 작품이라는 것이 특히나 지금처럼 온,오프라인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도출되는 출판환경에서는 독자들의 눈에 하나라도 더 띄기 위해서 내러티브를 과장하게 되고 다양하고 숨막히는 장치적 설정을 동원해서 독자들의 뇌리에 한방에 주입할려고 하는 임팩트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이번 작품은 약간은 트랜드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잔잔한 작품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이번 작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수 있는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일본의 전래동화 '원숭이와 게의 전쟁' 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작품에서 표방하는 가장 큰 플롯은 루저들의 희망 찬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러티브는 보기에 따라서 뻔한 스토리의 전개에다 약간의 반전이나 서스팬스를 가미한 전형적인 '권선징악' 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마냥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치부할 수 없는 점이 있다면 다름아닌 능동적인 루저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동안 우화나 동화를 통해서 지켜본 루저에서 윈너로 변모해 나가는 과정들은 한결같이 개연성에 기인하여 탈바꿈하는 것이지 루저들의 자체의 의지나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이번 작품 역시 이러한 수동태의 동사형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작품에는 능동태라는 동사형의 힘이 보이는다는 점에서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넓은게 아닐까 싶네요.

 

   자칫 뻔한 내러티브로 갈 수 있는 부분을 약간의 추리와 서스팬스 그리고 유머와 코믹을 가미하면서 스토리를 알차게 구성했고 독자들에게 단순한 희망을 제시하기 보다는 왠지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느낌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신데렐라가 되었있었다라는게 아니라 세세하게 신데렐라로 가는 여정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독자들은 절로 수긍하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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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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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전역을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했습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이후 미국이 외부세력에 의해 공격받은 적은 없었고 특히 미국 본토에서 그런일이 발생할 것이란 상상은 할수조차 없었기에 그 충격을 더 컸던 것이었죠. 물론 이 9.11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충격의 도가니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십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미국민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는 행동들이 뚜렷하게 남아있죠.(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파렴치한 행동을 묵인하는 행태등) 그리고 전 세계는 강요되었던 자발적이던 혹은 연출에 의거해 연기를 하던 9.11사건에 대한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게 되죠. 뭐 아직도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고, 엄밀하게 말한다면 미국측(혹은 제1세계 선진산업국을 주연으로 하고 기타 떨거지 조연국들 앙상블로 하는) 시각이 좀더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미국측 시각으로 인해 이슬람 전반에 대한 시각 자체가 부정적으로 점철되었고 호의적이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대세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뻔한 사실이니 굳이 언급치 않겠습니다. 대체적인 이러한 시각들이 실상은 우리의 눈에 백태를 씌우게 되었고 우리는 이런 백태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에 익숙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죠.

 

   이런 면에서 모신 하미디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는 바로 제대로 말 못한 9.11에 대한 담론 (이슬람을 포함한 제3세계와 일부 지각있는 자들의 시각) 을 풀어놓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품고 있는 폭발력은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히 어디서 세계경찰국가가 정의를 내렸고 집행이 완료된 사건 (미국을 추종하던 추종할수 밖에는 없는 분위기에 들러리를 하던 간에요) 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하는 행위를 아무리 곱게 봐줄려고 해도 그리 녹녹치 않는니까요. 또한 그동안 우리 눈을 가려왔던 백태가 벗겨지고 제대로된 시력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절로 눈길이 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작가는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약간의 트릭을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자' 라는 뉘양스가 가져오는 의미가 남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이슬람 과격분자라는 부정적인 뉘양스가 지배적으로 떠오르지만 막상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굉장히 월가적인 스탠다드에 가까운 근원적인 느낌으로 살짝 변질되면서 제목이 가져다 주는 이중성에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죠. 특히 전자의 뉘양스로 받아들인 독자들이라면 내러티브의 밋밋함에 다소 김이 빠지기도 하죠. 하지만 작가는 바로 또 다른 트릭을 설치해서 밋밋하게 흐를수 있는 내러티브에 밑간을 칩니다.


   바로 에리카와 찬게즈의 동서양 남녀 러브스토리를 깔아 놓은 거죠 (참 이부분이 전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서사라고 보여집니다.) 얼핏보면 작품의 성격이 너무 정치적 색깔이 짙다보니 다소 딱딱한 플롯에 에리카와 찬게즈라는 동서양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덧대어서 분위기를 다소 가라 앉혔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전 개인적으로 에리카와 찬게즈의 사랑이야기가 본 작품의 숨겨진 결정적인 부비트랩같은 설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찬게즈라는 동양적 담론이 에리카라는 서양적 담론에 손을 내밀지만 응답없는 메아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현세계의 정치적 구도에 빗대어 놓은 대단한 서사로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달리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왠지 이들의 사랑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처음부터 불행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강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스트럭쳐로 인해서 상당히 도발적이고 딱딱한 느낌을 완화하긴 하지만 결국엔 찬게즈(동양적 담론을 대표)에게 고통을 안겨주긴 마찬가지인 것이죠. 작가는 오히려 찬게즈의 9.11사건을 화면을 통해서 보면서 측은지심이 아닌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는 직접화법보다 찬게즈와 에리카의 러브스토리가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가 오히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가 정치적 담론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순수정치 소설로 보기 힘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신 하미드의 절제되면서도 유니크한 서사들이 독자들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푸근한 향이 느껴질 정도로 살아 숨쉬고 있어 전체적인 모티브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 그 경계성을 무너뜨리면서 로맨스 (정치적 담론과 무관한 부더러움이라고 해야할까요) 를 상상케하는 묘한 느낌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정말 독자들의 판단의식을 주저하게 하는거죠. 


   전반적으로 모신 하미디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는 읽는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이 느낌을 가져올 작품으로 보입니다.(저 개인적으로는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제대로 까발렸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지네요) 좀더 우측의 프리즘을 가진 독자층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불쾌한 느낌을 가져올 것이고 이와 반대측면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심년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것이 때문이죠. 아마도 이래서 더 주목받는 작품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뭐랄까 추리스릴러 장르와 전혀 무관하지만 작품이 끝날때 까지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들뜨게 한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불안증세도 양측의 시각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것으로 보입니다. 한쪽은 이 놈의 찬게즈가 결국 미국 정보요원에게 제거될 것 같은데 언제쯤일까라는 그리고 다른 한측은 찬게즈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는 미국인이 그저 여행객이길 바라는 심정, 결국 작품이 엔딩을 고할때 까지도 독자들의 불안증세를 제거해 주지 않는 스릴러 기법이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설정이 지금 현재 동서양의 불안한 정세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한층 더 작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도 하죠. 작가는 물론 어느측의 시각이 옳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죠. 그저 이렇게 달리 볼 수 있는 시각도 있다는 점을 보다 직접화법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직접화법이 상호의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점도 보여주고 있고요.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는 작품이지만 번역가의 표현처럼 미니멀리즘의 표본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네요.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면서도 정제된 서사 하나 하나가 정곡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모신 하미디의 작품세계가 왠지 국내 독자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가져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강하데 들어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이 동서양이 충돌하는 담론을 소프트하게 융화시키고 있는 서사의 대표라면 모신 하미드의 작품은 동서양의 충돌자체를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서사라는 점에서 묘한 대비와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파묵은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하미드는 강한 악력으로 악수하는 듯한 서사들이 상당히 대조적이면서도 결국 파토스를 끌어낸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아마도 오르한 파묵에 뒤이어 동서양문화권의 화합을 대변하는 작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족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책의 뒤편에 표기된 '시카고 트리뷴' 등의 유명한 서평들이 왠지 의아한 느낌을 줍니다. 그네들의 가식인지 아니면 이런 도발적인 근본주의자를 보란듯이 품에 안을수 있다는식의 포용력인지 아리송하지만 제 눈에는 왠지 가식으로만 보여진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저부터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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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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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열광하는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열한 팬중에 한 사람으로서 매번 그의 신작을 대할때마다 가슴 두근거리는 점을 피할 길 없습니다. 흔히 추리스릴러장르의 작품들이 표방하는 제 1원칙은 기발한 사건의 발생과 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해결사로 하여금 사건 해결의 추리를 연역적이 되었던 귀납적이 되었던 해결해 나가는 과정과 마지막 결말부분에 도착할쯤에 한방 터뜨리는 대반전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의해서 내러티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속된말로 뻔한 스토리에 뻔한 전개 그야말로 금새 식상해지고 이런 독자들의 눈을 잡기위해 억지스러운 내러티브와 추리를 꼬고 꼬아 지면만 늘려가는 악순환을 작가들 스스로 두게 되었습니다. 뭐 지금도 이런류의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존 추리스릴러 장르라는 개념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기본적인 툴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작품세계는 일반대중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독자를 직접 내러티브속으로 끌여들어 한 부분으로 인식할게끔 하는 흡인력등에서) 그 격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그의 작품속에는(특히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에 유독 많이 보입니다) 사건 중심이 아닌 휴머니즘을 다룬 인간 본연을 중심부에 설정하고 있다는 점과 이러한 이슈가 사회적 공감대를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강력한 매력이자 유니크한 설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가와 독자의 연결고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어 그의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2. 그리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에 왜 다시 열광하게 되는가?

   이번 작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은 어떻게 보면 고개가 오른쪽으로 쌀짝 기우는 감이 있는 작품입니다. 더구나 그동안 꾸준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어 왔던 독자라면 더욱 더 갸우뚱해지는 작품이죠. 그동안  작가는 물론 추리스릴러소설의 격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그래도 정통 추리스리럴 소설의 원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작가 특유의 내러티브를 창조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갈등,사랑,분노 등의 감정을 시대상황과 절묘하게 배치함으로써 단순한 사건해결의 차원을 뛰어넘어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사유와 인간과 사회가 고민해해야할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정말 인간미 넘치는 그런 작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동안 자신의 작품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작품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될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특별한 이슈되는 사건도 없고 이런 이슈가 없다보니 이를 해결해 가는 가가나 유가와같은 해결사도 존재하지 않는 밋밋한 내러티브로 언듯 보입니다. 또한 언뜻 보면 타임머신이라는 시간여행이 주모토가 되어 그 동안 많이 울겨 먹었는 소재를 차용한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구요. 전체적으로 봤을때 왜 잘나가는 양반이 이런 작품을 구상했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게 합니다. 물론 그 동안 그의 작품속에 빠져들었던 독자들이라면 더욱더 의아해할 수 있는 그런 쇼킹한 작품이라는 반증이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우리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번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재성과 탄탄한 내러티브의 향연을 맛보게 된다는 점이 우리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작품은 번역자도 개진했듯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 싶은 그런 작품이라는 말에 절로 공감이 갈 정도로 붉은색(핏빛이나 살인사건등의 추리물의 메타포) 하나 보이지 않고 있으면서 추리기법을 원용하여 작품을 재구성하는 맛이 감칠날 정도로 독자층의 폭이 확대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작가의 전매특허인 교묘한 추리기법은 이번 작품에서도 완전히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책장을 넘나들게 만들면서 독자들 나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이슈되는 사건은 다름아닌 쌩뚱맞게 등장하는 과거와의 상담편지가 될 것이고 사건의 해결사는 나미야 잡화점 그 자체의 공간과 덜 떨어지는 3인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미야 잡화점의 비밀과 아동보호시설인 한광원을 기점으로 서로 시간과 공간을 씨줄 날줄로 엮어서 진행되는 숨막히는 내러티브와 마지막 부분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부닥치는 마지막반전등 기본적인 추리소설의 스트럭쳐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비틀스라는 로망을 양념으로 가미함으로써 독자들의 눈을 잠시 흔들어 놓기도 하죠. 이렇게 보면 전형적인 하기시노 게이고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죠.


   뭐 손에 땀을 쥐면서 머리를 쥐여짜며 작가가 설치해 놓은 온갖 부비트랩을 해체해 나가면서 나름의 추리를 세워 범인과 사건해결에 골머리를 썩여가야만 추리소설를 제대로 읽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작품은 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읽는 내내 조마조마 하는 감정, 그리고 내심 기대심리가 발동하게 되고 한편으로 안타깝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가슴을 쓰러내리게 하는 인간 여정의 드라마를 다 보여주고 있어 그 어떠한 추리소설보다도 열중하게 되고 독자들을 흡입하게 되는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번 그의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이러한 메세지를 찾아내는 것 역시 그의 작품을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키는 것 같습니다. 어뚱한 결과로 상담사 역활을 하게 되는 야스야를 비롯한 삼총사 청년은 그야말로 궁상맞기 짝이 없는 실패한 인생에 비유되는 인물들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루저' 라고 해야겠죠. 독자는 바로 이런 루저들을 통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전기와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찌찔이 같은 인생에 타인의 인생 고민을 상담해준다는 설정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전 지금도 지금도 나미야 유지가 마지막 편지에서 언급한 백지인 지도에 대한 서사가 머리속을 자꾸 맴도는데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바로 그 메세지이지 않을까 싶네요. 

 

3.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은 휴머니즘과 추리가 앙상블을 이루는 기적같은 작품이다.

   스트럭쳐면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사뭇 다른 서사를 보여주고 있지만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사유는 '휴머니즘의 발견' 이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큰 맥락에서 벗어 나지 않고 있네요. 오히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런 사유의 총체적 결정판이라고 봐야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커다란 임팩트 없이 잔잔하게 전개되는 내러티브속에 실상은 그 어떠한 추리물보다 강력한 메타포가 담겨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즐거기만 한 것이죠. 이 만큼 잔잔한 스토리로 쓰나미 같은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은 접해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한마디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은 말 그래도 기적같은 작품이라고 보여지네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색다른 변신이 낳은 또 하나의 기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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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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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왈츠> 는 얼마 읽어보질 못했지만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막간의 즐거움을 느껴 봤지만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진정으로 알게 해 주는 작품은 다름아닌 <이별의 왈츠> 이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드네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그리고 <정체성> 이라는 작품에서도 이미 한번 겪어 봤듯이 쿤데라는 남녀간의 사랑, 애증, 증오, 배신 등의 극히 평범한 소재를 자신의 작품속에서 뭔가 색다르게 변모시키는 대가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구요. 이번 작품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벋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트럼펫 주자 클리마가 작은 온천도시를 방문하고 난 후 벌어지는 루제나의 임신소동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클리마의 노력 그리고 아이를 낳기 위한 루제나의 집념이라는 극히 세속적이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러티브가 주를 이루는 애정소설같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하나 둘씩 등장 (사실 독자들은 그저 소설의 완성을 위한 등장인물이거니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 또한 쿤데라의 주도면밀한 장치적인 설정임을 책을 읽어 갈수록 실감하게 되죠. 그리고 이러한 설정들이 전혀 억지스럽다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쿤데라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면서 내러티브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인간 내면 특히 남녀 간의 이질적인 감정의 변화와 그 원천에 대한 서사가 작품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해 버리기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 슈크레타의 친구인 야쿠프의 등장과 파란 독약과 루제나의 신경안정제가 뒤섞이면서 내러티브 자체가 극적인 반전을 향해서 돌진하게 됩니다. 사실 그 동안 클리마와 악단 단원들의 음모(낙태) 루제나와 동료 간호사의 도발(출산) 이라는 다소 밋밋한 대립구도가 갑자기 클라이막스를 향해 돌진 하는 3' 브라더스의 콘서트 연주곡의 진행처럼 청중과 독자들의 호흡을 가쁘게 몰아가는 것입니다. 자칫 극히 천박스럽고 세속적이면서 통속적인 연애소설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쿤데라는 여기에 인물심리묘사라는 히든 카드를 제시하면서 급반전을 시도하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적인 묘사가 가희 일품이라고 할만한 작품입니다. 뭐 남성들이라면 (아니 여성들 입장에서 바라본 입장도 매한가지겠죠) 충분히 공감이 갈 수 있는 일련이 행위와 심리적 면피 발언과 자기 합리화등를 솔직 담백하게 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고 작품을 읽으면서 왠지 남의 이야기가 아닐수도 있다는 뭐 그런 생각들이 이번 작품을 다시 들여다 보는 동기가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히든 카드는 "매일까이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하나의 작은 전기쇼크 같다" 는  혹은 "기독교 신자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자기 남편의 부정을 믿는다" 등의 표현등을 통해서 정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쿤데라만의 서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혹자는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당시 체코라는 사회주의국가라는 정치적 담론등을 내세워 보다 폭넓게 그리고 무게있게 그 비중을 격상시켜려고 하는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크게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쿤데라는 작품을 통해서 문학적 한계성에 부딛치는 정치적 딜레마를 작중에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굳이 이 부분을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그 자체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을 뿐, 어떤 설명도 동기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는 표현에서 이번 작품 역시 가장 근원적인 인간 특히 남녀간의 애정과 사랑 배신에 집중해서 작품을 인식하는 것이 타당할듯 합니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아주 단순하기 그지 없습니다. 뭐 정말 특별하게 내세울 것 없이 티각티각대는 정도의 강도로 진행되지만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상당히 분위기가 변화를 겪게 되죠. 처음 일대일 남녀간의 문제가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가면서 보편적인 담론으로 확산되면서 내러티브 자체에도 다소 무게감이 들어가고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남녀간의 특수문제에서 인간 본연의 감성을 다루는 일반적인 모토로 전환되면서 남녀 성대결의 구도가 아닌 인간성 본연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죠. 참 단순한 남녀간의 스토리를 이처럼 철학적 차원으로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킬수 있을까라는 의아심도 생기지만 이 또한 쿤데라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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