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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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쪽에 관심이 많다보니 이번에 이한우의 <왕의 하루> 라는 역사 평설이라는 책이 눈에 띄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부제인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동안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라는 표현이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던군요. 뭐 그 동안 많은 역사서와 평설을 접하면서 뭔가 새로운 분야를 거론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던 가장 큰 동기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솔직한 표현으로 이덕일소장을 비롯한 몇분의 저작을 빼고는 그 내용이 그 내용인 평설들이 대부분이고 일회용으로 반짝하는 우려먹기식의 편집들이 넘쳐났던 것도 사실이죠. 그러면에서 이한우의 <왕의 하루> 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챕터에서 왕이 결정적인 하루를 회상하는 독백 부분이 왠지 기존의 평설과는 다른 분야를 거론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일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초 기획했던 이러한 부제와는 다른 방향의 서사들이었다는 점에서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질 않네요. 결국 기존의 평설에서 크게 일도약 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마지막 챕터처럼 왕과 관련된 특수성이 가미된 부분을 중심으로 풀어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게 합니다. 그래도 이러한 시도는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고요 대충 몇가지 언급해야할 부분은 따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서평을 올리는 것이니 저자나 다른 독자분들과 충돌되는 부분은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 눈에 띄는 서사들

무엇보다 이번 <왕의 하루> 에서 주목 받고 눈에 띄는 서사는 다름아닌 예종과 연산군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예종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군주였죠. 워낙 재임기간도 짧았고(물론 인종에 비한다면 길었지만요) 앞뒤로 쟁쟁한 군주틈에 끼이다 보니 태종태세문단세예성...으로 이어지는 암기의 대상으로만 남았습니다만 그가 아버지 세조가 이루지 못한 왕권강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공신들과 힘겨루기를 했다는 점(그것도 그냥 밀어부치기식이 아닌 자기나름대로의 페이스를 갖고 했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만 하죠)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제대로 뜻을 피우지 못하고 의문사했다는점(이덕일은 '조선 왕 독살사건' 에서 독살로 규정하고 있죠)을 사서에 근거한 추론으로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논거를 서사하고 있어 새롭게 조명 받아야할 군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순한 폭군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연산군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시각보다는 재임 초기의 왕권강화에 대한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점수를 주고 있다는 점이 그 동안 왜곡된 사관을 어느 정도 바로잡아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네요. 그리고 '문묘배향' 과정은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여기에 숨어있는 비밀을 소개했다는 점과 실록의 제작과정을 면면히 소개한점등은 실록과 사관이 미쳐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라는 취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다소 아쉬운 서사들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치세 그리고 인조반정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정조에 대한 평가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서사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요즘 부각되고 재조명 받고 있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및 치세에 대해선 싸늘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저에는 선조의 인물됨됨이와 인재발굴능력평가를 높이하면서 광해군의 인재정책을 폄하하죠. 특히 선조의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꿈을 아들 광해가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표현까지 하고 있습니다. 선조대에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재들이 활약했던 시기입니다. 이 말은 성종때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사림이라는 인재풀이 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이러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왕권의 정통성에 집착하면서 임란이라는 최대 위기를 자초했던 것은 선조의 무능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인조반정을 정당하게 보여질 수 있는 장을 열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광해군 치세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느낌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양대호란이란 치욕을 겪으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불성설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다른 표현이 생각나질 않습니다.권력을 위해서 같은 당파라면 나라를 팔아먹던, 들어서 먹던, 곤경에 처하든 간에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형태가 결국 인조반정이라는 요상한 일이 발생되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 무엇보다 영문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만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당쟁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서사되었다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선조나 인조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왠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정조에 대한 평가 역시 다소 노론지향적인 시각으로 보입니다. 공적인(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왕통계승과 선왕의 정치성을 되물림하여 치세하여야 한다는 중론등) 치세보다 사적인(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들) 면에 너무 집착했다는 점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을 거론하면서 홍국영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정조치세 전반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점철되었다는 뉘양스를 갖게 합니다.(하지만 정조의 치세기간이 닫혀있던 조선사회에 다양성을 열었다는 점에서보면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논조이죠) 결국 정조의 죽음 역시 이러한 점에 집착하다 자연사한 것이지 독사설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혜경궁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정을 숙대밭을 만든 홍국영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 없을뿐더러 극히 친 노론적인 서사(가문 전체가 노론의 핵심세력들이었죠)라는 점을 거론해야 제대로된 인식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김조순과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서 세도정치라는 불행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라고 했지만 실상 정조가 의문사하지 않았다면 발생할 수 없었던 결과론적인 표현이라는 생각만 들게 합니다. 물론 역사는 결과를 놓고 평가한다면 달리 할말은 없지만요. 그래도 이러한 시각 자체가 일반대중들을 호도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점에서 걱정스럽습니다.

 

전반적으로 당초에 좋은 취지와 기획으로 접근한 평설로 출발했지만 전체적인 역사적 시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비근한 예로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당초에 자연사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말미부분에서는 다소 한발 빼는듯한 서사는 시종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당초 기대했던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라는 부제와는 거리가 먼 보통의 역사 평설에 가까웠다는 점이  물론 마지막 챕터에서 즉위식, 가례, 경연, 묘호등 쉽게 접하기 힘든 분야에 대한 서술이 그나마 추가되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취지나 의도했던 기획에 비해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오타 오식부분이 제법눈에 들어와서 무엇보다 역사평설이라는 부분에서는 좀더 새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2013년 사자성어로 제구포신(除舊布新)을 선정되었습니다.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펼치자는 뜻 같은데요. 아마도 우리 역사학계에 만연된 사관에 딱들어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저자의 사관이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도는 높이 평가하고 싶어지네요. 이러한 기획물들로 인해 일반 대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좀더 역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종교와도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계사년 새해를 맞이하여 한국사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정책과 더불어 개인들도 좀더 열린마음으로 한국사를 대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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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장계 - 심양에서 온 편지,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소현세자 시강원 지음, 정하영 외 옮김, 이강로 감수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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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를 상고해보면 다 아시다시피 두번의 반정(뭐 서인들하고 인조의 입장에서야 반정인 것이고 당한 사람입장에서야 엄밀히 말하면 쿠데타겠지만요)이 있어죠. 한번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중종 그리고 뒤를 이어 광해를 몰아내고 깃발을 꽂은 인조가 있었습니다. 중종이야 후대인들이 알다시피 상당히 운좋은 사나이였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옹립되면서 왕에 자리에 올랐지만 인조의 경우는 중종과는 사뭇 다른 행태를 띠고 있습니다. 연산군이야 폭정(뭐 이에 대한 평가도 사실은 분분하지만요 대체적으로 연산군이 좀 심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을 거듭하면서 사실 대내외적으로 반정의 명분이 충분히 갖추고 있어지만 인조의 경우는 상당한 무리수가 있었죠. 그래서 말도 안되는 숭명배청, 패모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몸소 반정에 앞장서서 옥좌에 앉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말이 많은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key는 양대호란을 겪으면서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 라는 치욕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사에서 임금이 자기 앞마당을 뛰쳐나간 경우가 인조말고 임진왜란때 선조가 있었죠. 그래도 선조는 줄행랑은 쳤어도 인조처럼 대놓고 항복하진 않았죠(뭐 둘다 오십보백보이긴 마찬가지지만요) 그래서 후대인들에게 더욱더 무능한 임금으로 낙인찍였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인조라는 군주가 최악의 군주로 손에 꼽히는 것은 아들(소현세자)와 권력다툼(말이 권력다툼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의심의 발로였죠)을 하면서 죽음(다들 아시겠지만 독사설이 거의 맞을듯 합니다)으로 몰아갔다는 점이 더 그의 평가를 최악으로 하게되는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회복되기전에 다시 맞은 호란은 그야말로 조선이라는 배를 거의 수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가경제는 물론이고 민심의 이반 그리고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을 볼모로 머나먼 이국땅으로 보내는 대의명분의 추락을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심양장계> 는 바로 병자호란이후 심양으로 볼모살이하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훗날 효종)등의 살아있는 기록물입니다. 특히 세자 시강원의 관원들이 심양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장계형식으로 조선 본국의 승정원에 보고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진귀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이미 '조선왕조실록' 을 통해서 기록문화의 진수를 보여준 이들이기에 세자가 있는 심양에서 조선조정에 올리는 보고서는 그야말로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날 있었던 거의 모든 일을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심양 분조(뭐 분조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실상 對청의 외교적인 활동을 주관했다는 점에서 크게 틀린표현은 아니라고 보여져서 전 분조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의 활동사항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자일행이 영구 귀국하기 마지막 1년분의 기록만 없을 뿐이지 볼모로 가 있는 전기간에 걸쳐 심양생활의 모든 모습을 엿볼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심양장계> 는 이처럼 기록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당시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첨예하게 부딛쳤던 사안들(주로 병력의 지원, 병참의 지원, 전쟁통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환속문제등), 그리고 당신 조선과 청의 정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의 상세 명세, 전란이후 청과 조선의 역학구도와 조선의 경제상태등 많은 부분에서 당시대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열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양장계> 가 돋보이는 이유는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볼모생활을 하면서 심양분조를 이끌어었던 소현세자 사단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아무래도 군주 위주로 작성되었기에 세자시절(혹은 후계자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적을 수 밖에 없지만 심양장계의 경우 거의 군주에 준하는 수준으로 그 동태를 작성하고 있기에 실록에 배제되었던 소현세자에 대한 이미지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역사에 가정이 있을수 없지만 만약에 소현이 그대로 왕위를 승계했다면 조선 역사상 통들어 가장 많은 족적을 남기는 군주가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드네요(물론 소현이 왕위계승을 했다면 조선의 정책과 외교등 국가전반에 걸쳐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겠지만 단순하게 기록물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 의미는 상당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양장계에는 역관 정명수에 대한 힐난이 많이 보입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청나라에 붙어 각종 이권과 내정간섭에 일등공신을 하는 정아무개에 대해 다들 분개하고 있는 내용이 자주 보입니다. 뭐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이지만 어디까지는 이런 시각은 인조를 비롯한 쿠테타세력의 시각이지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속이 후련한 배신행위이지 않을까라는 씁쓸한 생각도 들게 합니다. 또한 심양분조에 활당되는 민생고 지원이 줄어들면서 직접 농업과 상업에 손을 대야만 했던 점들이 짠하게 다가옵니다(이런 와중에서도 인조는 정말 배부르고 등따시게 지냅니다) 특히 소현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왕 하는일 시강원 관리들과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농경기법에 대해서 논의 하는 장면들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러한 볼모생활이 오히려 귀국후 자신의 목줄을 조여올줄은 꿈에도 몰랐을테니까요... 또한 심양장계는 공식적인 기록이자 소현세자 개인의 사생활 역시 어느 정도 담고 있어 어름짐작이지만 당시의 소현을 재구성해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밑의 동생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귀국기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부부인까지 대동하게 하는 노력(비록 자신은 홀몸으로 조선을 다녀왔지만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훗날 봉림은 철저하게 세자빈 강씨의 애타는 손길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권력은 무섭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원손인 석철과의 이별 장면, 주전화와 주화파의 거두였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구제를 위한 다방면에 걸친 로비, 심양분조 인원을 감축하여 본국으로 송환하고 청국에 잡혀온 이들을 차출하여 관소인원으로 충당키 위한 조치(워낙 환속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큰 관계로 부득불 편법을 동원하게 됩니다)등 분조정부 차원을 떠나서 개인 자격으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국땅에서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는 현실에서 조선의 세자라는 직분을 십분발휘한 상태였습니다.

 

<심양장계> 는 인조조에 발생했던 양대호란이후(특히 병자호란)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실록상의 공식적인 분위기였던 반청 내지는 북벌의 고상한 이미지 보다는 얼마나 청나라에 굴복했는지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본토의 분위기는 심양분조와는 사뭇 달랐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 현실적인 판단이었고 실상의 모습은 공물의 숫자 하나에까지 미운털이 박히지 않도록 노심초사한 모습등에서 볼 수 있듯이 냉혹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일국의 세자가 직접 챙겨야만 넘어갈 수 있었던 외교적 마찰, 공물에 대한 검수, 군수지원 독촉압력, 포로해방, 본토 정책 변명(사실 장계를 보노라면 은근히 슬쩍 본국이나 심양분조의 관리들이 소현세자가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읽을 수 있습니다)등 그야말로 수치란 수치는 다 겪으면서 나름 슬기롭게 대처하는 심양분조의 활약상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소현세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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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 강의
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 김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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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상고하다보면 수 많은 영웅들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한 영우들중 우리의 기억속에는 항상 성공한 영웅들 그리고 그 영웅들이 만들어 낸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기도 하죠.(물론 역사라는 것이 승자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존재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한 영웅들은 실상 모래밭에 바늘찾기처럼 아주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쩌면 성공한 영웅들은 이런 실패한(이 표현 역시 후대의 우리가 일방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기준일 뿐이겠지만요) 영웅들을 반면교사로 탄생한 인물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역사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인물평은 거의 대동소이한 상태로 남아있지만 이들의 후광에 가려진 영웅들의 진모습은 과연 어떤것 일까요? 또한 어떻게 봐야 할까요? 중국 <사기>연구의 대가 왕리친의 <항우 강의>가 바로 그 해답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 최초로 탄생한 제국 '진'나라가 혼돈에 휩쌓이면서 중국은 다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돈의 시대를 맞이 하게 됩니다. 영웅의 탄생은 바로 이런 혼돈의 시점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이 시기 중국 대륙은 항우와 유방이라는 두명의 걸출한 영웅을 배출했고 한 사람은 제국의 수장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만고의 역적으로 자리 매김을 합니다. 우리는 바로 성공한 인물 유방이 아닌 실패한 인물 '항우' 를 통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항우의 인재병용 그리고 국가경영의 비전등을 살펴보면서 항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항우 강의> 는 사마천의 <사기>에 관한 독보적인 대가인 왕리친 선생이 집필했으면 중국전역에 방송된 교육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뒷부분의 에필로그를 추가해서 그야말로 항우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 옵니다. 항우의 탄생에서 성장과정 그리고 서초패왕에 오르고 마지막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기본적으로 <사기>라는 역사서를 근저에 두고 다양한 사서와 그 해석 그리고 저자만의 특유한 역사적 관점이 가미되어 있어 역사평설이지만 평전처럼 쉽게 이해될 수 있게 서술되었다는 점이 눈에 돋보입니다. 흔히 독자들에게 특히 국내 독자들에게 항우라는 이미지는 소설 '초한지' 에서 많은 부분이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처럼 초한지 역시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한 역사소설이지 정사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다소 아둔하고 포악한 힘만 천하장사이지 머리는 그야말로 텅빈 그래서 유방하고는 게임도 안되는 그런 인물로 기억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위나라의 조조를 간웅으로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물론 초한지의 이미지처럼 실재로 항우가 지혜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달인은 아니라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러한 겉모습으로 항우 자체를 판단해서는 안되겠죠.

 

이번 저서는 항우라는 인물에 대해서 본인 뿐 아니라 그의 참모진들 그리고 그가 참모진들을 이끌고 서초패왕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과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뭐 그러다보니 자연히 유방과 그의 주변인물들과도 상대비교가 아닌 비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항우의 본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평가한다면 항우는 분명 불세출의 영웅이었습니다. 특히 거록전투와 팽성전투등에서 보여준 군사전략과 용기는 라이벌인 유방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뛰어난 군사전략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패권싸움이라는 것이 군사적 지략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음을 항우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고 결국 승자의 자리를 유방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죠. 항우는 군사분야외에서는 그다지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액면(출신성분이나 인적자원등)자체에서 유방과는 비교도 되질 않을 많큼 우세에서 출발했지만 항우는 인재의 등용에서 적재적소의 배분등 인용술과 더불어 전체적인 숲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방의 경우 자신의 취약점을 참모들의 직언을 통해서 보완했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전략으로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항우는 상당히 자신감만 강한 매러니즘에 빠져 대사를 놓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보게 합니다.

 

전반적으로 <항우 강의>는 항우라는 역사적 인물(사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방보다 항우를 더 좋게 평가했죠)에 대한 시각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현대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담고 있는 자기개발서적인 측면도 강하게 보입니다. 전술적인 처세술의 범위를 뛰어넘어 삶을 살아가는 전략을 어떻게 수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수 없이 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항우를 배신하는 과정을 지켜볼때 과연 배신자의 잘못이 큰것인지 아니면 배신할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항우의 잘못이 큰것인지 한번쯤 깊게 생각해볼만한 일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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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8-2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의 소개로 구매해 놓고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서향님의 글이 제 구미를 자꾸 당기네요. 조선 왕을 말하다 2권을 읽고 있는데 이책을 다 읽으면 바로 항우강의로 넘어가야겠네요.
 
다시 찾은 한국고대사 해외 유적
신형식 지음 / 주류성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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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참으로 요상한 논리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현재 중국인민주의공화국 영토내에서 벌어진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의 모든 사건들(우리는 이를 흔히 역사라고 지칭하죠)을 자국사로 인식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뭐 어떻게 보면 일리있는 이바구라고 생각도 들겠지만 이런 논리의 잣대를 세계사에 접목시켜보면 상당히 황당한 경우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미대륙에서 번창했던 체로키나 이로쿼이 역사를 미국사로 편입시켜야 하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로마사 역시 영국, 프랑스, 터키 역사로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는 논리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이런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나 대중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은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고 자국사 확대 재생산에 나아가는 것일까요 아마도 작금의 중국 정세와 맞물려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됩니다. 흔히들 우리는 미국을 대표적인 다민족 다인종 국가라고 생각하고 중국을 우리와 비슷한 단일민족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중국 역시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을 뭉쳐놓은 국가라는 것죠. 오히려 미국이나 서방보다 그 연결고리가 아슬아슬하다보니 권력 통치적인 문제에서 많은 애로점이 있고 이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요상한 사관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중국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이 상당한 문제이기 하지만 이 보다 더 문제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강넘어 불경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있다는 것이 더욱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가만히 우리 학계나 정부의 대응논리 그리고 이들 펼쳐 나가고 있는 방향을 보면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러한 역사적 문제들이 불거질때 마다 접대성(대중 여론몰이 형식)멘트나 한 두번 날릴 뿐이지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대책 강구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네요. 혹자는 이런 자학적인 목소리도 있을 것입니다. 자국내에 수 많은 문화유산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하는데 해외에 널려 있는 문화유산에 어떻게 신경이나 쓸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고요. 전혀 틀린말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모르는 대중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진하게 접근한 적이 없으니까요. 경제개발논리에 묻혀 이러한 정신문화 강화에는 등한시 하였고 결국 이러한 결과는 어찌보면 자명한 이치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번 <다시 찾는 한국고대사 해외 유적>은 그런면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생각과 고민거리를 던져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상고사인 고구려,백제,신라,발해를 상징하는 고대사(부여가 빠진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합니다)는 사실 한반도내 보다는 한반도 밖(지금의 중국영토와 일본영토)에 더 많은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도국가라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 고대사는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치 못할 만큼의 방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구려사나 백제사의 경우 현존하고 있는 기록물이 적기때문에 고증에 대한 어려움은 있지만 고대사 부분에서 동북아시아의 맹주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정도 인지된 상태이지만 백제의 경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한구텅이에서 고구려와 신라틈에 끼여 눈치만 보던 기껏해야 문화적인 발달(그것도 좋은 표현이지 않을까 싶네요)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발달했고 일부 문물을 일본에 전수했다는 정도의 선에서 문화강국정도로 인식하고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해양강국의 백제의 면모 그리고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백제의 강한 면모를 고찰하고 있어 백제사에 대한 인식제고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한 죄로 그동안 찬밥 대우를 받았던 신라사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해외 고대사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적극적인 역사 인식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논리를 대중들 스스로가 펼칠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련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자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인식이 선행되지 않을 경우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을 경우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대륙과 섬나라 일본에 산재되어 있는 우리의 고대 유적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수록 우리 고대사 역시 하나 둘씩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다시 찾는 한국고대사 해외 유적> 은 상기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딱딱한 역사서 형식을 탈피해서 다양한 화보와 현장감 있는 사진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시각적으로 각인하는 효과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각 챕터 끝에 더 알아보기라는 코너를 통해서 세세한 부분의 역사적 흐름을 리뷰해 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깊이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사를 대충이라도 한번 집고 넘어갈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물론 저자의 발행멸망 원인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독자들도 많겠지만요, 물론 이러한 시각은 곳곳에 보이기도 하지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전체를 리뷰할 수 있는 뷰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네요)과 부록편의 역사적 이슈는 고대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되어 있어 도움이 많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시각으로 고대사를 통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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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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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한국사를 접할 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고대 상고사와 더불어 개항기, 조선멸망기 및 일제감정기를 아우르는 근대사를 손에 꼽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사 요소 요소에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지만 韓민족에게 가장 거대한 트라우마를 남긴 시대가 바로 바로 이 두 시기의 역사일 것입니다. 뭐 고대 상고사야 대한민국 학계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증사학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문헌이나 유물이 적기 때문에 별별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마치 팩트인양 믿으라고 하는 부분들, 극히 작은 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합니다만 가장 근세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근대사 마저 소설로 탈바꿈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자면 이 놈의 나라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 한번쯤은 가져 보게 됩니다. 아마도 일제감정기를 거치면서 식민사학과 인조반정이후 뿌리 깊게 자리잡은 노론계 수구세력의 밥그릇 지키기 일환으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철저하게 왜곡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불안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세력들의 왜곡이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는 근원에는 일반대중들의 근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물론 결정적으로 전문 사학자들의 잘못과 눈가리고 아웅식인 면이 강하게 상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대중에게 근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엄청나게 편협되고 이분법적인 사관이 존재하고 있음은 틀린말이 아니겠죠.

 

저자인 이덕일 선생도 지적하듯이(아마도 이번 책의 출간 목적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동안 근대는 일제 감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독립 운동사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고 으레껏 일반대중 독자들이나 학생들에게도 근대라함은 바로 이러한 굵직한 두가지의 사건을 자연스럽게 머리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뭐 사실상 이 두가지의 변수가 우리 근대사를 기술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될 수 밖에 없는 것도 우리의 태생적인 한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근대사를 기술함과 그리고 근대사를 이해함에 있어 너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경향으로 흘러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개항기와 일제감정기 시대에 탄압 받았던 사건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독립 운동사들만이 부각되고 기술되다 보니 고종조에 들어서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전반적인 역사적 흐름에 대해선 소홀할 수 밖에는 없는 그야말로 나무만 보고 그 숲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근대사를 달달 외우고 있었던 거죠.

 

이런 측면에서 이번 <근대를 말하다> 는 개별적인 사건과 인물 중심보다는 전체적인 근대사의 흐름의 맥을 잡을 수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입니다. 물론 중요한 미시적인 사건에 대한 평설도 포함되어 있지만 거시적으로 왜, 어떻게 근대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이는 저서입니다. 특히 가해자인 일본의 근대화 진행과정를 자세하게 기술(특히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메이지 유신 그리고 근대화 제국화 되어 가는 과정들)하고 있어 조선과 일본 양국을 냉철하게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근대사가 진행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이덕일 선생의 저서를 줄곧 읽어왔던 독자들이라면 인정 하듯이 정말 역사를 맛깔나고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 다시 한번 느끼게 합니다.

 

전반적으로 역사를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사건이나 인물 중심의 역사 판단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것은 틀림없지만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저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근대사와 뗄레야 뗄수없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동시에 기술하고 있어 우리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근대사는 일제감정이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었고 이런 요인들이 식민노론계사학자들과 친일파 및 그 후손들에게 역사 왜곡이라는 판을 깔아 주었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근대사를 인식할때 부정적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솔직히 말하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게끔 철저히 교육되었고 강요되었다고 보는편이 더 타당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번 <근대를 말하다>를 계기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관에서 탈피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 근대사를 다시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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